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귀꽃
우리 둘 사귈까요 그 남자 말을 걸 때
쌀쌀맞게 고개 돌려 붉어진 얼굴빛이
지난 날 나를 본 듯해 멋쩍어서 웃는다
시월 가네
노을에 내 그림자 가만히 보듬으면
지난날 밑돌 받쳐 돌다리 건너왔던
푸르던 두 어깨마저 어느 사이 기울었다
가을 산 숲 사이로 바쁘게 들어서면
바람이 물감 풀어 슥슥 삭 환칠하다
참억새 하얀 붓 하나 내 손에 쥐여주고
헌 신발 벗어두고 안부 총총 물어본 뒤
돌아서 손 흔들며 가뿐한 걸음으로
생략된 간다는 말 대신 찬물 소리 거둬 간다
형산강 어귀에서
노모가 기다리는 푸른 물 강촌 너머
생각 갈피 못 잡고 미로 걷듯 맴돌아
허투루 떠돌면서도 먼발치서 바라봤지
이렇게 늦게 와서 한나절 앉아 쉬면
손 작은 그 아이가 잡던 재첩 반짝이고
반가운 파랑새와도 가만 눈길 맞추지
겁 없이 펴 든 날개 그런 건 광기일 뿐
유령의 행렬 같은 멈춰 선 길 위에서
바다로 너 떠나는데 나 옛집으로 돌아갈까
꽃피는 바다
한 공간 못 머물고 언제나 진행형을
미처 감추지도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때로는 해무 속으로 떠돌기만 했었지
발길질 아득한 곳 여기까지 닿기 위해
바람의 불협화음 가슴으로 받아치다
시퍼런 매질까지도 끌어안고 뒹굴지
수평선 몰고 와서 모래톱에 부려놓고
꿀잠 든 갯바위에 소금꽃도 일깨워
수없이 피고 지면서 꽃씨 한 톨 둔 적 없다
- 시집 『하루, 띄다』 책만드는집,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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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수 시인 시집 『하루, 띄다』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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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59
24.05.0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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