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사람이 됩시다"
꿈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승리
-요셉, 예수님, 성인들-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제가 예전은 물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이 꿈입니다. 꿈을 소재로한 시도 많습니다. 꿈이 있어야 비로소 산 사람입니다. 꿈이 없을 때 사람은 참 거칠어지고 사나워집니다. 요즘 사람들 보세요. 너무 거칠고 사나워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꿈을 잃으면 사람은 괴물이,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꿈의 사람들에게서 꽃처럼 피어나는 시들입니다. 꿈에서 피어나는 시의 꽃입니다. 이런 이들이 궁극의 승리자가 됩니다. 바로 예수님을 비롯한 성인들입니다. 왜냐? 하느님이 꿈꾸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꿈이 현실화된 분들이 성인들입니다. 예전 제 자작 짧은 애송시 몇편을 나눕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 눈
덮여있다
흰 눈 덮인 하얀 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그 당시 장면입니다. 이 시 덕분에 그해 겨울은 따뜻한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봄꿈’에 이어 ‘별꿈’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며
잠못 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 방울들”-2000.10.1.
요즘 산책하며 자주 부르는 제18번 노래 아침이슬 노래중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이란 대목이 연상되어 더욱 애착이 가는 별꿈이란 시입니다. 별꿈을 꾼후 강론을 쓰는 새벽 고요한 시간입니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
죽어있는 것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봄꿈의 나무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2009.4
문득 과로로 지금 입원중인, 윗 시가 속한 시집들을 곱게 편집하고 제본해준, 20년 이상 물심양면 헌신적으로 수도원과 저를 도와준 고마운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은 참 사랑스런 하느님의 딸, 자매님에게 주님의 치유의 축복을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어제 사촌 누님의 장례미사시 깜짝 놀랐습니다. 자녀들이 모두가 신자들인데 냉담중인 듯 한사람도 영성체를 하지 않고 연령회 회원 몇분만이 했습니다. 미사도 참 무미건조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꿈이 없구나. 위로부터의 끈이, 하느님의 끈, 믿음의 끈이 단斷! 끊어졌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무관한 삶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통의 단절, 믿음의 단절, 꿈의 단절이 오늘날의 대체적 보편적 현실같습니다. 참으로 자녀들에게 물려 주어야 할 최고의 유산은 믿음이자 하느님 꿈임을 깨닫습니다. 조카들의 잠든 믿음의 씨앗이 초록빛 믿음의 꿈으로 활짝 피어나는 파스카의 봄철이면 참 좋겠습니다.
문득 어제 끝기도후 신선한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누구보다 꿈의 사람들이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평생 날마다 함께 바치는 아름다운 시편 성무일도의 은총이 꿈의 수도자들로 만들어 줍니다. 한 형제가 집무실 밖에서 서성이다 저를 보자 청했습니다. 작년 꿈같은 아이디어로 제주도 여행을 주선했던 수사입니다.
“수사님, 올해 저와 함께 전주 부근의 아름다운 성지에 성지순례휴가합시다. 아주 아름다운 성지들입니다. 끝기도때 꿈처럼 꽃처럼 떠오른 생각입니다.”
요지의 고운 생각과 말에 “고마운 생각입니다. 염두에 두고 생각하겠습니다.” 화답했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강론써 인터넷에 올릴 수 있고 매일 미사만 드릴수 있으면 언제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휴가는 이미 잊은지 수십년이 됩니다. 하루하루 일하면서 꿈꾸듯 휴가하듯 아름다운 나날을 살고 있는데 새삼 무슨 휴가이겠는지요!
오늘 창세기의 요셉은 제가 참 좋아하는 꿈의 사람입니다. 참 매력적인 사람이,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꿈의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꿈이 없으니 질투에 눈멀어 저렇게 모질고 사납게 요셉을 사지로 몰아넣는 형제들이 아닙니까? 꿈을 잃으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사나운 괴물같은 사람들이나 무기력한 폐인들입니다. 악한 형제들의 단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그러자 형제들중에 하느님의 첩자(?) 르우벤과 유다가 있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나니 이또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의 꿈은 요셉을 통해 서서히 무르익어 가다가 언젠가는 꽃으로 활짝 피어날 것이며, 아무도 이런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의 섭리를 막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요셉입니다. 궁극엔 꿈의 사람들의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은 꿈이 없어 욕심에 눈이 멀으니 사납기가 야수같고 괴물같습니다.
오늘날 정가에도 꿈을 잃은 권모술수의 괴물같은 정치인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정치가’가 아닌 ‘정치업자들’이라 하더군요. 고 김대중 토마스 대통령을 모 정치 평론가는 정치가를 넘어 ‘정치의 신’이라 칭했고 저역시 공감했습니다. 정치의 신하면 김대중 대통령의 절친이었던 남아프리카의 대통령까지 했던 역시 평화 노벨상 수상자 만델라가 생각납니다.
다음 소작인들의 말이 방금 제1독서 창세기의 사악한 요셉 형제들은 연상케 합니다. 인간 역사는 이처럼 반복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아, 무지한 사람이 꿈을 잃으면 이처럼 사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꿈의 사람, 파스카의 예수님을 좌절시킬수는 없습니다. 다음 예수님 말씀은 후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체험에 배어 있는 시편을 통한 체험적 고백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아무도 하느님의 꿈을 막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파스카의 꽃으로 활짝 피어납니다. 꿈의 사람,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화두는 하늘나라였고 부활을 통해, 매일 미사은총을 통해 서서히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꿈, 하늘나라입니다. 궁극엔 꿈의 사람, 예수님의 승리요 하느님의 승리임을 뜻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꿈의 사람으로, 파스카의 꽃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하박3,19).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