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을 벗어났다 할 것인가? 그대의 벗어남을 끝까지 방해하는 귀신시간을 짓이기듯하여 떨어내야만 벗어날 것이다。어느 귀신을 指目하여 억지라도 이기고자 해보라。그 귀신이 성깔을부려 크게 떨쳐일어나는듯 하리니 네가 먹고자하는 진수성찬의 상을 둘러엎어 울화통을 치밀게 하기는 보통이요 아주 악성종기 같은게 되어 밀착하여 달라붙어 두고두고 고통을주고 지근지근 밟음을 당하는 듯한 능력행사를 받으리니 왜 나를 무시하느냐 내가 옳고 내 行爲가 正當하여 네게 福을 주고 즐거움을 줄것인데 왜 나를 받들지 않느냐 하리로다。그렇더라도 체념하는듯 아는체하지말아라 절대로 따라 춤추듯 화를 내거나 뿌리채 뽑고자 하질말아라 그렇게 거덜을 내고자하면 아주들어누워 오줌똥싸듯 갖은 어지려움을 흩틀어놓고 떼쓰듯 할것이니 또 설령 그렇게 당하여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절대로 요구에 넘어가지 말아라 너의 만신창이가 귀신의 만신창이 아주일어나지도 못하게시리 짓이겨라。제풀에 시들어 그대의 원대로 변해있으리라。귀신은 正直하여 먹은마음(一心)을 파괴하길 즐기나니 그대의 운명이 부득이한 형편에 처할때 곧 그것이라 할 것이다。억 겁참선의 돌부처라도 부득이한 형편이면 풍상에 깎이듯 관여가 되느니라. 나의 관여가 아니라 저의 관여라한다면 저가 그 관여할 계제에 있으니까 그가 관여하는 것이 아닌가 내몰라라 뿌리치듯하는 것이 그 풍상에 깎여나가는듯 관여하는 것이 아닌가 억 겁으로 그리해도 돌아앉아 뒤돌아보지 않는다한다면 눈은 벽을보나 마음은 등뒤의 향기나고 맛있는 음식에 가있게 되어 있는데도 관여가 아니라할 것인가 해라.그것은 사람의 느낌이지 돌부처가 무슨 그럴리야 있겠느냐 한다면 저 칼자루를 오래잡고 있으면 내음이 베이듯 억겁을 두고 갖은것을 다 겪었는데 무슨것인들 풍기지 않으랴하리로다。실컷먹어 베어있는데 관여가 아니라 할 것인가 이것이 또한 부득이해서 그렇다 하나 그만(뜻은 있으나 어찌해 볼 도리 없음을 말함) 부득이한 형편이란 것이 길을 막고 원한을 생산하나니 그것이 또한 운명이라 업보덩어리로 왔기 때문에 그렇다고 아는체 둘러대나니 그런지 안그런지 남도 그렇게 알아 實證할만한 무슨방법과 늘어놓을 건덕지도 크게 없 으면서 말이다. 한낱 제만알고 아는체하는 獨脫일뿐이지 누가 인정을 하여 높이 그 高邁(昧)(허령불매의 착각)한 理想을 사줘 거룩한 성인이나 훌륭한 人事처럼 하여 줄 것인가 그 虛中에 개미귀신이 물고 들어가 강제로 보시를 당하듯 삿된 끝에 빠진중 모르고 벗어났다 미친체 호랑방탕 너스레들 떠는 것이다. 저 원한이 물고 늘어짐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걸림 고(罟)가 될 것인데 무슨 脫破라 할 것인가? 잡다한 생각과 좀스러운 妄想이라 조그만큼의 진척도 없으리라 한다면 잘 닦아 진척있는 그대는 이미 벗어났는가 하리로다。물고 늘어지던 베풀었던간 業이라는 것은 立場의 번복이니 그에 구애된다면 우려하는 마음에 깊이 젖어 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도 구애될것 없으니 네가 용서할 立場이라하고 네가 용서할 계제에 있다하고 먼저 용서한다면 또 이미 용서했다 한다면 아무런 걸림이 없을 것이니 그원한이란 생각을 일으키는 主體性質의 것이 오히려 脫破의 맛으로 되어돌(回)것이다.그렇기 때문에 釋氏가 忍辱바라밀이라 하였나니 석씨의 見解가 後死者의 覺에 영향을 줘 覺을 옮기는 글을 망치고 있도다.이것이 영향을 받은 환골이라 하는 것이니 그 영향에 옮아드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남에 말씀을 시청치 않겠다고 耳目을 닿는다면 이 또한 井底觀天이요 요동에 돼지기르는 사람보다 더 못하지 않겠는가하리로다。그렇게 어둡게 하고서 무슨 벗어치움 있어 커다란 空의 果를 이룩한다 할 것인가? 한참 퉁탕거리던 천둥번개도 이제 잠잠해졌다(※ 정리때의 天事日氣를 말함이다。九七 十月十七日 子丑時) ◎ 그 處地를 잃지 말라는 것이 本然에 능력을 抑制하라는 건아니다。어떠한 本能이 있다면 그 本能~벗어보겠다고 너로 뭉쳐왔는데 어찌 그 벗겠다함(願함을 풀겠다함)을 방해한단 말인가? 그러하고선 무슨道를 깨우쳐 원한걸 얻는다 할 것인가? 나는 願이 없어 道(道란 行할 때 向方의 가르침을 주는것。말하자면「쭈욱」길이 그리로 나 있으니까 行하는 者가 지나가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向方處의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다)(노릇)한다。즉 깨우침에 도달해서 깨달음으로있다 한다면 그보다 더 큰 願이 어디있겠는가 삼라가 저마다 깨친바대로 찌글상이던 우글상이던 象을짓거늘 제모습만 벗어치운 象이라한다면 하룻강아지도 범을 알아보고 삼척동자도 배꼽잡고 웃을 일이다。벗어치움이 그렇게쉽다면 醒者같은 이가 뭣하러와서 모처럼 듣는 이에게 뚱단지같은 말을 늘어놓겠는가? 次元이 差異가 나면 관념이 틀려듦도 있으려니 醒者의 말이 별세계의 말같이 들릴것 아닌가? 그처지를 잃지말라는 것은 그질서를 지키라는 것이지 억눌리고 속박을 강요받으라는 것은 아닌 것이다.제 판단으로 하지않겠다 하여서 如他에게 그하지 않을것을 강요하는것 같이함은 속박이니 무슨 깨달음을 얻는 방식이란 말인가? 이야기를 다른방면으로 돌려서 누가 말하는 것처럼 내보이길 스스로를 가리키거나 어떤 특정한 行態나 形態를 지칭해서 시공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났다 한다면 또 혹자 있어 그에 반박하길 갖은 억겁에 들어 갖은 삼라상을 다지어 봤는가?할 것이다。또 혹자 있어 주제넘게도 道가 높은 체하며 하는 말이 삼라상이 一切象이라 시간을 두고 제위치를 삼아서 다지어봤다 한다면 그게어디 제나름대로의 꿈속같은 생각속의 일이지 제가 어찌 土石의 位置에 서봤으며 草木의 位置에 서봤으며 부유(蜉蝣) 즉 하루살이의 位置에서 봤으며 時間의 위치에 서봤으며 갖은 질곡과 통증의 위치에서 봤으며 그것이 슬프고 기쁜것인지 어느 준칙의 판단으로 알아서 서 봤는가 하리로다。남이 즐거워하는 것도 제눈이 슬프면 제주제도 모르고 가련한체 상을 지어 자기만이 獨脫한 것처럼의 相을 궁글리고 짓나니 어리석기 그지 없음 아니던가 제가쓴 가면을 벗지않곤 벗어남은 없으리라 낮 두꺼운 철면피 같은 마음에 원체 저가쓴 가면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니 알아야지 벗어날것 아닌가 모든이가 信實하고 다 假飾이 없는 걸로 對하고 가면이 없는 걸로 여기니 그것이 바로 가면이 아니고 뭣인가 몰라서 진지한 모습을 제나름대로 짓는 것이라 한다면 그런대로 봐줄만하다할 것이나 안다면 너스레를 떠는것이 아니던가 진실한 面은 감춰지고 저마다 허울상의 활옷을 입고 춤추는 것처럼 하고있다고 하지않겠는가? 그럼 진실한 면은 뭔가? 억제된 감정 및 행동이 自制되는 것이 진실한 것인가? 저 착고로 채우듯해 克己하는 것이 진실한면인가 마음이 狂的으로 波高침을 魔로여겨 降魔한다고 하는 律테의 法相(일체의 가르침)이 진실한 면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진실하다 하는것 一切가 이 모두 껍질일뿐인 것이다. 즉 진실함은 없다는 것이다에 도달함인 것이다。진실한 것은 아직 덜 익은 쓴맛、벗은 허울은 무르익은 단맛 모두가 이 벗은 단맛이라 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假(거짓 빌린)象일 수도 있는 것 사람들은 계속 걸리적거림을 정돈하듯 무슨 眞象이 있는가하고 찾아 헤매인다네… 할 것이다. 윗글을 본다면 形容象은 여러가지다.이렇게 여러가지(界)인데 어찌空이라 할까( (※ 즉 담기게 하는 빈그릇만이라고 할까? 이는 모든걸 포용하고 수용하겠다는 욕심이 끝도 없는 虛象(妄想)인 것이다)) 空도 하나의 定數이니 家見이 아닌가°빈그릇도 담기길 바라는 담겠다는 家見이란 뜻이다.모든 것이 빈그릇에 담긴것 故로 빈그릇은 찬그릇 空色이 一相身일뿐이다。이것이 法相이 아주 없어진건 아니라는 누구말의 환골이 아닌가? 누리가 천태만상으로 벗어나 있거늘 (((아무리 假象(빌린상 거짓 지은상)이라도 그렇다。가상도 眞象((※ 眞象은(未達이고 獨斷에 말같지만) 없는것이라 현혹하는 세상이 너무험난하니까 헤쳐나가겠다는 길잡이 노릇하겠다는 想相의 見이 아닌가하고 나는 의심스러워한다))이 어디있다치고 그眞象을 가르키기위한 假象이 아닌 가))) 立場이 같겠다는 것이 우스운일 아닌가? 모든것이 立場이 같아 平이라면 당장 실증을내 뛰쳐나오고자 하는자 있으리라(무엇을 갖고 立場이 같다는 것인가? 또 무엇을 같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 껍질을 같게하겠다는 것인가 상념할 수 있는 생각의 기능을 바보멍청이 되는 주사를 한대씩 놓아 평준화시키겠다는 것인가 이것이 자기 주장을 어떻게든 관철시키겠다는 아집 줏대를 내세우는 一種의 고(罟)가 아니던가? 입장을 같게 하겠다는 것이 그느끼는 강도를 같게 하겠다는 것인가? 强度는 다르더라도 저마다의 염원을 흡족하게 들어줘 여한없는 풀림이 되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렇게됨 相間 모순과 씹히는면이 있어 흡사 공간이 겹치고 찌글어들거나 뒤집히는 블랙홀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할 것이다.(또 相(모양)이 相을 모르게 하는 것이 입장이 같은 것인가 의문에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할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게하기 위하여 주제넘은 생각 모든 현상은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니까)을 자제케하는 것이 立場을 같게 하는 것인가 사람의 머리는 일종의 生覺의 집 역할도 한다. 이거 여지껏쓴 말이 누구의 환골이 아닌가 삿된 귀신에게 속아 내가 사뭇 누구말을 환골하여 적고 있었을 뿐이었다。그럼 누구말 보기 그以前에 말은 어디서 옮아온 것이며 누구의 괴뢰역할을 한 것인가 아님 어디서부터 언제부터인진 몰라도 머리의 思索된 色相인가 도시알 수 없을 뿐이다。반대는 그반대를 원하여 회전체는 회전하게 되있는 것이다.※ 같은 입장은 家見 그 家見은 허물어지게 되리라 다른 입장또한 家見 그 家見도 허물어지게 되리라°무언가 내세울 만한 것은 一切가 家見이니 家見은 모였다 흩어지는 거와 같아 허물어지리라.그래서 정체한것 처럼 보여도 무위유동이라 하는 것이다。입장을 같이함도 가견ㆍ 입장을 달리함도 가견 一合相한 진리를 만든 것이니)도 家見 多合相 分列相(저마다 진리를 세운것이니)도 家見、家見은 고(罟)이지 고(罟)를 깨트린 것은 아니다.그래서 반대를 원하는 것같이 하여(계속 추진력이 자체적으로 生成되는 것처럼 갈등相이 일어나) 돌고 돌아 그 輪劫을 벗어치지 못하는 것이다. * ○一切 하지 말라의 本身이 아무러크소니니라 철저하게 버림 받았으니 똘똘 뭉치듯 하여 아름다운 꽃을 피워 諸般界의 꺼지지 않은 등불이 되지 않겠는가? 얼마나 두려웠으면 하지말라 금제하는 말을 하였는가? 끄나풀이 이어지지 않으니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니 관여하고 존재치 않는 곳이 없느니라 家見을 이룬 法身들과 理由들이 그에 집착되어 일체 부정하고 흉내내듯 하지 말라 하나니 왜냐하면 그 家見이 무너지면 그 주장하는 끝이 의지할 곳이 없으니 한사코 힘을 다하여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家見은 기름이 다한 등불과 같아 그 빛을 발하다 곧 꺼지리니 어둠에서 보는 눈조차 더욱 어둡게 할 뿐이요 늘상 벗어나 있는 벗어남의 法位(이 또한 그리 가보진 못했으나 法이라 한다면 허울 쓴 고(罟)일 뿐일 것이다。어떻게 그렇게 주제 넘게도 억측하느냐 할것인지 모르나 未達이라서 세상에 몸담고 있는 한 野視보는 心相이 그릇 깨끗이 가시듯 가시지 않아서 그렇다 하리로다。그렇게 안보이게 할렴 머리가 확 트이게 하여 총명한 귀신들린 것처럼 귀신 집 노릇했다 하는 소리를 들어도 좋으니 그렇지 않다는 걸 내게 증명해 보여라 이거다。괜스리 믿지 않는다고 능력행사 한답시고 남의 하는 일에 훼방이나 놓고 부르트는 시련이나 줄 생각같은 行爲事件이 와 닥치게 하지 말고ᆢᆢ)가、아니나니라。易에 말하길 得臣이 無家(뜻을 얻어 行하고 할일 없이 놀지 않는다。性覺을 깨트려 指向할바 理想이 果를 크게 이루어 걸리적 거리는 허울을 없앴으니 어찌 횡횡 우주하지 않으리! 性覺 以後 말은 필자의 雜解이다)라 하였으니 아무러크소니는 집 (家見 眞理相)이 없으니 흡사 만리를 부운처럼 流行하는 방랑객과 같으니라. 그래서 옛 철인 말씀하시길東家宿 西家宿一定한 居處家 없다 하였나니라。이제 그 뜻을 얻어 그 뜻이란게 뜬(浮)것이라。모두 흩어버렸거늘 오래도록 한 곳에 유거할 집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하리로다。 바로보라! 남은 破脫을 해서 즐기는 걸 갖고 제심정의 눈이 비뚤어져서 순간의 쾌락은 영원한 고해의 나락의 늪에서 중독장이 처럼 허우적거린다로 비틀어지게 照明한다면 뭔가 잘못되도 단단히 잘못된 운명의 틀을 타고난 者라고 할것이다。森羅가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해가 뜨면 햇볕을 쬐는 것이 당연한 理治이거늘 그런 것이 못마땅한 것이라면 무엇이 마땅한 것인가? 저항하고 대항하여 절벽처럼 우뚝서서 계속 부정만하다가는 몸의 脫破도 얻기 힘들 것이고 그 脫破된 즐거움도 모를 것이고 계속 궁구하다 천만년의 歲月을 보낼것이다.그러니 얻는것도 없고 잃은 것은 주어진 時間이라 잠깐의 시간이라도 얻어 갖기 힘들거늘 무료하게 낭비한다면 벗어날려고 온 보람이나 기회가 헛되이 사라질 것이 아닌가? 이 말씀을 삿된 끝의 꾀임이라 하지 말것이다。 ◎ 벗어는 果가 생김인즉 그 된 德의 칭송을 원할런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 그 果가 누리에 끼치는 영향이 어떠하다더냐에 달렸다 할것이다. 만약상 선업이던지 악업이던지 미치는 得失이 至大하다면 億千萬年이라도 化石처럼 되어 누리의 새김 속에 길이 있어 마치 끝날줄 모르는 念佛을 통로로 유통하는 공기처럼 느껴지게 하리라。이런 뜻에서 한고(罟)가 그 고(罟)를 벗어 놓은 경우를 例를 들어 말함일진데 그것이 여름날에 무르익은 果일 참외라면 이렇게도 조명해봤다. 참외 그 씨앗이 이루어 무거운 짐을 내려 놓듯 벗어버린 살집과 그 즙액과 껍데기가 입안에서 향기롭게 춤을 춘다。그 脫破(파괴해 이룬 즉 깨트려 깨우친)를 이룬 파괴된 껍데기 벗어 놓은 것 향기를 내뿜으니 그 씨앗이 道를 이뤄 극에 達했다 아니하랴? 그 벗어 논 옷이 어떻게 될까를 머리에서 굴리지 말라 아무러크소니가 적절한 시기에 요소 요소에 있어 저가 있을 곳에 있게 하나니 그 된 노릇을 다하게 하여 道 이름을 펴보이게 할것이다.장강의 앞물결을 뒷물결이 치러할 때 그 된 노릇 司命이 다할줄 알지니 다시 쓸만한 것은 새로운 힘을 얻는(재충전 하는)재생창 같은데로 갈 것이고 산적되는 쓰레기 노릇이 될 때에는 아무러크소니가 미화원들이 되어 걷워가지고 저 있을 곳에 있게 할것이다。이렇게 저렇게 다양하게 조절 또는 조정하는 것은 관여하는 관리자에게 있지 벗어치운 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果를 事用하는 修行人은 수없이 많아 꼬리를 연이은 것 같다 할것이다。 움직이면(流動 行) 머리골 공간의 균형점이 틀려돈다。순간 정신골이 흔들리어 쓸말을 잃고 떠오른생각이 틀려 돈다.그래서 그때그때의 잃으면 아까운 듯한 잡다한 번뇌가 庫家됨을 무너져 유실되지 않게하려고 記錄하는 것이다。本文 초안작성 때도 무언가 집착하듯 해논 생각을 읽어 이 글을 썼는데 정리 때 아주 중요한 것처럼 떠오르던 생각을 읽고 거리를 방황하듯 이 뒷글을 첨부하는데 그 흐릿한 생각을 정리코자 하는데 이웃한 자명종 소리에 覺은 千里 밖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내 마음이 달가우면 그 육신이 질곡속에 있어도 고통인줄 모르고 불평불만이 있을리 없다。달가움은自發的인 것에 있고 他發的인 것이라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것에 있다。그 힘(완력=강압적인 것)으로 남을 눌러 잡아 긍정으로 유도하려든다면 참다운 순응이 있을리 없고 뜻이나 형편이나 경우로 긍정하게 하려든다면 이 또한 어느 정도 수긍이 가나 이런 중엔 귀신이 경문에 막히듯 하여 어쩔 수 없이 따라함도있을 것이니 그렇담 불만이 쌓일 것이고 생각이 꽉 막힌자 시키는대로 진리인것처럼 여겨 고분고분 따라함에 제 마음이 달가와서 하게 함이라 남이야 잇발이 삭건말건 제 일과 뜻펴기 위해 설탕을 먹여서 부리는 거와 같음이라°모든게 사필귀정이라.크게 신망이 두터운듯 하더라도 그 그릇(非)됨을 알고나면 때려 죽이려 덤벼 들리라°시간이 가치관을 전복시켜 是非를 뒤바뀌어 놓으니 변혁 시기마다 是是非非하여 是非라 하는 것이다. 세상에 몸담고 있는 것이 꿈결인가? 森羅物象에 서린(蟠) 氣運과 그 象하고 있는 뜻 및 諸般生命體가 그리는(圖) 꿈이 있으면 實로 아름다운 잠(休眠)이 있을 것 아닌가? 사람들이 여기길 미물이라 하는 매미는 굼벵이로 수년간의 道를 닦아 잠깐의 번데기처럼 休眠한 다음 환골탈태하여 창공을 나른다。대다수 창공을 나르는 곤충류들이 이와 같은 生涯를 이루나니 이처럼 삼라생명이 꿈같은 삶속에 있다가 잠깐의 휴면속에 들어 (쉬는 것처럼 보이지만 實은 계속 役事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있다가 환태하여 벗음이 이렇다하는 제모습이라는 모습을 드러낸다.모든 삼라物象이 소멸되고 죽으나 (作=지어진 것은 永遠할 없다) 제몸 이루어 왔던 것들이 뿔뿔이 흩어지더라도 아주 소멸되는 것이 아니요 여러 象으로 界를 달리하는 것이니 時差마다 行事마다 겪고 느낀게 願이 되어서 고(罟)가 되었으니 풀을려고 맞는 것끼리 모여서 다시 올 수 밖에 더있겠는가? 설령 맞는 것끼리만 올 형편이 못되면 맞지않는 것도 끼워넣어 썩여서 오기도 하고 맞지않는것 끼리만도 원을 푸는 곳으로 올수만 있다면 같이 모여서 우선 오고부터 보기로 하는 것이 삼라일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뱀도 사람이 되고자 할게 있을 것이고 거미 또한 사람되고 싶은 이 없을손가? 원에 의해 어떻게든 會合되어 오나 그 근원의 온바들이 다르고 그 원하는 바들이 다르니生涯에 萬端事緣이 일게 되니 곧 삶의 歷史인 것이다。無量授受來往因緣果業에 의해 갖갖은 고(罟)로되 돌아와서 벗고자 하는 모습이 그쭈 글상이던 우글상이던 아름다운 상이던 그 모습이요 그 活動象인 것이다 내 이 말씀을 欺瞞이라고 반박할 자 있을지 모르나 그 아니라는 근거(事理모음)는 또 무엇으로 귀신 논리 내세우는 것처럼 주어 섬길 것인가? 더러는 맞지 않는 것 끼리도 뭉쳐올 수도 있어 悔恨도 쌓이게 되고 아귀다툼도 있고해서 경쟁 사회라 하여 치고받듯 경쟁으로 발전이라 하는 것을 가져오게 하기도 하는 등등 구원 노릇도 하고 제合 노릇도 하는 등 각양각색의 벗은 모습이요 벗어나는 行事로 됨인 것이다。 나는 所任司命이 다하여 저쪽으로 갔다가 이쪽으로 되돌아 올적에 저꽃이 되련다 願을 지으면 그때의 氣質들은 同向의 性質 끼리 같은 主性分을 이뤄 꽃의 原素가 되면 꽃으로 태어날 것이고 다른 願등도 그렇다 할것이니 하필 삼라가 저쪽으로 가서 그 혼백이 흩어져 風烈水火土로만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니 그 어떤 먹이가 먹길 원함이 있으면 보시 하듯 갔다가 다시 그 보시해주는 이에 의해 먹는 성격體를 갖춰 돌고 돌아 올것 아닌가? 그 이 저의 윤회속에 있는 듯하여도 輪은 헛된 空이라。설령 그에 편승해 있더라도 그 모든 고(罟)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끼면 實로 벗어난 것이라。콩깍지에서 떨어진 알알이 굴르는 콩알처럼 띄밭에서 떼어낸 띄장처럼 떨어지고 벗어진 것으로 될것이다.그 生命의 성분이 여러가지라 여러가지로 뭉쳐온 것이 삼라 벗은 象의 모습인 것이다.빛과 어두움 같은 造化로써 갖은 형상을 그리게 되니 그 얽히는 얽는(갈등 覺의 점선면化 되는 神象) 時間이 모든 立體物事로 태어나는 것이다. 빛과 어두움의 드리움은 氣의 원소가 原素가 될것이고 그 氣가 가만히 있질 않고 놓았다 당겼다 하는 作用으로 无動에서 (충격을 받음 가만히 있는 것이 출렁이듯) 움직임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실제 무동이란 것은 無爲有動인 것이니 그 無爲有動이 卞化를 띄는 모습이란 뜻이다(어떠한 氣라 하는 것은 그 原素가 作用을 願하는 뜻의 뭉침인 것이니 그것을 생명이 이 것이다. 작용을 원하는 것은 내 보이기 위함인 것이니 實로 아무런 相이 없는 것은 宇宙에 存在치 않으니 생각이 또한 아무런 相이 없다하나 形容相인 것이니 그 相을 짓기 위해서 작용이 일어야 하고 그 작용을 원하는 뜻은 氣덩어리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아무相도 아닌것처럼 여기는 창공 허공이라도 이 相으로써 작용이 있게 되있는 것이다.여기서 相이라 하는 것은 내세울수 있는 理의 主된 見解를 말한다.그것은 그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 주장하는 것이다. 즉 말하자면 확실하게 고증할 수 있고 실증할 수 있는 것이니 저 콩은 두부의 原料란 뜻과 같음을 말함인 것이다) 所謂立體物事라 하는 것은 나타난 現相界의 時空이니 현상계의 시공은 거리(間)가 있게 되는데 이것은 无現의 源泉의 時空의 顚倒현상이란 뜻이니 시간이 맺침 공간이요 공간이 풀림 시간이란 논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엄청난 이론을 필자의 두뇌론 한두마디로 實證的 조명을 할 수 없는 것이니 哲人을 기다릴 뿐이다。잘못하다간 황당무궤한 것이 되어 종교의 함정에 빠진다 할것이다。 ◎ 疑問論 妄答論 時間에 대한 六甲이라 하는 것을 어떻게 적용한 것인가 徒是 알길이 없다。節氣의 거듭됨과 地球의 공전과 自轉의 반복을 봐서 運行이 一回로 똑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一回로 떨어진다는 표현은 한번 돌아가고 정지한다는 의미의 一回를 가리킴이다) 딱 들어맞게 떨어지는 것으로 봐서 육갑론의 十二支에 있어 月支와 時支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天地 생긴지 이미 오래라 어떻게 추적하여 生成年代를 알아서 甲空年을 알아 甲月을 定하고 甲日을 알아서 甲時를 정한단 말인가?(※ 우주의 나이는 무엇을 기준하여 定하는가?) 空間에 대한 十空(天干이라 하는 열가지 定한 명칭명분) 즉 甲空等類를 定한다는 것은 複號나 名分上으로 그럴듯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할 것이나 즉 숫자를 갖고 고유번호를 붙힌것 같이 고유 명사 및 그가 가르키고 있는 內在하고 있는 뜻이나 성질을 대변하는 것이라할 것이지만 흐르는 時間에 공간의 명분을 적용한다는 것은 좀 이심적은 面이 있다 하지 않을 것인가? 思料된다。 물론 이 또한 時空을 同一視하는 관점으로 놓았을 때는 適合하다 할런지도 모른다。옛 先賢이 흐르는 時間의 어느 분기점에서 甲時日月年을 세웠다면 그 以前은 꺼꾸로 환산해 들어갔다는 논리가 나온다 할것이니 대체로 濟元甲子가 언제인가? 그것은 常考할 수 없다는 것인가? 그때가 언제인지 불확실하니 年月日時에 甲等類의 名分을 配當하여 定한다는 것은 欺瞞에 가깝다 아니할 것인가? 물론 시간에 의해 공간이 형성되었다로 본다면 節氣나 지구의 공자전等을 봐서 藏支(※ 支 시간이라 하는 것을 열둘로 나눈 것에 대한 각각의 명칭 명문을 定하여 가르키는 것으로 子丑寅?……등이다)에서 干을 抽出한다한다면 그럴듯한 面이 있다 할것이나 이또한 어느 절기와 시간에다 대고 기준하여 干의 추출을 판단한단 말인가? 아침에 해뜨고 저녁에 해짐을 기준하는것인가? 太陽曆의 冬至點은 基準하는 것인가? 宇宙에 無方으로 퍼져 흐르는게 시간인데 어디에다 대고 기준을 設定한단 말인가? 필자의 淺識으로 徒是 알길이 없다 하리로다。그저 모르는 것은 전부다 神格化해서 귀신에다 덮어 씌우고 내 책임 내 허물 내 알 바 아니다 하고 회피하려든다면 무엇이 事理에 扶合되는 것을 궁구해서 찾아내는 面이 있다 할것인가? 中華의 사람 元祖라 하는 반고 氏가 桓國에서 나온 해를 元年으로 삼아 濟元甲子年이라 하였는가? 제원갑자가 九七年丁丑 기준 1015만 五九五四年前 甲子年月日時라 하다。熊氏族의 始祖 桓雄氏가 나온 해를 처음 甲子年이라 하였는가? 一說에는 예전에는 癸亥가 頭라 한걸 어느 문헌인가 볼것 같은데 환웅씨가 나온 해를 계해 頭年이라 하였는가? 나온 날을 甲日이라 하였는가? 己日이라 하였는가? 자욱자욱 발자국을 띌때 마다甲時乙時를 定하였는가? 시간에 대한 육갑의 그 근원 來歷 밝히기가 막연하다 아니하랴? 세상에 닭이 알에서 부화된지 이미 오래인데 무슨 숫대로 算定하여 닭의 나이를 알것이며 그 알이 닭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닭이 알이 아니면 하늘 어디에서 뚝 떨어지듯 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를 볼진데 시간은 없는 것이다。밀리는 토시 짝과 같을 뿐인 것이다。즉 제가 그 알을 낳고 그 알에서 제가 태어난다는 논리이니(이거이 모순에 의해 세상이 現象된다는 논리다) 알이 두개 세개 등 누수가 될 수 없는 것이다。(이것은 근원을 밝힌 다음 나중의 의 번식 후에 해당할 뿐인 것이다) (이 말씀은 一 合相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立長이 같은 空에 의함이란 뜻이니 空시의 활동작용이 그렇게 一時에 分列되 퍼지듯 定해져 있다는 뜻이니 그 一時라는 것도 작용에 의한(進化과정) 끊임없는 깨침의 표현이란 뜻이다) 여럿의 숫자 퍼지는 현상은 그 있음을 내보이기 위한 표현수단인 것이다.그러다가 소멸될 뿐이니 모여 지어진것(會作)은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니 언젠가는 다시 흩어지게 되고 또 卞貌하게 되 있는 것이다.오래된 공룡화석은 그 있었다는 표현이지 지금 그 종류가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또 그 化石도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어떤 生命體들의 시간적인 영역 활동이 一世界라면 그 一世界는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니(왜 영원할 수 없어 그 영원하다 하는 보자기가 모든 걸 뒤집어 씌우듯 싸가지고 있음 영원할게 아닌가? 한쪽에 치우친 주장을 내세우는 문맥을 흐르게 하는 사탄의 꾀임에 꼭두각시처럼 동조하지 말라는 또 다른 삿된 진리가 저멀리서 외치면서 다가오는 것만 같다。이래서 모든 내세우는 주장이 삿된 것이라는 것이다。그렇다고 내세우지 않으면 무엇이 있겠는가? 뜬 구름이 생겼다 소멸되듯 소멸되더라도 우선은 내세우고 보는 것이 시공 작용 世上현상인 것이고 번뇌가 되는 의문을 깨트려 없앰의 도달하는 길의 上策인 것이다) 잠깐의 번개 새김과 같아 微塵의 空間을 할애받는 것 만큼도 못하다는 것이다. 저만치 흘러가 있는 것을 逆追跡할 수 있는 方法이 있다면 혹 그 세계로 가볼 수 있다 할것이나 역시 그 世界의 立張으로 지어질 뿐이다. 아니라면 현실속으로 세계에서 시간적 의미의 다른 세계가 지어져 보여야 할것 아닌가? (혹 澤氏가 광명을 놓아 그렇게 지어 보였는지 모른다(빛과 어둠의 퍼짐은 시간의 활동작용으로써 그 시간 있음의 표현인 것이다)이 또한 빛속의 환상과 같은 世界일 뿐이다. 물론 이 세상이 그와 같아 역시 光陰속의 환상의 世界일수도 있을 것이다。이것이 꿈속같은 속이라면 마음먹기에 따라 장단과 제반게 메였다할 것이다) 공간적 의미의 다른 세계는 삼라만상이라 하면 될 것이다. 물론 시간적 의미의 세계도 그 공간적 의미의 세계에 의탁해 있다 한다면 말이 된다할 것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생각일뿐 현실적으로 나타난 삼라세계는 현실世界의 공간적 의미의 世界일 뿐인 것이다. 말하자면 저 이 쪽의 막힌 경계(의문의 界와 答의 界)를 탁 터논것이 현실세계라면 그냥 이렇게 궁글르는 것(흐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正觀 관점이라 할지 모른다。現象界는 늘상 그렇다는 것이니 혹자는 이런 현상을 껍데기라 하나 그럼 알맹이는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 그 근원을 찾을려 할 필요없이 그 근원이란 것은 원래라는 뜻도 없지만) 원래 없는 것이다로 여기면 닭이 알을 낳던 알이 닭이 되던 生滅의 번복이니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보여 그러함이 계속 이어져 영원한 것처럼 보이나 늘상이란 뜻이니 뭐가 뭣이 됐던 實로 그러함을 그러하다 하는데 무슨 탈잡을 것이 있을 것인가를 말 함인 것이다。돌고 돌아 윤회인 걸 먼저란 뜻의 점을 찾아 세울려 하니까 흐르는 굴레를 정지시키듯 분란이 이는 것이다。분란이 인다는 것은 그 관여하여 저마다의 흐름을 제뜻에 맞추기 위하여 소멸시키겠다는 것이니 그것이 因果의 업이 된다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먼저와 나중이란 시간 개념을 이런 뜻에 빛추어선 버리라는 것이다。그래서 未知의 망령된 생각을 규합하지 말라는 것이다。쓸데없는 삿된끝이 요구하는 함정에 떨어지고 조건에 걸리기 쉽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