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진용선 선생님의 정선아리랑학교가 온라인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카페의 초기화면에 링크시켰습니다.
이제 막 오픈을 해서 따끈 따끈합니다.
내용은 진선생님께서 채우시고 계시며, 디자인(?)은 제가 했습니다.(어디서 많이 본듯한 스타일입니다. ^^;)
진용선 선생님과 겨레문화답사연합의 오랜 인연이 사이버공간에서 새롭게 맺어졌습니다.
진용선 선생님을 아시는 많은 분들! 그리고 궁금하신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방문바랍니다.
정선의 산골, 옛 매화분교...그곳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정선아리랑학교>의 모습이 눈에 삼삼하군요.
※ 아래는 진용선 선생님 관련 기사입니다. 잘모르시는 회원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올립니다.
[경향신문, 매거진 X / 1997. 6. 20]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청춘을 사로잡은‘아라리’
눈이 올려나 비가 올려나
억수 장마질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삶이 그렇게 슬펐을까. 생이 그토록 애처로웠을까. 왜
이다지도 맺힌 한이 많은 것인가. 소리 속엔 짙은 체념이 깔려있다. 그러나 체념은 체념이 아니다. 한바탕 풀어젖히는 한의 소리뒤엔 새로운 시작이 있다.
체념속의 여유, 「정선아라리」. 굽이굽이 이어지는
가락은 민족의 한많은 역사인양. 하지만 끊어지는 법없이 맥을 잡고 기어코 넘어간다.
『숨겨진 비밀이 뭐기에 나는 그 소리에 자꾸만 빠져들까』
진용선씨(34·정선아라리연구소 소장). 신들린 듯 「아라리」를 찾아다녔다. 산이 많아 「하늘이 15평밖에
안된다」는 강원 정선. 그 중에서도 탄광이 많은 함백에서 태어난 것이 운명이라면 운명. 아라리 가락 한 줄을 위해 청춘을 바쳤다.
산하를 헤집고 다닌지 6년. 93년 1,025수의 가사를 책(「정선아라리 그 삶의 소리, 사랑의 소리」)으로 펴냈다. 그동안 관에서 보존하고 있던 것은 불과 430여수.
사투리에 대한 해설을 싣고 해제(解題)도 곁들였다. 「사대부가 아닌 기층민중들의 소리」. 잘못된 유래나
학설도 바로 잡았다. 이어서 음반 3,000여개를 만들었다. 상스러운 표현도 그대로 실었고 애욕과 색정을 드러낸 노골적 내용도 담았다. 하지만 민초(民草)들의 진솔한 소리.
내가 왜 왔나 내가 왜 왔나
우리 님 따라서 내가 왜 왔나
사할린이 좋다고 내가 왜 여기왔나
일본놈들 무습어 내 여기왔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사할린 아리랑」의 일부)
중국·일본·러시아. 93년부터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민족의 수난사를 체험하는 작업이었죠.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많이도 울었습니다.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구전하는 아리랑. 그리고 「사할린아리랑」과 「독립군아리랑」도 찾아 냈어요』
국내에 가사만 전해오던 「경상도아리랑」도 찾았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어랑타령」,「쪽박아리랑」등도 채록했다. 모두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CD로 만들었다. 해외에 흩어져있던 아리랑이 동포 2세의 목소리로 되살아났다.
교수와 통역전문가를 꿈꾸던 청년. 하지만 인연의 끈은 그를 아리랑에 옭아매었다. 인하대 독문과 재학시절 독일 뮌헨박물관관장이 학교에서 특강을 했다. 강의중 갑자기 한국의 아리랑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진씨는 그때 자신이 공부하고 있던 분야라 자신있게 대답했다. 칭찬을 듣고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그 순간 그는 이미 아리랑전문가를 꿈꾸고 있었다. 또 고향에서
아버지와 함께 부군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집무실 책상위에 녹음기를 틀어놓고 아라리 가락을 듣고
있었다. 자극이 컸다. 무턱대고 『이제 이 일은 우리고장의 젊은이가 해야한다』며 현관까지 나와 손을 꽉
잡았다.
가슴 하나 가득 채워진 아리랑. 번역이나 작문과목의
주제도 아리랑만 골라 잡았다. 대학원졸업후 통역일을
할때도 외국인들에게 단골메뉴처럼 아리랑을 소개했다. 정선아라리의 서정성과 감성은 그의 시에도 등장했다. 85년「계명대 문화상」「제1회 MBC청소년 문학상」 「기독교문학상」. 그리고 「라지브 마을의 새벽」으로 「시문학」 추천을 받았다.
87년 귀향했다. 토플강사를 하며 번돈이 있어 생계걱정은 덜했다. 풋풋한 흙내음. 고향은 어머니품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완강했다.
『장남이 그래서야 되겠느냐. 통역관이나 교수를 해라. 광부로 평생 탄가루를 뒤집어쓴 내가 널 다시 이곳으로 오게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연구소 간판도 내걸지 못했다. 부모 모르게 인근 마을을 뒤지고 다녔다. 그러던중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7일이 지난후 아버지마저 규폐증으로
돌아가셨다. 죄스럽고 슬픈마음. 그 모든 것이 삭지 않고 아라리에 대한 열정으로 넘어갔다.
92년 연구소 문을 열었다. 흩어져 있던 자료를 모았다.
힘들고 외로웠다. 하지만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격려를 보내왔다. 지금은 후원회도 생겼다. 93년부터는 매년 여름에 「정선 아리랑학교」를
열어 아라리를 전파했다.
경창대회와 유적지 답사도 함께한다. 밤엔 청소년들과
함께별자리도 관측한다. 요즘은 영어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한다. 연구소를 꾸려나가기 위해서다. 올 4월엔 강원도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마음이 무겁다.
큰맘먹고 디지털 녹음기를 새로 장만했다. 정선아라리의 유포 경로를 찾으려는 새로운 작업.
배를 타고 남한강 뗏목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여주·이천·단양·문경·구미…. 거역할 수 없는 강물의 흐름. 이제 그도 아라리도 서로를 버릴 수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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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 1997. 9. 25]
혼불로 밝힌 아리랑 10년
『미쳤군,단단히 미쳤어』
아리랑연구의 대가인 秦庸瑄씨(34^정선아라리문화연구소 소장)는 고향인 정선군 함백에서 「미친 사람」으로 통한다. 소문난 우등생이자 잘 나가던 영어강사였던 그가 앞날이 창창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시커먼
탄가루로 뒤덮인 광산촌으로 내려와 「아리랑」을 연구한다고 했을 때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반기기는 커녕 오히려 이상한 시선으로 비아냥거렸다.그의
아버지는 기대를 저버린 장남에게 「더이상 내 아들이
아니니 나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는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요즘엔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미쳐도 저 정도는 미쳐야지』라는 시샘섞인 평가로 바뀌었다.10년에 걸친 「미친 아리랑
사랑」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秦씨의 아리랑 사랑은 어느날 갑자기 생긴 이상한 증상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들어온 소리. 눈뜨고 밥먹듯 생활의 일부로 그의 내부에 자리잡았다.
슬프고도 구성진 아리랑가락이 왠지 좋았다.
춘천에서 중^고교를 다니고 수석입학을 한 4년 장학생으로 대학(인하대 독문과)에 다닐 때도 줄곧 아리랑을
쫓아 다녔다. 대학생활의 낭만으로 여겨졌던 축제나
미팅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입에선 늘 아리랑가락이
맴돌았다. 독어나 영어 작문을 할 때도 주제는 늘 아리랑이었다. 이 때문에 대학친구들은「경로당」이라 불렀다.「고리타분」이란 수식어도 달고 살았다.
아리랑에 혼을 빼앗기다시피 하면서도 아리랑연구가
본업이 되리라곤 아직 생각을 못하고 있을 무렵, 정선
부군수를 만났다. 정선아리랑 채록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던 부군수는 「이 작업도 이젠 젊은 사람이 해야지」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마음이 아리랑연구쪽으로 기울던 순간이었다.
대학졸업 후 대학원을 다니며 학원의 토플강사, 기업의 영어강사로 한창 주가를 높여가고 있을 때, 독일 뮌헨박물관장과의 만남은 그를 아리랑연구에 투신하도록
이끌었다. 아리랑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유창한 설명에 감탄한 독일인 관장이 계속적인 연구를 격려했던
것.여기에는 물론 대학시절「외국어를 배우는 진정한
목적은 우리 것을 외국에 알리는데 있다」는 그의 신념이 바탕이 됐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함백으로 내려온 87년부터
아리랑연구가 본격화됐다. 정선, 평창, 영월 일대에 흩어져 있던 정선아리랑은 물론 밀양, 진도 등 전국을 이잡듯 헤집고 다니며 아리랑가락을 채록했다. 중국의
흑룡강성과 길림성, 사할린, 일본, 네덜란드 등 집단이주나 징용, 입양 등 어떤 이유에서건 우리 민족의 발길이 닿은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발굴해 낸 아리랑 가사는 정선아리랑 1천4백여수를 포함해 모두 2천 여수. 아리랑채록을
위해 만난 사람만 해도 5천명은 넘는다.
『아리랑에는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정서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고국을 떠난지 몇 십년이 지난 사람들이 다른 말은 다 잊어도 「어머니」「아버지」라는 단어와
아리랑노래는 잊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며 아리랑이 가진 민족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죠』
93년 「정선아라리 그 삶의 소리,사랑의 소리」(집문당)란 첫작품을 냈다. 여기엔 기존의 郡가사집에 실려있던 4백50수를 포함, 1천25수의 정선아리랑 가사가
풍부한 해설과 함께 실려있다. 이를 시작으로「정선아라리」(킹레코드^94년),「해외동포아리랑」(신나라레코드^95년)등 음반과 「아라리 정선아라리」「정선아리랑 찾아가세」등 시집, 산문집도 냈다. 그가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작업은 아리랑을 대중예술로 승화시키는
것. 91년부터 정선 아우라지 강변에 「정선아라리문화연구소」를 설립, 여름방학마다 학생, 일반인을 대상으로 아리랑학교를 열어 지금까지 5백여명의 수료자를
배출했다. 올가을부터는 폐쇄된 분교를 빌려 아리랑학교를 사철내내 운영하며 아리랑의 세계화에 힘쓸 계획이다.
그가 아리랑에 미쳐 있었던 10년은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던 시기이기도 했다.91년 아리랑사랑을 격려해주는 평생의 동반자(裵京淑 34)를 만났고,夏林(6)夏俊(2) 두아들도 얻었다.
그러나 평생을 광산촌에서 보내며 아들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던 아버지, 어머니는 불치병에 걸려 거의 보름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눈을 감기 몇주전 그렇게도
못마땅해 하시던 「제 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秦씨의 눈가에 잠시 이슬이 맺히는 순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정선아라리」가락이 흘러 나왔다.그 옛날 촌부가 정선아라리를 부르며 삶의 고달픔을 승화시켰던
것처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