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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뮈엘 베케트
1. 개요
20세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실험 문학의 대표 소설가, 그리고 시인이다.
본명은 새뮤얼 바클리 베킷(Samuel Barclay Beckett)으로 사뮈엘 베케트라는 이름은 본명을 프랑스어로 읽은 것이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근현대 문학의 대표적인 거장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사이)/(pause) 를 처음 사용한 극작가이기도 하다.
2. 생애
1906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3]에서 태어났고,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프랑스 문학과 이탈리아 문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로 가서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한 직후인 1920년대 후반, 그는 모교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영어 강사로 취직해 활동했다. 그때, 그는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던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을 받아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 관한 비평문을 첫 공식적인 글로 발표했고, 1930년에는 자신의 첫 시집 <호로스코프>를, 이듬해 1931년에는 비평집 <프루스트>를 펴냈다. 이후 그는 아일랜드에 귀국하고 나서 자신이 다녔던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프랑스어 강사로 활동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첫 장편소설 <그저 그런 여인들에 대한 꿈>[4]을 쓰고, 1934년 첫 단편소설집 <발길질보다 따끔함>을, 1935년 시집 <에코의 뼈들 그리고 다른 침전물들>을, 1938년 장편소설 <머피>를 출간하며 작가로서 발판을 다졌다.
프랑스로 옮겨 정착한 것은 1937년의 일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일랜드인로서는 드물게 프랑스 레지스탕스로서 전쟁을 치르고[5],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소설 3부작인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를 발표해서 화제를 모았다. 그 사이 1952년에는 그 유명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발표해 문학계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1961년에는 구두점을 전혀 넣지 않은 산문 <어떤 식으로 그것이>를 발표했고, 말년에는 어둠 속에서 입술만이 강조되어 보이는 희곡 <내가 아니다>를 집필했으며, 196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 아일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프랑스에서 살다가 1989년에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3. 대표 작품
3.1.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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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의 종말(Fin de Partie / Endgame)[6] (1957)
오, 행복한 날들(Happy Days) (1963)
3.2. 소설
발길질보다 따끔함(More Pricks Than Kicks) (1934)
머피(Murphy) (1938)
몰로이(Molloy) (1951)
말론 죽다(Malone meurt) (1951)
이름 붙일 수 없는 자(L'innommable) (1953)
그게 어떤지(Comment c'est) (1964)
그저 그런 여인들에 대한 꿈 (Dream of Fair to Middling Women) (1992)
3.3. 시집
호로스코프(Whoroscope) (1930)
에코의 뼈들 그리고 다른 침전물들(Echo's Bones and other Precipitates) (1935)
시들(Poèmes) (1968)
3.4. 비평
프루스트(Proust) (1930)
세계와 바지(Le monde et le pantalon)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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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로 되어 있는 3부작 소설 《몰로이》, 《말론은 죽다》, 《명명하기 힘든 것》으로 주목받고, 《고도를 기다리며》로 프랑스 문단과 극계에서 크게 호평을 받았다. 1961년에 구두점이 전혀 없는 산문인 《어떤 식으로 그것이》, 1963년에는 《아! 아름다운 나날》 등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그 작품들을 통하여 세계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의미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적인 인간의 조건을 극히 인상적인 언어로써 허무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후, 《승부의 끝》, 《마지막 테이프》, 《행복한 나날》 등 종래의 연극 개념을 뒤엎는 독창적인 희곡을 발표하여 전후의 새로운 연극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주제는 《고도》 이후 변치 않는 인간의 일의 무의미함과, 서구적인 합리주의에 의한 세계의 붕괴인데, 신선한 문체와 뛰어난 연극적 감각으로 정평이 나 있다. 후기작으로 어두운 무대에 입술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독백하는 특징이 있는 희곡인 《내가 아니다》가 있다. 196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4. 여담
프랑스에서 살 때 어린 앙드레 더 자이언트를 통학길까지 태워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증언들을 확인해보면 앙드레만 태워줬던 건 아니고, 평소에도 통학하는 마을 아이들을 태워줬다고. 출처.
고도를 기다리며 등 작품 여럿을 모국어 대신 후천적 언어였던 프랑스어로 집필했다. 모국어로 글을 쓰면 본의 아니게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맥락에 모호성이 생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말년에는 독일의 지원을 업고 텔레비전 예술희곡들을 다수 시도했다. 이에 대해 질 들뢰즈가 '소진된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논평한 것이 또 유명하다. 단순히 '피로한' 인간이라는, 에너지가 없는 인간이 아니라 더 이상 창조해낼 가능성이 사라진 '소진된' 인간을 다루기 위해 그가 언어에 대해 그 기초라고 주장한 랑그의 개념들이 다각화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한 독특한 철학적 논평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적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죽을 때까지 단테의 신곡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애독하였다고 한다.
"도전 했는가? 실패했는가? 괜찮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나은 실패를 하라." 라는 명언을 남긴 사람이기도 한다
1961년 9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으며 결혼 당시 아내가 60대였기에 자녀는 없었다. 아내는 베케트가 죽기 몇 개월 전 향년 89세로 먼저 사망했다.
노년에 들어 멋지게 주름살이 든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