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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계 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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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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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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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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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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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5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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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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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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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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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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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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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 1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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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1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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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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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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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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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3~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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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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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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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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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1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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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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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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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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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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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정색은 남자를, 청색은 여자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주 요 인 물
이름 |
부 |
모 |
생년 |
몰년 |
국 명 |
비 고 |
거리(居利) |
파사 |
가리(백) |
15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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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박제상4대조 |
골치(骨夂) |
허루 |
흘고 |
121 |
206.12 |
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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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君己) |
신공 |
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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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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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을(君乙) |
대수 |
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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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冬 |
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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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문(吉門) |
하루 |
장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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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 |
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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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원(吉元) |
길문 |
경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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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10 |
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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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노(奈老) |
남해 |
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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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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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제(摩帝) |
월복 |
홍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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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 |
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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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나(馬知那) |
일지 |
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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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 |
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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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明宣) |
유리 |
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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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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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다(毛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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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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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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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례(美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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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애례 母 |
사을나(沙乙那) |
일지 |
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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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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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勢漢) |
알지 |
아호(아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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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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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阿世) |
남해 |
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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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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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閼智) |
호공 |
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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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 |
신라 |
김씨 시조 |
윤공(尹公) |
남해 |
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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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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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생(伊利生) |
대수 |
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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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일성 母 |
일지(日知) |
대노 |
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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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4 |
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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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례(支所禮) |
칠공 |
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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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5 |
신라 |
지진내례 父 |
토해(吐解) |
다파라군 |
성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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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 |
신라 |
석씨 시조 |
한제(閑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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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제 |
102 |
190.2 |
신라 |
운제 막내딸 |
허루(許婁) |
대노 |
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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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12 |
신라 |
사성 父 |
허을(許乙) |
허루 |
달문 |
1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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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을공 父 |
후복(厚福) |
유리 |
아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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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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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正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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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11 |
가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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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宝日) |
비가 |
정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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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8 |
가야 |
정견 장자 |
주일(朱日) |
비가 |
정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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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
대가야 시조 |
청예(靑裔) |
비가 |
정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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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
금관 시조 |
경문(景文) |
보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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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 |
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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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정색은 남자를, 청색은 여자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元年 二月 上與惠后 親祀祖廟 大享骨門
원년(A.D.126) 2월 왕과 혜후(惠后, 아혜)가 친히 조상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골문(骨門, 종실)에게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용어≫ 1. 대향(大享) : ①종묘(宗廟)에서 사맹월(四孟月)의 상순(上旬)과 납일(臘日)에 지내는 제사(祭祀)와 사직(社稷)에서 정월(正月) 첫 신일(辛日)에 풍년(豊年)을 빌며 지내는 제사(祭祀) ② 중춘(仲春)ㆍ중추(仲秋), 첫 무일(戊日)과 납일(臘日)에 지내는 제사(祭祀)
2. 대향(大饗=大享) : 특별한 경축행사에 임금이 베푸는 성대한 잔치
以市老爲伊伐飡 阿休爲稟主
시노(市老)를 이벌찬(伊伐飡, 신라 때의 최고 관리, 진골만이 하는 벼슬로 신라 17관등제와 별도로 제정)으로, 아휴(阿休)를 품주(稟主, 신라 최고의 행정기관인 집사부(執事部)의 전신으로 조조(租調)의 출납을 담당하던 재정기관)로 삼았다.
許婁爲中外軍事 阿明爲軍母
허루(許婁)를 중외군사(中外軍事)로, 아명(阿明)을 군모(軍母)로 삼았다.
≪견해≫ 이벌찬과 품주, 장군(또는 군사)과 군모는 부부사이다.
三月 上與惠后 巡撫京外州郡 發倉賑貧 曰 “三皇之世 民無盜賊 而皆自富裕 太君以來 四方多事 民多抵罪 朕深憐之 其除死罪 而原之”
3월 왕과 혜후가 서울 밖의 주군을 돌며 위로하고, 창고를 열어 가난한자들을 구휼하며 말하기를 “삼황(三皇, 삼국유사에 의하면 삼황의 첫째가 남해차차웅이라고 함)이 다스릴 때는 백성들 중에 도적이 없었는데 백성들이 스스로 부유함으로부터다. 태군(太君, 토해)이래로 사방에서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많은 백성들을 저죄(抵罪, 죄의 경중에 따라 알맞게 형벌을 받아 때움)해야 하므로, 짐(朕)이 심히 가엾이 여겨 죽을죄를 제외하고는 용서하겠다”고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년 기사
2년 2월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주군을 순행하여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옥에 갇힌 죄수를 조사하여 두 가지의 사형 죄에 해당하는 자가 아니면 모두 석방토록 하였다.
≪견해≫ 삼황(三皇)에는 3명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남해차차웅이 첫째, 유리이사금이 둘째, 탈해이사금이 셋째가 되어야 하나 문맥상 탈해이사금이 탈락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신라본기는 남해차차웅과 자충을 같은 사람이라 하였으나, 권등성경의 팔린통빙고에 의하면 다른 사람으로 보았다.
四月 以支所禮爲兵官 使屬中外
4월 지소례(支所禮)를 병관으로 삼아 중외(中外)에 속하여 부리도록 하였다.
六月 稟主阿休奏 曰 “妾兄阿世 乃眞骨之精也 神道多艱 被奸受汚 今在自淨 情甚可矜 願召宮中 以補權妻 何如” 上曰 “阿世女豪也 非許婁則不可” 命爲中外上軍母 使吉 鮑祠
6월 품주 아휴(阿休)가 여쭈어 말하기를 “첩의 언니 아세(阿世)는 진골(眞骨, 부모가 왕과 왕비)의 으뜸입니다. 신도(神道)에 많은 어려움이 있고, 요사스러움을 입고 더럽힘을 받았으나, 지금은 자정(自淨, 스스로 깨끗해짐)하고 있으나 인정상 심히 가엾습니다. 원하건데 궁 안으로 불러 권처(權妻, 후궁의 한 종류, 배우자를 따로 정하지 아니함)의 보직을 맡기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세는 여걸이다. 허루가 아니면 불가하다.”라고 하고 (아세를) 중외상군모(中外上軍母)로 삼고 포사(鮑祠, 포석사)에서 길한일(吉, 즉위식 혹은 결혼식, 여기서는 허루와의 결혼)을 하도록 하였다.
九月 沙伐副君成公與伏亥 入朝
9월 사벌(沙伐) 부군(副君) 성공(成公)과 복해(伏亥)가 입조(入朝)하였다.
≪견해≫ 성공과 복해는 부부 사이다.
行大場 于一善州
일선주(一善州)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견해≫ ‘行大場’이라는 문장은 9월(혹은 10월)에만 등장한다. 혹은 대장연(大場宴)이라고도 한다.
十一月 上與惠后史省 入奈歷 護山梯病
11월 왕과 혜후와 사성(史省)이 내력(奈歷)으로 들어와서 산을 지키며 병의 실마리를 잡았다.
≪견해≫ 삼국사기 잡지(雜志) 제일(第一) 제사(祭祀)편에 의하면 내력(奈歷)은 진한(辰韓) 6부 가운데 하나인 습비부(習比部, 명활산 고야촌)에 있다고 하였다.
十二月 遣支所禮 問西路將士
12월 지소례(支所禮)를 보내어 서로(西路)의 장졸에게 묻도록 하였다.
韓那生 許婁子穀公 賜米
한나(韓那)가 허루(許婁)의 아들 곡공(穀公)을 낳았다. (왕이) 쌀을 내렸다.
二年 正月 上與惠后 受朝 奈歷
2년(A.D.127) 정월 왕과 혜후가 내력(奈歷)에서 조회를 받았다.
三月 置南北桃 以爲骨仙集場
3월 남도(南桃)와 북도(北桃)를 설치하여, 골선(骨仙)들이 모이는 장소로 하였다.
≪견해≫ 북도(北桃)라는 명칭은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以許婁爲伊伐飡 阿世爲稟主
허루(許婁)를 이벌찬으로, 아세(阿世)를 품주로
以月瓠爲西路軍事 妻以達門 謁長爲朶山城主 妻以彡月
월호(月瓠, 호공의 아들)를 서로군사(西路軍事)로 하여 달문(達門)을 시집보내고, 알장(謁長)을 타산성주(朶山城主)로 하여 삼월(彡月)을 시집보냈다.
五月 月福太子薨 葬以太公禮 太子先神之摩腹子也 好神仙 遊四方神山 北至勾利 南至海上 得道以歸 以育兩門 有子女八十二 孫不知數 上與惠后 爲之幸其宅 仙徒會集者萬衆 上臨問 曰 “大父上昇 誰可繼統乎” 太子曰 “吾子皆劣不足 以傳唯齊居 可以統仙” 於是仙統遂歸齊居
5월 월복(月福)태자가 죽어 태공(太公)례로 장사지냈다. 태자는 선신(先神)의 마복자(摩腹子)다. 신선을 좋아하여 사방의 신산을 유람하여 북으로는 구리(勾利)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도(道)를 얻어 돌아와 양문(兩門)을 길렀다. 자녀가 82명이고 손자는 몇 명인지 알 수 없다. 왕과 혜후가 월복태자를 다스리고자하여 그 집에 행차하였는데, 선도(仙徒)의 회집(會集, 모임)에 많은 백성이 모였다. 왕이 대면하여 말하기를 “대부(大父)가 하늘로 올라가면(上昇) 누가 이어 통솔하느냐”라고 묻자 태자가 말하기를 “나의 아들들은 모두 뒤떨어지고 부족하니 오로지 제거(齊居)에게 전하여 신선을 통솔하게 함이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신선들을 통솔함이 제거에게 돌아갔다.
九月 月瓠與河石等 大破蛙山 燕支出降 坑扶余守卒二百人 扶余卒皆取河石軍之妻女 致怒於軍 故被禍慘矣
9월 월호(月瓠)와 하석(河石)등이 와산(蛙山)을 크게 깨뜨렸다. 연지(燕支)가 나와서 항복하였다. 부여(扶余, 백제)의 수비병 200명을 구덩이에 묻었다. 부여의 병사들은 모두 하석(河石)군의 처와 딸을 취하여, 군대에 분노가 이른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입은 재난이 참혹하였다.
≪비교≫ 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10년, 19년, 20년의 기사
10년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백 명을 그 곳에 남겨 거주시키며 수비하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빼앗았다.
19년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와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20년 9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여 와산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에서 와서 살고 있던 2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2. 백제본기 다루왕 39년, 48년, 49년 기사
39년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군사 200명을 남겨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신라에게 패하였다.
48년 10월 또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49년 9월 와산성이 신라에게 회복되었다.
≪견해≫ 탈해이사금의 후반부 기사와 섞여있으며, 백제의 다루왕 시기와 연결된다.
十一月 上與惠后 入奈歷 禱天
11월 왕과 혜후가 내력(奈歷)에 들어와 하늘에 기도하였다.
惠后生女翁君 上洗而名之
혜후가 딸 옹군(翁君)을 낳았다. 왕이 씻겨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견해≫ 아기를 씻는 것은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있다.
三年 正月 上與惠后 受朝 高井
3년(A.D.128) 정월 왕과 혜후가 고정(高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三月 許婁請免 不許
3월 허루가 면직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以赤旨爲卞韓兵官 君己爲京都兵官 歸公爲中外兵官
이 때문에 적지(赤旨)를 변한(卞韓)병관으로, 군기(君己)를 경도(京都)병관으로, 귀공(歸公)을 중외(中外)병관으로 삼았다.
阿世生 許婁子倉公 賜米視兒
아세가 허루의 아들 창공(倉公)을 낳았다. (왕이) 쌀을 내리고 아기를 살펴보았다.
五月 上與惠后史省 幸一善州 犒軍 州干克市 進樂浪玉器 于后及史省 史省不受 曰 “金玉非寶也 良臣爲寶 汝若愛民忠君 何用玉乎” 克市汗出 惠后聞之 曰 “朕爲天子 而德不如史省” 亦却其器
5월 왕과 혜후와 사성이 일선주(一善州)에 행차하여 군사들에게 음식을 보내어 먹였다. 주간(州干, 지방의 벼슬이름) 극시(克市)가 낙랑(樂浪)의 옥그릇을 (혜)후와 사성에게 바쳤다. 사성이 받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금과 옥은 보배가 아니라 좋은 신하가 보배로다. 네가 만약 백성을 사랑하고 임금에게 충성한다면 옥이 무슨 소용이겠느냐”라고 하였다. 극시가 땀을 흘리며 나갔다. 혜후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짐은 천자(天子)다. 덕이 사성과 같지 않다”라고 하며 역시 그 그릇을 물리쳤다.
≪견해≫ 낙랑이라는 명칭은 기림기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기림기에 우두주에서 낙랑과 대방에게 공물을 바쳤는데, 백제와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갖기 위해 전쟁을 한다고 하였다(근초고왕과 고국원왕의 직접적인 전쟁원인이다). 추모경에 의하면 남옥저의 땅이라고 하며, 아슬라․장령이라는 명칭과 같이 등장한다. 낙랑에 철기병(鐵騎兵)이 등장하기도 하며, 대방이 등장하는 것은 기림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八月 推火草八等合 加耶兵 欲納良刀 于卞山 吉門迎 戰于黃山津口 大破之 虜獲千餘 乃進其爵 爲波珍飡
8월 추화(推火)와 초팔(草八) 등을 합한 가야(加耶)의 병사가 양도(良刀)를 바치기를 바라며 변산(卞山)으로 왔다. 길문(吉門)이 황산(黃山)의 나루터 입구에서 맞이하여 싸워 크게 깨뜨려, 사로잡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이에 작위가 파진찬에 나아갔다.
≪비교≫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21년 기사
21년 8월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를 상대로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죽였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여 그 전공에 해당하는 상을 주었다
≪견해≫ 1. 추화(推火)국은 129년 2월 기사에 신라영토로 등장하므로, 이 때에 병합된 듯 하다. 155년 8월 기사에 초팔(草八)국은 가야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등장하고, 다시 내해이사금 포상8국의 란(亂)중에 8국 중 1국으로 등장한다. 이후로 초팔국의 이름이 사라진다. 포상8국의 란(亂)은 백제와 공모하여, (대)가야를 치려하였고 (대)가야가 구원을 요청하여 이루어진 전쟁이다.
2. 195년의 기사에서 대도(大刀)와 대수(大樹)가 일지(日知)를 견제하였다고 하였다. 대도와 양도(良刀)는 형제관계인데, 일지가 양도에게 원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9월의 기사와 연결된다.
九月 上與阿利大母日知神君 會于境上
9월 왕과 아리(阿利)대모와 일지(日知)신군이 국경에서 만났다.
≪견해≫ 아리와 일지는 모자(母子)관계이고, 파사와 일지는 동복(同腹)형제이다. 파사와 왕위를 다툰 사람은 일지(日知)인 것 같다.
十一月 良刀南奔 阿那加耶奉使請罪
11월 양도(良刀)가 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아나(阿那, 아라)가야가 사신을 받들어 죄를 청하였다.
≪견해≫ 양도가 남쪽으로 도망쳐야 하는 이유는 일지의 청을 파사가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十二月 一直太守 大長神君薨 以白公爲之代 賜其妻宿其 紫花衣白大馬
12월 일직(一直)태수 대장(大長)신군이 죽었다. 이런 까닭으로 백공(白公)을 대신하게 하였다. 백공의 처 숙기(宿其)에게 자화의(紫花衣)와 백대마(白大馬)를 내렸다.
四年 正月 上與惠后 受朝 南桃 宴太君彡君 於高井
4년(A.D.129) 정월 왕과 혜후가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고정(高井)에서 태군(太君, 토해)과 삼군(彡君)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견해≫ 삼군(彡君)은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二月 駒令君珍花 入朝修貢
2월 구령군(駒令君) 진화(珍花)가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以許婁子加良爲護城大師 以發良爲京都軍事 甘生爲軍母 乾水爲一善州太守 克市爲推火太守
허루(許婁)의 아들 가량(加良)을 호성대사(護城大師)로, 발량(發良)을 경도(京都)군사로, 감생(甘生)을 (경도)군모로, 건수(乾水)를 일선주(一善州)태수로, 극시(克市)를 추화(推火)태수로 삼았다.
三月 許婁爲角干 掌中外兵馬事 爲祖主 阿名爲大軍母
3월 허루(許婁)를 각간(角干)으로 삼아 중외병마사(中外兵馬事)에 관한 일을 맡기고, 아세(阿世)를 조주(祖主)로, 아명(阿名)을 대군모(大軍母)로
齊居爲伊伐飡 遐利爲稟主
제거(齊居)를 이벌찬으로 삼고, 하리(遐利)를 품주로 삼았다.
四月 日知神君薨 于卞山 阿利大母請歸葬 上問於許婁 許之 神君失志以來 沈爵 得疾不起 上痛哀之 葬以尼今禮 入蛇陵門 殉之者甚衆 加良禁之不得
4월 일지(日知)신군이 변산(卞山)에서 죽었다. 아리(阿利)대모가 (제자리로) 돌아와서 장례를 치러주기를 청하였다. 왕이 허루(許婁)에게 물어 허락하였다. 신군(神君)은 뜻을 잃은 이후로 술잔에 빠져들어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왕이 애통해하며 니금례(尼今禮)로 장사지냈다. 사릉문(蛇陵門)에 들어가 따라죽으려는 자가 심히 많았으나 가량(加良)이 따라 죽는 것을 막아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견해≫ 일지신군이 묻힌 곳은 사릉(蛇陵)이고, 사당은 변산(卞山)에 세웠다. 길문이 황산진구(黃山津口)에 만난 가야의 병사들은 변산에 일차 집결하였으므로, 가야군을 움직인 이는 일지신군일 가능성이 높다. 일지신군과 가야는 어떤 관계일까?
復以爲太聖 居大井 許婁爲太聖私臣 呼以聖父
다시 아리(阿利)를 태성(太聖)으로 되돌리고, 대정(大井)에서 살게 하고, 허루를 태성사신(太聖私臣)으로 하여 성부(聖父)라고 불렀다.
≪견해≫ 태성(太聖)은 왕의 어머니를 부르는 존호로, 시기마다 호칭이 달라진다. 후에 허루의 성부(聖父)라는 명칭이 길문과 마제의 반란의 명목이 된다.
五月 置五路軍事 九州太守 命五路 皆娶聖父女爲軍母 以生里妻西路月瓠 干時妻南路吉門 夂多妻水路歸公 河馬妻北路摩帝 水酒漢烏 樂浪那嘉 悉直猪治 爲第一藩 覆岩弩乙知 召羅方我 爲第二藩 一直白公 一善乾水 爲第三藩 卞山晉公 推火克市 爲第四蕃
5월 5로 군사와 9주 태수를 두었다. 5로 모두 성부의 딸(허루가 그 어머니들에게 장가들어 양녀로 삼았음)에게 장가들도록 명하여 (성부의 딸을) 군모로 삼았다. 생리(生里)는 서로 월호(月瓠)의 처로, 간시(干時)는 남로 길문(吉門)의 처로, 치다(夂多)는 수로 귀공(歸公)의 처로, 하마(河馬)는 북로 마제(摩帝)의 처로 삼게 하였다. 수주(水酒) 한오(漢烏), 낙랑(樂浪) 나가(那嘉), 실직(悉直) 저치(猪治)는 제1번(藩, 왕의 영토, 변방을 지키는 왕가의 부용국)으로 삼고, 복암(覆岩) 노을지(弩乙知), 소라(召羅) 방아(方我)는 제2번, 일직(一直) 백공(白公), 일선(一善) 건수(乾水)는 제3번으로, 변산(卞山) 진공(晉公), 추화(推火) 극시(克市)는 제4번으로 삼았다.
≪견해≫ 5로 군사라고 하면서 4로밖에 안 보이는 것은 경로(京路)군사가 빠졌기 때문이다.
六月 太聖與聖父阿世 享上及惠后 于夏宅 以聖父宗妻加其 爲五品大母 私妻達元月門 爲三品大母 授紫花大衣 以聖父子加也 爲殿中郞
6월 태성(太聖, 아리)과 성부(聖父, 허루)와 아세(阿世)가 하택(夏宅)에서 왕과 혜후를 위하여 잔치를 하였다. 성부의 종처(宗妻) 가기(加其)는 5품 대모로 삼고, 사처(私妻) 달원(達元)과 월문(月門)은 3품 대모로 삼아 자화대의(紫花大衣)를 주었다. 성부의 아들 가야(加也)는 전중랑(殿中郞)으로 삼았다.
七月 吉門與發良妻甘生 逃歸卞山 初甘生與吉門 有私願 歸于吉門 聖父不許 而妻發良 甘生乃誘干時 曰 “我夫骨好而性柔 汝夫骨賤而性急 我當爲汝易之” 干時年幼而順良 以其言告于吉門 吉門大喜 遂與發良會飮 因其醉 使干時薦之 發良酒醒 而悔之 謝罪于吉門 吉門笑曰 “入枕之花不貪 非丈夫也 旣貪之花 反之非豪傑也 兄妻雖老 與我有私 可以易之” 發良曰 “我旣犯罪 敢不如命 但恐聖父不許” 吉門乃與甘生 不告而去 聖父大怒 欲伐吉門 時達門有寵於聖父 而泣救之 史省亦止之 乃以干時爲京路軍母 行吉 鮑祠 而命吉門反甘生 甘生托病不歸 自爲吉門妻
7월 길문(吉門)과 발량(發良)의 처 감생(甘生)이 변산(卞山)으로 도망하여 결혼하였다. 처음에 감생과 길문은 사사로이 좋아하여 길문에게 시집가기를 원하였다. 성부가 허락하지 않고 발량에게 시집보냈다. 감생이 간시(干時)를 속이어 말하기를 “나의 남편(발량)은 혈통이 좋고(발량의 부모 모두 혁거세와 알영의 자식임) 성품이 부드러운데 너의 남편(길문)은 핏줄이 천하고 성품이 급하니 내가 마땅히 너의 남편을 바꾸어 주겠다”라고 하였다. 간시는 나이가 어려서 착하고 어질어, 그 말을 길문에게 알리었다. 길문이 크게 기뻐하며, 발량과 만나서 함께 술을 마셨다. 취기로 인하여 간시를 발량에게 천거하였다. 발량이 술이 깨자 후회하며 길문에게 사죄하였다. 길문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여자와 동침하는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은 장부가 아니다. 이미 여자와 동침하였으므로 되돌리려 하는 것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형의 처(감생)가 비록 나이가 많으나 나와 더불어 사사로운 감정이 있으니 바꾸는 게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발량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죄를 저질렀다. 감히 명령을 거절할 수 없다. 다만 성부(聖父)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 두렵다.”라고 하였다. 이에 길문이 감생과 더불어 (성부에게) 알리지 않고 가버렸다. 성부가 크게 화를 내며 길문을 베려하였다. 당시 달문(達門)은 성부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울면서 길문을 구하였다. 사성(史省) 또한 (길문을 베려는 것을) 그치게 하였다. 이에 간시를 경로군모(발량의 처로 삼았다는 뜻)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고, 길문에게는 감생을 되돌리도록 하였다. 감생을 병을 핑계로 돌아가지 않고 스스로 길문의 처가 되었다.
聖父奏曰 “臣之子女 恃臣之功 而荒亂者 願上治之無赦” 上曰 “朕之兄弟也 雖亂何妨”
성부(聖父)가 아뢰어 말하기를 “신의 자식들이 신의 공로를 믿고 주색에 빠져 어지럽힘을 일으켰으니 왕께서 다스려 사면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성부의 자식들은) 나의 형제와 다름없다. 비록 어지러움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어찌 거리낌이 있겠는가.”
八月 行大嘉俳 于觜山
8월 자산(觜山)에서 대가배(추석)를 행하였다.
≪견해≫ 자산(觜山)은 길문의 할머니 이름이기도 하다.
以史省爲雌神 行吉 奈乙
이로써 사성(史省)을 자신(雌神)으로 삼고, 내을(奈乙)에서 길한 일(여기서는 즉위식)을 행하였다.
十月 樂浪太守那嘉與其妻阿曼 入朝 獻宝弓神器革囊 賜爵大阿飡 以授紫衣
10월 낙랑태수 나가(那嘉)와 처 아만(阿曼)이 입조하여 보궁(宝弓)과 신묘한 그릇 가죽 주머니를 바쳤다. 대아찬의 벼슬을 내리고 자주색옷(紫衣)을 수여하였다.
≪견해≫ 내려준 옷의 색깔과 벼슬의 높이가 관계가 있다.
五年 正月 上與惠后史省 受朝南桃
5년(A.D.130) 정월 왕과 혜후(惠后)와 사성(史省)이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二月 大光星出 自東北 凡二十日 或曰聖人出
2월 대광성(大光星)이 동북쪽에 나타나더니 무릇 20일이었다. 혹은 성인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비교≫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23년 기사
23년 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나더니 20일 만에 사라졌다.
≪견해≫ 이 문장은 자연현상(혜성출현?)과 다음해 지마의 탄생기사와 관련이 있다.
上與惠后史省 禱天 于閼川
왕과 혜후(惠后)와 사성(史省)이 알천(閼川)에서 하늘에 기도하였다.
≪견해≫ 혜후에게 이미 덕공이라는 아들이 있지만, 신라는 부모의 혈통보다도 신(神)이 내린 자손을 더 중요시하였다.
三月 八鏡多 出死魚 命戽其水
3월 8개의 거울이 포개어지니 죽은 물고기가 나타났다. 그 물을 퍼내도록 명하였다.
≪견해≫ 억지로 해석해 놓은 문장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以發良爲伊伐飡 干時爲稟主 弩門爲京都軍事 以聖父女烏羅爲軍母 以屈公子古乙爲護城兵官
발량(發良)을 이벌찬으로 삼고 간시(干時)를 품주로 삼았다. 노문(弩門)을 경도군사로 삼고 성부의 딸 오라(烏羅)를 군모로 삼았다. 굴공(屈公)의 아들 고을(古乙)을 호성병관으로 삼았다.
四月 大風 大井東門頹壞 上爲之責己不食 惠后沐浴禱天 曰 “責在妾身 願解夫 今須臾風止” 遣支所禮 問民頹戶
4월 큰 바람이 불어 대정(大井)의 동문이 기울어져 무너졌다. 왕이 자책하며 식사를 하지 않았다. 혜후가 목욕을 하고 하늘에 기도하며 말하기를 “책임은 첩에게 있으니 원하건대 남편을 풀어주시고, 비록 지금 잠깐이라도 바람을 그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다. 지소례(支所禮)를 보내어 백성들의 집이 무너졌는지 묻게 하였다.
五月 惠后生女 難之曰 “妾己衰矣 願以吾女毛多爲聖母 以報上恩” 上曰 “施優在多 何爲母 汝尙豊雋 史省在 焉勿爲遠慮也”
5월 혜후가 딸을 낳으며 (앞날을) 어려워하며 말하기를 “첩의 이미 쇠하여 나의 딸 모다(毛多)를 성모로 삼아 주기를 원합니다. 이로써 왕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베풀고 싶은 마음은 많으나 어찌 (성)모로 삼겠는가. 너는 오히려 풍성하고 영특하니, 사성이 있을 때 이에 먼 앞일을 걱정하지마라.”라고 하였다.
≪용어≫ 원려(遠慮) : ①먼 앞일까지 미리 잘 헤아려 생각함. ②멀리 떨어져서 근심하거나 걱정함. 또는 그런 근심이나 걱정.
≪견해≫ 혜후의 당시 나이가 48세이므로 자녀 생산이 어려우니 대신 자신의 딸을 맞이하여, 대광성의 후광을 입은 아들을 낳아 사성에게 후계자 구도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마음을 나타낸 기사로 보인다.
八月 太君以暑疾崩 于日知宅 上與惠后臨泣 曰 “父今棄我何去” 太君曰 “歸侍先今 此願畢矣 骨門無相殘 努來無相欺 知之乎” 上曰諾 太君乃崩 天地晦冥 上痛哀之 以父今禮葬 于壤井陵門 阿孝今堂皆殉之 不能禁 太君足智多謀有 大功于社稷 又喜女色 所畜嬪妾 千有余人 生子女七百 人不能盡知 自神以來 初有之事也.
8월 태군(太君)이 더위로 병을 얻어 일지댁(日知宅)에서 죽었다. 왕과 혜후가 대면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부금(父今=父王)은 지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렵니까?”라고 하자 태군이 말하기를 “선금(先今)을 모시러 돌아가고자 한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원하는 바이다. 골문(骨門, 혈육)간에 상잔(相殘, 서로 해침)하지 말고 (신라로) 오고자 하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며 속이지 말라. 명심하라”고 하였다. 왕이 승낙하였다. 태군이 이에 죽었다. 하늘과 땅이 깊은 어둠속에 빠져들었다. 왕이 애통해 하며, 부금례(父今禮)로 양정릉(壤井陵)에 장사를 지냈다. 아효(阿孝)와 금당(今堂)이 모두 따라 죽었으나 막지 못하였다. 태군은 지혜와 많고 꾀가 있어서 사직(社稷, 나라와 조정)에 큰 공이 있었다. 또 여색을 좋아하는 바가 있어 빈첩(嬪妾, 임금의 첩)이 천여 명이었고, 자녀가 700명이다. 사람들이 모두 알지 못하였다. 하늘이 열린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다.
≪비교≫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24년 기사
24년 4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8월, 왕이 붕어하였다. 성의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용어≫ 노래(努來) : ①오는 사람을 맞아 수고를 위로함. ②수고를 치사하고 격려함.
≪견해≫ 상장돈장에 탈해의 족보에 대하여 기록하지 아니하여 가계도를 살필 수 없다.
九月 以史省毛施納慧爲聖母 行吉 于奈乙
9월 사성(史省)과 모시(毛施)와 납혜(納慧)를 성모(聖母)로 삼았다. 내을(奈乙, 혁거세의 탄생지라고 함)에서 길한 일(즉위식)을 행하였다.
覆岩太守 弩乙知薨 干州革古 請拾骨而歸 許之
복암(覆岩)태수 노을지(弩乙知)가 죽었다. 간주(干州) 혁고(革古)가 시신을 수습하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5년 기사
5년 8월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견해≫ 복암은 옛날 마한과 백제의 영토였다. 당시의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으로 추정된다. 노을지가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장례를 치른다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확인이 불가하다.
吉門請 與易妻 許之
길문(吉門)이 발량(發良)과 처를 바꾸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以明宣爲覆岩州太守 妻以都氏
명선(明宣)을 복암주(覆岩州)태수로 삼고, 도씨(都氏)를 처로 하였다.
十月 聖父角干與太聖 巡至一善 慰賜軍士 夂理唐卒 命以海飡禮葬之
10월 성부각간(聖父角干, 허루)과 태성(太聖)이 순행하여 일선(一善)에 이르러 위로하여 군사를 (더하여) 주었다. 치리(夂理)가 갑자기 죽어 해찬례로 장사를 지냈다.
≪견해≫ 당시 신라의 어떤 변고가 있었는데, 결과만을 기록하여 전후관계를 살피기 어렵다.
十二月 扶余乘雪 欲取一牟城 不克而退
12월 부여(扶余, 백제)가 눈을 타고 일모성(一牟城)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견해≫ 일모성(一牟城)은 백제와 신라의 변경지역에 있다.
六年 正月 上與惠后及三母 受朝 南桃
6년(A.D.131) 정월 왕과 혜후(惠后)와 삼모(三母)가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賜骨門長老宴 于其宅 分遣勅使勸酒
골문장로의 집에서 잔치를 내려, 칙사(勅使, 임금의 명령을 받은 신하)를 나누어 보내어 술을 권하였다.
達文生許婁子許乙 上賜米見視兒
달문(達文)이 허루(許婁)의 자 허을(許乙)을 낳았다. 왕이 쌀을 내리고 아기를 살펴보았다.
≪견해≫ 허을(許乙)은 남당유고 위화진경초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二月 行月歌會 于春宅 賞歌仙七人
2월 춘택(春宅, 봄에 거주하는 별장)에서 월가회(月歌會)를 열어, 가선(歌仙) 7인에게 상을 내렸다.
≪견해≫ 남당유고 고구려사초(략)에 월가회는 고구려로부터 전래된 것이라 한다.
以聖雪仙童宮公爲奈麻 宮公有寵于善孝大母 以爲首功 而賜爵
성설선동(聖雪仙童) 궁공(宮公)을 내마(奈麻)로 삼았다. 궁공이 선효(善孝)대모에게 총애가 있어 으뜸 공로로 삼아 작위를 내렸다.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發良爲南路軍事 干時爲軍母 以車門爲理方大師
3월 길문(吉門)을 이벌찬으로 감생(甘生)을 품주로, 발량(發良)을 남로군사로 간시(干時)를 (남로)군모로, 차문(車門)을 이방대사(理方大師)로 삼았다.
史省聖母生太子 是爲祇摩 上喜不自勝 與惠后洗兒 終日不離 曰 “此子有龍狀 必興太國家也” 惠后不悅 曰 “吾子德公 何如” 上乃慰惠后 曰 “弟固兄之臣 雖貴在下吾妻之子 可以奉神 何可同論” 惠后大喜 以酒勸上不止
사성(史省)성모가 태자를 낳았는데 이 분이 지마(祇摩)다. 왕이 기뻐하며 사사로운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혜후(惠后)와 함께 아이를 씻기며 하루 종일 떼어놓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 아기에게 용상(龍狀, 용의 형상, 즉 임금)이 있다. 반드시 나라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혜후가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의 아들 덕공(德公)은 어찌 하구요”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혜후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동생은 오로지 형의 신하일 뿐이다. 비록 귀하다고는 하나 나의 처의 아들(덕공)의 아래에 있을 뿐이다. 가히 신(神)을 섬김이 마땅하다. 어찌하여 같음을 논하는가.”라고 하였다. 혜후가 크게 기뻐하며 왕에게 술을 권함이 그치지 않았다.
≪용어≫ 자승(自勝) : ①자기 스스로 남보다 낫다고 여김. ②사사로운 욕심을 억누름.
≪견해≫ 130년 2월의 기사에 대광성(大光星)이 나타나면 성인이 나타난다는 믿음이 당시 신라인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사성의 아들 지마가 대광성을 타고나, 혜후가 죽음이후에 형인 덕공(德公)을 누르고 왕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四月 以君己爲大城大師 妻以聖父女加西 行吉 于鮑祠 許婁與阿世 主之
4월 군기(君己)를 대성대사(大城大師)로 삼았다. 성부의 딸 가서(加西)를 군기에게 시집보냈다.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고, 허루(許婁)와 아세(阿世)가 주재하였다.
≪견해≫ 군기는 아세(신공)의 아들, 가서는 허루의 딸이다.
以屈公爲仙老 齊居爲上仙 行法 于南桃 會子萬衆
굴공(屈公)을 선노(仙老)로, 제거(齊居)를 상선(上仙)으로 삼아 남도(南桃)에서 행법(行法)을 하였는데 모인 백성이 많았다.
≪용어≫ 행법(行法) : ①사법(四法)의 하나.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하는 수행을 이른다.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 따위이다. ②수행하는 방법.
≪견해≫ 현대적 의미의 뜻을 알지 못하는 단어가 많다. 우리의 선도(仙道)가 불가(佛家)에 이어짐이 많으니 의미전달에 크게 무리가 없을 듯.
六月 以聖父爲太上老仙 督中外仙巫事
6월 성부를 태상노선(太上老仙)으로 삼고 나라 안팎의 신선과 무속에 관한 일을 살피게 하였다.
≪용어≫ 중외(中外) : ①안과 밖을 아울러 이르는 말. ②나라 안팎을 아울러 이르는 말. ③조정(朝廷)과 민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
八月 行大嘉俳 于高井 惠后自績 而示衆
8월 고정(高井)에서 대가배(大嘉俳, 추석)를 행하였다. 혜후가 몸소 길쌈을 하며 백성들에게 보였다.
聖父正妻山梯大母薨 上親幸吊慰 葬以后禮 聖父痛之 曰 “吾妻賢 而訓我 今日富貴 而相棄 何可忍乎” 乃作思妻廟 是爲山宮也
성부의 정처(正妻) 산제(山梯)대모가 죽었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조문하고 위로했다. 후(后)의 예로 장사지냈다. 성부가 아파하며 말하기를 “나의 처는 현명하여 나를 가르쳐 현재의 부귀를 이루었는데 함께하기를 버리고 떠나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사처묘(思妻廟)를 지었는데, 이것이 산궁(山宮)이다.
≪견해≫ 상장돈장에 의하면 산제(山梯)의 부모는 혁거세와 알영이니 시조(始祖)인 혁거세왕의 사망시기를 짐작케 할 수 있는 기사이다. 발량(發良)과 백마(白馬)가 산제의 아들이다.
以權妻毛優 妻康造太子 行吉 鮑祠
권처(權妻) 모우(毛優)를 강조(康造)태자에게 시집보냈다.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견해≫ 모우(毛優)는 유리왕과 아혜의 소생이다.
十月 以阿世爲聖父正妻 名曰宅主 初太聖自願之 上欲從之 齊居諫之不行
10월 아세(阿世)를 성부의 정처로 삼고, 택주(宅主)라고 불렀다. 처음에 태성이 스스로 성부의 정처가 되기를 원하여 왕이 따르고자 하였으나, 제거(齊居)가 간언하여 행하지 않았다.
十二月 以康造太子 爲壤井大師 月公爲副師 星門爲都頭
12월 강조(康造)태자를 양정(壤井)대사고 삼고, 월공(月公)을 (양정)부사, 성문(星門)을 (양정)도두로 삼았다.
≪견해≫ 양정은 탈해가 묻힌 곳으로 이 분들은 탈해와 혈족관계라는 뜻으로 보이는데, 자세한 사항은 상장돈장 기록미비로 확인할 수 없다.
七年 正月 上與惠后 拜玄神 于井中 受朝 南桃
7년(A.D.132) 정월 왕과 혜후가 정중(井中)에서 현신(玄神)에게 절하였다.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上巡行六部 至漢祇 見飢民于途 下車泣之 命改倉廩令 而責其部君
왕이 6부를 돌며 한지(漢祇)에 이르러 길가에서 굶주린 백성을 보고 어가에서 내려 눈물을 흘렸다. 창름령(倉廩令)을 바꾸도록 명하고 한지부 군장을 꾸짖었다.
≪용어≫ 창름(倉廩) : ①=곳집 ②곳집에 저장하여 둔 곡식.
二月 以加良爲京路軍事 君己爲護城大師 允良爲大城大師 以阿世女道失 妻加良 爲軍母 以聖父女果老 爲君己妻 使吉 鮑祠
2월 가량(加良)을 경로군사로 삼고, 군기(君己)를 호성대사로 삼고, 윤량(允良)을 대성대사로 삼았다. 아세(阿世)의 딸 도실(道失)을 가량(加良)에게 시집보내고 군모로 삼았다. 성부(聖父)의 딸 과노(果老)를 군기의 처로 삼았다.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三月 以月瓠爲伊伐飡 生里爲稟主 以吉門爲北路軍事 摩帝爲西路軍事 弩門爲按軍使 巡五路 以備戎器
월호(月瓠)를 이벌찬으로 생리(生里)를 품주로 삼았다. 길문(吉門)을 북로군사로, 마제(摩帝)를 서로군사로, 노문(弩門)을 안군사(按軍使)로 삼아 5로를 살피며, 병기(戎器)를 갖추도록 하였다.
惠后有疾 上爲之不食 命中外仙巫 行禱
혜후(惠后)가 병이 들어, 왕이 혜후를 위하여 식사를 하지 않았다. 중외선무(中外仙巫)에게 명하여 기도하도록 하였다.
以厚理爲聖父密妻 行吉 鮑祠
후리(厚理)를 성부의 밀처(密妻)로 삼고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四月 覆岩君都氏與其子孟百 入朝
4월 복암군과 도씨(都氏)가 그들의 아들 맹백(孟百)과 함께 입조(入朝, 벼슬아치들이 조정의 조회에 들어가던 일)하였다.
置助比川主 以大盖爲之 古陀耶主 以叔公爲之 加西妻叔公 加亥妻大盖
조비천주(助比川主)를 두어 대개(大盖)로 삼고, 고타야주(古陀耶主)는 숙공(叔公)으로 삼았다. 가서(加西)를 숙공에게 시집보내고, 가해(加亥)는 대개에게 시집보냈다.
≪견해≫ 조비천(助比川)은 백제와의 경계지역이다.
五月 聖父與太聖 遊卞山
5월 성부와 태성이 변산(卞山)으로 놀러갔다.
加耶遣使獻神鹿 于太聖及聖父
가야(加耶)가 사신을 보내어 신록(神鹿)을 태성과 성부에게 바쳤다.
≪견해≫ 변산(卞山)이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역임을 확인하는 기사다.
孟百爵大舍 使屬京路
맹백(孟百)에게 대사(大舍)의 작위를 주고, 경로(京路)에 속하여 부리도록 하였다.
七月 善孝大母生宮公女流宮公 于沙伐
7월 선효대모(善孝大母)가 사벌(沙伐)에서 궁공(宮公)의 딸 유궁공(流宮公)을 낳았다.
都氏願 以其弟召氏爲明宣妻 許之
도씨(都氏)가 그 (여)동생 소씨(召氏)를 명선(明宣)의 처로 삼아줄 것을 원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八月 行嘉排 于南桃
8월 남도(南桃)에서 가배를 행하였다.
悉直太守猪治卒 以其子奉治代之
실직태수(悉直太守) 저치(猪治)가 죽어 그의 아들 봉치(奉治)로 대신하게 하였다.
九月 太聖聖父歸 自卞山
9월 태성과 성부가 변산(卞山)에서 돌아왔다.
以勢漢爲倉廩令 以備內外之穀
세한(勢漢, 김알지의 아들)을 창름령(倉廩令)으로 삼아 나라안팎의 곡식을 갖추도록 하였다
≪견해≫ 세한(勢漢)을 열한(熱漢)이라고 표기하는 곳도 있다.
十一月 聖父密妻韓那代母薨 上爲之發哀 葬以太公禮 卞人立其祀 曰大國神
11월 성부의 밀처(密妻) 한나(韓那)대모가 죽었다. 왕이 한나대모의 죽음을 슬퍼함을 드러내며, 태공례(太公禮)로 장사지냈다. 변인(卞人)이 사당을 지어 대국신(大國神)이라고 불렀다.
≪견해≫ 한나(韓那)의 어머니가 알영이다. 133년 5월 기사에 일지갈문왕과 합사하는 기사가 있다.
以出于爲奈靈郡主 赤旨爲一牟城主
출우(出于)를 내령군주(奈靈郡主)로 삼고, 적지(赤旨)를 일모(一牟)성주로 삼았다.
十二月 上宴太聖聖父 于高井
12월 왕이 고정(高井)에서 태성과 성부를 위하여 잔치를 열었다.
命支所禮 巡問窮民
지소례(支所禮)에게 돌아다니며 굶주리는 백성을 살펴보라고 명하였다.
八年 正月 太聖有疾 上與惠后三母 禱天 廢朝 雪雨不止 聖父命齊居 會集中外仙巫 于京都 未行大禱 而崩 上痛哀之 以太后禮葬 于蛇陵門 分骨于壤井及卞山 聖父請殉之 不許
8년(A.D.133) 정월 태성(太聖)이 병이 들어 왕과 혜후(惠后)와 삼모(三母)가 하늘에 기도하고 조회를 폐하였는데, 눈비가 그치지 않았다. 성부(聖父)가 제거(齊居)에게 명하여 중외선무(中外仙巫)를 경도(京都)에 모이도록 하여, 큰 기도를 행하기 전에 태성이 죽었다. 왕이 어머니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태후례(太后禮)로 사릉문(蛇陵門)에 장사지냈다. 분골(分骨)하여 양정(壤井, 토해의 무덤이 있는 곳)과 변산(卞山)에도 장사 지냈다. 성부가 따라 죽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견해≫ 아리와 토해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아리와 변산(卞山)과는 어떤 연고가, 탈해와 토해가 동일한 분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삼국사기에는 탈해와 토해가 동일한 분이라 한다.
二月 召宮公于沙伐 許爲仙孝私臣
2월 궁공(宮公)을 사벌(沙伐)으로 불러, 선효(仙孝)의 사신(私臣, 비서)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聖父率中外仙巫 行大祭 于阿利神廟 上與惠后及德公太子 率三母八妻 行拜于庭
성부가 중외선무를 거느리고 아리신묘(阿利神廟)에서 큰 제사를 지냈다. 왕과 혜후와 덕공태자(德公太子)가 3모(三母), 8처(八妻)를 거느리고 마당에서 절을 했다.
三月 以晉公爲伊伐飡 早乙爲稟主 月瓠爲西路軍事 摩帝爲按軍使 弩門爲水路軍事 歸公爲卞山太守
3월 진공(晉公)을 이벌찬으로, 조을(早乙)을 품주로 삼았다. 월호(月瓠)를 서로군사로, 마제(摩帝)를 안군사(按軍使)로, 노문(弩門)을 수로군사로, 귀공(歸公)을 변산태수(卞山太守)로 삼았다.
以晉公前妻奈好爲祖主
진공(晉公)의 전처(前妻) 내호(奈好)를 조주(祖主)로 삼았다.
以聖父女骨夂爲德公太子妃 行吉 于奈乙 上與惠后 召聖父紇古 于神井 主其吉 骨夂乃紇古之生也
성부의 딸 골치(骨夂)를 덕공태자비(德公太子妃)로 삼고 내을(奈乙)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왕과 혜후가 성부와 흘고(紇古, 토해와 금당의 소생)를 신정(神井)으로 불러 결혼식을 주재하게 하였다. 골치는 흘고가 낳은 자식이다.
≪견해≫ 결혼식의 주재는 부모가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신정(神井)은 내을(奈乙)에 있다는 것은 알고 넘어가기를 바랍니다.
四月 上與德公太子骨夂妃 奉惠后 謁仙桃山 大宴骨門
4월 왕과 덕공(德公)태자와 골치비(骨夂妃)가 혜후를 모시고, 선도산(仙桃山)을 찾아뵈었다. 골문(骨門)에서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견해≫ 왕의 배우자는 后, 그 밖에는 왕자나 종실의 배우자는 妃로 구분된다.
以聖父密妻紇古爲大母 修太子職事
성부의 밀처(密妻) 흘고(紇古)를 대모(大母)로 삼아, 태자직무의 (도덕과 품행을) 닦도록 하였다.
以聖父女婁麽爲晉公正妻 行吉 鮑祠 聖父以婁麽年穉 命早乙仍爲稟主
성부의 딸 루마(婁麽)를 진공(晉公)의 정처(正妻)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성부는 루마가 나이가 어리다하여, 조을(早乙)을 거듭 품주로 삼았다.
五月 作日知神廟 于卞山 合大國神 于其中 號曰雙神 以沙乙那爲主 是日又 以馬知那爲釰師大頭 永公爲殿中郞
5월 일지신군의 사당을 변산(卞山)에 지어 대국신(한나의 사당)과 합하였다. 그 이름을 부르기를 쌍신(雙神)이라고 하였다. 사을나(沙乙那)를 주(主)로 삼고, 이날 다시 마지나(馬知那)를 인사대두로, 영공(永公)을 전중랑으로 삼았다.
≪견해≫ 일지와 한나는 사을나와 마지나의 부모다.
六月 沙伐君旨亥卒 副君成公代之
6월 사벌군(沙伐君) 지해(旨亥)가 죽어, 부군(副君) 성공(成公)이 대신하게 하였다.
九月 以婁麽爲稟主 早乙娠滿 而免 賜爵七品大母
9월 루마(婁麽)를 품주로 삼았다. 조을(早乙)은 임신으로 배가 불러 면직하였다. 7품 대모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十一月 上與惠后 入冬宅 宴骨老上仙
11월 왕과 혜후가 동택(冬宅)으로 와서 골노상선(骨老上仙)에게 잔치를 열었다.
以支所禮爲護城大師 君己爲聖父私臣
지소례(支所禮)를 호성대사로 군기(君己)를 성부사신(聖父私臣)으로 삼았다.
大風 頹仙桃山神木 上親幸 禱祓 以善孝改爲山主
큰 바람이 불어 선도산(仙桃山) 신목(神木)이 넘어졌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푸닥거리를 하며 기도하였다. 이 때문에 선효(善孝)를 다시 (선도)산의 주(主)로 삼았다.
九年 正月 上與惠后德公骨夂 修朝 南桃
9년(A.D.134) 정월 왕과 혜후, 덕공(德公), 골치(骨夂)가 남도에서 조회를 받았다.
二月 以明宣爲伊伐飡 閑帝爲稟主 乾水爲覆岩太守 妻以召氏 弩門爲一善州太守 允良爲水路軍事 活祇爲大城大師 以君己妻果老 妻允良 以聖父密妻召于那 妻君己
2월 명선(明宣)을 이벌찬으로 한제(閑帝)를 품주로 삼았다. 건수(乾水)를 복암태수로 소씨(召氏)를 처로 삼게 하였다. 노문(弩門)을 일선주태수로, 윤량(允良)을 수로군사로, 활지(活祇)를 대성대사로 삼았다. 군기(君己)의 처 과노(果老)를 윤량에게 시집보내고, 성부의 밀처(密妻) 소우나(召于那)를 군기에게 시집보냈다.
三月 召文使玉上人等 入朝 獻仙酒五十囊 樂器七事 上與惠后 引見勞之
3월 소문(召文)이 옥상인(玉上人)등을 보내어 입조하여, 선주(仙酒) 50자루와 악기7벌을 바쳤다. 왕과 혜후가 이끌어 만나보고 위로하였다.
古陀耶君加西生一子二女 上命其弟加也 往慰賜米
고타야군(古陀耶君) 가서(加西)가 1남 2녀를 낳았다. 왕이 그 남동생 가야(加也)에게 명하여 위로하고 쌀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견해≫ 가서와 가야는 허루의 자식이다.
四月 權妻玄兒生 上女多可 上洗之
4월 권처 현아(玄兒)가 왕의 딸 다가(多可)를 낳아 왕이 아기를 씻겼다.
刀良干 羊公 出獵爲獸所傷 而卒 其妻不怠 請以其子艾公代之 許之
도량간(刀良干) 양공(羊公)이 사냥을 나갔다가 짐승에게 상처를 입어 죽었다. 양공의 처 불태(不怠)가 그의 아들 애공(艾公)을 대신하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五月 加西與夫叔公 引其孿子 入朝 獻靑牛三牝一牡 上與惠后 視其兒 賜叔公衣酒 命農師大頭 置靑牛典 畜之
5월 가서(加西)와 남편 숙공(叔公)이 더불어 그 쌍둥이 자식들을 데리고 입조하여 푸른소 암컷 3마리와 수소 1마리를 바쳤다. 왕과 혜후가 그 아이들을 보았다. 숙공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농사대두(農師大頭)에게 청우전(靑牛典)을 설치하여 기르도록 명하였다.
北路軍母甘生 遣使獻方物 奏曰 “妾夫吉門 多年戍外 身家未好 子女思京 妾亦願見陛下 許妾夫妻 賜暇一年” 上問於聖父 聖父曰 “武臣思安 非其道 可罪之” 史省曰 “身恙 而不許 非骨肉之情也” 乃勸聖父 許之
북로군모 감생(甘生)이 사람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며 아뢰기를 “첩의 남편 길문(吉門)이 수년간 국경을 수비하러 나가 있어 몸과 가정이 좋지 못하며 자식들 또한 경도만을 생각하고 있으며, 첩 또한 폐하를 뵙기를 원하므로 첩의 부부에게 일년 동안 휴가를 청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성부에게 물으니 성부가 말하기를 “무신(武臣)이 편안함을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므로 죄를 줄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사성(史省)이 말하기를 “몸의 근심이 있는데 허락하지 않는 것은 혈육간의 정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내 성부에게 권하여, 허락하였다.
以晉公爲北路軍事 婁麽爲軍母 召吉門歸京都 上命宅師 起吉門宅 于日知宅東
이 때문에 진공(晉公)을 북로군사로 루마(婁麽)를 (북로)군모로 삼았다. 길문吉門을 불러 경도(京都)로 돌아오게 하였다. 왕이 택사(宅師)에게 명하여 일지(日知)의 집 동쪽에 길문의 집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甘生與其子逃門 謁聖父 逃門者 甘生逃于吉門 而生也 時方五歲 而俊美有巧智 能令聖父笑 聖父愛之曰 “以汝之功 可赦汝母罪” 吉門大喜 其名曰功門
감생(甘生)과 그의 아들 도문(逃門)이 성부를 찾아뵈었다. 도문은 감생이 길문(吉門)에게 도망하여 왔을 때 태어난 자식이다. 이때 바야흐로 5세였는데, 예쁘고 재주와 지혜가 있어서, 능히 성부로 하여금 웃게 하였다. 성부가 도문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너의 공으로 너의 어머니의 죄를 사면하겠다”라고 하였다. 길문이 크게 기뻐하며 이름을 공문(功門)이라 하였다.
麥大豊 南路新縣 多連歧者 上命農師 集其穗 薦于祖廟
보리가 풍년이 들었다. 남로 신현(新縣)에서는 이삭에서 연결된 것이 많았다. 왕이 농사(農師)에게 명하여 그 이삭을 모으게 하여 조상의 사당에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5년 기사
5년 2월 명선을 이찬으로, 윤량을 파진찬으로 임명하였다.
5월 고타 군주가 푸른색의 소를 바쳤다. 남신현에서는 하나의 보리 이삭에 여러 가닥이 생겨나 크게 풍년이 들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六月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以明宣爲骨門伊飡 閑帝爲骨母
6월 길문(吉門)을 이벌찬으로 삼고 감생(甘生)을 품주로 삼았다. 명선(明宣)을 골문이찬(骨門伊飡)으로 삼고, 한제(閑帝)를 골모(骨母)로 삼았다.
九月 穀大登 大豊大師尹公角干 與其妻伊利生大母 行大場 于南郊 上與惠后幸之 賜酒父老 頌聲遍野 是夜伊理生 夢見儒理尼今 以大穗授之 曰 “可以爲神穗” 乃告于尹公 尹公曰 “大兆也 不可語人 可以驗之” 遂沐浴 行禱 而合宮 果得神胎 公夫妻 自喜于心 曰 “吾夫妻 夂淪不明 今有大慶 無以報神 只可垂憐民草 無失慈愛也”
9월 곡식이 창고에 가득 찼다(穀大登은 行大場과 연결되는 문장, 풍년이 들어도 곡식을 창고에 채워야 한해의 농사가 종결된다). 대풍대사(大豊大師) 윤공(尹公)각간이 그의 처 이리생(伊利生)대모와 더불어 남교(南郊, 남쪽 교외 혹은 地名)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왕과 혜후가 행차하여 남자 노인들에게 술을 내렸다. 들판에서 두루 칭송하는 노래를 들렸다. 이날 밤 이리생이 꿈속에서 유리니금(儒理尼今)을 만났는데 큰 이삭을 내려주며 말하기를 “가히 신의 이삭이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윤공에게 고하니 (윤공이) 말하기를 “좋은 조짐이로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실험해야 옳다”라고 하고 목욕 후 기도하고 합궁(合宮)하여 그 결과로 신의 태기를 얻었다. (윤)공의 부부가 스스로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부부가 뒤늦은 물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 큰 경사를 맞이하여 신에게 보답함이 없으므로, 오직 민초(民草)들을 불쌍히 여기고 자애로움을 잃지 않음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용어≫ 수련(垂憐) : ①가엾게 생각하여 돌봄 ②불쌍하게 여기어 동정(同情)함
十二月 行大祭 閼川 加耶樂浪召文之民 亦許入列 家給人足 行不賚粮 狗不食糟
12월 알천(閼川)에서 큰제사를 지냈다. 가야(加耶), 낙랑(樂浪), 소문(召文)의 백성들 역시 줄을 서는 것을 허락하였다. 집집마다 살림이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고 식량을 내려주지 않음이 없었다. 개조차 술지게미를 먹지 않았다.
≪용어≫ 가급인족(家給人足) : 집집마다 살림이 부족(不足)함이 없이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豊足)해 살기 좋음
以白公子啓其爲京都兵官 乃加其之兄子也 娶加其女加大 爲妻 亦聖父婿也
백공(白公)의 아들 계기(啓其)를 경도병관으로 삼았다. 계기는 가기(加其)의 형의 아들이다. (숙부) 가기의 딸 가대(加大)에게 장가들어 처로 삼았는데, 또한 성부의 사위이다.
十年 正月 上與惠后德公骨夂 受朝 高井
10년(A.D.135) 정월 왕과 혜후가 덕공(德公), 골치(骨夂)와 고정(高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扶余 侵一牟城 不克而退
부여가 일모성(一牟城)을 침입하여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비교≫ 1.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6년 기사
6년 정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2월 길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4월 객성이 자미 성좌에 들어갔다.
2. 백제본기 기루왕 9년 기사
9년 정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4월 을사에 객성(客星)이 자미(紫微, 별자리)로 들어갔다.
二月 以吉門長子吉元爲兵官阿飡 賜其母庚元紫衣 長婁子長世爲南路兵官
2월 길문(吉門)의 큰아들 길원(吉元)을 병관아찬으로 삼고, 그 어머니 경원(庚元)에게 자주색 옷을 하사하였다. 장루(長婁)의 아들 장세(長世)를 남로병관으로 삼았다.
以摩帝爲伊伐飡 河馬爲稟主 吉門爲按軍使 蝦盧爲理方大師
마제(摩帝)를 이벌찬으로, 하마(河馬)를 품주로, 길문(吉門)을 안군사로, 하로(蝦盧)를 이방대사로 삼았다.
三月 上享聖父 于春宅
3월 왕이 춘택(春宅)에서 성부에게 잔치를 내렸다.
置大畜典 命勢漢理之
대축전(大畜典)을 설치하여 세한(勢漢)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六月 以虹盧爲護城兵官 君乙爲京都兵官
6월 홍노(虹盧)를 호성병관으로, 군을(君乙)을 경도병관으로 삼았다.
八月 五日 大豊大母伊利生生子 于南山私宅 瑞光照耀 尹公希其夙成 名曰逸聖 大樹角干見而喜之 曰 “我有孫矣”
8월 5일 대풍대모 이리생(伊利生)이 남산(南山) 사택(私宅)에서 아들을 낳았다. 상서로운 빛이 밝게 비추어 빛났다. 윤공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발육이 빨라 어른스러워지기를 바라서 일성(逸聖)이라고 이름 지었다. 대수(大樹) 각간이 아기를 살펴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에게 손자가 생겼다”라고 말하였다.
≪용어≫ 숙성(夙成) : 나이는 어리지만 정신적, 육체적으로 발육이 빨라 어른스러움
九月 不怠生艾公子作公 不怠弗喜之女也
9월 불태(不怠)가 애공(艾公)의 아들 작공(作公)을 낳았다. 불태는 비희(弗喜)의 딸이다.
穀大登 京都所畜陳穀 十五萬石 州郡倉廩皆實 乃增其庫
곡식이 창고에 가득 찼다. 경도(京都)에서 모아 말린 곡식이 15만석이었다. 주군의 창고가 모두 차서 이에 창고를 늘리도록 하였다.
多波那君薨而無嗣 其妃請奉彡尼今爲夫 惠后許之 命水路大師 裝船百艘 而送之
다파나(多波那)군이 죽었는데 후계자가 없었다. 그 비(妃)가 삼니금(彡尼今)을 받들어 남편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혜후(惠后)가 삼니금을 남편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였다. 수로대사(水路大師)에게 백 척의 배를 치장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견해≫ 1. 삼국사기에 다파나국은 탈해가 태어난 곳으로, 다파나국이 왜의 동북쪽 천리에 있다고 하였다. 남당유고에 왜에 볼모로 갔던 눌지의 동생 미해(미사흔)가 제상의 도움으로 탈출한 이후에 왜왕녀 보미가 또한 도망을 와서 살았으며, 보미의 사망(485년 1월)기사에 다파라왕녀라고 명시하고 있다. 다파라국과 왜국을 분리하여 다른 나라로 보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나 남당유고에서는 구분되지 않고 있다.
2. 삼니금(彡尼今)은 지마이사금의 재위기에 일성이 스스로 칭한 왕호(王號)로, 여기서 말한 삼니금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168년 4월의 기사에 야인이 후복(厚福)태자의 명이라 하며 신라의 선박을 탈취하려는 사건이 발생한다. 상장돈장을 살펴보면 후복은 유리와 아혜의 소생이라 하고, 본 기사의 삼니금은 다파나 여군의 남편으로 보낸 것을 허락하는 이가 아혜후이기 때문에, 후복이 삼니금으로 제수된 이후에 다파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3. 신라에서 다파라에 보낸 백 척의 선박에 무엇이 타고 있었으며 열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도 의문이다. 혹은 다파라 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일대 혼란이 있었을 터이니 어려움을 수습하기 위해서 신라의 병사와 신물(神物)들을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
十二月 以摩帝長子樊五爲兵官阿飡 賜其母月分紫衣 君乙母君門亦賜紫衣
12월 마제(摩帝)의 큰아들 번오(樊五)를 병관아찬으로, 그의 어머니 월분(月分)에게 자의(紫衣, 자주색 옷)을 내렸다. 군을(君乙)의 어머니 군문(君門)에게도 역시 자의(紫衣)를 내렸다.
十一年 正月 上有疾 聖父侍德公太子骨夂妃君 受朝 南桃
11년(A.D.136) 정월 왕이 병이 있어, 성부가 덕공(德公)태자와 골치비군(骨夂妃君)를 모시고 남도(南桃)에서 조회를 받았다.
二月 復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摩帝爲按軍使 蝦盧爲大乘大師 啓其爲理方大師
2월 다시 길문을 이벌찬으로, 감생을 품주로 하였다. 마제를 안군사로 하고, 하로(蝦盧)를 대승대사로 하고 계기(啓其)를 이방대사로 하였다.
五月 惠后難産而崩 春秋五十四 上痛哀之 三日不食 郡臣力救護之 葬后於蛇陵門
5월 혜후가 난산으로 죽었는데 춘추 54세였다. 왕이 혜후의 죽음을 슬퍼하여 삼일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힘써 왕을 간호하였다. 후(后)를 사릉문(蛇陵門)에 장사지냈다.
以雌神史省爲皇后 以權妻阿良爲聖母
이로써 자신(雌神) 사성(史省)을 황후로 삼고, 권처(權妻) 아량(阿良)을 성모(聖母)로 삼았다.
六月 上與史后 受朝 南桃 大宴骨門
6월 왕과 사후(史后, 사성)가 남도에서 조회를 받고 골문에 큰 잔치를 벌였다.
九月 以白馬爲以伐飡 細婁爲稟主 吉門爲五軍都護使 屬于聖父
9월 백마(白馬)를 이벌찬으로 삼고, 세루(細婁)를 품주로 삼았다. 길문을 5군도호사(五軍都護使)로 하여, 성부에 속하게 하였다.
十二年 上與史后 受朝 高井
12년(A.D.137) 왕과 사후(史后)가 고정(高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二月 以摩帝爲伊伐飡 河馬爲稟主 白馬爲按軍使
2월 마제를 이벌찬으로, 하마(河馬)를 품주로 삼았다. 백마(白馬)를 안군사로 삼았다.
賜船公穀五千石
선공(船公)에게 5천석의 곡식을 하사하였다.
五月 金官加耶與月奈等 七國作亂 命吉門爲征虜大將軍 討平之
5월 금관가야(金官加耶)와 월내(月奈) 등 7국이 난을 일으켜, 길문(吉門)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아 쳐서 평정하였다.
≪견해≫ 금관(金官)과 월내(月奈)는 자주 등장하는 나라이다.
七月 命發良白馬 築加召馬頭
7월 발량(發良)과 백마(白馬)에게 명하여 가소(加召)성과 마두(馬頭)성을 쌓게 하였다.
≪견해≫ 1. 파사이사금기에 나타나는 축성기사로 경기도 여주군에 파사성이 있다.
2. 가소(加召)성주 장세(長世)가 145년 9월에 거타(居陀)를 구하려다 가야에게 사망한 기사가 있고, 마두(馬頭)성은 143년 2월에 가야가 공격한 기록이, 307년 10월에 내해이사금의 아들 우로가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마두책(馬頭柵)으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소(加召)성, 마두(馬頭)성 모두 가야의 인근에 위치한 城인 듯하다. 마두(馬頭)와 마두책(馬頭柵)이 인근 지역인지는 알 수 없다.
上謂摩帝 曰 “朕以寡德臨國無威 扶余加耶 去益猖獗如之 何則好乎” 摩帝曰 “臣之愚計 莫如通色 相親 以機制之” 上善之
왕이 마제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짐의 부덕함에도 나라를 맡아 위엄이 없으니, 부여와 가야의 창궐(猖獗, 전염병이 퍼지거나 좋지 못한 세력이 갈수록 퍼져나감)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마제가 말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계략으로는 색(色)을 통하여 서로 친하여, 그것을 계기로 통제함이 마땅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그 말을 좋게 여겼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8년 기사
8년 7월 왕이 “내가 부덕함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맡았다. 우리나라는 서쪽으로 백제를 이웃하고 남쪽으로 가야에 접하였으나, 나의 덕망은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외국을 두렵도록 하기에 부족하였으니, 마땅히 성과 보루를 수리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달에 두 곳, 즉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았다.
十二月 以白子爲馬頭城主 車門爲加召城主 加爵一級
12월 백자(白子)를 마두성주로, 차문(車門)을 가소성주로 삼았다. 1계급의 작위를 더하였다.
稟主河馬生三子 而危篤 命 以權妻美禮爲摩帝密妻 代行稟主事
품주 하마(河馬)가 3쌍둥이를 낳아 위독하게 되어, 권처 미례(美禮)를 마제의 밀처로 삼아 품주의 일을 대행하게 하였다.
十三年 正月 上與史后三母 受朝 南桃
13년(A.D.138) 왕과 사후(史后)와 3모(三母)가 남도에서 조회를 받았다.
稟主河馬卒 聖父痛哀之 葬以大母禮 以河馬母月門爲蛇陵門主 加大紫衣
품주 하마(河馬)가 죽어 성부가 애통해 하였다. 대모례(大母禮)로 장사지냈다. 하마의 어머니 월문(月門)을 사릉문주(蛇陵門主)으로 삼고 대자의(大紫衣)를 더하였다.
摩帝請免 君己爲伊伐飡 召于那爲稟主 摩帝爲聖父私臣
마제가 사직하기를 청하여 군기(君己)를 이벌찬으로, 소우나(召于那)를 품주로 삼았다. 마제를 성부사신으로 삼았다.
五厚爲阿瑟羅君 年十六
오후(五厚)를 아슬나군(阿瑟羅君)으로 삼았는데 나이 16세였다.
二月 聖父密妻沙乙那 生孿子 上親幸視兒 名男曰又日女曰又韓 賜米加布 聖父感泣拜恩 上曰 “沙乙那 亡兄寵女 我所以深愛也 今得聖父寵 生此佳兒 安得不喜乎”
2월 성부의 밀처 사을나(沙乙那)가 쌍둥이 자식을 낳았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아기를 살펴보고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남자아이는 우일(又日), 여자아이는 우한(又韓)이라고 이름 지었다. 쌀을 내려주고 베를 더하였다. 성부가 감동하여 울면서 은혜에 엎드려 절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사을나는 죽은 형(日知)의 총녀(寵女)다. 내가 마음 깊이 사랑하는 바가 있었는데 지금 성부의 총애를 얻어 이렇게 아름다운 아이들을 얻음에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견해≫ 신라사초와 상장돈장을 살펴보면 우일이 여자인 듯하다.
五月 辛公角干薨 于仙桃山 葬以太公禮 辛公失志以來 潛心祀事 不以世俗事關心 唯與童男童女 朝夕奉神 十年如一日 上嘉其節 累幸慰賜 自以罪居 不敢恣情所御 婢妾之子 一切不聞 骨官遺言 不許從殉 阿世聞其疾篤 請往訣 聖父乃偕臨 而流涕 辛公曰 “善與新人好 何苟苟流涕乎” 聖父大其言 許當分骨 而訣之
5월 신공(辛公) 각간이 선도산(仙桃山)에서 죽어 태공례(太公禮)로 장사지냈다. 신공은 뜻을 잃은 이래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사 일만 하였다. 세속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와 더불어, 아침과 저녁으로 신을 모시기를 10년을 하루처럼 수행하여 왔다. 왕이 그 절개를 아름답다하여 누차로 행차하여 위로하고 하사하였는데, 스스로 죄인으로 살았다. (왕이) 감히 뜻하는 바대로 하지 못하였다. 비첩(婢妾, 계집종과 첩) 아들들도 일절 듣지 못하고, 골관(骨官)이 유언을 (전하여) 따라죽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세(阿世)가 병으로 위중하다는 그 말을 듣고 가기를 청하였는데, 성부가 이에 함께 대면하며 눈물을 흘렸다. 신공이 말하기를 “새로운 남편과 사이가 좋은 것이 온당하도다. 어찌하여 구차하게 눈물을 흘리느냐”고 하였다. 성부가 그 말이 훌륭하다 하여 마땅히 분골하기를 허락하고 사별하였다.
阿世謂聖父 曰 “汝妬辛夫 而不子我子 今己故汝 不子之 孰可爲父” 聖父許之 乃加阿世子皆 爵一級
아세(阿世)가 성부에게 힘써 말하기를 “너는 신부(辛夫, 신공)를 시새움하는 것이냐. 나의 자식들을 (신공의) 자식이라 하지 못하고, 지금 내가 너에게 있는 까닭으로 자식이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아버지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성부가 아세의 자식들이 신공의 자식으로 칭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아세의 자식들 모두에게 일급의 작위를 더하였다.
九月 穀又大登 行大場 于一直
9월 또 곡식이 창고에 가득 찼다. 일직(一直)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以大樹角干爲六部頭上 君門仙母爲仙母頭上 賜大紫衣
대수(大樹)각간을 6부두상(六部頭上)으로, 군문(君門)선모를 선모두상(仙母頭上)으로 삼았다. 대자의(大紫衣)를 내렸다.
≪견해≫ 대수(大樹)와 군문(君門)은 부부사이다.
十四年 正月 上與史后 受朝 高井
14년(A.D.139) 정월 왕과 사후가 고정(高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骨夂生 德公子共公 上爲之洗兒 賜米
골치(骨夂)가 덕공(德公)의 아들 공공(共公)을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고 쌀을 내려주었다.
以加良爲伊伐飡 道失爲稟主 君己爲京路軍事 以湣公爲理方大師 洛公爲大乘大師 洛公妻斗里爲旗母
가량(加良)을 이벌찬으로, 도실(道失)을 품주로, 군기(君己)를 경로군사로 삼았다. 민공(湣公)을 이방대사로, 낙공(洛公)을 대승대사(大乘大師)로, 낙공의 처 두리(斗里)를 기모(旗母)로 삼았다.
四月 上與史后 宴聖父 于高井 以權妻道生爲聖父正妻 阿世爲太母 聖父感泣 上曰 “惟 父再造 朕命 可以共天下也”
4월 왕과 사후가 고정(高井)에서 성부에게 연회를 열었다. 권처 도생(道生, 파사의 딸)을 성부의 정처로 삼고, 아세(阿世)를 태모로 삼았다. 성부가 감동하여 울었다. 왕아 말하기를 “생각해 보건데, 아버지(성부)를 다시 만들어 짐의 명령이 천하를 함께 함이 옳다”고 하였다.
推火太守克市卒 以市老代之
추화(推火)태수 극시(克市)가 죽어, 시노(市老)를 대신하게 하였다.
六月 上幸骨夂 于夏宅 史后妬怒不食 命齊居上仙講道 于井中
6월 왕이 골치(骨夂)에게 행차하여 하택(夏宅)으로 갔다. 사후가 시새움으로 노하여 식사를 하지 않았다. 제거상선(齊居上仙)에게 정중(井中)에서 설교하도록 명하였다.
以卞山神君爲殿中郞 昌永爲太子兵官
변산(卞山)신군을 전중랑(殿中郞)으로, 창영(昌永)을 태자병관(太子兵官)으로 삼았다.
召文王景文請娶骨女 命嫁權妻巨好
소문왕(召文王) 경문(景文)이 골녀(骨女)에게 장가가기를 청하여, 권처 거호(巨好)를 시집가도록 명하였다.
七月 上謂加良 曰 “汝以妙年 因骨登相 汝妻亦然 朕之赤子 治歟不治歟” 可良曰 “請使王子十人 于州郡 而察之” 上曰善 乃以玉君方侔毛知康造昔公壤君大車西公茂山月公等 率其文師私臣 巡行 南北廉察 公事不勤 田野荒廢 以報 甚者黜之 輕者貶之
7월 왕이 가량(加良)에게 말하기를 “너는 20살 안팎에 너의 핏줄로 인하여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너의 처(도실) 역시 그러하다. 짐이 갓난아기처럼 여겨 사랑하지만 다스림을 아느냐 모르느냐”고 하였다. 가량이 말하기를 “왕자 10명을 부리어 주군을 살피기를 청하옵니다.” 왕이 옳다고 말하고, 이에 옥군(玉君), 모모(侔毛), 모지(毛知), 강조(康造), 석공(昔公), 양군(壤君), 대거(大車), 서공(西公), 무산(茂山), 월공(月公) 등 그 문사(文師, 글 선생)와 사신(私臣)을 거느리고 순행하게 하여, 남북을 청렴하게 순찰하도록 하였으나, 공사(公事, 나랏일)에 열심히 일하지 않고 밭과 들이 황폐화 되어, 이를 보고하였다. 심한 자는 내쫓고, 가벼운 자는 강등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11년 기사
11년 7월 10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주주와 군주들을 조사하고, 공무에 성실하지 않거나 농토를 많이 황폐하게 한 자가 있으면 직급을 내리거나 사직토록 하였다.
≪용어≫ 赤子 : ①=갓난아이. ②임금이 갓난아이처럼 여겨 사랑한다는 뜻으로, 그 나라의 '백성'을 이르던 말.
≪견해≫ 태자라고 해서 모두 파사이사금의 아들이 아니다.
八月 以大惠爲天公妻 行吉 鮑祠 上與阿世 主其吉
8월 대혜(大惠)를 천공(天公)의 처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왕과 아세(阿世)가 그 혼사를 주재하였다.
行大嘉俳 于大井 行白龍祭
대가배를 대정(大井)에서 열고, 백룡제(白龍祭)를 지냈다.
≪견해≫ 139년은 기묘년으로 해맞이 제사가 아니다.
九月 草童雪童分戰 于雲橋 仙桃山童女亦多助之 上命湣公治之
9월 초동(草童)과 설동(雪童)이 나뉘어 운교(雲橋, 구름다리)에서 싸움을 하였다. 선도산동녀(仙桃山童女) 역시 싸움을 도운이가 많았다. 왕이 민공(湣公)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견해≫ 구름다리는 선도산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以倉廩令勢漢爲大倉大師 加爵匝判
창름령(倉廩令) 세한(勢漢)을 대창대사(大倉大師)로 삼고 잡판(匝判)의 작위를 더하였다.
十月 上與史后 巡六部
10월 왕과 사후가 6부를 순행하였다.
大樹角干薨 以太公禮 葬于伊山 以奈老角干爲六部頭上 珍祇爲仙母頭上
대수(大樹) 각간이 죽어 태공례로 이산(伊山)에 장례를 지냈다. 이 때문에 내노(奈老)각간을 6부두상으로, 진마(珍祇)를 선모두상으로 삼았다.
十一月 分理方三部 左治骨仙 右治兵官 藩族平治隸民
11월 리방(理方)을 3부(三部)씩으로 나누어 왼쪽은 골선(骨仙)들이 다스리고, 오른쪽은 병관(兵官)들이 다스리게 하였다. 번족(藩族, 왕실의 울타리가 되는 족속)들이 예민(隸民, 예속된 백성)들을 평탄하게 다스리게 하였다.
十五年 正月 上與史后 受朝 高井
15년(A.D.140) 정월 왕과 사후가 고정(高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견해≫ 왕이 해년마다 장소를 바꾸어가며 조회를 받은 것인지?
仙桃山法奈老上骨 有疾 上親幸禱疾
선도산법(仙桃山法) 내노(奈老, 파사의 숙부) 상골(上骨)이 질병이 있어 왕이 친히 행차하여 병이 낫기를 기도하였다.
以摩帝爲伊伐飡 美禮爲稟主 加良爲聖父私臣 克公爲護城兵官
마제를 이벌찬으로, 미례(美禮)를 품주로, 가량(加良)을 성부사신으로, 극공(克公)을 호성병관으로 삼았다.
三月 稟主美禮生 摩帝女愛禮 于高井 上爲之視兒賜米 先是 美禮爲聖父所寵 生子 摩帝不悅 自道生之後 美禮失寵 得生摩帝女 摩帝乃喜 曰 “今得吾女” 美禮曰 “汝欲希 我生爾子 不自植力乎 我非愛聖父 而薦身也 奈老物有力何” 摩帝曰 “此兒長 則可制老物也” 摩帝之背聖父 自此益著
3월 품주 미례(美禮)가 마제의 딸 애례(愛禮)를 고정(高井)에서 낳았다. 왕이 아기를 살펴보고 쌀을 내렸다. 이전에 미례가 성부의 총애를 받은 바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마제가 기뻐하지 않았다. 도생이 (성부의 정처가 된) 이후로 미례가 (허루의) 총애를 잃었는데, 마제가 딸을 얻으니 마제가 이에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제서야 나의 딸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미례가 말하기를 “너는 내가 너의 자식을 낳기를 바라는구나. 스스로 아이를 심을 능력이 없지 않느냐. 나는 성부를 사랑하지 않지만 천거된 몸이다. 늙은이(허루)에게 힘이 있으니 어찌하란 말이냐?” 고 말하였다. 마제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자라면 곧 늙은이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제가 성부를 배신함이 이때부터 드러나게 커져갔다.
六月 以君乙爲護城大師 支所禮爲京路軍事 君己爲聖父私臣 加良爲按軍使 白馬爲北路軍事 晉公爲西路軍事 月瓠爲五軍頭上 使屬聖父 以樊五爲馬政大師 季老爲軍粮大師 虹盧爲馬頭城主 白子爲祥文大師 加樹爲護城兵官 以支所禮妻加亥爲軍母 樊五妻曷名爲馬母 皆聖父女也
6월 군을(君乙)을 호성대사로, 지소례(支所禮)를 경로군사로, 군기(君己)를 성부사신으로, 가량(加良)을 안군사로, 백마(白馬)를 북로군사로, 진공(晉公)을 서로군사로, 월호(月瓠)를 오군두상으로 하여 성부에게 속하여 부리게 하였다. 번오(樊五)를 마정대사로, 계노(季老)를 군량대사로, 홍노(虹盧)를 마두성주로, 백자(白子)를 상문대사로, 가수(加樹)를 호성병관으로 삼았고, 지소례의 처 가해(加亥)를 군모(軍母)로, 번오의 처 갈명(曷名)을 마모(馬母)로 삼았는데 모두 성부의 딸이다.
七月 權妻毛多生 上女毛利 上洗之
7월 권처 모다(毛多)가 왕의 딸 모리(毛利)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上幸稟主美禮 于摩帝宅 摩帝餉其軍臣 而榮之
왕이 품주 미례(美禮)에게 행차하여 마제댁으로 왔다. 마제가 자신의 장수들에게 군량을 보내며, 영예롭게 여겼다.
八月 道生生 聖父子多婁 上臨其洗 見聖父大臂肉脹脅力益壯 而佳之 曰 “不下於新軍頭可知 道生之福也” 聖父曰 “臣一食盡兩彘肩 一房行五色 使戟百斤 跨馬若飛 何比新軍頭乎” 上壯其言 賜酒 醉歡 道生亦喜 抱兒而歌之
8월 도생(道生)이 성부의 아들 다루(多婁)를 낳았다. 왕이 아기를 씻기는 것을 대면하고, 성부가 (아직도) 팔뚝 힘이 넘치고, 근육에 살이 찌고, 옆구리 힘이 점점 더해져 씩씩해짐을 보고, 아름답게 여겨 말하기를 “신군부의 우두머리 장수보다 (힘이) 아래가 아님을 가히 알겠다. 도생의 복이다”라고 말하였다. 성부가 말하기를 “신은 한번의 식사에 돼지의 양어깨를 먹으며, 한 침실에서 다섯 번을 행할 수 있고, 백 근의 창을 사용할 수 있고, 말을 나는 것처럼 뛰어넘을 수 있는데 어찌 신군부의 장수들과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장하다고 여겨 술을 내리니 취하여 기뻐하였다. 도생이 역시 기뻐하며 아기를 안고 노래를 불렀다.
九月 穀大登 行大場 于南郊
9월 곡식이 창고에 가득 찼다.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召文獻 美女八人 宝馬三雙
10월 소문(召文)이 미녀 8명과 보마 3쌍을 바쳤다.
摩帝享 上及史后聖父阿世道生
마제가 왕과 사후, 성부, 아세, 도생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十一月 崔好爲一牟城主 离己爲所利城主 赤旨爲牛頭城主 皆以骨女妻之
11월 최호(崔好)를 일모(一牟)성주로, 이기(离己)를 소리(所利)성주로, 적지(赤旨)를 우두(牛頭)성주로 삼았는데 모두 골녀(骨女)를 처로 삼았다.
≪견해≫ 3개의 성(城) 모두 백제와 연관이 있는 성이다.
十六年 正月 史后生 上女婁生 上爲之延朝
16년(A.D.141) 정월 사후가 왕의 딸 루생(婁生)을 낳았다. 왕이 (구실삼아) 조회를 미루었다.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摩帝爲五軍都護使
길문을 이벌찬으로, 감생을 품주로, 마제를 5군도호사로 삼았다.
二月 艾好生 聖父子艾老 賜米
2월 애호(艾好)가 성부의 아들 애노(艾老)를 낳아 쌀을 내렸다.
三月 上與史后 受新朝 于南桃
3월 왕과 사후가 남도(南桃)에서 (새로운) 조회를 받았다.
以車門爲護城大師 啓其爲京路軍事 加大爲軍母 以耆盧聶公爲理方大師 支所禮爲別軍使 君乙爲加召城主 長世爲大城大師
차문(車門)을 호성대사로, 계기(啓其)를 경로군사로, 가대(加大)를 군모로, 기노(耆盧)와 섭공(聶公)을 이방대사로, 지소례를 별군사로, 군을(君乙)을 가소성주로, 장세(長世)를 대성대사로 삼았다.
仙老屈公薨 以角干禮葬之 屈公者心公之子也 性淸閑 好神仙 壽至七十六 及其仙化 身體如玉 人多奇之
선노(仙老) 굴공(屈公)이 죽어 각간례로 장사를 지냈다. 굴공이라는 사람은 심공(心公)의 아들인데, 성품이 조용하고 여유로우며 신선을 좋아하였다. 수명이 76세에 이르러. 선화(仙化, 신선 따위가 죽음을 이르는 표현)됨에 이르니 신체가 마치 옥(玉)과 같아서 기이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十七年 正月 以允良爲伊伐飡 果老爲稟主 啓其爲水路軍事 加大爲水母 吉門爲京路軍事
17년(A.D.142) 정월 윤량(允良)을 이벌찬으로, 과노(果老)를 품주로, 계기(啓其)를 수로군사로, 가대(加大)를 수모(水母, 계기의 처)로, 길문(吉門)을 경로군사로 삼았다.
二月 上與史后 宴宗老閼智神君及阿婁大母 聞古所夫里有二百歲老翁 親幸問年 賜之年穀及肉 骨夂生 上女骨花 命德公洗之
2월 왕과 사후과 종노(宗老) 알지신군(閼智神君)과 아루대모(阿婁大母)를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 고소부리(古所夫里)에 200세의 노옹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이 친히 행차하여 나이를 묻고 나이만큼 곡식과 고기를 하사하였다. 골치(骨夂)가 왕의 딸 골화(骨花)를 낳았다. 왕이 덕공(德公)에게 아기를 씻기도록 명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14년 기사
14년 정월 윤량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계기를 파진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왕이 고소부리군에 행차하여 나이 많은 백성을 직접 위문하고 곡식을 주었다.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견해≫ 1. 남당유고 미추이사금기에는 아루(阿婁)를 세한의 어머니라 하고, 내물이사금기에서는 아호(阿好)를 세한의 어머니라 한다.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아루(阿婁)는 알영의 딸이고, 아호(阿好)는 남해의 딸인 아효(阿孝)의 딸이다.
2. 고소부리(古所夫里)와 소부리(所夫里, 백제 사비)는 이름이 비슷하다.
七月 稟主果老腹通 前夫君己 事發 允良請免 上不許 允良請改稟主 聖父怒勸上 以君己爲伊伐飡 復妻果老 流允良于卞山
7월 품주 과노(果老)가 전 남편 군기(君己)와 배가 맞았다. 일이 드러나자 윤량(允良)이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량이 품주를 바꾸어 주기를 청하자 성부가 노하여 왕에게 (사직을 받아주기를) 권하였다. 이 때문에 군기를 이벌찬으로 삼고 과노를 다시 처로 하였다. 윤량을 변산(卞山)으로 귀양을 보냈다.
十月 京都大震 家頹山壞 人言允良之寃 上乃請于聖父 召允良歸京
10월 수도에 대지진이 있어 집이 넘어지고 산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윤량(允良)이 원통해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이 이에 성부에게 청하여 윤량을 불러 수도로 돌아오게 하였다.
十八年 正月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君己爲聖父私臣 車門爲京路軍事 妻以果老 勢漢爲護城大師 古乙爲大倉大師
18년(A.D.143) 정월 길문을 이벌찬으로, 감생을 품주로, 군기(君己)를 성부사신으로, 차문(車門)을 경로군사로, 과노(果老)를 (차문의) 처로, 세한(勢漢)을 호성대사로, 고을(古乙)을 대창대사로 삼았다.
二月 加耶反賊圍馬頭城 以吉元爲征虜將軍 率京騎一千 與南路 來攻大破之 上嘉吉元功 拔爲南路軍事 妻以沙乙那 初吉元臨發 聖父使 沙乙那洗足 而送之 曰 “汝若得勝而歸 當以此女賞之” 至是 沙乙那 請歸吉元 聖父曰 “㫰所言者 戱言也 吾安可一日無汝乎” 沙乙那曰 “聖人無戱言 況國家大事乎” 聖父笑 曰 “吾已老矣 汝之欲就少者 無怪矣” 聖父乃與庚元 主其吉 于鮑祠
2월 가야반적(加耶反賊)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였다. 길원(吉元)을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삼아 경기(京騎) 1천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남로군사가 오자 함께 공격하여 크게 쳐부쉈다. 왕이 길원의 빼어난 공을 기뻐하며 남로군사로 뽑고, 사을나(沙乙那)를 시집보냈다. 처음 길원이 출발함에 임하여, 성부가 사을나에게 (길원의) 발을 씻기도록 하였다. (길원을) 보내며 말하기를 “네가 만약 승리를 얻고 돌아온다면, 마땅히 이 여자를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이 때에 사을나가 길원에게 시집가기를 청하자, 성부가 말하기를 “햇볕이 있는 곳에서 한 약속은 우스갯소리다. 내가 어찌 네가 없이 하루라도 살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사을나가 말하기를 “성인은 거짓약속을 하지 않는다. 하물며 국가의 대사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성부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이미 늙었으니, 네가 젊은 사람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고 하였다. 성부가 이에 경원(庚元, 길원의 母)과 포사(鮑祠)에서 결혼을 주재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15년 기사
15년 2월, 가야의 적군이 마두성을 포위하자 아찬 길원을 보냈다. 길원은 기병 1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격퇴하였다.
8월, 알천에서 군대를 사열하였다.
長世爲加召城主 君乙爲井頭
장세(長世)를 가소성주로, 군을(君乙)을 정두(井頭)로 삼았다.
以發良爲別軍事 大公爲神官阿飡 妻以史后女那生 行吉 鮑祠
발량(發良)을 별군사(別軍事)로, 대공(大公)을 신관아찬(神官阿飡)으로, 사후의 딸 나생(那生)을 (대공의) 처로 삼아, 포사(鮑祠)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昔公爲大城大師
석공(昔公)을 대성대사(大城大師)로 삼았다.
六月 漢烏入朝 請免 上不許
6월 한오(漢烏, 수주태수)가 입조하여 사직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八月 大閱 于閼川
8월 알천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德公宅新成 上親幸 賜骨夂紫衣宝佣 以五色車載骨花 上親曳之 骨夂後扶之 出視諸女 曰 “汝等幼時 皆如此愛” 諸女乃輿上 稱壽 曰 “父今貴爲天子 力能絶倫 性不喜色 吾等無以舞報 願以剪髮爲 報以獻骨夂” 上許之 命宅師令 新諸女宅
덕공(德公)의 집을 새로 지었다. 왕이 친히 행차하여 골치에게 자의(紫衣)와 보용(宝佣, 장난감)을 내리고, 오색의 수레에 골화(骨花, 파사와 골치의 소생)를 실었다. 왕이 친히 이끌고, 골치가 뒤에서 떠받쳤다. 나오는 것을 딸들에서 보이며 (왕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렸을 때 모두 이처럼 사랑하였다”고 하였다. 딸들이 이에 수레에 오르며 장수를 기리며 말하기를 “부왕의 존귀함은 천자로 삼을 만하고, 능력이 절륜(絶倫, 두드러지게 뛰어남)하나, 성품이 색(色)을 좋아하지 아니하니 우리들이 춤으로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머리카락을 자름을 소망하니, 골치에게 (골화의 머리카락을) 바치어 보답하고자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택사령(宅師令)에게 명하여 딸들의 집을 새로 지어주도록 명하였다.
穀公私行召文 命送扶持
곡공(穀公)이 사사로이 소문(召文)으로 갔다. 고생이나 어려움을 견디어 물리치라고 명하였다.
≪용어≫ 부지(扶持) : 고생이나 어려움을 견디어 배김
十九年 正月 以摩帝爲伊伐飡 美禮爲稟主 吉門爲都護使 支所禮爲南路軍事 樊五爲京路軍事 加亥曷名爲軍母 吉元爲馬政大師 沙乙那爲馬母 車門允良爲別軍使
19년(A.D.144) 정월 마제를 이벌찬으로, 미례를 품주로, 길문을 도호사(都護使)로, 지소례를 남로군사로, 번오(樊五)를 경로군사로, 가해(加亥)와 갈명(曷名)을 군모로, 길원을 마정대사로, 사을나를 마모로, 차문과 윤량을 별군사로 삼았다.
上幸美禮 于政堂 上自昨冬 累幸摩帝宅 寵愛美禮 復其稟主 至是命入常侍 賜權妻毛多 于摩帝 以爲密妻
왕이 미례에게 행차하여 정당(政堂)으로 갔다. 왕이 작년 겨울부터 마제의 집으로 누차로 행차하였다. 미례를 총애하는 바가 있어 품주의 직위를 번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들어와 (왕을) 항상 모실도록 명하였다. 권처(權妻) 모다(毛多)를 마제에게 주어 밀처(密妻)로 삼게 하였다.
五月 以君乙爲水路軍事 以權妻多利妻之 多利爲君乙之侄 情皃相似 潛通于井 而有娠 上許 與之吉 上召伊利生 主之 是日以允良爲井頭 啓其爲別軍使
5월 군을(君乙)을 수로군사로 삼고, 권처 다리(多利)를 처로 삼게 하였다. 다리는 군을의 조카로 삼았는데, 뜻과 모습이 서로 닮았다. 정(井)에서 잠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왕이 (군을과 더불어) 결혼함을 승낙하였다. 왕이 이리생(伊利生)을 불러 결혼을 주재하도록 하였다. 이날 윤량(允良)을 정두(井頭)로, 계기(啓其)를 별군사(別軍使)로 삼았다.
≪견해≫ 군을(君乙)과 다리(多利) 어떻게 숙질간이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상장돈장에 군을은 대수(大樹)의 아들이고, 상장돈장에서 다리의 계보도를 찾지 못했다. 신라사초 192년 2월 기사에 다리는 일성이사금(윤공과 이리생의 아들)의 누나라고 하고, 위의 기사에서 결혼을 주재한 이가 이리생(伊利生)이라 하므로, 다리가 이리생의 딸이라고 추측된다. 이리생은 대수의 딸이다. 과연 상장돈장은 남당 박창화 선생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쓴 계보도가 맞을까?
七月 居陀君斯牟遣使 稱臣曰 “臣父節公臨崩 命臣 朝我祖國 今遣河波等上貢 請以骨女妻 臣以爲南藩” 上嘉其節 命以半阿妻之 賜爵阿飡 賜其母胡母大紫衣
7월 거타군(居陀君) 사모(斯牟)가 사신을 보내, 칭신(稱臣)하며 말하기를 “신의 부친 절공(節公)이 죽음에 임하여 신에게 우리 조상의 나라(신라)를 알현하도록 명하여, 지금 하파(河波) 등을 보내어 공물을 올리니, 골녀(骨女)에게 장가들기를 청하옵고 ,신으로 하여금 남번(南藩)이 삼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그 절개를 아름답다 여기고, 반아(半阿)를 시집보내도록 명하고, 아찬의 벼슬을 내렸다. 그 어머니 호모(胡母)에게 대자의(大紫衣)를 내렸다.
≪견해≫ 이 기사는 145년 9월 가야와의 전쟁 원인이 되고, 487년 10월에는 거타(居陀)와 아라(阿羅)가야의 국경분쟁기사가 있다.
九月 以順貞角干爲六部頭上 彡善仙母頭上
9월 순정(順貞)각간을 6부두상으로, 삼선(彡善)을 선모두상으로 하였다.
二十年 正月 發良爲伊伐飡 干時爲稟主
20년(A.D.145) 정월 발량(發良)을 이벌찬으로, 간시(干時)를 품주로 삼았다.
七月 大風三日 大井南神樹 自倒 命巫祓之
7월 큰바람이 3일 동안 불었다. 대정(大井)의 남쪽 신령스러운 나무가 스스로 넘어져 무당에게 푸닥거리를 하도록 명하였다.
九月 加耶女與半阿 爭位 加耶襲居陀 長世聞 急救之戰沒 上怒 命吉門率京騎一千 引南水勇士五千 三路掩殺 大獲勝利
9월 가야녀와 반아(半阿)가 자리를 다투었다. 가야가 거타(居陀)를 습격하였다. 장세(長世, 가소성주)가 소식을 듣고 급히 구하러 갔으나 전쟁 중에 사망하였다. 왕이 노하여 길문에게 경기(京騎) 1천을 거느리고 가게하여 (길문이) 남로, 수로의 병사 5천을 끌어들여 3로(경로, 남로, 수로)의 병사가 별안간 엄습하여 죽이고, 많은 포로를 잡아 승리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17년 기사
17년 7월 남쪽에서 폭풍이 불어와 금성 남쪽에 있는 큰 나무가 뽑혔다.
9월 가야 사람들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다. 성주 장세를 보내 방어토록 하였으나, 그가 전사하였다. 왕이 노하여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그들을 물리쳤다. 노획한 물자가 매우 많았다.
十月 上與美禮 入冬宅 愛有公稟主 干時妬之 曰 “妾以承寵稟主 反屈於前稟乎” 上曰 “汝亦生子 如此 則當如此” 干時曰 “人言 夫今不好色 我謂大好色” 上怒 復以美禮爲稟主 摩帝伊伐飡 流發良干時 于推火
10월 왕과 미례(美禮)가 동택(冬宅)으로 들어왔다. 사랑함이 있어 공적으로 품주의 예로 대하였다. 간시(干時)가 시새움하며 말하기를 “첩이 총애를 계승하여 품주가 되었는데, 반대로 전 품주에게 굽힐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너도 역시 아들을 낳으면 이처럼 대할 것이다. 곧 마땅히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간시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금(夫今, 왕은 품주는 君夫)은 색을 좋아하지 않으나, 나에겐 대호색(大好色)하다고 합니다.” 왕이 노하여 다시 미례를 품주로, 마제를 이벌찬으로 삼고, 발량(發良)과 간시를 추화(推火)로 유배를 보냈다.
二十一年 正月 吉門將伐加耶 其世主正見 遣其次子朱日 謝罪 願世世爲藩 上命朱日留都 召吉門歸
21년(A.D.146) 정월 길문이 장차 가야를 치려하자, 가야의 세주(世主) 정견(正見)이 둘째아들 주일(朱日)을 보내어 사죄하고, 세세대로 번국이 되기를 원하였다. 왕이 주일에게 경도에 머물도록 명하고, 길문을 불러 돌아오도록 하였다.
≪비교≫ 1.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18년 기사
18년 정월 군사를 동원하여 가야를 치려하였으나, 그 임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2.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한바 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美禮生 上子馬公 上洗之
미례(美禮)가 왕의 아들 마공(馬公)을 낳아 왕이 그 아기를 씻겨주었다.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甘生爲稟主 召發良干時歸京 先是 吉門出 在推火 復通干時 歸 告于上 曰 “干時流涕言 過大悔前非” 云 故放之也
3월 길문을 이벌찬으로, 감생을 품주로 하였다. 발량과 간시를 불러 경도로 돌아오게 하였다. 앞서 길문이 나가서 추화(推火)에 있을 때 다시 간시와 통하고 돌아왔는데, 왕에게 고(告)하여 말하기를 “간시가 눈물을 흘리며 지난날의 잘못을 크게 후회한다고 다짐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유배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五月 以吉元爲京路軍事 沙乙那爲軍母 樊吾爲馬政大師 曷名爲馬母
5월 길원(吉元)을 경로군사로, 사을나(沙乙那)를 군모로, 번오(樊吾)를 마정대사로, 갈명(曷名)을 마모로 삼았다.
二十二年 三月 以摩帝爲伊伐飡 美禮爲稟主 樊五爲京軍事 吉元爲南軍事 支所禮軍(爲)西軍事 晉公爲骨門伊飡 吉門爲中外大軍事
22년(A.D.147) 3월 마제를 이벌찬으로, 미례를 품주로, 번오를 경군사로, 길원을 남군사로, 지소례를 서군사로, 진공을 골문이찬으로, 길문을 중외대군사로 삼았다.
五月 摩帝吉門奏 曰 “太聖上天已久 許婁以道生爲妻 尙尊聖父僣矣 臣等皆 以陛下赤子 安敢以陛下爲子乎” 上不許 齊居勢漢等亦 贊其奏 許婁見機請罪 上乃以聖父爲太公 以齊居勢漢左右上輔 摩帝吉門爲左右大相 先時吉元妻沙乙那 若許婁召幸 求出南路 許婁乃奪沙乙那 而不許同赴 吉門亦與沙乙那 相通有娠 吉門請 使同赴 則許婁怒 曰 “爾父子 以吾之恩得貴 而奪我寵姬 聚麀交娠 可以流汝” 吉門乃與摩帝結託 曰 “今天下之權 有在我等二人 互相依託 何事不成” 摩帝素有異志 故許之 許婁乃解軍 神之權 時大旱月餘 祈而無雨 聖父去號 天大雨 人皆曰大刀雨
5월 마제와 길문이 아뢰어 말하기를 “태성(太聖, 아리)이 하늘로 올라감이 이미 오래입니다. 허루는 도생(道生, 파사의 딸)을 부인으로 삼았는데, 오히려 성부로써 숭상됨에 참람함이 있습니다. 신들은 모두 폐하의 적자(赤子, 어린 아기, 백성)인대, 어찌 감히 폐하를 자식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나, 제거(齊居)와 세한(勢漢) 등 역시 그 상소를 도왔다. 허루가 기회를 엿보다 죄를 빌었다. 왕이 이에 성부를 태공(太公)으로 삼았다. 제거와 세한을 좌우상보(左右上輔)로, 마제와 길문을 좌우대상(左右大相)으로 삼았다. 앞서 길원의 처 사을나가 허루가 불러 행차함을 약속하여, (사을나가) 남로를 나옴을 구하였다. 허루가 이에 사을나를 빼앗아, (길문이 사을나와) 함께 (관직에) 나아감을 허락하지 않았다. 길문 또한 사을나와 상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길문이 (사을라로) 하여금 함께 나아가기를 청탁하였다. 성부가 곧 화내며 말하기를 “너희 부자는 나의 은혜를 입어 귀하게 되었으나 나의 총애를 받는 계집 암사슴(麀)과 함께 사귀어 임신을 시켰다. 너는 유배를 가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길문이 이에 마제와 결탁하여 말하기를 “지금 천하의 권력은 우리 두 사람 등에게 있으니, 서로 몸과 마음을 의지하면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제가 본디 다른 뜻이 있었던 까닭으로(140년 3월의 기사참조) 승낙하였다. 허루는 이에 군사적 충돌을 풀고 신의 권능으로 당시 한 달여 동안 크게 가물어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비가 오지 않았다. 성부가 떠나기를 부르짖자, 하늘에서 큰비가 왔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도우(大刀雨)라 하였다.
二十三年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沙乙那爲稟主 以摩帝女茶耶 妻吉元 以甘生干時爲吉門密妻 摩帝爲中外大軍事 美禮爲大軍母
23년(A.D.148) 3월 길문을 이벌찬으로, 사을나를 품주로, 마제의 딸 다야(茶耶)를 길원에게 시집보내고, 감생과 간시를 길문의 밀처로 삼았다. 마제를 중외대군사로, 미례를 대군모로 삼았다.
七月 以吉元爲京軍事 樊五爲南軍事 沙乙那思吉元 欲歸南軍 故召之地
7월 길원을 경군사로, 번오를 남군사로 삼았다. 사을나가 길원을 사모하여, 남군(南軍)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그 경(도)로 불렀다.
二十四年 三月 摩帝爲伊伐飡 美禮爲稟主 吉門爲中外大軍事 沙乙那爲大軍母
24년(A.D.149) 3월 마제를 이벌찬으로, 미례를 품주로, 길문을 중외대군사로 사을나을 대군모로 삼았다.
五月 月瓠卒 以角干禮葬之 瓠性精敏勤厚 不爭功名 只帶頭上虛位 而不介于意 惟以國家爲念開 導少壯 人皆惜其卒
5월 월호(5군두상)가 죽어 각간례로 장사 지냈다. (월)호는 성품은 정민(精敏, 자세하고 민첩함)하고 근후(勤厚, 부지런하고 온후함)하여, 공명(功名)을 다투지 않았다. 다만 두상(頭上)이라는 형식적인 직위를 차고 있어서, 의사결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라를 위한 생각만은 열어두어, 젊은 장수들을 이끌었다.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아까워하였다.
以五軍頭上爲左右頭上 以白馬爲左 車門爲右 以允良爲北軍事 妻吉門女成門 發良爲水酒太守 漢烏爲別軍事
이로써 5군두상(五軍頭上)을 좌우두상(左右頭上)으로 나누고, 백마(白馬)를 좌(두상)으로, 차문(車門, 길문의 형제)을 우(두상)으로, 윤량(允良)을 북군사로 하여 길문의 딸 성문(成門)을 시집보내고, 발량을 수주태수로, 한오(漢烏)을 별군사로 삼았다.
七月 大雹 殺鳥群 于推火 命還朱日 于加耶 其妻靑氏正子 同歸
7월 추화(推火)에서 우박이 내려 새떼가 죽었다. 주일(朱日)을 가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그의 처 청씨(靑氏)와 아들이 함께 돌아갔다.
十月 大震 破屋傷命 上躬訪宗老太公 責己
10월 대지진이 발생하여, 집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왕이 몸소 종노(宗老, 알지신군)와 태공(太公 허루)을 방문하고, 자신을 책망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1년 기사
21년 7월 우박이 내려 날던 새가 죽었다.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민가가 쓰러지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二十五年 正月 加耶世主 遣其三子靑裔 入朝
25년(A.D.150) 정월 가야세주(加耶世主, 정견)가 그 셋째아들 청예(靑裔)를 보내어 입조하였다.
≪견해≫ 540년 5월 기사에 수로(首露)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 수로(首露)가 청예(靑裔)를 말하는지, 그 조상중의 한분을 말하는 지 알 수 없다.
三月 以吉門爲伊伐飡 茶耶爲稟主 沙乙那愛吉元 而不肯爲稟主 上許其志 遂以茶耶代之 摩帝爲中外大軍事 美禮爲大軍母
3월 길문을 이벌찬으로 삼고 다야(茶耶)를 품주로 삼았다. 사을나가 길원을 사모하여 품주로 삼은 것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왕이 그 뜻을 허락하고, 다야가 대신하게 되었다. 마제를 중외대군사로 삼고 미례를 대군모로 삼았다.
十二月 音汁伐與悉直谷爭界 王命其地老辨之 地老曰 “加耶王子靑裔多智 可以立議” 上許之
12월 음즙벌(音汁伐)과 실직곡(悉直谷)이 경계를 다투었다. 왕이 그 땅의 노인들로 하여금 (경계를) 변별하도록 하였다. 노인들이 말하기를 “가야왕자 청예(靑裔)가 지혜가 많으니 그의 의견으로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 기사
23년 8월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국경 문제로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결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왕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불러와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집벌국에 주도록 하였다. 이에 왕은 6부로 하여금 수로왕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5부는 모두 이찬으로 우두머리를 삼았는데, 오직 한기부만이 직위가 낮은 자를 우두머리로 삼았다. 수로가 노하여 그의 종 탐하리를 시켜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다. 보제의 종이 도망하여 음집벌주 타추간의 집에 의탁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가 돌려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음집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자기의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압독 두 나라 왕이 항복해왔다.
≪견해≫ 음즙벌(音汁伐)과 실직곡(悉直谷)은 나라이름이 아니다. 실직곡(悉直谷)은 실직국, 음즙벌(音汁伐)은 압독국의 영토다.
汗門爲京都兵官 汗兒子也
한문(汗門)을 경도병관으로 삼았는데, 한아(汗兒)의 아들이다.
二十六年 二月 靑裔巡遊六部 部氓以其神智聚觀之 部主皆以伊干迎之厚饗 漢祇主保齊 獨以家奴接之 甚薄 靑裔之臣耽下里恥之 殺其奴 逃依音汁伐主 上命索之不應 命吉元伐之 以爲郡
26년(A.D.151) 2월 청예(靑裔)가 6부를 순찰하며 유람하였다. 부맹(部氓, 部의 서민)들이 그의 신지(神智, 영묘한 지혜)를 살펴보러 모여들었다. 부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이간(伊干, 지방벼슬로 추측)으로 후하게 잔치를 열어 맞이하였는데, 한지(漢祇)부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만이 홀로 가노(家奴)로 접대하여 심히 박하게 대하였다. 청예의 신하인 탐하리(耽下里)가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그 노비를 살해하였다. (탐하리가) 음즙벌주(音汁伐主)에게 도망하여 의지하였는데, 왕명으로 (탐하리)를 찾았으나 응하지 아니하였다. 길원에게 음즙벌을 벌하도록 명하여, 군(郡)으로 삼았다.
悉直君奉治押督君王乙 皆以其地納之
실직군(悉直君) 봉치(奉治)와 압독군(押督君) 왕을(王乙)이 모두 그 땅을 바쳤다.
三月 摩帝爲伊伐飡 吉門爲中外大軍事
3월 마제를 이벌찬으로, 길문을 중외대군사로 삼았다.
九月 穀大登
9월 곡식이 창고에 가득 찼다.
加樹爲馬頭城主
가수(加樹)를 마두성주로 삼았다.
十月 桃李皆華 誦歌連野
10월 복숭아와 오얏(자두)꽃이 호화로웠다. 들판에서 노래를 읊는 소리가 이어졌다.
二十七年 正月 大軍事吉門爲賊所弑 上痛哀之 葬以角干禮 以摩帝爲中外大軍事 吉元爲伊伐飡 沙乙那爲稟主 茶耶爲祖主 君乙爲京軍事 啓其爲水路軍事 虹盧爲南軍事
27년(A.D.152) 정월 대군사 길문이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길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각간(角干)례로 장사지냈다. 이 때문에 마제를 중외대군사로, 길원을 이벌찬으로, 사을나를 품주로, 다야를 조주(祖主)로, 군을을 경군사로, 계기(啓其)를 수로군사로, 홍노(虹盧)를 남군사로 삼았다.
三月 以支所禮爲伊伐飡 吉元爲西軍事 沙乙那爲摩帝密妻 茶耶爲西軍母
3월 지소례를 이벌찬으로, 길원을 서군사로, 사을나를 마제의 밀처로, 다야를 서군모로 삼았다.
四月 以摩帝女愛禮爲祇摩太子妃 上與美禮主吉 于神井 太子兵官玉權爲韓飡
4월 마제의 딸 애례(愛禮)를 지마태자비(祇摩太子妃)로 삼았다. 왕과 미례(美禮)가 신정(神井)에서 그 혼사를 주재하였다. 태자병관 옥권(玉權)을 한찬으로 삼았다.
十月 以吉元爲左頭上 樊五爲右頭上 白馬爲西軍事 車門爲別軍事
10월 길원을 좌두상으로, 번오를 우두상으로, 백마를 서군사로, 차문을 별군사로 삼았다.
二十八年 正月 星隕如雨 不至于地 史后有疾 上減膳自責
28년(A.D.153) 정월 별들이 비처럼 떨어졌으나 땅에 이르지는 않았다. 사후가 병이 들어 왕이 반찬을 줄이며 자책하였다.
吉元伊伐飡 茶耶稟主 支所禮左頭上 太子太師昌永加爵匝判
길원을 이벌찬으로, 다야를 품주로, 지소례를 좌두상으로, 태자태사(太子太師) 창영(昌永)에게 잡판의 직위를 더하였다.
三月 崔好請娶扶余芍平女 許之
3월 최호(崔好, 일모성주)가 부여 작평(芍平)의 딸에게 장가들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하였다.
七月 奉治卒 其臣牟斗等作亂 支所禮討平之 徙其衆 于南鄙各地
7월 봉치(奉治, 悉直君 혹은 悉直太守라고 섞여 쓰였다)가 죽어 그의 신하 모두(牟斗)가 난을 일으켜 지소례가 쳐서 평정하였다. 남은 그 무리들을 남쪽 시골 각지에 옮겨 살도록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5년 기사
25년 정월 많은 별들이 비오듯 떨어졌으나, 땅에 이르지는 않았다.
7월 실직이 배반하자 군사를 보내 토벌 평정하고, 남은 무리를 남쪽 변경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十月 樊五伊伐飡 曷名稟主 吉元右頭上
10월 번오를 이벌찬으로, 갈명(曷名)을 품주로, 길원을 우두상으로 삼았다.
二十九年 正月 扶余獻其骨女二人 請和 許之
29년(A.D.154) 정월 부여가 골녀(骨女) 2명을 바치며 화해를 청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二月 雪深三尺 兩山不通 加童三十人
2월 눈이 3자 깊이로 내려, 양산(兩山, 地名은 아닌 듯, 두개의 산)이 불통되었다. 어린아이 30명을 더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6년 기사
26년 정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였다.
2월 서울에 석 자 깊이의 눈이 내렸다.
六月 支所禮伊伐飡 加亥稟主 樊五左頭上
6월 지소례를 이벌찬으로, 가해(加亥)를 품주로, 번오를 좌두상으로 삼았다.
≪견해≫ 支所禮伊伐飡는 支所禮爲伊伐飡를 생략한 표현이다.
勾利與遼 大戰 取其地爲郡
구리(勾利, 고구려)와 요(遼, 거란)가 크게 싸웠다. 그 땅을 취득하여 군(郡)으로 삼았다.
≪견해≫ 요(遼)나라의 건국은 907년의 사실이다. 당시에도 요(遼)나라라는 명칭이 쓰였는지 의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이런 기사를 찾을 수 없다.
三十年 正月 稟主加亥病免 上以愛女毛利 命爲稟主
30년(A.D.155) 정월 품주 가해(加亥)가 병이 들어 사직하였다. 왕이 사랑하는 딸 모리(毛利)를 품주로 삼기를 명하였다.
≪견해≫ 이벌찬 지소례(支所禮)와 품주 모리(毛利)는 지진내례의 어머니이다. 지진내례는 일성이사금과 사이에서 아달라이사금을 낳고, 석추갈문왕과 사이에서 벌휴이사금을 낳는다. 지진내례의 출생기사가 없고, 사망기사에 나이를 적어 두지 않아 태어난 해를 알 수 없으므로, 위의 기사에서 대략적인 출생시기의 파악이 가능하다.
上與史后幸押督 賑民
왕과 사후가 압독(押督)으로 행차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三月 上還都 以吉元爲伊伐飡 茶耶稟主 支所禮右頭上
3월 왕이 (경)도로 돌아왔다. 길원을 이벌찬으로, 다야를 품주로 하고, 지소례를 우두상으로 하였다.
七月 大蝗 王遍祭 神山大川而禳之 曰 “朕德衰歟 臣下奸歟 昨夏大水 十道民饑 今此大蝗 奈蒼生 何果蝗減 而有年” 時閼智神君薨 上臨之則 曰 “臣以宗老 無有上報 昇天 則可以除蝗” 果以薨日之夜 臭雨大降 虫自除 而穀大醒 故人曰 閼智穀 立其廟 于南郊
7월 메뚜기 떼가 창궐 하였다.왕이 두루 신산(神山)과 대천(大川)에서 제사를 지내어, 푸닥거리를 하며 말하기를 “짐의 덕이 쇠하였는지, 신하 중에 간사한자가 있는지, 작년 여름에는 큰물이 져서 10도의 백성들이 굶주리더니, 지금은 이처럼 메뚜기 떼가 창궐할 수가 있는가. 어떠한 결과로 메뚜기 떼가 감소한 해가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이때 알지신군이 죽었다. 왕이 알지신군의 죽음을 대면하자, (알지)가 말하기를 “신(臣)은 종노(宗老)로써 왕의 (은혜에) 보답함이 있지 않습니다. 하늘에 오르면 곧 메뚜기를 없애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과로 알지신군이 죽은 밤에 몹시 큰 비가 내렸다. 메뚜기들이 스스로 없어지고 곡식들이 깨어났다. 그러한 까닭으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지곡(閼智穀)이라 하였다. 알지신군의 사당을 남교(南郊)에 세웠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9년, 30년 기사
29년 5월에 홍수가 났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10도에 사신을 보내 창고를 열어 구제토록 하였다. 군사를 보내 비지국·다벌국·초팔국을 정벌하여 합병하였다.
30년 7월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쳤다. 왕이 산천에 두루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렸다. 메뚜기 떼가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八月 比只與多伐草八 作亂 命虹盧加樹 討平之 比只太子宝日 戰沒 次子朱日自召文還 主和 其弟靑裔 奔于金官
8월 비지(比只), 다벌(多伐), 초팔(草八)이 함께 난을 일으켜 홍노(虹盧, 남로군사)와 가수(加樹, 마두성주)에게 명하여 평정하였다. 비지의 태자 보일(宝日)이 전쟁 중에 사망하고, 둘째 주일(朱日)은 소문(召文)으로부터 돌아가 화친을 주장하고, 동생 청예(靑裔)는 금관(金官)로 도망쳤다.
≪견해≫ 비지(比只)는 162년 5월 기사에 재등장하고, 초팔(草八)는 포상(浦上)8국 중 1국이라 하므로, 당시에 모두 신라에 병합된 것은 아니다.
十二月 太公許婁薨 上與史后痛哀之 以尼今禮葬之 追尊爲葛文王 其妃道生 欲赴殉地 摩帝扶之 曰 “何不爲新太公生子” 上知摩帝意 乃以摩帝爲太公 吉道生 于神井 爲妃 是日 以樊五伊伐飡 曷名稟主 吉元左頭上
12월 태공 허루가 죽어, 왕과 사후가 애통해 하였다. 이로써 니금례(尼今禮)로 장사지내고 갈문왕으로 추존하였다. 허루의 비(妃) 도생(道生)이 따라 죽는 장소로 나아가려고 하였다. 마제가 곁에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신태공(新太公)의 아들을 낳으려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마제의 뜻을 알아듣고 이에 마제를 태공으로 삼았다. 도생이 신정(神井)에서 결혼을 하고 (마제의)비로 삼았다. 이날 번오를 이벌찬으로, 갈명(曷名)을 품주로, 길원을 좌두상으로 삼았다.
≪견해≫ 尼今과 王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三十一年 正月 上與史后 祭火神 于井中
31년(A.D.156) 정월 왕과 사후가 정중(井中)에서 화신(火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以摩帝次子莫兮爲京軍事 君乙爲北軍事 以支所禮女加車爲莫兮妻 行京軍母 以玉君之子玉權爲護城大師 尹公之子逸聖爲太子兵官 使屬祇摩 日知之子馬日爲殿中郞 昌永爲大井大師神籬將軍 命督三軍 乃京路護城太子之軍也
마제의 둘째아들 막혜(莫兮)를 경군사로, 군을을 북군사로, 지소례의 딸 가거(加車)를 막혜의 처로 하여 경군모(京軍母)직을 행하게 하였다. 옥군(玉君)의 아들 옥권(玉權)을 호성대사로, 윤공(尹公)의 아들 일성(逸聖)을 태자병관으로 하여 지마(祇摩)에게 속하여 부리게 하였다. 일지(日知)의 아들 마일(馬日)을 전중랑으로, 창영(昌永)을 대정대사(大井大師) 신리장군(神籬將軍)으로 삼아 삼군을 살펴보게 하였다. 삼군(三軍)은 이에 경로(京路), 호성(護城), 태자의 군대를 말한다.
狗壤主河己卒 子屯己立
구양(狗壤)의 우두머리 하기(河己)가 죽어, 아들 둔기(屯己)가 섰다.
≪견해≫ 구양(狗壤)은 백제와의 변경이다.
二月 上命祇摩太子與妃愛禮 聽政 摩帝率百僚 朝于大井
2월 왕이 지마(祇摩)태자와 (태자)비 애례(愛禮)에게 나랏일을 듣도록 명하였다. 마제가 백료(百僚=百官, 모든 벼슬아치)를 거느리고, 대정(大井)에서 조회를 하였다.
三月 祇摩太子 宴摩帝美禮 于大井 太子謂美禮 曰 “爾女已娠我子 可以繼天 但我無威難 制天下何” 美禮大喜 曰 “汝乃吾女之愛夫 與吾一體也 可以大符委之也” 摩帝亦醉 而許之
3월 지마(祇摩)태자가 대정(大井)에서 마제와 미례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자가 미례에게 까닭을 말하기를 “당신의 딸은 이미 나의 자식을 임신하였으니, 가히 하늘(왕위)을 계승할 수 있다. 다만 나에게 위엄이 없는 어려움이 있으니, 천하를 무엇으로 제어해야 할까”라고 하였다. 미례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너는 내 딸이 사랑하는 남편이다. 너와 우리는 한 몸이다. 대부(大符, 마제의 符節을 의미하는 듯)를 맡길 만 하다”라고 하였다. 마제 역시 취하여, 허락하였다.
太子 以吉公爲伊伐飡 馬知那爲京軍事 馬知那妻兪生爲京軍母 乃太子之胞妹也 吉公妻暖生爲稟主 莫兮爲太公私臣
태자가 길공(吉公)을 이벌찬으로, 마지나(馬知那)를 경군사로, 마지나의 처 유생(兪生, 유리이사금의 딸)을 경군모로 삼았다. 유생은 태자의 같은 어머니 동생이다. 길공의 처 난생(暖生)을 품주로, 막혜(莫兮)를 태공사신으로 삼았다.
七月 上與史后 遊卞山 親祀雙神
7월 왕과 사후가 변산(卞山)으로 놀러가서, 친히 쌍신(雙神, 일지와 한나)에게 제사지냈다.
十月 愛禮妃君 生子班君 太子洗之 上聞之 自卞山歸 見 賜妃玉寶金紫大衣
10월 애례비군(愛禮妃君)이 아들 반군(班君)을 낳아 태자가 아기를 씻겨주었다. 왕이 소식을 듣고, 변산에서 돌아와 아기를 살펴보았다. (애례)비(妃)에게 옥보(玉寶, 임금의 존호를 새긴 도장)과 금자대의(金紫大衣)를 내려주었다.
三十二年 正月 上與史后祇摩愛禮班君 受朝 于大井 讌嚮兩門 是日 上幸愛禮妃君
32년(A.D.157) 정월 왕과 사후, 지마(祇摩), 애례(愛禮), 반군(班君)이 대정(大井)에서 조회를 받았다. 양문(兩門, 두 집안)의 잔치가 있었다. 이날 왕이 애례비군(愛禮妃君)에게 행차하였다.
三月 復以支所禮爲伊伐飡 毛利稟主 吉公爲骨門角干 樊五爲右頭上
3월 지소례를 다시 이벌찬으로, 모리(毛利)를 품주로, 길공(吉公)을 골문각간으로, 번오를 우두상으로 삼았다.
四月 暖生(生) 太子女暖花 太子洗之
4월 난생(暖生)이 태자의 딸 난화(暖花)를 낳았다. 태자가 아기를 씻겨주었다.
大井城門自毁 上謁廟 問過
대정(大井)의 성문이 스스로 무너져, 왕이 사당을 알현하여 잘못을 물었다.
七月 命中外仙巫祈雨 太子與妃君 露處三日 乃雨 時旱魃橫行三月 民心洶洶 至是始得種播 人以爲太子雨
7월 중외선무(中外仙巫)에게 비를 내리도록 기도하도록 명하였다. 태자와 (애례)비군이 노처(露處, 한데서 거처함)에서 3일을 지냈다. 이에 비가 왔다. 당시 3달 동안 가뭄 귀신이 횡횡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씨앗을 파종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태자우(太子雨)라고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32년 기사
32년 4월에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九月 太子幸稟主毛利 于政堂 兵官逸聖諫之 曰 “政堂非吉所 恐爲人譏” 太子曰 “善 吾旣被譏 汝獨無譏 可乎” 乃强使逸聖 繼濡之 人非之 曰 “誰謂諫之 不似甚於贊之 不似邪
9월 태자가 품주 모리(毛利)에게 행차하러 정당(政堂)에 갔다. 병관 일성(逸聖)이 간언하여 말하기를 “정당은 결혼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됨을 비웃음을 두려워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옳도다. 나는 이미 비웃음을 입은바 있다. 너는 홀로 비웃지 않았는데 옳은 것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강제로 일성으로 하여금 이어 젖도록 하였다. 사람들이 그릇되었다며 말하기를 “누군가 설명하여 간언하니, 심히 그것을 도운 것과 같지 않고, 사악함이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十月 太子閱三軍車騎 于北川
10월 태자가 북천(北川)에서 삼군(三軍)의 수레와 기병을 검열하였다.
三十三年 正月 以樊五爲伊伐飡 曷名稟主 支所禮右頭上 扶余骨女加利 生上子居利
33년(A.D.158) 정월 번오를 이벌찬으로, 갈명을 품주로, 지소례를 우두상으로 삼았다. 부여의 골녀 가리(加利)가 왕의 아들 거리(居利)를 낳았다.
≪견해≫ 거리(居利)는 박제상의 4대조이다.
二月 以玉權爲京軍事 馬知那爲南軍事 虹盧爲北軍事 允良爲神籬將軍 翌宗爲護城大師 逸聖爲京都大頭太子私臣
2월 옥권(玉權)을 경군사로, 마지나를 남군사로, 홍노(虹盧)를 북군사로, 윤량(允良)을 신리장군으로, 익종(翌宗)을 호성대사로, 일성(逸聖)을 경도대두(京都大頭) 태자사신으로 삼았다.
五月 上有疾 妃君禱天不寐 上下稱之
5월 왕이 병이 들어 (애례)비군이 잠을 자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상하(上下, 위아래사람들)이 그것을 칭찬하였다.
七月 上復疾 召太公及左右頭上大井大師太子大師 入寢殿 傳位于祇摩太子 太子號泣 受之 大赦 天下呼太子小今
7월 왕이 다시 병이 들어, 태공(太公, 마제)과 좌우두상(左右頭上, 길원과 지소례), 대정대사(大井大師, 창영), 태자대사(太子大師)를 침전으로 불러 들어왔다. 지마태자에게 전위(傳位)를 하였다. 태자가 소리 내어 울며 전위를 받았다. 죄인들을 사면했다. 천하가 태자를 소금(小今)이라고 불렀다.
十月 上夢見惠后 喉渴而崩 史后引小今 于仙寢 而行祥 葬上 于蛇陵門
10월 왕이 꿈에 혜후(惠后, 아혜)를 만나고, 목구멍이 말라 죽었다. 사후가 소금(小今n 지마)를 선침(仙寢)으로 이끌어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왕을 사릉문(蛇陵門)에 장사를 지냈다.
≪비교≫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33년 기사
33년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以允良爲伊伐飡 吉元爲神籬將軍 昌永爲左頭上 君乙爲水酒太守
윤량을 이벌찬으로, 길원을 신리장군으로, 창영을 좌두상으로, 군을을 수주태수로 삼았다.
十一月 上與史后愛禮 受大朝 于南桃 以愛禮爲雌神聖母 史后爲太聖
11월 왕과 사후가 애례와 남도(南桃)에서 큰 조회를 받았다. 애례(愛禮)를 자신성모(雌神聖母)로 삼고, 사후를 태성(太聖)으로 삼았다.
加耶世主正見殂 子朱日立 自稱阿豉今
가야세주 정견(正見)이 죽어 아들 주일(朱日)이 섰다. 스스로 아시금(阿豉今)이라 칭하였다.
十二月 上立先今廟 于高井 命王女十二人分 朔遞祭之
12월 왕이 선왕의 사당을 고정(高井)에 세웠다. 왕녀 12명을 나누어 (매월) 초하루에 교대하여 제사지내도록 명하였다.
擇六部仙女三十六人 妻雪草兩童 命十部王子 主其吉 于鮑祠
6부선녀 36명을 골라서 설동(雪童)과 초동(草童)에게 시집가게 하였다. 10부의 왕자들에게 명하여 포사(鮑祠)에서 혼사를 주재토록 하였다.
≪견해≫ 앞에서는 六部라 하고 뒤에는 十部라 하였다. 十部는 오기인 것 같다.
行先今大祭 于新廟 炬火連十里 先今性溫慈好仁節儉 省用 愛民如己 御下以道 勞來諸候 疆土益加 亦中興之聖祖也.
선금(先今, 파사)의 제사가 새로운 사당에서 행하여졌다. 횃불이 10리에 연이어졌다. 선금의 성품은 온자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며, 절약하여 검소하며, 사람을 살펴 쓰고, 백성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였다. 아랫사람을 다룸에 도리가 있으며, 오고자 하는 제후(諸候)의 수고를 위로하고, 강토(疆土)가 더하여 늘어났다. 또한 중흥(中興)의 성조(聖祖)다.
≪견해≫ 파사이사금 당시 병합된 주변 영토는 추화(推火, 129년 2월), 거타(居陀, 144년 9월), 압독(押督, 151년 2월), 실직(悉直, 151년 2월)이 있다.
첫댓글 三皇之世民無盜賊而皆自富裕太君以來四方多事民多抵罪 삼황의 치세에는 백성들이 도적질함이 없고 모두 스스로 부유하였는데, 태군 이래로 사방에 일이 많아 백성들이 거슬러 죄짓는 일이 많아졌다.
밝은눈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미 라디오님이 지적하여 주신 부분이기도 하구요. 저도 해석 초반에 많은 고민을 하였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事가 사건 또는 섬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어느 뜻으로 해석해야 할지는 탈해이사금기를 해석하여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파사이사금 말미에 사방에서 제후들이 투항해 오는 기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하는 부분이 처음과 2번째 해석할 때에 달라지는 부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밝은눈님 의견 감사드립니다. 날카로운 지적에 항상 놀라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도 올린 적이 있는데, 왜 또 올렸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에는 남당유고 신라사초에 해석이 완료되지 않아 생각나는대로 해석을 했습니다만, 일단 한문본을 완료하고 나니, 그 동안에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혼자서 해석하다 보면 자의적인 해석이 될 수 있으므로,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반응이 좋으면 지마이사금기 부터 법흥왕까지의 기록도 계속해서 올리고자 합니다.
원문은 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33.pdf(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인의 한문 실력이 일천하여 특히 인명(人名)인 경우 한자 판독에 애로가 많았으며, 두 가지 음으로 읽는 경우 읽기 쉬운 이름 또는 많이 알려진 이름으로 표기 하였습니다. 또한 한글2002프로그램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변환되지 않는 한자는 이체자를 확인한 후에 동일한 한자로 정리하여, 굵은색으로 정리해 둠으로써 원문 확인시 편의를 도모하였습니다. 굵은색으로 정리된 부분에는 오자가 있을 수 있으니 검토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잘 정리하셨군요...저도 남당유고 일부 혼자 번역하다가 결국 포기 상태였는데 고맙습니다...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립니다.
ooklee님// 남당유고를 해석하려 시도했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든든하군요. 저의 실력이 뛰어나 남당유고를 해석한 것은 아닙니다. 벌써 1년 반이 넘어섰는데, 이제서야 한문본으로 전부 읽어보고, 절반은 초벌이 된 상태입니다. 지금에 와서 살펴보니 제대로 된 해석이 아니더군요. 그리고 한문 판독이 잘못된 곳이 1,000여개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 고백하면, 아마 위의 해석에 믿음이 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도움을 받고자 해석문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는 인터넷에 올리는 중에 한자 변환이 잘못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용기를 잃지 마시길...
해석하다 보면, 간혹 어떤 뜻이 문장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곳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억지로 때운 곳이 50여군데는 됩니다. 상장돈장을 보기도 하고, 삼국사기 신라본기도 보고, 그리고 뒷부분을 읽어본후에야 내용을 알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라디오님이라는 분이 그러더군요. 주위에 한문박사는 많은데, 왜 사서의 해석이 되지 않는지를요. 사서의 해석은 한문을 많이 알아야하고, 둘째는 역사에 대한 기본지식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기본적인 컴퓨터활용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하나가 부족해도 해석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주변에 가지고 있는 왠만한 옥편은 출력하여 대충 훓어볼때 간혹 막히면 참고하시고요. 네이버 한자사전, 한국고전번역원 이체자정보검색,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관련사이트 안에 한자사전들이 괜찮은 곳이 여러곳 있습니다. 고려대장경 한자사전, 존 한자사전, 한자 이체자사전을 주로 이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은 현실입니만, 상당부분 해결이 가능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토록 많은 분량을 일일히 TEXT화 하여 옮겼다는데 엄청난 노력과 수고가 있었다고 봅니다..덕분에 우리같은 회원님들이야 잘 읽고 있네요..암튼 감사합니다.
저는 사실 위화진경에 관심이 았어 번역하다가 한 반쯤 했었는데...갑자기 컴퓨터가 맛이 가버리는 바람에...6개월 적공이 헛수고가 됐다는...ㅠㅠㅠ 아무튼 그래도 얻은 것은 꽤 있다는 생각입니다...여러가지 개인적 일이 겹치는 바람에 다시 시작할 엄두도 못내고 있습니다...저도 한문은 형편없지만 이건 실력으로 되는게 아니고 정성과 끈기로 하는거죠...그런 의미에서 정말 대단하십니다...
ooklee님// 님께서 위화진경을 번역하였다면, 제가 해석하고 있는 부분을 열심히 보고 계시것 같군요. 저도 위화진경을 보았는데, 화랑세기와 좀더 가깝고, 다음은 신라사초입니다. 이 두가지를 보지 않고는 위화진경을 해석해 낼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해석하면서 몇 번 해석본을 날렸습니다. 요즈음 usb가격도 싼데, 2개정도 구입하셨다가, 정기적으로 백업을 받으시길 권합니다. 솔직히 하루 이틀 분량을 날려도 정말 화가 납니다. 저는 구리넷에 올린 글을 다시 복사해서 복원한 경우도 있습니다. 생각날때마다 정리해 둔 글은 모두 날렸습니다. 그래도 다시 하시면 전보다는 배는 빠를 듯 합니다. 뭐 해석도 정확해지구요.
제가 한 6개월 모르는 한문가지고 씨름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기성학자들이 화랑세기를 사료로 인정하는 편에서 조차 다른 남당유고를 소설로 폄하(?)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제가 느낀 점은 확실히 화랑세기와 다른 남당유고는 같은 세상를 얘기하고 있다는 겁니다...즉 비유하자면 영화 스타워즈나 반지의 제왕의 세계가 비록 가공이지만 그자체로 이미 완전한 세상을 이루고 있듯이...그래서 저는 아직 사료로 인정할 수 있느냐 아니냐의 결론은 못내고 잇습니다...하지만 화랑세기가 만약 진짜라면 남당의 유고도 단순한 음란한문소설이 될 수는 없겟죠...최소한 우리가 모르는 사료에 기초한 문학작품쯤은 될거란 생각이
고 화랑세기가 가짜라면 남당유고도 다 소설이죠...하지만 화랑의 세계를 창조한 그상상력만은 정말 천재급이다...하루빨리 화랑세기의 진위에 대한 결정적 증거사료가 나와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남당 유고가 필사본이냐 아니면 남당의 창작작품이냐의 문제는 화랑세기가 아니라 신라사초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나올 듯 합니다. 저는 신라의 고분에서 유물보다 그 곳에 묻힌 분들의 유해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신라사초를 살펴보면, 사망 당시의 나이가 추적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금관에 관한 내용이라든지, 돌아가실 때 어떤 질병이 걸렸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것이 매우 궁금한데, 어디를 뒤져도 찾을 수 없습니다. 제가 먼저 신라사초를 세상에 내 놓으면 다음은 문화재 전문가들의 몫이겠지요.
기존의 사료와 금석문에서 화랑세기의 진위를 판별할 수있는 증거를 찾아보고 또 몇가지 착안한 점도 있습니다만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다음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