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 차오, 안녕 내 사랑
이학성
밀바의 음성으로는 오래전 선배의 옛 자취방에서 처음 들었다.
발목이 잠기도록 폭설 퍼붓는 밤,
늦도록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가 어지럽다.
벨라 차오 안녕 내 사랑, 깎아지른 능선을 파르티잔의 행렬이 넘고 있다.
형편없이 저들의 군화는 낡았다.
헤진 모포로 감쌌어도 산골짝의 한기가 품속을 파고든다.
대열 끝자락에 형의 원수를 갚으려 소년병사가 따르고 있다.
장전된 경기관총 한 자루가 총구를 숙인 채 그의 어깨에 힘겹게 걸려 있다.
형은 마틸도 전선에서 두 발의 총탄을 맞았다.
불운하게도 모습을 감춘 저격병의 조준은 빗나가지 않았다.
첫 번째 탄환이 허벅지를 관통했고
휘몰아치는 冬季의 칼바람처럼 둘째 탄환이 가슴복판을 꿰뚫고 지나갔다.
피로 얼룩진 형의 일기장이 소년의 품에 들어 있다.
대오가 느려지는 건 시야를 가리는 지독한 눈보라 탓,
얼어붙은 계곡을 건너뛰며 청년대원이 휘파람을 분다.
벨라 차오 안녕 내 사랑, 나 죽으면
그대 집 앞마당 떨기 꽃으로 피어나리.
붉은 꽃가지 꺾어 그대 향기로운 머리에 꽂으리.
소년이 노래를 익힌 건 넉 달 전 산악전투교과의 첫 수업시간,
대원의 꿈을 이뤄냈지만 오늘밤 소년은
겹겹의 가파른 협곡을 해뜨기 전까지 가로질러야 한다.
그러고 나면 어머니께 편지를 띄울 수 있다.
벨라 차오 안녕 내 사랑, 그리운 어머니 당신께 가고 있어요.
식구들과 나들이 가던 몽텔로드 언덕이 저기 지척이랍니다.
아마도 행운이 우릴 편들어서
다가올 이번 봄은 당신과 맞이하게 될 듯합니다.
끈질기게 뒤좇는 무리가 간격을 좁히려 따라붙고 있으나
입술이 검게 부르텄어도 늙은 대장의 휘파람 소리에
굴욕과 복종이 끼어들 틈은 없다.
벨라 차오 안녕 내 사랑, 자나 깨나 당신을 생각한다오.
우리 아이들을 잘 돌봐주오.
모두의 자유와 앞날을 위해 택할 수 있는 건 이 길뿐이었다오.
지금은 아니더라도 곧 당신을 안을 수 있기에
첩첩산간의 적막과 허기쯤은 조금도 두려울 게 없다오.
누군가 멀리 고향땅에서 저들을 기다리고 있지만
작정한 듯 세상의 모든 흔적들을 지우겠노라 밤새껏 퍼붓는 눈,
숨죽인 나뭇가지들 위에도 저들의 어깨 위에도 공평하게 내려쌓인다.
잠을 떨친 어느 새벽은 눈부시도록 맑고 또렷했던가.
그 밤의 끝자락에서 선배가 말했다.
밀바가 열창하건 이브 몽탕의 감미로운 저음이건
노래의 선율 속에서 저벅저벅 눈밭을 울리는
행군 소리가 들린다면 그 사람은 빼어나게 훌륭한 귀를 보유하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0년 10월호 발표
이학성 시인
1961년 경기 안양에서 출생.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여우를 살리기 위해』, 『고요를 잃을 수 없어』가 있음.[출처] 벨라 차오, 안녕 내 사랑 - 이학성 ■ 웹진 시인광장 2020년 10월호 신작시 l 2020, Octoberㅡ통호 제138호 l Vol 138|작성자 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