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과 안개주의보.
전라도 순천과 여수 지방에서 전해 오는 말이 있다.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벌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여수 가서 돈 자랑하지 마라.”
<동국여지승람>에 ‘산천이 수려한 고장’이라고 실려 있는 순천은 순천만과 정원박람회로 알려져 있지만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으로 더 알려져 있다.
무진기행을 처음으로 읽었던 날을 생각한다. 읽을 때의 그 막막함, 다 읽고 나서, 책을 덮지 못하고 온간 상념에 빠져 들었던 기억, 마치 첫 사랑을 떠나보낸 뒤 멍하던 것과 같이 상실감과 허망함이 내 온몸을 휘어 감던 그 책의 무대가 된 무진은 소설 속의 공간이면서, 작가의 고향인 순천을 지칭한다. 그 순천을 묘사한 글을 보자
“나는 물이 가득 찬 강물이 흐르고 잔디로 덮인 방죽이 시오리 밖의 바닷가까지 뻗어 나가 있고, 작은 숲이 있고, 다리가 많고 골목이 많고, 흙담이 많고, 높은 포플러나무가 에워싼 운동장을 가진 학교들이 있고, 바닷가에서 주워 온 까만 자갈이 깔린 뜰을 가진 사무소들이 있고, 대로 만든 와상臥床이 밤거리에 나 앉아 있는 시골을 생각했고, 그것은 무진이었다.
그 무진을 무진답게 묘사한 것이 안개고, 그 안개를 <안개 속에서> 라는 아름다운 시로 남긴 사람이 독일의 시인인 헤르만 헤세였다.
이상하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을!
숲과 들은 모두가 외롭고
나무들은 서로를 보지 못해
모두가 다 홀로이어라
내 인생이 아직 밝았을 때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었는데
그러나 이제 안개가 내리고 나니
그 누구 한사람 보이지 않는구나
모두로부터 하나도 빼놓지 않고
조용히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어두움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
그 사람은 진정 현명치 못하거니,
이상하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은
인생이란 야릇한 존재
누구 한사람 타인他人은 알지 못하나니
인간은 모두가 홀로이어라
헤르만 헤세와 달리 김승옥은 무진의 안개를 더욱 더 신비하게 묘사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 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오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인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까!“
그렇게 한 편의 시처럼 묘사한 <무진기행>의 말미는 얼마나 더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 속에서 잊혀 질 수 있다고 전보電報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작정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우리는 약속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김승옥의 <무진기행>
가끔씩 <무진기행>을 소리 내어 읽는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인생사‘가 어찌 그리도 기묘하고, 야릇한지를 살아갈수록 깨닫는다. 그래서 작가는 ‘대화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듯’이라고 썼을 것이고, 김일손 선생은 기행문에서 ‘인연이란 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썼을지도 모른다고 자위한다.
그래서 그런지 안개를 묘사한 사람들의 글도 철학의 심연처럼 심오하고 애매모호하다.
“나에게는 철학적 진보가 산에 접근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접근해 갈수록 산은 점차 안개를 뚫고 그 윤곽을 뚜렷이 드러낸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마침내는 어느 정도 분명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내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안개 자체의 가치 있는 진리의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견해이다.
명료성도 그것이 어렵고, 희귀한 것이기 때문에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나의 거부가 나의 모든 철학적 작업의 가장 깊은 충동이다.”
버트란트 러셀의 말이다.
학문이 깊이를 더해갈수록 밝은 대낮처럼 환하고 명료해지는 것이 아니라 안개 속 같이 모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리라.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잠시 살다가 가는 인간이 얼마나 알 수 있으며 얼마를 더 알아야 ‘다 알았다’고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안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이다. 불확실성이라야 사람을 매혹할 수 있다. 안개는 모든 것을 매우 아름답게 해준다.” 라고 말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더 설득력을 주는 것 같다.
이렇듯 안개는 어디서든 실체를 보여주지 않으며 기억의 저편에서 우리를 가끔 손짓하며 부른다. 언제까지고 막막한 어둠 같고, 닿을 수 없는 사랑의 심연 같은 그 안개,
그 안개 자욱한 밤을 즐기시고, 단 차를 가진 사람은 안개 속에 추돌을 조심하시라.
을미년 이월 열나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