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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 항공기 드론으로 촬영한 장원방(옛 영봉리) 일대 전경. 장원방은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와 노상리·완전리 일대를 말하며, 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조선초기 인재향이다. 선산읍기(邑基)의 서쪽 내백호 지맥 아래에 위치해 풍수지리적으로도 명당으로 꼽힌다. |
풍수는 자연학이자 인문학이며 기(氣)의 학문이다. 자연학은 자연의 논리를 말하고, 인문학은 인간의 논리를 말하며, 기는 천기(天氣)·지기(地氣)·인기(人氣)를 말한다. 그런데 기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선산읍 이문·노상·완전리 일대
비봉산·선산평야·단계천 사이
산이 끝나고 들판 열리는 명당
영남유학파 부흥 밑거름 조성돼
금오산·망장산·봉란산·죽장사…
봉황 떠나지 않도록 보완한 지명
장원방 이문리서 태어난 김재규
상모리 출신 박정희와 묘한 운명#1. 산진야개(山盡野開)·호학향풍(好學鄕風)의 명당
현재의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와 노상리·완전리 일대는 조선초에 영봉리(迎鳳里)였는데, 장원방(壯元坊)이라는 영예스러운 별칭을 얻었다. ‘방(坊)’은 ‘마을’이니, 장원방은 곧 ‘장원이 배출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400년을 전후해서 불과 70여년 동안 이 마을에서 13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는데, 그중에 5명이 장원을 하고 2명은 부장원을 했다. 게다가 1577년과 1738년에 두 사람이 더 장원급제를 했으니, 영봉리에서 그토록 많은 ‘장원’이 나온 배경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영봉리를 품에 안은 비봉산의 영험한 기운 덕분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선산평야 너머로 멀리 보이는 금오산 문필봉의 길응설(吉應說)이다. 물론 당시의 학동들이 그 같은 풍수적인 소응(所應) 얘기를 들으며 한껏 의기충천해 공부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장원을 많이 배출한 주된 요인이었다고 결론짓기에는 뭔가 설득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장원방은 선산읍기(邑基)의 서쪽 내백호 지맥 아래에 위치한 동네다. 남북축으로는 비봉산과 선산평야가 만나는 경사변환점이요, 동서축으로는 읍기의 내백호 줄기가 끝나는 장원봉(壯元峰)과 내명당수인 단계천 사이다. ‘택리지’에서도 “상주는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지만, 선산의 산천이 상주보다 더욱 깨끗하고 밝다”고 했으니, 선산읍기의 한 명구(名區)를 차지하고 있는 장원방의 됨됨이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골짜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이른바 산이 끝나고 들판이 열리는 산진야개(山盡野開)의 명당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삶터(地)라 할지라도 시운(時運·天)과 길인(吉人)을 조우하지 못한다면 큰 발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선초의 영봉리는 그야말로 물을 만난 고기 같은 호시절을 맞고 있었다. 시운은 이 땅에 유학이 처음 들어온 때요, ‘길인’이라는 것은 마침 야은 길재가 역성혁명에 등을 돌리고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키우던 시기였으니, 저 드넓은 감천과 낙동강변의 퇴적평야를 바탕으로 탄탄한 경제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사족(士族)들로서는 가문 중흥의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15세기 후반 선산 출신의 저명한 관료학자 김종직은 ‘이존록(彛尊錄)’에서, “길재의 문하로 학동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소회한 바 있으며, ‘경상도지리지’에서는 “선산의 풍속이 화려함을 숭상하고 학문을 좋아한다(俗尙華麗 好學問)”고 썼다. 이 호학향풍(好學鄕風)의 인문적인 배경 환경이야말로 훗날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조선초기 영남유학(선산학파)의 발흥을 가져다준 큰 밑거름이었던 것이다.
선산의 장원방과 장원봉은 사람의 노력으로 일군 인문학적 곳이름(地名)이다. 여기에서 서당마을 뒷산을 ‘장원봉’이라 이름한 후에 장원 급제자가 나왔느냐, 아니면 화려하게 귀향하는 장원 급제자 행렬을 본 후에 장원봉이라 이름지었느냐 하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다.
당시에 장원방(서당마을)을 출발한 선비들이 과거장으로 향하면서 반드시 이 장원봉 아래로 지나간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원봉과 장원방이 유생들에게 긍정적 심리효과를 극대화하는 이중적 기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인승유지(人勝由地·사람은 땅으로 말미암아 유명해지게 된다)든 지승유인(地勝由人·땅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명승지가 된다)이든 장원 급제자가 연이어 나온 이상, 그 터가 지닌 유무형의 영향력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이다. 28세였던 1459년에 장원급제했던 이 마을 출신 김종직은 여러 관직을 거쳐 1476년에 선산부사로 금의환향했는데 “학도들은 아직도 (영봉리를) 장원방이라 말하누나(靑衿猶說壯元坊)”라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577년에는 김여물(金汝)이, 1738년에는 박춘보(朴春普)가 각각 영봉리 출신자로서 장원급제 전통을 이어갔으니, 김종직의 ‘아직도(猶)’는 놀랍게도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장원방의 전설 아닌 실제 얘기가 불과 수십 년 전인 1970년대 말에도 일어났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김재규(1926~80)였다.
#2. 비봉산 아래 장원방 출생 김재규 vs 금오산 아래 상모리 출생 박정희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울렸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것이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2007년에 필자는 한 월간지를 통해 기상천외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1970년대 중반 김재규 부친이 돌아갔을 때 한 풍수사가 묘터를 잡아주면서 ‘군왕지지(君王之地)’라고 하는 바람에 그가 ‘자기암시’로 대통령 시해를 결단했다는 것이다. 그 풍수사는 박정희의 선대 묘도 ‘금오탁시혈 제왕지지(金烏啄屍穴 帝王之地·까마귀가 시체를 쪼아 먹는 형국의 대길지로서 제왕이 날 터)’로 미화했던 장본인이었다.
김재규는 장원방인 선산읍 이문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에 대한 정신적인 자존감은 조선초 무학대사의 금오산 ‘왕기설’을 믿고 5·16의 강단(剛斷)을 보였던 박정희에 못잖았을 법하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생가 터를 품고 있는 비봉산과 금오산의 관계에 대해 해평 출신 최현(崔晛, 1563~1640)이 쓴 ‘일선지(一善誌·선산읍지)’에 주목할 만한 내용이 적혀 있다.
“형세를 보고 주산을 비봉산이라 이름하였기에, 봉황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주변의 모든 산 이름과 절 이름을 거기에 맞춰 지었는데 망장산(網障山), 무래산(舞來山), 봉란산(鳳卵山), 금오산(金烏山), 봉암산(鳳巖山), 죽장사(竹杖寺), 죽림사(竹林寺), 오동사(梧桐寺)가 바로 그것이다.”
한마디로 봉황이 죽순을 먹은 후 오동나무에 깃들어, 알을 품으면서 영원히 선산고을을 떠나지 말기를 소망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그런 각종 풍수지명들을 지었다는 것이다.
초점은 바로 금오산이다. 금오는 금까마귀다. 해질녘 붉은 노을 속을 날아가는 금까마귀를 보고 고려말에 ‘금오’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얘기도 전해오지만, 그를 입증해줄 만한 고문헌자료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일선지’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금오’라는 산 이름은 과거에 구미가 선산도호부의 한 외곽 변두리에 불과했던 시기에, 고을의 복록을 담보해주는 봉황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당시 선산 유림들이 비봉산에 종속시켜 지었던 여러 비보(裨補·부족한 점을 보완함) 지명 중 하나임이 확실하다.
영천시의 작산(鵲山·까치 산)과 진주시의 작평(鵲坪·까치 들)도 그와 유사한 봉황 관련 비보지명이다. 주로 삶터 뒷산이 비봉산이거나 아니면 읍기가 봉황형일 때 그 봉황에 대응하는 앞산을 상징하는 새(鳥)로 ‘까치’를 설정했는데, 문제는 그에 대한 풍수해석이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어용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조선의 풍수’에서 말한 “봉황은 까치 울음소리를 들으면 그것을 잡으려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는다”고 한 해석을 그대로 따라 쓰고 있다.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자. 봉황은 상상 속의 신조(神鳥)로서 만조(萬鳥)의 우두머리 새다. 그런 새가 굳이 까치를 잡으려 할 이유도 없으려니와 또한 잡으려 한다면 일단 날아올라야 하기 때문에 “봉황이 까치를 잡기 위해 날지 않는다”는 말은 아예 앞뒤가 맞지 않는다. “봉황이 까치를 잡는다”는 상극(相剋) 논리적인 해석은 알고 보면 일제의 간악한 우리민족 정신문화 말살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이나 이원명의 ‘동야휘집’, 이희준의 ‘계서야담’ 등을 보면 까치는 오히려 과거 합격이나 벼슬 진급과 연관돼 있다. 그러니까 주산과 안산을 상징하는 영물로 배정된 봉황과 까치의 관계는 “마치 제왕격인 봉황이 까치(과거 급제자)를 맞이하여 그동안의 공부 소회(까치 소리)를 경청하고 있는 듯하다”는 상생(相生)의 논리로 해석돼야 옳은 것이다.
동양문화권에서 길상조(吉祥鳥)로 받아들여지는 까치는 조류분류학상으로는 까마귓과에 속한다. 까마귀는 예부터 적오(赤烏) 혹은 삼족오(三足烏)라 하여 직접 태양을 상징하기도 했고, 또 남쪽이 붉은 태양의 화기(火氣)가 비등한 곳이어서 사방신수(四方神獸)의 하나인 ‘날아가는 붉은 새(朱雀)’와 동류(同類)로 비정(比定)되기도 했다. 때문에 봉황을 대(對)하는 새가 까치든 금까마귀든 그 상정된 작용 원리는 같은 것이다. 무라야마 지준 같은 유(類)의 어용학자나 사이비 술사라면 또 10·26을 이와 연관시켜 “마치 봉황산하(下) 장원방 출신 김재규가 금오산하(下) 상모리 출신 박정희를 잡은 풍수감응이 현실세계에서 운명론적으로 일어났다”고 억지로 꿰맞출지도 모르겠다.
장원방 풍수의 인문학적 스토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든 간에 금오산과 비봉산은 오늘도 여전히 사이좋게 바라보고 있고, 감천과 낙동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 누가 감히 이 대자연의 질서와 이법을 함부로 상징 조작하고 있다는 말인가.
글=이몽일<풍수학박사·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