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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의 빛] 단양과 영주, 소백산이 갈라놓은 두 고장 이야기
영주 소백산 자락에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종찰 부석사의 겨울풍경. |
소백산은 제 주름 안에 발 있는 것들을 가뒀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기후, 생태, 문화가 이 산을 기준으로 철쭉과 설화마냥 판이하게 달라졌다. 산자락에 깃든 사람들은 골짜기 흙에 맞춰 저마다의 특산품을 키웠고, 걸쭉한 사투리의 억양과 농도가 달랐으며, 분쟁의 시대에는 서로 다른 국가의 백성이기도 했다. 산 너머의 메아리, 산 이편의 얘깃거리는 아흔 아홉 구비 중령을 넘어서만 가까스로 전해졌다. 그래도 이들은 모두 소백산 바람에 얼굴을 비비며 살았다. 산은 거대한 장벽이 되어 길을 막았지만 동시에 유순한 능선과 안전한 골짜기로 사람을 품었다. 고개에는 객점과 마방, 장터가 수두룩했고, 불심 깊은 사찰이 산기슭마다 들어섰으며, 서원에서는 무수한 인재들이 풍류와 학문을 노래했다. 굽이굽이 크고 높아 부처와 도둑이 함께 살았다던 소백산, 유구한 세월동안 산과 사람이 부딪어 만들어낸 다양한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굽이굽이 소백산은 제2연화봉과 도솔봉 사이의 중령으로 영동과 내륙을 이어온 교통 중심지이다. |
봉우리는 높지만 능선이 온화하고, 골짜기 깊어도 흙이 옹골진 소백산은 예로부터 사람을 살리는 영험한 장소였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명풍수인 격안 남사고는 소백산을 향해 ‘활인’의 승지라며 넙죽 절을 했고,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서도 전란이나 천재지변에도 걱정할 일이 없다는 십승지지의 첫 번째로 소백산 자락을 꼽았다. 또한 소백산은 단양군에 148㎢, 봉화군에 2㎢, 영주시에 170㎢가 분포하여 행정구역상 경상북도와 충청북도를 나뉘는 지형적 기준이자 영주, 예천, 단양, 영월의 생활문화권의 경계를 이루는 삼도접점의 지역이다. 소백산과 가장 넓은 면적이 맞닿은 영주와 단양은 천연의 경계 이편저편에서 사찰과 문화재로 불심을 새기고, 서원과 향교를 중심으로 무수한 인재들을 배출하며 유교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다.
단양은 1985년 충주댐 건설로 구시가지가 수몰되며 대대적인 이주를 거쳤다. |
소백산의 서쪽, 충청북도 단양이야기
단양을 떠올리면 입 안에 알싸하게 매운 맛이 돈다. 단양마늘은 석회암지대의 황토밭에서 재배되는 한지형 마늘로 매운 맛이 강하고 단단하여 저장이 용이하다. 산간고랭지에서 자라는 단양고추 역시 색이 곱고 껍질이 두꺼우며 맛과 향이 뛰어나다. 허나 마늘과 고추가 특산품인 고장의 곳간이 어찌 넉넉하겠는가. 단양은 경작지가 작고 소출이 적어 조선시대 세금을 감면 받았을 만큼 궁핍한 지역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온은 냉하고 땅이 척박한 지역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일제 때는 타지에서 곡물을 구해와 겨우 먹고 살 정도로 식량난이 심했다고 한다. 이중환의 지은 택리지에도 '단양은 모두 첩첩한 산중에 있어 10리 되는 들녘조차 없으나 강과 시내, 바위와 골짜기마다 절승'이라는 내용과 함께 '험하고 궁벽해서 살 만한 데가 못 된다'는 촌평이 덧붙여져 있다.
탁월하게 아름답고 애달프게 가난하던 두메산골 단양에 일제 수탈과 6.25 전쟁을 피해서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다양한 출신의 화전민들은 소백산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한때 6000가구가 넘었던 이들은 산림황폐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1974-1976년에 시행된 화전정리사업에 의해 뿔뿔이 흩어졌다. 충주댐의 건설 역시 단양의 생활환경을 크게 바꾸었다. 단양군의 수몰 규모는 5개 읍면의 26개 마을, 전체 경작지의 4분의 1에 이르렀고 총 2684세대의 주민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생업을 잃은 수몰민들은 신단양으로 이주한 후에도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보상비는 금방 사라졌으며 수많은 절경이 물어 잠기고 기대했던 관광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고장의 역사는 또한 시멘트 산업의 흥망성쇠와 함께 한다. 1962년 삼천리표 한일 시멘트 공장, 1964년 호랑이표 현대 시멘트 공장, 1969년 천마표 성신 화학 공장 등이 들어서며, 1970~80년대의 단양은 충북에서 공업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 이에 58년도에 5만 8천 명 정도이던 단양의 인구는 1960년대 말에는 9만을 넘어서는 규모로까지 성장했다. 그러나 시멘트와 석탄 산업이 침체기에 들어서자 토건에 의지했던 단양의 경제성장도 주춤하기 시작했다.
2015년은 신단양 이주 30주년으로 지자체에서 행사를 크게 가졌다. |
화전민 정리사업으로 산간마을이 사라지고, 저지대는 구시가지 수몰과 이주를 겪고, 지역경제의 동력이 떨어지면서 단양군의 인구는 계속 감소하여 현재 3만948명으로 줄어든 상황이다. 인구감소와 노령화가 꾸준히 진행 중인 단양의 주요관심사는 ‘체험형 관광상품’ 개발에 의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있다. 2011년 단양군은 영춘면 하리 소백산 자락에 너와집, 초가집, 기와집 등에서 숙박하며 더덕, 산양삼 등을 직접 채취할 수 있는 소백산화전민촌을 복원했다. 고구려의 명장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을 테마로 한 온달관광지를 크게 조성하고, 고수동굴 환경개선공사를 진행하며, 류한우 단양군수가 2016년 역점사업으로 소백산 케이블카 건설을 꼽은 것 역시 관광수입을 통한 지역경제 안정을 바라는 간절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영주 부석사는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5점, 보물6점 등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다. |
소백산의 동쪽, 경상북도 영주이야기
영주, 풍기, 순흥, 고을 3개가 합쳐진 영주시는 소백산에 폭 안긴 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은 인삼과 사과의 고장이다. 인근토양이 인삼을 재배하기 좋은 조건이라 풍기 인삼은 육질이 단단하고 무겁고 약효가 뛰어나기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영주는 전국 생산량의 13%를 차지하는 사과 주산지이기도 하다. 일조량이 풍부하고 일교차가 큰 소백산 남쪽 산지과원에서 당도가 높고 맛이 뛰어난 사과가 생산된다. 약 11만 명이 살아가는 영주는 ‘부자농촌’이라는 구호처럼 농업의 비중이 크고 경북에서 귀촌귀농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내륙교통의 중심지였던 이 고장은 1955년 강원도 태백시와 영주읍 사이에 영암선이 개통되어 영동과 경북 내륙의 물산이 서울이나 부산으로 가기 위해 한번은 거쳐 가는 관문이 되었다. 이어 1963년에는 영동선이, 1966년에는 경북선이 이어지며 전국 철도 화물 수송량의 50% 이상을 전담하며 ‘철도 영주’라는 호칭을 얻는다. 이런 화물역의 역할은 1973년 제천에 태백선이 개통되면서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중앙선, 영동선, 경북선의 분기점이자 코레일 경북본부가 자리 잡은 철도의 요충지이다.
순흥에 위치한 소수서원은 조선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으로 유교의 역사에 큰 역할을 미쳤다. |
사통팔달과 더불어 영주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문화재다. 삼국시대 고구려 땅이었던 영주는 마지막까지 신라에 저항하다가 6세기 말 파사왕 때 완전히 신라 땅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고도나 중심지가 아니었고 많은 전쟁과 역사적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영주에는 무사히 보전된 문화재가 매우 많다. 비로봉, 연화봉, 두솔봉, 봉우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부터 영주에는 많은 사찰들이 창건되었다. 특히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종찰인 부석사에는 최고의 목조건물로 손꼽히는 무량수전 외에도 국보 5점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빼곡하게 들어차있다. 영주의 소백산 자락에는 그밖에도 비로사, 성혈사, 흑석사, 희방사 등의 사찰과 절을 잃어버린 석불들이 산재하여 있다.
영주는 유학의 메카이기도 하다. 죽계천가에 위치한 소수서원은 풍기군수로 재임한 주세붕이 세우고 이후 퇴계 이황이 명종에게 현판을 하사 받은 조선시대 첫 사립교육기관이다. 또한 퇴계 이황은 풍기군수로 재임 중이던 1549년 3박4일 동안 소백산을 오른 후 <유소백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영주는 불교문화재와 유교문화재가 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대다수의 문화재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단양에 비해 소백산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관광홍보에도 적극적이다.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상북도 영주시 사이에 있는 소백산국립공원은 겨울 눈덮인 능선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
'소백산은 우리 산' 단양과 영주의 갈등
영주의 문화재와 명승지가 대부분 소백산권인 것에 반해 단양은 예부터 단양팔경이나 고수동굴, 구인사 등 소백산 이외의 관광지 방문객이 더 많았다. 2003년 단양군지에서 발표한 연간 관광객 현황을 보면 단양팔경 약 300만 명, 동굴지구 약 70만 명, 구인사 약 90만 명으로 소백산 약 13만 명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아무리 문화재와 명승지가 즐비해도 소백산 역시 단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연유산이다. 2015년 5월, 신단양 이주 3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진행한 ‘제 33회 단양 소백산 철쭉제’는 4일 동안 13만 여명이 방문해 모두 93억 4500만 원의 직접 경제효과를 창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3년 단양문화원 주관으로 처음 개최된 단양소백산철쭉제는 현재 단양의 축제 중 규모와 위상, 예산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대표성을 띠고 있다. 문제는 영주에서도 따로 소백산철쭉제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같은 산에서 열리는 같은 이름의 축제를 두 고장에서 경쟁적으로 진행하니 관광객들의 혼선이 안 생길 수 없다. 이에 1999년부터 격년제로 축제를 맡기도 했지만 2006년부터 다시 매년 각각 소백산 철쭉제를 열고 있다.
5월이면 영주와 단양에서 각 ‘소백산 철쭉제’를 개최한다. 1999년부터 격년제로 함께 진행하기로 했으나 2006년에 다시 분리되었다. |
갈등은 철쭉제뿐만이 아니다. 2011년 영주시는 단산면을 소백산면으로 이름을 바꾸는 조례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이에 단양군은 '소백산이란 이름은 특정 지역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며 분쟁조정을 신청했고 중앙분쟁조정위원회는 ‘소백산면 명칭 불가’를 선언하며 단양군의 손을 들어줬다. 지역이름도 상품이 되는 시대이니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사촌이라도 소백산 주도권을 두고 갈등과 시비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소백산을 둘러싼 기 싸움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15년 선정된 ‘한국관광100선’에 소백산의 소재지가 경북 영주로 표기되자 단양이 크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관광공사는 영주시만 소백산을 응모하고 단양군은 다른 관광지를 응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충청도민들을 납득시키진 못했다. 결국 소재지를 경북과 충북으로 병기하는 것으로 일단락된 이 사건은 소백산을 가운데 둔 영주와 단양의 오랜 갈등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있는 죽령은 충청북도 단양과 경상북도 영주를 연결하는 소백산 고개이다. |
죽령으로 이어지는 이웃사촌
죽령에 오르면 서쪽으로는 단양이, 동쪽으로는 영주가 보인다.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 충북과 경북의 역사·문화적 분기점, 수도권과 영동을 잇는 교역로, 죽령은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의 애환을 간직한 해발 696m의 고갯길이다.
중령 어귀의 마을은 예부터 오가는 이들을 위한 쉼터였다. 높고 험준한 고개를 앞둔 나그네와 보부상들이 하룻밤 쉬고 갈 숙소와 말을 갈아탈 마방, 술과 국밥으로 허기를 달랠 주막거리가 번성했다. 중요한 관문인 만큼 고개에 숨어사는 산적도 많았다. 산은 험하고 산적은 무서웠으니 죽령에는 다자구할머니에 관한 옛 이야기가 전해진다. 산적으로 사람들의 피해가 막심할 때 어느 할머니가 홀로 그 소굴에 들어가 잃어버린 자식 이름을 부르듯 '다자구야', '들자구야' 외치며 관군들의 소탕작전을 도와줬다는 전설로 당시 죽령이 얼마나 외지고 두려운 길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오죽하면 산신당을 ‘다자구할머니당’이라 칭했을까.
지금 죽령에선 옛길, 신작로, 철길, 고속도로, 다양한 길들이 교차한다. 보부상들이 땀 흘리며 걸었던 험한 고갯길은 1933년 포장도로가 깔렸고 1941년엔 중앙선 철도를 잇는 죽령터널을 뚫었다. 2001년에는 중앙고속도로가 생기며 또 하나의 터널이 개통했다. 옛길은 옛길대로, 길고 빠른 길은 그 나름대로 제 쓰임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길 문화재에 지정된 죽령옛길을 포함한 ‘소백산자락길’ 역시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을 천천히 즐기려는 방문객들로 붐비는 명승지가 되었다.
3도를 걷는 12구간 소백산자락길이 큰 호응을 얻으며 생태관광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
2009년 영주문화연구회가 만들기 시작한 ‘소백산자락길’은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한국관광의 별’과 2015년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가 선정한 ‘아름다운 숲길’에 등극되는 등 성공적인 생태관광사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경북 영주시와 봉화군, 충북 단양군, 강원도 영월군를 지나 소백산을 한 바퀴 휘감아 도는 143km의 소백산자락길은 한 지역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여행형태이다. 이처럼 기존의 대중관광에서 벗어나 ‘생태관광’, ‘체험관광’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관광객 유치를 위한 지역 협조가 중요해졌다. 죽령옛길이 수천 년 동안 두 고장을 이어왔듯이, 단양과 영주는 이제 소백산을 두고 상생과 협력을 모색해야 한다.
무수하고 다양한 문화재와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 하는 소백산 |
여전히 사람을 살리는 땅, 소백산
화합과 친목을 위한 노력도 적지 않았다. 단양과 영주는 1998년부터 교류협력회를 만들어 소백산 철쭉제 공동 개최, 농특산물 판매교류전, 종합관광지도 제작, 소백산 정상 표지석 정지사업 등을 함께 펼쳐왔다. 2007년도 중부내륙중심권 의정협력회를 발족시켜 다양한 사업에 협력했고, 공동 애플리케이션을 개설하고 통합된 관광가이드북을 발간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충북 단양군과 강원도 영월군, 경북 영주시가 삼도접경 권역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구성한 '소백산생활권협의회'가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싸움으로 소백산을 자를 수 없다면 서로 손을 잡고 상생하는 길을 찾는 현명한 걸음이리라. 삼도접점이자 경계인 소백산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을 살리는 공간이다. 부처도 살고 도적도 살았던 소백산의 품은 부모처럼 깊고 거대하다. 그 산에 기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서로를 지키며 보살필 수 있을까.
글 민은주 기자 사진 단양군청·영주시청·마운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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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