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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 7
네가 선을 행하면
천상 천하의 최고 지선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신 뜻입니다. 때문에 지상의 최고 지선은 하나님의 뜻 준행에 있습니다. 범죄 이전에도 그러하고 그 이후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본문 7절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입니다.
1. “내가 선을 행하면” 이라는 말에서 하나님은 가인이 지금 부당하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책망하고 계십니다.
1) 그는 지금 그 모든 악의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으므로 그의 분노를 잘못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았다고 그렇게 불평하고 분개하는 것이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제물의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여 시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이 모든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오랫동안 격렬하게 분노를 뿜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자기들의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확정 받고 자기들이 저지른 악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려고 헛된 노력을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 헬라의 해석가들은 여기서 모세가 의미하고 있는 말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히브리인들이 모음(母音) 대신에 사용하는 표나 점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 말들이 서로 유사한 결과로 이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적응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히브리어로 된 구절을 온건하게 고찰하면 쉽사리 그들의 잘못을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배격하는 것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히브리어에 능숙한 자들까지도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니 물론 그들은 한 개의 단어를 중요시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헬라인들은 거기에 비추어 볼 때 문장 전체를 변경시키고 있습니다. 그 문맥과 그 말의 본질에 관해서는 의견을 일치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서도 히브리어 (세에트)라는 말에 관해서 그 차이가 있습니다. 그 말은 사실상 명령법에 속해 있으나 실명사로 분석해야 될 것입니다. (나사)라는 말이 때로는 ‘높이다’로, 때로는 ‘가져가다’ 또는 ‘면제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때는 ‘드리다’ 때로는 ‘받아들이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석가들은 그들 가운데서 각각 다르며 각자가 이 의미를 취하느냐, 저 의미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해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2) 히브리어 박사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그 말은 가인의 ‘용모’를 가리키는 말로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비록 지금은 슬픔으로 아래를 쳐다보고 있지만 다음에는 그 얼굴을 쳐들어 위를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풀이하고 있습니다.
(3) 그리고 다른 히브리어 학자들은 그 말이 죄를 속량해 주시는 것이라고 적용시키고 있으니 마치 ‘잘해 봐라. 그러면 죄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 라고 말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료로 사죄하는 것을 훼손시키는 결과만을 빚는 상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모세가 의미하고 있는 뜻에서 너무나도 현저한 간격이 생기고 있습니다. 세 번째의 해석이 보다 더 그 진리에 밀접하게 접근하고 있으니 ‘승귀(勝貴)’는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존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합니다. 즉 ‘네 동생의 명예를 조금도 질투할 필요가 없다. 만약 네가 올바른 처신을 하면 하나님이 그와 똑같은 명예를 받을 수 있도록 너도 일으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분이 네 죄로 말미암아 기분이 상해 너를 불명예스런 자로 정죄하고 계시긴 하지만 그렇게 울려주실 것이다’ 라는 방법으로 승귀라는 말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2) 그러나 이 해석도 역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다 철학적으로 잘 다듬어서 말하기를 가인은 만약 자기가 외적인 제사와 함께 마음의 정결함을 믿음으로 드린다면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주시며 그분의 은혜로 도와주심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그들의 의견에 무엇보다 신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거의 내실을 기하지 못한 것에 목표를 두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롬은 그 말을 ‘너는 받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수하고 정당한 예배에 보상을 약속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의견들을 많이 인용하여 왔으니 이제는 가장 적합하게 보이는 것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히브리어 (새에트)라는 말은 ‘수락’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절’ 이라는 말의 반대입니다.
둘째로, 그 대화가 당면하고 있는 일에 관해서 되어지고 있으므로 그 대화를 제물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바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그 제물들이 올바로 드려질 때 받으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히브리어에 능숙한 자들은 여기에 억지로 부과된 것이나 그 말의 참된 의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의미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이제는 일들의 순서 그 자체가 우리를 똑같은 지점으로 인도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하나님이 거절하고 배격하신 그 제물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선언하고 계시는 사실이니 그것은 부적절하게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순수하고 합법적인 것이었다면 기뻐하시고 향기가 좋은 헌물로서 받아주셨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가인이 얼마나 부당하게 자기의 제물이 열납(悅納) 되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으며 그리고 동시에 그 제물들이 허물이 없이 드려졌다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손을 뻗쳐서 받으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이전에 말한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지니 경건한 자에게 대하여 잘하는 주요한 요점은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며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값없는 화해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그리고 가식 없이 예배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일들은 상호관계를 가지고 서로 밀접하게 연합되고 있습니다. 신실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에로 들어가는 빈도에 비례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위탁받고 있으며 그들의 죄들도 그분의 은혜만으로 깨끗하게 지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순수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선을 행치 아니하면” 이라는 말씀에서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가인에게 대하여 무서운 언도를 내리고 계십니다.
1) 그것은 만약 그가 죄악으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며 그의 범죄에 계속 탐닉되어 있다면 그 무서운 선고가 그에게 내려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 말씀은 아주 강조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부당한 불만을 반박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가인이 내적으로 아끼고 있는 그의 죄보다 더 큰 죄를 가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몇 마디의 말씀으로 불경건한 죄인을 결박하고 계셔서 그분이 마치 ‘너의 고집이 너에게는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전혀 피할 곳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비록 네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할지라도 너의 죄는 너에게 아무런 안식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 죄들은 예리하게 너를 몰고 갈 것이며 추적하며 또한 너를 독촉하여 절대 피할 수 있도록 너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는 절대로 피난처를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가인은 헛되게 화를 내고 있으며 자기에게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는 분노를 터뜨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아무도 그의 내부에 있는 죄의식을 고소하지 않지만 그 마음 속에는 그런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고 한 표현은 양심의 내적인 심판을 묘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이 사람에게 압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그를 포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불경건한 사람이 상상하기를 하나님이 하늘에서 잠자고 계신다고 생각하거나 할 수 있으면 그분의 심판에 대한 공포를 쫓아내려고 백방으로 노력할런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죄는 계속해서 그들의 뒤를 따라 다닐 것이며 그들이 그토록 망설이고 피하며 도망다닌다 할지라도 결국은 그 죄가 그들이 서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하는 그 법정에까지 끌고 가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방인들의 선언이 증명해 주듯이 그들도 이런 진리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양심은 천명의 증인과 같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양심을 가장 잔인한 형집행자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열거되는 것보다 더 슬프고 또한 잔혹한 고통이 없으니 더욱이 하나님 자신도 이런 류의 고백을 강요하고 계십니다. 쥬베날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범죄들에, 하늘의 날카로운 보복을 보라. 세상의 판정은 돈에 사고 팔릴지라도 죄인은 자기의 재판관을 가슴에 지니고 있으며 양심은 고통을 주는 걱정으로 그를 괴롭히고 있다네” 라고 했습니다.
2) 그러나 모세의 표현은 특이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 죄는 ‘거짓말 하는’ 것이 라고 하며, 또한 그것은 ‘문’에 엎드려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심판의 두려움으로 즉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을 속이기 위하여 자기 주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마음대로 자행하며 생활하는 것이며 심지어는 마치 초원에서처럼 즐겁게 흥청거리고 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일단 그 문에 이르게 되면 거기에서 ‘죄’ 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감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전에는 자유로이 제 나름대로 생각했던 양심이 억류되고 그곳에 늦게 도착했다는 대가로 두 배의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3.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에서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이것을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이 충고의 말씀으로 그런 타락한 욕정들은 제지를 당하고 있으니 그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며 재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 말의 뜻은 이런 류가 될 것입니다. 즉 “만약 너를 복종시키려고 대항하여 일어나면 그것을 제지하고 통제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오히려 왜 네가 그 죄에 몰두하고 있느냐? 네 육신 안에 있는 그런 정욕들을 정복하고 모조리 나에게 가져오는 것은 네가 할 일이다. 너는 이미 그 육신의 정욕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을 대항하여 반항까지 한다는 것도 깨닫고 있다’는 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측하기로는 여기서 모세가 의미하는 것은 무언가 전혀 다른 의미인 듯합니다.
우리는 ‘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에다 여성적인 성(性)의 표를 첨부시키고 있는 사실은 여기서 그냥 지나가기로 하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개의 남성 관계 대명사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고 가야겠습니다. 확실히 모세는 이미 범한 죄 자체를 특별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유출되어 나온 죄책을 특별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말 즉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라는 말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하지만 그다지 오랫동안 반박을 하기 위하여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우리가 그 표현의 참된 의미를 파헤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은 하나의 책망인 듯 합니다. 그 책망으로 하나님은 배은망덕하고 있는 불경건한 자들을 질책하고 계십니다. 그는 장자의 명예를 오히려 멸시하는 자세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큰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덕(恩德)들입니다. 그것들을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으며 장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은덕을 더 많이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가 의무를 지고 있는 은혜의 수여자(授與者)이신 하나님에게 진정하게 봉사하고 섬기기를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그만큼 우리의 불신앙을 더 질책하시며 엄벌하시는 것입니다.
아벨이 자기 형보다 열등한 자로 여겨졌을 때도 그는 자기의 처지와는 상관없이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태어난 자는 하나님을 등한히 섬겼으며 형식적으로만 그분을 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도 역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존귀한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죄를 확대시키셨으니 조금이라도 그는 자기 동생을 모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는 명예 정도면에서 그 자신이 지녔던 것처럼 경건면에서도 자기 동생보다 훨씬 더 능가했어야 될 사람이 자기 동생보다 못하고 그를 따르기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런 말의 형식은 히브리인들 가운데서는 일반적인 것이므로 자기가 복종하는 자에 관하여 열등한 자의 소원이 향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자에 대하여 말하기를(3:16) 그녀의 소원은 그의 남편에게 있을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치하게 사소한 것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하는 자들은 주장하기를 이 구절이 의지의 자유를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왜곡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만약 가인이 그의 의무에 대하여 교훈을 받은 것은 죄에 복종하는 데에 자신을 적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우리가 시인한다면 아직까지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 여기에서 추론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로만 육신의 애착들이 굴복하여 기세를 떨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명령을 하실 때마다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받게될 것이라는 식이 아니라 ‘당신이 명령하신 것을 주옵소서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명령하옵소서’ 라고 말한 어거스틴의 말을 우리는 무엇보다도 굳게 붙잡아야 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