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많은 뮤지션들이 앞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월에는 2,300여 명의 음악인들이 시국선언에 참가했으며, 현 사태를 대변하는 민중가요들이 봇물 터지듯이 나왔습니다. 시위현장에서는 여러 음악인이 공연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힘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시대를 떠나 암울한 상황에서는 많은 음악인이 앞서 행동했었는데요. 오늘은 이 중에서 민중가요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을 알아볼까 합니다.
미국 포크 음악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구전 민요를 수집하고 인권 운동에 참여하면서 저항 가요의 수많은 걸작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미국 보수층에서는 이들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회적 활동을 했습니다.
피트시거의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If I had a hammer’와 같은 비판적 가사를 써서 국내에서도 금지곡 처분이 되었습니다. 특히 ‘We shall overcome’은 전세계의 집회현장에서 각 나라에 맞게 번안되어 불리는 노래인데요. 한국에서는 ‘우리 승리하리라’로 알려져있습니다.
두 사람은 민중가요의 토대를 다졌으며, 구전민요를 정리하여 포크라는 현대적 음악 형식으로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We shall overcome’ 존 바에즈 버전
존 바에즈, 밥 딜런 - 60년대 저항의 아이콘
1960년대 초반, 20대 초반에 두 젊은 뮤지션은 피트시거, 우디 거스리의 영향을 받아 저항뮤지션의 행로를 걷습니다. 특히 존 바에즈는 프로테스탄트로 마틴 루터킹과 가까워지면서 그와 행보를 같이 하는데요. 마틴 루터킹의 연설로 유명한 워싱턴 행진 때는 밥 딜런과 존 바에즈가 앞장서서 노래하며 시위자들에게 큰 용기를 줬습니다.
존 바에즈는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요. 징병 거부운동을 하다가 수감되기도 하고, 베트남에 직접 찾아가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밥 딜런은 ‘Blowin’ in the wind’, ‘Masters of war’, ‘A hard rain’s gonna fall’ 등 사회 비판적인 가사를 많이 쓰면서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당시 젊은 세대들의 우상이었으며, 그들의 스타성으로 인해 포크 음악이 대중화되고 저항의 음악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지난 촛불 집회 때 가수 양희은 씨가 ‘아침이슬’을 불러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침이슬’의 원곡은 포크가수 김민기 씨가 작곡했는데요. 양희은 씨는 그를 자신의 음악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합니다.
원작자 김민기 씨는 1971년 자신의 이름으로 첫 앨범을 발매하는데요. 당시 유신 정부에서는 앨범수록곡 ‘아침이슬’의 ‘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른다'는 가사가 불순하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선정합니다. 하지만 이런 금지곡 조치 덕에 운동권에서는 더 알려지게 되었는데요. 양희은 씨가 부르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중가요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유신정권에서 좌파음악인으로 낙인 찍히면서 줄줄이 금지곡 처분을 받게 되는데요. 김민기 씨는 민중가요를 가르치다가 연행되기도 하며 순탄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대한민국 70년대 저항문화 상징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후배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촛불집회에서 ‘아침이슬’을 부르는 양희은 씨
노래를 찾는 사람들 - 민중가요의 황금기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80년대부터 활동한 민중가요 노래패인데요. 흔히 줄여서 노찾사라고 부릅니다. 80년대 군사정권에 맞선 투쟁으로 많은 집회가 생겨나고, 자연스럽게 대학가 중심으로 민중가요 노래패들이 모여 결성되었습니다.
김민기 씨가 프로젝트 음반을 기획했지만, 심의 통과를 위해 많은 부분을 타협하게 되었습니다. 결과물은 기획의도에서 많이 벗어나게 되고 정권의 탄압으로 판매량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6월 항쟁으로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음반발매와 현장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집에서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거친 광야에서’, ‘사계’ 등 거의 모든 곡이 히트하면서 대중적으로 성공합니다.
그 이후로도 노찾사는 사회적 활동은 물론이며, 김광석, 안치환 등 재능이 넘치는 음악인들도 배출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사에도 큰 획을 남깁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 사계
정태춘과 박은옥 - 사전심의 제도와의 외로운 싸움
한국의 피트시거로 불리는 정태춘 씨는 1978년 1집 ‘시인의 마을'을 발표하며 호평을 받고 여러 방송사에서 수상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박은옥 씨를 만나 결혼하며 외적으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냅니다.
하지만 음반 사전심의제도 때문에 가사를 부분 수정해서 발매하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또한 홍보때문에 어색해하던 방송출연을 하며 음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이때부터 방황하며 슬럼프를 겪게 됩니다. 80년대에는 부인 박은옥 씨와 함께 듀엣으로 활동하면서 대중적으로 다시 성공하지만 이때도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1990년, ‘아, 대한민국…’ 앨범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부하고 대학가와 공연장에서 배포됩니다. 이 앨범은 사전검열 제도에 공식적으로 저항한 최초의 음반으로 한국 음악사에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데요. 앨범도 전통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강렬한 저항의 메시지를 담은 명반이었습니다.
정태춘 씨는 1991년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사전검열제도와 일선에서 맞서게 됩니다. 1993년에도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앨범을 심의 없이 배포를 강행했는데요. 사인판매와 관객들 지지서명까지 받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합니다. 같은 해에 문화체육부는 서울지검에 정태춘 씨를 고발했고 정태춘 씨는 음반법위반으로 불구속기소됩니다.
이 사건으로 사전검열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으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에서는 정태춘 씨 기소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면서, 많은 예술인이 그를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2차 공판부터는 관련법률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받아들였으며, 3차에서는 헌법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으로 판정하였습니다. 정태춘 씨는 선고유예를 받으며, 이것으로 사전검열제는 폐지되었습니다. 그의 5년간 외로운 싸움이 결실을 보았으며, 이는 한국 음악사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 지난 11월 촛불시위에도 참여하여 사회적 신념을 이어갔습니다.
지난 11월 촛불시위에 참가한 정태춘 씨
이 외에도 언급하지 못한 음악인들이 매우 많은데요. 민중가요 중심으로 글을 쓰긴 했지만, 많은 음악인이 장르를 불문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일선에서 활동했던 그들의 용기와 사회적 신념은 앞으로도 대중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며, 많은 음악인에게 모범이 될 것입니다.
첫댓글 작년 광화문에서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들었지요.
정말 울컥하더라고요.
어침이슬은 역사 깊은 저항의 노래, 명곡 중의 명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