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정 후 히틀러와 만난 비시 정부 수반 페텡 총리.(1940년 10월 24일)
1951년 오늘, 프랑스 비시(Vichy) 정부의 수반 앙리 필립 페탱(Henri Philippe Pétain, 1856~1951)이 아흔다섯 살을 일기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무훈으로 한때 ‘프랑스의 국부’로 칭송받았던 페탱은 자택의 침실에서가 아니라 대서양 되섬(Ile d'Eu)의 요새 감옥 독방에서 눈을 감았다.
1차대전 프랑스의 영웅 페탱, 감옥에서 죽다
나치에 대한 부역으로 프랑스의 영웅에서 ‘민족 반역자’가 되었던 페탱의 죽음이 만만찮은 역사적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페탱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육군을 패퇴(敗退)시킨 베르됭(Verdun) 전투에서 프랑스를 구해낸 역대의 공적(公敵)에도 불구하고 재판(裁判)에 회부(回附)되어 사형(死刑)을 선고(選考)받은 것이다.
베르됭의 구원자(救援者)로 1918년 프랑스 제3공화국 군 원수(軍元帥)로 승진(昇進)한 페탱은 1920~30년대 프랑스의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1940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였을 때 그는 부총리였다.
패전(敗戰)이 자명(子明)해진 상황(狀況)에서 휴전협정(休戰協定)을 주장한 페탱은 6월 16일 신임 총리(新任總理)가 되어 새 내각(內閣)을 구성하고 독일에 정식으로 휴전협정을 요구했다.
페탱은 독일과의 전쟁보다는 항복이 낫다고 판단(判斷)한 것이었다.
↑독일 점령기의 프랑스(1940~1944). ⓒ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필립 페탱 원수는 1944년 8월 15일, 87세의 나이로 파리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사형(死刑)을 선고받았다.
6월 22일 맺어진 휴전협정(休戰協定)은 기실은 항복조약(降伏條約)이었다.
독일 강점기(强占期)의 비시 정부가 대독협력(對獨協力體制)가 된 것은 전적으로 이 협정(協定)에 따른 것이었다. 협정에 따라 프랑스 영토의 북부 절반(수도 파리 포함)은 독일군에 점령(占領)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비(非)점령 지역의 도시 가운데 중부의 휴양도시(休養都市)인 비시를 ‘수도(首都)’로 선택(選擇)했다.
페탱 정부를 ‘비시 정권’(1940.6.16.~1944.8.25.)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후 페탱 정부는 프랑스의 유일한 합법 정부(合法政府, Vichy France)임을 주장(主張)하며 나치 독일과 협력했다.
비시 정부는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의식적(意識的)이고도 적극적(積極的)으로 협력정책을 수행한’ 정부였다.
독일이 요구(要求)한 노동력 징발(勞動力徵發)에 대해선 의무(義務)노동제(18~50세의 모든 남성과 만 21~35세의 모든 독신 여성(獨身女性)을 강제 징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협력’했다.
비시 정부의 적극적 대독 ‘협력’
무엇보다도 비시 정부의 가장 악명(惡名) 높은 협력(協力)은 ‘나치 독일의 적(敵)들을 체포(逮捕)·처벌(處罰)·제거(除去)하는 것이었다.
그 ‘적’이란 물론 레지스탕스(La Résistance, '저항(抵抗)'이라는 뜻,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 프리메이슨(Freemason) 단원(團員), 유대인(猶太人) 등이었다.
비시 정부는 기존(旣存)의 법 절차(法切磋)와 무관하게 레지스탕스를 탄압(彈壓)할 수 있는 사법기구로 ‘특별재판부(特別裁判部)’를 설치(設置)했고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한 보복 조치(報復調治)로 독일 군 당국이 처형(處刑)할 프랑스인 인질(人質) 명단을 작성(作成)하는 일도 맡았다.
특히 1942년 여름의 협력은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마침내 비시의 경찰(警察)은 프랑스 주둔(駐屯) 독일 친위대(親衛隊)와 협약(協約)을 맺고 대대적 유대인 검거(檢擧)에 나선 것이었다.
프랑스 경찰이 검거하여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收容所)로 끌려간 7만6천여 명의 프랑스 거주(居住) 유대인들 가운데 단 3%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 파리를 점령, 입성하는 독일군들. 뒤에 개선문이 보인다
↑프랑스를 점령한 뒤 파리에 입성한 히틀러와 나치 장교들
그러나 연합군(聯合軍)이 횃불 작전으로 프랑스령(領) 북(北)아프리카에 상륙(上陸)한 직후인 1942년 11월 11일에 나치가 안톤(Anton) 작전이란 작전명으로 비시 프랑스가 통치(統治)하던 프랑스 남부(南部)를 점령해 버리자 비시 정부는 모든 권력(權力)을 상실(喪失)했다.
비시 프랑스는 명맥(命脈)은 유지(有支)했지만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르망디(Normandie) 상륙 후 연합군이 프랑스 지역을 탈환(奪還)하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고립(孤立)되거나 철수(撤收)를 시작했고 친 독일계 경찰들은 거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1944년 8월 25일 폰 콜티츠(Dietrich Hugo Hermann von Choltitz, 1894년 11월 9일~1966년 11월 5일) 독일군 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解放)되자 자유 프랑스 정부의 드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 1890년 11월 22일~1970년 11월 9일) 장군은 파리에 입성(入城)했다.
드골은 임시정부(臨時政府)의 대통령 자격(資格)으로 독일과 전쟁을 수행(修行)하면서 동시에 해방된 지역에서는 나치 협력자들을 정리(整理)하겠다고 발표했다.
↑ 1944년 8월 25일 폰 콜티츠 독일군 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었다. ⓒ 위키백과
↑1944년 8월 26일, 파리에 입성하고 있는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의 드골 장군.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叛逆者), 나치 협력자(協力者)들에 대한 드골의 방침(方枕)은 확고(確固)했다.
드골이 규정(規定)한 민족(民族) 반역자는 자유 박탈(自由剝脫)을 정당화(正當化)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敗北)를 악용(惡用)한 투항주의자(投降主義者)들, 프랑스 국민을 ‘악(惡)의 길’로 이끈 비시 정부의 고위 공직자(高位公職者)들과 추종자(追從者)들, 나치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협력한 프랑스인들이었다.
“국가가 애국적(愛國的) 국민에게는 상(賞)을 주고 민족 배반자(民族背反者)나 범죄자(犯罪者)에게는 벌(罰)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團結)시킬 수 있다.”
“나치 협력자들은 정치적 결정(政治的決定), 주로 정치 활동과 때로는 군사행동(軍事行動) 그리고 행정조치(行政措置) 및 언론(言論)의 선전 활동(宣傳活動) 등의 변화무쌍(變化無雙)한 형태로 프랑스 민족의 굴욕(屈辱)과 타락(墮落)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박해(迫害)마저도 미화(美化)했다.
민중(民衆)의 분노(憤怒)가 폭발(爆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치 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放置)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 전염(傳染)하는 흉악(凶惡)한 종양(腫瘍)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2차대전 직후 드골은 나치 협력자에 대한 단호(斷乎)한 단죄(斷罪)에 나섰고 대다수 프랑스 시민들의 지지(支持)를 받았다.
드골은 나치 협력자 문제는 개개인의 과오(過誤)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재확립(再確立), 군국주의자(軍國主義者)들과 그 공범자(共犯者)들 및 그 사상(事狀)의 청산(淸算), 그리고 민족반역자(民族叛逆者) 청산문제라고 보았다.
파리 해방(1944.8.25)을 전후한 부역자 처벌(附逆者處罰)은 재판(裁判)을 통한 사법적 숙청(司法的淑淸) 이전에 약식(弱息) 처형과 여성 부역자들의 머리를 깎는 삭발식(削髮式) 등의 초법적(峭法的)인 형태(形態)로 시작되었다.
이어진 재판을 통한 처벌은 드골 정부의 ‘명령’, 부역자재판소, 공민재판부(公民裁判部), 최고재판소 등의 법령·기구에 의해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은 사법적 단죄 이전에 약식 처형과 여성 부역자들의 삭발식 등으로 진행되었다.
사법 숙청(司法淑淸)은 약 35만 명의 대독 협력 혐의자(對獨協力嫌疑者) 가운데 12만 명 이상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중 약 3만8천 명이 유무기의 징역(懲役)이나 금고형(禁錮刑)을 받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부역자재판소에서 모두 6천여 명이 사형선고(死刑選考)를 받았고 정규 법정(定規法廷) 밖에서 약식 처형(略式處刑)된 이가 9천 명이었던 데 비해 합법적(合法的)으로 처형된 사람은 약 1,500명이었다.
공민권 박탈형(公民權剝奪型)만 선고받은 이도 약 5만여 명이었다.
프랑스의 정의, 단호한 ‘부역자 단죄(附逆者斷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