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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7장 11절 ~ 21절
O 칼데아인들의 군대가 파라오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군대를 해산시켰을 때, 11)
And it came to pass, that when the army of the Chaldeans was broken up from Jerusalem for fear of Pharaoh's army, 11)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나와 베냐민 땅으로 들어가 백성들 한가운데서 자신을 분리시켜 12)
Then Jeremiah went forth out of Jerusalem to go into the land of Benjamin, to separate himself thence in the midst of the people. 12)
바빌론 군대가 철수하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성을 나와 베냐민땅으로 왜 가게되었는지는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예레미야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고, 바빌론 군대가 철수하였기 때문에 그의 예언은 반박받을 위험하다는 것을 모를리 없을텐데 그의 외출은 미스테리합니다.
베냐민 성문에 있을 때,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이요, 그 이름이 이리야인 경비 대장이 거기 있었는데 그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고 말하기를 "네가 칼데아인들에게로 변절하는도다." 하니 13)
And when he was in the gate of Benjamin, a captain of the ward was there, whose name was Irihah, the son of Shelemiah, the son of Hananiah; and he took Jeremiah the prophet, saying, Thou fallest away to the Chaldeans. 13)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도다. 나는 칼데아인들에게로 변절하지 않노라." 해도 이리야가 그에게 경청하지 아니하고, 그가 예레미야를 붙들어 고관들에게 데려오니라. 14)
Then said Jeremiah, It is false; I fall not away to the Chaldeans. But he hearkened not to him: so Irijah took Jeremiah, and brought him to the princes. 14)
아마도 예레미야의 외출은 주의 명령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굳이 베냐민 성문에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문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지나가는 곳입니다. 주의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알릴때 성문에서 알리라고 하시는 이유로 볼때 그가 성문에 있는 것은 그의 근황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성문에서 경비대장과 시비가 붙습니다.
예레미야와 이리야의 논쟁을 보면 반드시 떠오르는 우리 역사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김성일입니다. 임진왜란을 조선이 오판하는데 기여한 인물로 진리보다 자신의 입장을 생각한 인물입니다. 김성일을 후에 의병을 일으켜서 싸우다 병사하였다고 하지만 사실 임진왜란의 백성들의 고통을 초래한 인물로 역사에서 비난받아야만 하는 인물입니다.
선조와 인조와 고종이 혼군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처럼, 어리석은 신하 昏臣(혼신)으로 불리워야 마땅한 인물입니다.
당시에 황윤길과 김성일은 각각 서인과 남인으로 파가 달랐으며, 황윤길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으로 김성일은 잘못된 보고를 하게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의 우리 정치에서 민주당이 하는 것을 모두 반대하는 국민의 힘이나 국민의 힘정책을 모두 반대하는 민주당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당과 국민의 힘이 일치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백신접종사기입니다. 수백년 내려온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이 백신사기극에서 멈추게 되니 아이러니합니다.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무마했다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
류성룡의 질문에 대한 김성일의 대답 - 징비록
대저 성일의 사람됨은 지나치게 거만하여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일이 없으므로 사정에 어두웠다. 중봉 조헌의 사람됨과 백중(伯仲)을 이룬다.[15] <은봉야사별록>에서 임진년의 일로 그 나라를 잘못되게 한 죄는 오로지 성일에게 있다 고 한 것이 전적으로 거짓된 말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안동의 인물 학봉김성일 종택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안동시에서 안동김씨 김성일의 고택으로 그의 생가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이 아직 일본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근거입니다. 민족의 큰 고통을 안겨준 실패한 인물을 기리고 보존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른 나라라면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아직도 한국이 일본인들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승리의 역사를 안겨준 패배한 민족의 인물을 기리는 것은 그들에게는 소소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시드키야의 오판처럼 선조와 김성일의 오판에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고집이 있었습니다. 시드키야는 말씀보다 전쟁에서의 가능성을 계산하였다가 멸망했습니다. 선조와 김성일은 진리보다 자신들이 생각하고 싶은대로 믿어버린 것입니다. 시드키야나 선조와 김성일은 그 자신과 그의 민족의 파멸을 불러왔지만 지금까지도 반성은 없고, 체념뿐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도 목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백신이 안전하다는 거짓을 진실보다 더 신뢰하였습니다. 믿고 싶은대로 믿는 다고 현실이 바뀌지 않으며, 조선은 비참한 전란을 맞이 하였고, 백신 접종자들은 자신의 육체의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병원 진료에 항상 접종인지 부터 묻습니다.
저는 조선의 역사를 괴뢰정권의 비정상적인 유지라고 생각합니다. 슬프게도 이러한 비정상은 조선왕조에서 끝나지 않고, 일본 미국 중국 다시 미국으로 그 주인이 바뀌고 있는 와중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임진왜란 당시의 백성이나 우리나 어떻게 바꿔볼 방법이 없습니다. 윤석열이 미국의 지시에 따라 전쟁을 시작하면 전쟁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시드키야왕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가 같은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시드키야왕의 고집으로 시작된 전쟁은 심판이 아니라 재앙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 재앙이 될 것이며, 인내하면 이겨낼 수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지막때를 살아가는 세대의 사람들로 전쟁보다는 종교통합이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많은 전쟁에 관련된 소문이 들려오더라도 종교통합을 대비하는 것이 순서에 맞습니다.
그리하여 고관들이 예레미야에게 화를 내고 그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감옥에 넣었으니 이는 그들이 그 집을 감옥으로 만들었음이라. 15)
Wherefore the princes were wroth with Jeremiah, and smote him, and put him in prison in the house of Jonathan the scribe: for they had made that the prison. 15)
O 예레미야가 지하감옥 밀실에 들여보내져 거기에서 여러 날 동안 있었을 때, 16)
When Jeremiah was entered into dungeon, and into the cabins, and Jeremiah had remained there many days; 16)
dungeon (과거 특히 성 안에 있던) 지하 감옥
위 말씀에 나오는 감옥은 요나단 개인이 만든 사감옥으로 그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을 것으로 느껴집니다.
시드키야왕이 보내서 그를 끌어내어, 자기 궁에서 그에게 은밀히 물어 말하기를 "주로부터 무슨 말씀이 있느냐?" 하니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있나이다." 하고 그가 말하기를 "왕은 바빌론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하더라. 17)
Then Zedekiah the king sent, and took him out: and the king asked him secretly in his house, and said, Is there any word from the LORD? And Jeremiah said, There is: for, said he, thou shalt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king of Babylon. 17)
또 예레미야가 시드키야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왕과 왕의 신하들과 이 백성들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들이 나를 감옥에 가두었나이까? 18)
Moreover Jeremiah said unto king Zedekiah, What have I offended against thee, or against thy servants, or against this people, that ye have put me in prison? 18)
바빌론 왕이 당신들과 이 땅을 대적하여 오지 아니하리라고 당신들에게 예언하여 말한 당신들의 선지자들이 지금 어디에 있나이까? 19)
Where are now your prophets which prophesied unto you, saying, The king of Babylon shall not come against you, nor against this land? 19)
당신들에게 백신을 맞으라고 하던 의사와 목사와 관료와 정치인과 친구와 가족과 직장동료와 고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백신을 맞는 것이 좋지 않지만 선교를 위해서라면 기도하고 백신을 맞을 수 밖에는 없지 않은가?
순종하지 않지만 인내가 필요없는 휴거를 기쁨으로 소망하자.
순종하지 않지만 인내가 필요없는 휴거를 기쁨으로 소망하자.
순종하지 않지만 파라오 군대가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할 수 있다.
위의 속삭임은 사람이 원하는 생각대로의 믿음이며, 현실을 대비하지 못하게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결국 다다르는 곳은 시드키야, 선조, 김성일이 맞게 될 결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안에는 예레미야가 있고, 하나냐가 있으며, 이리야도 있고, 요나단도 있고 그리고 당신은 시드키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 내 주 왕이여, 내가 청하오니 이제 들으소서. 내가 청하오니 나의 간구를 받아주소어 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나를 돌려보내지 마소서. 그래야 내가 거기서 죽지 않겠나이다." 하더라. 20)
Therefore hear now, I pray thee, O my lord the king: let my supplication, I pray thee, be accepted before thee; that thou cause me not to return to the house of Jonathan the scribe, lest I die there. 20)
이에 시드키야왕이 명하여 예레미야를 감옥의 뜰에 두고 빵 만드는 거리에서 나오는 빵 한 조각을 그성읍에 모든 빵이 다할 때까지 날마다 그에게 주게 하니라. 그리하여 예레미야가 감옥의 뜰에 머무니라. 21)
Then Zedekiah the king commanded that they should commit Jeremiah into the court of the prison, and that they should give him daily a piece of bread out of the bakers' street, until all the bread in the city were spent. Thus Jeremiah remained in the court of the prison. 21)
감옥의 뜰도 일종의 수감장인데 요나단의 지하실보다 훨씬 나은 것이 느껴집니다. 시드키야왕은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하는 예레미야를 챙겨줍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 잘해주는 것과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악하게 대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어야 합니다.
제 자신의 구원은 다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저를 칭찬하건 욕을 하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잘대해주고, 평판이 좋아도 그것은 사람들의 평가일뿐 그것이 하나님의 평가와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평가로 제 자신은 따뜻하지 못하여 내 자신을 보호하는 계산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섭니다. 시드키야왕의 모습으로 볼때 계산하지 말아야하는데 시드키야왕처럼 자신을 보호하는 계산을 반복해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계산이란 시드키야왕이 바빌론을 탈출하는 계산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드키야왕이나 저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현실적인 진리의 모습입니다. 계산하지 않는 것, 제 자신의 보호모드를 풀어버리는 것 그리고 맡기는 것 이것이 진실로 순종이라고 느껴집니다.
이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으며,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였 때에 대접하였고,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혀 주었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에 문안해주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음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26장 35절 36절 37절
보호모드가 가동되고 있는 사람들은 낮은 자를 대접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불행으로 이끄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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