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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6.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금요일. - 거대한 악보다 거대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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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06 05:27
- 거대한 악보다 거대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
제가 누구를 죽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래 악심과 앙심을 품고 있다가 죽이는 것은 더 말할 것 없습니다.
물고기도 죽이기 힘든데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까?
얼마나 악하면 죽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악하게 되었을까요?
제가 남을 죽일 수 없고 그런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은
마치 남을 죽이려고 칼을 지니고 있을 때
그 칼에 자기가 먼저 찔리듯 제가 먼저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미워하면 그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더 괴롭잖습니까?
너무 괴로워하며 미워했는데 그는 정작 내가
미워하는 줄도 모르고 천하태평일 때도 있잖습니까?
악과 관련한 우리말이 있습니다.
악에 받치다거나 악이 극에 달하다거나 극악하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 안에 선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우리 안에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우리는
누구를 미워하거나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괴롭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를 죽일 정도로 미운 것은 극악해야지만,
곧 선이나 사랑이 하나도 없고 악이 극에 달했을 때만 가능합니다.
아무튼 오늘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죽이고 싶었고 죽이려고 했을까요?
제 생각에 형제들이 그 정도로 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아버지가 편애하였다 해도
그것이 죽이고 싶을 정도의 이유가 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모의를 그들이 했어도 막상 죽이려고 하니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피만은 흘리지 말자!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팔아먹을 정도의 악은 그들에게 있었고,
그래서 요셉은 팔려 가게 되는데 아시다시피
여기에 하느님 구원의 역사 있고 결과적으로
형제들의 모의와 악행은 구원 역사의 시작이고 일부입니다.
제가 이 얘기를 오늘 길게 한 것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거대한 악들의 충돌과 관련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의 트럼프나 이스라엘 네타냐후가 이란에 대해 하는 짓은
눈을 씻고 봐도 선의 구석이 하나도 찾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란의 하메네이에게 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악보다
훨씬 더 큰 것이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중심이 되는 악들입니다.
이들이 하는 악한 짓을 볼 때 우리는 하느님이 뭘 하고 계시는지,
그냥 보고 계시기만 하는 건지 우리 믿음에 의혹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짧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는 길게 봐야 합니다.
하느님은 악을 통해서도 구원하시고,
악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주님의 예표인 요셉의 얘기를 통해서 우리가 오늘 믿게 되는 믿음입니다.
인간의 거대한 악보다 더 거대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구원의 계획을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할 우리 세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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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의 회복하는 정의 - 용서와 씨름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치유하시고 도와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하느님의 회복하는 정의
하느님의 회복하는 정의 – 용서와 씨름하기
2026년 3월 5일 목요일
마리에타 예거 레인(Marietta Jaeger Lane)은 딸 수지(Susie)가 납치되어 살해당한 뒤, 회복적(혹은 회복하는) 정의 교육자 일레인 엔스(Elaine Enns)와의 대화에서 용서의 길을 씨름하며 걸어간 여정을 나눕니다:
저는 화를 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집에서 자랐습니다. 분노하는 것은 죄라고 배웠습니다. … 캠프장의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수지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며 보낸 2주 동안, 제가 억눌러 두었던 분노가 서서히 끓어올랐습니다. 마침내 제 분노와 마주했을 때 … 저는 납치범을 맨손으로, 얼굴에 미소를 띠고서라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가 수지에게 무엇을 했는지 알기도 전에, 그녀에게 끼친 공포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사실, 그리고 우리 가족 전체에 남긴 상처 때문에 저는 그를 죽일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하느님과 치열한 영적 씨름을 하던 끝에, 저는 제 분노와 복수의 "권리"를 정당화하려 애썼지만 결국 "항복"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자유와 자유의지를 결코 침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제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하느님께 허락드렸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이 격렬한 분노에서 용서로 옮겨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는 어떤 일에도 협력하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처음에는 납치범을 용서한다면 딸 수지에게 불충실한 것이라 느꼈습니다. 또한 폭력 피해자들이 흔히 겪는 것처럼, 제가 분노를 붙들고 복수를 추구하면 통제권을 쥐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주 강렬한 영적 여정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많은 시간을 기도와 성경 읽기에 바쳤고, 그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자주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길고 점진적인 과정이었지만, 그 해 동안 저는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사실상 제 힘을 납치범에게 넘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이 제 가치관을 바꾸고, 제가 원하던 삶의 방향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 하느님의 눈에는 납치범도 제 어린 딸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 그리고 제가 가톨릭 신앙을 진실하게 살아가고자 한다면,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았음을 깨달았습니다.
레인은 이후 인권 옹호자가 되었습니다:
몇 달 동안 수지에 대한 소식이 없자, 저는 하느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라면,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정의 자체라는 것을.
성경 속에서 예수님의 삶을 바라볼 때, 저는 우리를 해치거나 벌하거나 죽이려고 오신 분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하시고 도와주시며, 회복시키고 화해시키시며, "원죄"로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되돌려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처벌"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어린 소녀였을 때, 하느님은 가혹한 감독자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어머니(정신분열증을 앓으셨습니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을 보실 때마다 손가락을 흔들며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지옥에 갈 거야.”
이 말은 저를 두렵게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비롭고 따뜻한 수녀님들과 본당 신부님들을 만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1950~60년대에 이분들은 저에게 사랑과 자비, 돌보시는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1990년대에 저는 리처드 신부님과 CAC(Center for Contemplation and Action)를 만나 제 영혼을 계속 길러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80대에 접어들었고, 매일 하느님께서 저를 가까이 품어주시며 인도해 주심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Mary W.
References
Ched Myers and Elaine Enns, Ambassadors of Reconciliation: Diverse Christian Practices of Restorative Justice and Peacemaking, Volume 2 (Orbis Books, 2009), 60–61.
Image Credit: Jordan Heath, untitled (detail), 2018, photo, New Zealand,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강과 호수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의 위대한 분수령을 봅니다. -- 정의가 원한 없이 넓게 흘러가며, 우리를 우리의 상처보다 더 큰 사랑 안으로 이끌고,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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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회개의 시작점....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당신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뽑아 오시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시편 80,9)라는 구절처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가리키는 이미지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실 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곧바로 자신들을 겨냥한 말씀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들에 대한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말씀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분노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노 뒤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는 단순히 과거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에도 주어지는 경고입니다. 교회가 참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통해 당신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살아있는 사랑과 봉사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영적 위로와 공동체성을 찾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본당 공동체 안에서 충분한 영적 돌봄과 친교를 경험하지 못하고, 다른 영적 집단이나 신흥 종교로 눈을 돌리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 교회가 "포도원의 일꾼"으로서 열매를 맺고 있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제도나 권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살아 있는 공동체로서 사랑과 자비와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교회가 하느님과 그 사랑과 자비를 믿는 이들의 모임이라면 '나' 한 사람이 그런 믿음의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공동체는 이런 믿음을 지닌 여러 "나"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선과 사랑의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선과 사랑의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믿음의 토대 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 머튼의 [실재(현실)의 참된 깊이]라는 묵상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미지의 것은 미지의 것으로 그대로 있기 마련이다. 미지는 하나의 신비일 뿐이다. 믿음의 기능은 신비를 분명한 어떤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전체적인 삶 안에서 통합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체적인 삶 안에서 우리의 외적인 자신이 갖고 있는 한계성을 더욱더 초월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은 단순한 순응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다. 믿음은 알지 못하는 영적인 우리의 깊이뿐 아니라, 하느님 당신의 숨겨진 본질과 사랑의 가장 신비스럽고도 접근할 수 없는 그 깊이를 통찰해 가면서 삶의 모든 분야를 끌어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현실(실재)의 참된 깊이를 열어주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의 고유한 실재가 지니는 참된 깊이를 포함해서 말이다.
사람이 전적인 믿음으로 동의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맡길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이방인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신에게서 떠나 유배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기 존재의 가장 의미심장한 깊이로부터 제외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깊이는 이성으로 알아내기에는 너무도 단순하면서도 너무도 깊은 것이기에 불명료하고 알지 못하는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선과 사랑의 하느님의 가장 소중한 선물로 여기며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성령)을 의식하고 알아차리는 수양부터 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믿음이란 '내' 안에 계시며 당신의 일을 하시는 분께 '나'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코앞의 일도 알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토마스 머튼이 말하듯이 우리는 전적인 믿음으로 동의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맡길 수 있는 신비로운 존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부터 참된 믿음의 열매 맺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까지의 제 삶을 뒤돌아보면 제가 겪어야 했던 많은 일들은 모두 제가 예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혼돈을 지나갈 힘을 주신 분도 선과 사랑의 하느님이셨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회개가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회개의 주체는 분명히 '나'이지만 이 '나'라는 주체 안에서 회개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처드 로어 신부님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맺음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된다고 말합니다.
죄 -> 용서 -> 변모 -> 회개의 순으로요. 그런데 이 관계 맺음의 이야기를 우리는 죄 -> 벌 -> 회개 -> 변모의 순으로 이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리처드 로어 신부님이 강조하는 바는 회개가 우리가 이루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며 우리가 그 일을 의식하는 데서 회개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라고 말씀하신 바가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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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은 주인의 아들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게만 하네.”(마태 21,42).
그렇지만, 동시에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사실,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이는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네.”(마태21,42)라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하오니, 주님!
우리의 삶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밀쳐내고, 당신의 권리를 강탈하지 말게 하소서.
탐욕으로 인해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을 저지르지 않게 하소서. 이제는 당신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치게 하소서. 바로 오늘, 당신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 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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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함부로 마침표를 찍지 마라.”입니다. 지난 1월 25일 주일입니다. 전날부터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교구에서는 지침을 주었습니다. “위험하니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않아도 주일 미사 참례 의무를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구는 지킬 수 없는 것을 강제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주일 미사에 오는 교우가 있으니 성당 문은 열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교구의 지침대로 성당 문을 열었습니다. 해설도, 반주도, 복사도 없이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800명 넘게 나오던 주일 미사인데 80명이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눈길에도 주일 미사에 참례한 교우분과 함께 미사를 정성껏 봉헌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교무금과 헌금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2026년 새해가 시작되었는데 1월부터 적자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교우분이 본당을 위해서 기부금을 봉헌해 주었습니다. ‘딱’ 필요한 만큼을 봉헌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1월을 기쁘게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들은 동생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동생을 유난히 예뻐하기도 했고, 동생의 꿈 이야기가 형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형들은 동생 요셉을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을 받고 팔아 버렸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날 것 같았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섬기는 주인의 아내에게 유혹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요셉은 ‘꿈’ 해몽을 잘하였습니다. 파라오 왕의 꿈을 해몽해 주었고, 요셉은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사는 땅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형들은 이집트로 가서 곡식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형들은 거기에서 동생 요셉을 만났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동생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성공한 요셉은 풍요로운 땅 이집트로 가족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야곱과 그 가족은 척박한 가나안 땅에서 풍요로운 땅, 성공한 아들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2019년 8월 21일 교구 인사이동으로 한국에서 미국 뉴욕으로 떠났습니다. 제가 맡은 새로운 사목은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 지사장이었습니다. 평화신문 홍보를 위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2달 정도 일정으로 LA와 밴쿠버에 있는 한인 성당으로 홍보를 가기로 했습니다. 비행기 표도 샀고, 머물 곳도 정했습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하느님이 하신다.’라는 잠언의 말씀처럼 저의 계획은 하나씩 틀어지게 되었습니다. 2020년 2월부터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습니다. 6곳의 성당에서 모두 신문 홍보를 취소한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아예 이동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코로나 기간에 신부님들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캠핑도 다녔습니다. 코로나 기간에 영주권 신청을 하였고, 코로나가 끝날 무렵에 영주권이 나왔습니다. 다행히 신문사는 열정적인 후임 신부님이 맡아서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2년 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침표를 찍으실 때까지는 늘 감사드리면서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형제들은 아버지가 보낸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듯이, 형제들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동생 요셉을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렸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은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쁜 포도원 소작인들은 자연을 파괴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요셉이 보여주었던 ‘인내와 용서’를 채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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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키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신앙도 성장하고 인성도 성장하고!
창세기를 열심히 다시 읽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한 성조들의 스토리를 읽으면서 그분들 이야기가 오늘 우리네 이야기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요셉의 생애를 통해 저는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은 그야말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데, 그 안에 무한 성장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요셉은 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다 보니 하늘 무서운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머나먼 타국에서 노예 살이 하면서 그는 끝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성찰했습니다. 철딱서니 없는 소년에서 성숙하고 지혜로운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종으로 있을 때 주인의 아내의 간계로 2년간 감옥에 갇히는데, 거기서도 열심히 했습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했으면, 감옥의 관리 전체를 다 맡겼습니다. 거기서 요셉은 교도소 운영이나 관리 전반에 대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대제국 이집트의 재상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실질적인 1인자가 된 것입니다.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꿈 해몽을 잘한 것에 그치지 않고, 치밀하고 꼼꼼한 국정 운영으로 이집트 사람들뿐 아니라 근동의 여러 국가 사람들까지 기근에서 구했습니다. 사실 7년째 풍년이 들던 해 파라오는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7년 동안이나 곡식 사들이느라 왕실 재정이 완전 바닥이었습니다. 만일 8년째 풍년이 들었더라면 이집트 재정은 파탄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8년째 되던 해 요셉의 예언대로 대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입한 정부미를 팔기 시작했는데, 그냥 팔았겠습니까? 고가로 팔았습니다. 1년 만에 왕실 재정 다 복구되었습니다. 그리고 외국에서도 곡식을 사러 오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9년째 되던 해부터는 요셉에 의해 국가 운영 시스템이 바뀌게 됩니다. 백성들이 더이상 곡식 살 돈이 없다 보니 요셉은 땅을 내놓게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모든 땅이 국가에 귀속되었습니다. 자연스레 토지 개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선물한 능력과 권력을 인류 전체를 위해 잘 사용한 것입니다. 요셉은 성장하면서 키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신앙도 성장하고 인성도 성장하고 지혜도 성장하고 능력도 일취월장했습니다. 요셉은 더이상 그 옛날 철부지 꿈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신중한 사람,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이집트 사람들, 온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참 신앙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만사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매사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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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미성숙한 신앙 두 번째 이야기
역시나 제 예감이 맞았습니다. 자정이 지났으니 어제가 되겠습니다. 저녁 늦게 다른 단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저녁에 전화를 제가 드렸을 때는 식사하시느라 잠시 통화만 하고 끊었는데 늦게 전화가 와 제가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후 통화를 했습니다. 확실한 건 모르지만 제 예측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잘못하다간 또 레지오 단원 하나가 탈퇴를 하게 생겼습니다. 제가 본당을 옮기기 전에는 제 대부님이 같은 레지오를 하는데 그때도 제가 어떻게 기지를 잘 발휘해 슬기롭게 대처해서 대부님이 레지오를 탈퇴하려고 했는데 막았습니다. 사실 대부님이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고 주위 사람들이 꼰대짓을 해서 그게 보기 싫어 탈퇴를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제가 설득한다고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아무도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제가 대자라서 설득을 당한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대부님을 설득시킨 것은 '명분'이었습니다. 대부님도 그러시면 저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답답한 면이 없겠습니까? 솔직히 대부님께 틀어놓고 이야기하면 같이 공동으로 차를 마시고 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를 할 때 특히 신앙 안에서 신앙적인 이야기를 할 때 정말 답답한 소리만 할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시는지요? 나이만 많다면 한 소리 하겠지만 나이가 어린 관계로 그냥 답답해도 무식한 소리를 해도 듣고 넘어갑니다. 그런 자리에서 제가 아는 체 하면 또 어린 사람이 아는 체 한다고 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해봐야 덕 될 게 없어서 말을 안 할 뿐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따지고 사람들과 교제를 하려고 하면 정말 성당 다니기 힘듭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부님의 마음을 돌렸습니다.
다른 분들은 제가 어떻게 해서 대부님을 설득해 다시 레지오를 하게끔 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냥 단순히 대자가 어떻게 말을 잘 했나 보네 하고 그 정도만 생각했을 겁니다. 제가 어제 카톡에도 올렸습니다. 다른 분들은 조금 어안이 벙벙했을 겁니다. 다 통화가 안 되는데 저는 어떻게 통화가 됐는지 말입니다. 저랑 통화를 했을 때 그때 형제님은 저한테 한 건 아니지만 저한테 그냥 화풀이를 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그 정도는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나이는 한참 차이가 나지만 말입니다. 레지오 단장님 말고 제가 단장님이라고 하는 분과 통화를 하면서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과 통화를 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이라 저한테 전화를 했는데 제가 아주 쉬운 해법을 말씀드렸습니다. 너무나도 단순합니다.
화가 난 형제님께 왜 화가 났는지 그 이유를 누군가가 물어보면 답을 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답을 듣고 나면 어떻게 중재하는 방법이 생기니 일단 그것부터 알아봐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발단이 어떻게 생겨서 그렇게 된 것인지 언급을 하지 않았네요. 발단은 화가 난 형제님이 단장님으로부터 모임 자리에서 어떤 마음 상한 말을 들었나 봅니다. 그 자리에서는 다른 사람도 있고 해서 어떻게 분을 참았던 모양인데 댁에 돌아가서는 그게 분이 가라앉지를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날 주일도 어겼던 모양이고 화요일 레지오 때도 나오지 않아서 수요일날 레지오 단장님이 레지오 톡에 그 형제님과 통화를 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톡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다른 레지오 단원도 혹시나 무슨 일인지 싶어 통화를 했는데 다 안 돼서 걱정을 해 나중에는 주소를 확인해 방문해야겠다고 해 어제 저는 그냥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됐던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제가 레지오 단장님과도 통화를 했는데 화가 난 형제님이 말씀을 하신 것을 우회해서 표현을 했는데 전혀 단장님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종합해보면 그렇습니다. 화가 난 형제님이 어떤 경우는 약간 다혈질이 될 때도 있습니다. 첫 번째 글에서 제가 언급했다가 그냥 삭제를 했습니다. 형제님은 서울대를 나왔습니다. 마산고 출신입니다. 그 연배에 마산고 나왔으면 아주 똑똑했다고 보면 됩니다. 또 서울대까지 갔으면 말입니다. 처음엔 서울대 나왔다고 누군가로부터 들었을 땐 좀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똑똑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머리는 똑똑한데 말을 깔끔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핸디캡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성격이 급한 것 때문인지 말 또한 빠릅니다. 사고가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격인데다가 레지오 단장님도 어떤 경우는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약간 꼰대 같은 그런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습니다.
최근 몇 개월간 간혹 주일에 같이 모임을 하면 그런 걸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제가 그렇다고 어떻게 조금 단장님 이건 좀 아니지 않냐고 어떻게 개인적인 뜻을 피력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하셔도 그냥 넘어가야 했습니다. 결국은 넓게 보면 이 두 분의 성향이 그 상황에서 서로 어떻게 이해관계가 상충된 것입니다. 레지오 단장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어떤 뜻없이 이야기를 한 모양인 것 같고 또 화가 난 형제님은 그 말이 자기에게는 마음에 깊이 언짢은 내용으로 다가왔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누구 잘잘못을 떠나 한마디로 표현하면 다 신앙적으로 미성숙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서로 대처를 잘 못 했던 것입니다. 주변에서도 그런 상황에서 그럼 다른 분이 어떻게 교통정리를 잘 했으면 됐을 텐데 그런 기지를 또 발휘를 한 사람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결론은 신앙적으로 성숙한 면이 없었다는 게 이유입니다. 전 이 모든 것을 다 떠나서 하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말이 중요합니다. 말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다 잘 아는 것입니다. 신앙 밖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신앙 안에서는 더더욱 말이라는 건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의 감정을 다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 감정을 삭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말 정의와 공정대로 한다면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서로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게 돼 오히려 서로 더 서먹서먹한 관계가 될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게 더 불편하기 때문에 그런 걸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냥 어떤 경우는 약간 화가나는 감정이 생겨도 분을 참아야 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천주교에서 생활한 경험으로는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 같았습니다. 저도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해 본 결과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면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교과서대로는 절대 되지 않습니다. 변수도 많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맨날 단순히 미사만 드리고 성당만 왔다갔다 한다고 신앙은 발전하지 않습니다. 이건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끊임없이 고민을 하고 넘어가야 할 산이 됩니다. 이 산을 잘 넘어가는 사람만이 신앙이 진일보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 방면으로 많은 묵상을 해서 좀 더 공유를 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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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묵상 : 고독사 한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을 통해 신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게 있습니다.
지난주와 이번주에 걸쳐서 두 번의 고독사 현장을 찾았습니다. 이번 건도 개신교 봉사하는 팀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땐 천주교 신자라서 부탁을 했고 이번에는 저번에 했던 걸 계기로 해서 같이 할 수 있으면 해달라고 부탁을 해 어떻게 시간을 내 같이 했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과 아주머니 한 분 이렇게 두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불교 신자였던 것 같습니다. 불교서적이 많이 있는 걸로 봐서는 그런 모양입니다. 아주머니는 종교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평범했던 보통의 사람 같았습니다. 제가 이 봉사를 개종하기 전에 우연한 일 때문에 하게 됐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한 스물다섯 번 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세 번 하면 아마 도합 스물 여덟 번 정도 유품정리 봉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이 일을 하게 됐을 땐 겁이 많이 났습니다. 몇 번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는 겁은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봉사라고 한 건 재해나 산악 인명 구조 봉사를 많이 한 것이 대부분이고 또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 같은 게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적십자 회원 자격으로 했던 것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봉사를 하게 되면 보람이 많이 있고 뿌듯한데 이 봉사는 그렇지 못합니다. 찝찝하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다면 애시당초 하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고 왔을 때 마음이 많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유품을 정리하다 보면 그냥 그게 유품이긴 한데 그 유품 하나 하나가 마치 슬픈 사연이 다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게 무슨 느낌인지 잘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 개신교에 있었을 때 했을 때 처음엔 잘 몰랐는데 이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 몇 번은 고인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른 상태에서 가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턴가는 어느 정도 정보를 알고 갔습니다. 그렇다고 깊은 정보까지는 아닙니다. 하다 보면서 유품이 말은 하지 않지만 무엇인가 말을 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조금 감수성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건 같이 봉사를 하는 분 중에 개신교 자매님도 계십니다. 그분들이 예전에 그랬습니다. 제가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 유품에 대해 어떤 감상을 말하면 상당히 공감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번에는 천주교 신자라서 요청한 것도 있지만 사실 이번에 들었는데 앞으로는 고인되신 분의 종교와 상관없이 같이 봉사를 했으면 좋겠는데 하고 부탁을 해서 할 시간이 있거나 여건이 되면 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이게 단순히 그냥 물건을 치우고 버리는 문제면 간단한데 생각보다는 그런 게 아닌 면이 있습니다. 직업적으로 하는 곳도 있지만 이곳은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하는 봉사 단체라서 단순히 쓰레기 정리를 하는 그런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맨처음 할 때 이에 대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쓰레기나 물건을 치우는 그런 개념으로만 생각하면 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개종하기 전에는 거의 다 개신교 신자 위주로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종 후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특별한 경우에는 개신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했던 적이 좀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했던 거는 제가 기록으로 많이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냥 봉사를 했다는 그 사실로만 만족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하면서 나름 묵상한 게 있습니다. 또 연락을 받고 나서 약속된 시간이 올 때까지 고독사에 대햔 자료도 많이 찾아봤습니다. 또 이번 두 분의 고독사 현장을 다 정리하고 난 후에 같이 봉사를 했던 분들과 많은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봤습니다. 그분들은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이건 개신교 천주교 신앙 이렇게 양극단 대립적인 종교로써 바라볼 문제가 아닌 것을 느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큰 틀에서 생각을 공유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었습니다. 최근에 세 번 하고 또 이분들과 같이 봉사를 한 후에 나눈 나눔을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신앙을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이 점을 여러분과 함께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저번에 천주교 신자인 자매님 유품을 정리했을 땐 전체가 형제들로만 구성됐습니다.
이번에는 자매님 두 분이 계셨는데 다행히 두 분다 예전에 같이 했던 분들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반가웠습니다. 보통 보면 이 봉사를 꺼려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어서 동참하는 분이 잘 없다고 했습니다. 근데 자매님들은 이 봉사가 보람이 많이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게 궁금해 여쭤봐도 딱히 설명을 잘 해 주시지는 못했지만 보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보람보다는 가슴이 아프다는 게 전부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고독사를 하게 되면 명백히 구분되는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결과는 동일한데 그 과정에서 차이가 나는 게 있습니다. 만약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도 차이 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든 남여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닌데 제가 그동안 해 오신 분들의 경험담과 제가 그동안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차이점이 오늘 제가 글을 올려서 공유하고자 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바로 '외로움'입니다. 사람은 혼자라면 누구나 또 나이가 들어가게 되면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건 고독사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지금은 이 현실이 더 절실하게 느끼는 현 시대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사회현상입니다.
원래 성비를 보면 남자가 훨씬 고독사 사망이 더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근데 최근 몇 년간 새로운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50대 중반에서 60대 중반 여성의 고독사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원인 중 하나가 질병이 있어서 질병으로 인한 고독사보다 외로움으로 인한 고독사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어제 오늘 이런 방면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 특이한 통계 자료도 봤는데 이게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연령층만 딱 놓고 봤을 때 이때까지 미혼인 여성과 기혼인 여성이었는데 어떻게 이혼을 했다든지 아니면 상처를 했다든지 해서 혼자서 살게 된 경우로 나누어서 보면 특이한 특징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별이나 이혼한 여성이 더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 정반대가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입니다. 이건 실제 이 봉사를 오랬동안 해 온 개신교 자매님들의 전언을 통해서 들어보면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 사실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분들 같은 경우는 신앙이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만약에 그럼 신앙이 있는 경우라면 과연 결과가 어떨까요? 이건 종교가 어떤 것인지는 상관없다는 걸 전제로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분들은 개신교 신자들을 많이 상대로 했기 때무에 그간 제가 14년 정도 가톨릭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했을 겁니다. 그중에는 개신교 신자도 있었을 겁니다. 이를 토대로 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신앙을 가져도 그 외로움을 신앙으로 채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는 되지만 씁쓸한 현실 같습니다. 이게 남자와 여자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냥 그 자체로 외로움이 있어도 그냥 마치 운명인 것처럼 생각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높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외롭긴 하지만 다른 대체적인 것으로 어느 정도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기질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번에 새로운 것을 느꼈습니다. 남녀 성별을 불문하고 이런 상황도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도 신앙이 있다면 다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실제 현실과는 너무나도 다른 결과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고독사 하면 경제적인 결핍도 고독사의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도 원인이 되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도 고독사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본 게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게 무조건 죽어서 나중 우리가 가는 영혼의 세계인 본향에 초점을 두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젠 이 문제보다는 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한 후에 이 문제는 차후 문제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요 요즘은 남녀가 결혼을 해 가정을 가지고 살아도 이혼이나 사별 같은 게 있기 때문에 이런 게 현실적으로 일어난다고 했을 때에도 어떻게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남자도 해당되고 여자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평균적으로는 남자가 먼저 빨리 하늘나라 가지만 어떤 경우는 자매님이 빨리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영세를 받고 나서 레지오를 했는데 얼마 안 있어서 한 1년 정도 됐을 때 한 형제님의 자매님이 선종을 했습니다. 형제님이 기가 많이 쳐졌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성당에 나오셨는데 또 레지오 회계도 맡고 하셨습니다. 물론 연세가 상당히 많으셨는데 그만 자매님이 선종하신 충격으로 언제부터 그냥 냉담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경우라도 재혼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더라도 자신만의 신앙적인 결심을 평소에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걸 평소에 생각하지 않으면 그런 상황이 현실적으로 닥쳤을 땐 소위 말해서 멘붕이 올 것입니다.
만약 재혼이 불가능하다면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평소에 신앙으로 이런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자기만의 힘인 내공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독사는 둘째치고 남은 여생을 신앙보다는 오히려 외로움에 더 지쳐 신앙을 등지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앙과 먼 생활을 하면서 남은 생을 보내게 될 경우가 더 많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부로 살든 독신으로 살든 마지막 인생 여정에는 다 혼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시간이 닥치게 될지 아니면 안 닥칠지는 자신의 운명이겠지만 그 운명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게 신앙 안에서는 또 하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결국 신앙의 길을 가도 외로움과도 싸워야 하는 건 누구나 걷게 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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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1,33–43.45–46
예수님은 “포도밭”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주인은 포도밭을 잘 가꾸어 세를 주고 떠납니다.
열매를 거두려 종들을 보내자
소작인들은 종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마침내 아들까지 보내지만
그 아들마저 죽이며 말합니다.
“저 상속자를 죽이고, 유산을 차지하자.”
이 비유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폭력 그 자체만이 아니라
‘맡겨진 것을 내 것이라 착각하는 마음’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교회의 사명은
소유물이 아니라 열매로 응답해야 할 선물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내 권리’로 바꾸는 순간,
신앙은 돌봄이 아니라
지배와 배제의 체계로 변질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게 맡겨진 포도밭은 무엇인가? (가정, 공동체, 일터, 몸, 시간)
나는 “열매”를 주님께 돌려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내 방식”으로 움켜쥐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아들(그리스도)을 환대하는가,
아니면 내 계획을 방해하는 분으로 밀어내는가?
주님,
제게 맡겨진 것을 제 소유로 착각하지 않게 하소서.
받은 은총을 움켜쥐지 말고
열매로 돌려드리게 하시며,
공동체 안에서
돌봄의 책임을 기쁘게 감당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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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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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50 추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마태 21,37-43.45-46).>
1)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자만심’과 ‘특권의식’에 대한 경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이니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자만심과 특권의식에 빠져서, 회개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면 구원에서 탈락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
<43절의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비유가 아니라 직접적인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여기서는 유대교를 향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교도 이 경고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각 개인의 경우로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다 해당됩니다.
신앙생활에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 경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리스도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이 말씀은 분명히, 당신의 교회를 지켜 주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무조건 지켜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당신의 교회답게 잘 살면 지켜 주겠다는 조건부 약속입니다.
우리는 ‘반석’으로 임명된 베드로 사도가 바로 뒤에 ‘걸림돌’로 추락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반석이 ‘반석답게’ 살지 않으면 ‘걸림돌’이 되어버립니다.
<똑같은 바위라도, 예수님의 뒤를 잘 따르면 반석이 되고, 예수님의 앞을 가로막고 방해하면 걸림돌이 됩니다.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2)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의 첫 부분은(마태 21,33-36),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를 가리킵니다.
‘주인의 아들’에 관한 말씀은(마태 21,37-39),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알아보고 ‘아들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려고 아들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생각으로 죽였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고, 실제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 일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인 것은, 하느님을 거슬러서 ‘반역죄’를 지은 것입니다.
비유의 세 번째 부분은(마태 21,40-43),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겠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고집부리면 멸망을 당할 것이다.” 라는 경고입니다.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과 “소출을 내는 민족”은 그리스도교를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또는 유대교가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아서, 그 은총은 그리스도교로 넘어 왔습니다.
3)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아직 구원의 기회가 남아 있고,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구원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1,28-29).”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향해서는, 예수님의 교회답게 살지 않으면 잘릴 것이라고 경고합니다(로마 11,22).
교회 전체든지 개인이든지 간에 ‘자만심’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니 항상 조심하면서 끝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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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09:05 추가
■ 생활묵상 : 매일 하루 한 번 감동하기
올해 개인적으로 정한 게 하나 있습니다. 매일 매일 하루 한 번씩 주제는 상관없이 감동하기입니다. 뇌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연구를 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뭔가 하면 사람이 감동을 하면 뇌가 젊어진다는 것입니다. 노화와 관련된 연구분야입니다. 흥미로운 분야입니다. 사실 이런 걸 예전에 뇌과학 연구자들이 약간 가설로 세운 것인데 이게 지금은 약간 현실로 연구를 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원래 개인적으로 돈 되는 분야는 아니지만 관심이 많은 분야입니다.
신앙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분야인데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습니다. 단순히 뇌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노화와 연관된다는 사실 때문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재미있는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외부적인 환경요인에 의해서 감동을 받게 되면 뇌 건강에 아주 좋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선한 충격을 준다는 것이고 또 뇌를 자극하는 것이라 뇌를 젊게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피실험자를 두 파트로 나누어 실험을 했습니다. 한 파트는 독서를 통해 한 파트는 동영상 같은 영상이나 영화를 통해서 감동적인 내용의 글이나 영상을 본 후에 두 집단의 사람들 뇌파를 촬영해 비교를 한 것입니다.
세세한 내용은 제가 다 기억을 할 수가 없습니다만 최종 결론은 기억합니다. 뇌과학이나 재활의학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뇌가소성'이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더 활성화된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어떤 이유로 인해 뇌의 어떤 부분이 잘못됐다고 했을 때 그 기능이 기능을 하지 못하지만 또 다른 영역의 뇌에서 새로운 영역의 기능을 하게 되면 원래 작용하지 못한 뇌기능을 보충해 정상적인 기능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원래 다 정상이었을 때의 뇌 기능의 상당 부분 회복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9년 전에 서울대 의대 한 교수님이 쓴 뇌과학에 관한 글에서 위 실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뇌가소성을 설명한 걸 봤습니다. 요즘은 재활의학과에서도 같이 통용해 사용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년말쯤에 재미있는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심리학 관련 책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도 이 내용이 마침 나왔습니다. 그래서 작년 말에 올해 제가 목표를 하나 세운 게 있습니다. 바로 매일 하루 한 번 감동하기 프로젝트를 세운 것입니다. 처음엔 막상 이 목표를 세우고 나서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한 달까지가 조금 힘들었습니다. 한 달 이후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걸 잘 실행하기 위해서 억지로 감동도 되지 않은 걸 가지고 감동이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두 달이 지났습니다. 뇌의 변화는 잘 모르겠지만 감성은 더 풍부해지는 느낌입니다. 혼자서 느끼는 행복 도파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게 많이 나오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덜뜬 기분 같은 황홀한 기분은 아니고 잔잔한 물결이 일듯이 일어나는 잔잔한 행복 이런 느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은 저는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병원에서 간접적으로 권유를 한 면도 있었습니다. 심장 건강 때문에 말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십자가라고 표현하지만 세상 학문에서는 스트레스로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이 스트레스 때문에 육체적으로 심장 건강에 많은 악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치료상 이유 때문에 한 측면도 있습니다. 이제 두 달 정도밖에 하지를 못해서 정확한 결과는 알 수 없습니다만 결과를 떠나서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일단 정신건강에 좋은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건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니 여려분도 한번 이런 걸 한 번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좋은 점이 있을 겁니다. 이건 심리학 분야에 나옵니다. 감수성이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이 더 잘 조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로 보면 신앙생활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찬미예수님! 하루에 한 번 감동하려면 세상이면 세상 주변에 많은 관심과 관찰을 해야 합니다. 그게 유투브에서도 감동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저질 유튜브도 많지만 유익한 유튜브도 많습니다. 딱 보고 저질 같으면 패스하면 됩니다. 3일 전엔 비가 오는 늦은 밤에 마트에 갔다가 오는데 여고생 정도 보이는 학생이 비를 맞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비를 맞고 가는 학생이 남학생이라면 뭐 성장하기 위해서 그런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잔 아무래도 마음이 아파서 저는 집도 조금만 가면 되니 제가 우산을 주겠다고 하니 정말요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더군요. 우산은 어떻게 돌렫릴까요 해서 그냥 너가 괜찮다면 너가 사용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고급 우산이라 여학생이 사용해도 좋은 캐릭터 그림도 있고 또 양산 겸용이라 말했는데 애가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다고 하면서 아저씨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하고 헤어졌습니다. 저는 약간 비를 맞았지만 조금밖에 맞지 않아서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댓글 2. (강만연 08:54)
찬미예수님! 애는 보니 옷이 완전히 이슬비보다는 좀 더 많은 비라 상의 옷이 다 젖어서 아마 감기 걸리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인사를 하고 가는 걸 보니 애가 가정교육은 잘 받은 모양입니다. 비는 약간 맞고 우산 하나 없어졌지만 그래도 행복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냥 고맙습니다 정도 인사만 하고 갈 수도 있는데 자기 딴에는 고마운 마음에 복 많이 받으라고 하는 인사를 하는 것이 참 기특했습니다. 저는 그런 인사를 하는 애가 오히려 저한테는 더 감동이 된 것입니다. 이런 것도 하나의 감동입니다. 사례 하나 설명해드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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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6. 사순 제2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1:20 추가
마태 21,33-43.45-46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또 사랑하시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사랑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사랑하는 외아들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주실 정도이지요 하지만 제 몫으로 주어진 것 이상을 가지려고 하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그 탐욕을 채우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일마저 서슴지 않는 인간의 집착 때문에 하느님은 큰 상처를 받으시게 됩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외아들이 목숨을 잃는 큰 슬픔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 사람들’이 당신께서 바라던 ‘구원의 소출’을 내지 못했다면 ‘저 사람들’에게, 안되면 될 때까지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그런 하느님의 모습은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하여도 그 악함을 한 없이 큰 자비로 덮어 버리시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의 부족함과 약함, 실수와 잘못을 통해서도 당신의 선을 이루시는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의 큰 사랑과 신뢰를 져버리고 다시금 같은 잘못을 반복하여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우리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그깟 재물이 뭐라고, 명예나 권력이 우리의 참된 행복에 무슨 소용이라고 손 안에 꽉 움켜쥔 채 놓지 못하는, 그러느라 정작 받아야 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놓쳐버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돌아보게 하는 양심의 거울입니다. 탐욕과 집착에 빠져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지요.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생명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시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어 누리게 하신 하느님께 조금이나마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느님 말씀을 어기지 않았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이 얼마나 큰데, 그것 하나 정도는 그분께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기쁘게 ‘봉헌’했을 겁니다. 이 세상의 ‘관리자’로써 하느님께 바쳐야 할 도조, 즉 ‘십일조’로써 말이지요.
하지만 뱀의 꾀임에 빠져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 아담과 하와는 ‘그 하나마저’ 자기들이 가지려고 욕심내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것으로도 모자라, 그분께서 자기들을 부르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셨는데도 그 기회마저 ‘남탓’으로 돌리며 날려버리지요. 그 결과 하느님께서 만드신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하느님께 순명하며 살았으면 먹게 되었을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먹지 못하게 되어 죽음이라는 큰 슬픔과 절망이 우리 삶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은 ‘소작인’으로 비유되는 우리들에게서 또 다시 반복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기에, 감사와 보은의 마음으로 그분께 받은 것의 일부라도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봉헌하지 않기에, 그저 내 탐욕만 채우려고 고집을 부리기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우리가, 그분 나라에서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할 우리가 ‘소작인’이라는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분의 종으로조차 살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 겁니다. 이제부터라도 그런 신세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감사하며 그 중 일부라도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기쁘게 봉헌함으로써 우리가 그분께 사랑받는 자녀임을 분명히 드러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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