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한국 언론은 바로 설 수 있을까 - 이인숙 작가 기고
사진: 이인숙 작가
[고양신문] 해(年)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덕담을 나누며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의 다짐을 한다. 그런데 올해는 연말과 연시에 연이어 터진 충격적인 사건 때문에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이 착잡했다. 12월 마지막 주에 전 국민을 충격에 빠트린 배우 이선균의 죽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검사까지 포함하여 네 차례 마약검사에서 음성이 나왔는데도 경찰은 세 차례나 소환조사를 하고, 비공개 수사요청도 묵살한 채 그를 포토라인에 세웠다. 3차 소환 때는 19시간이나 강압적, 모멸적 수사를 이어갔다. 직접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는데 왜 이렇게 집요하게 괴롭혔을까.
이 과정에서 한국 언론이 보여준 행태는 어떠했는가. 수사 과정을 언론에 흘려주는 경찰과 이를 먹이 삼아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 언론들, 자극적인 언어로 클릭 수를 유도하는 일부 유튜브 방송들, 유명인은 이렇게 무방비로 당해도 괜찮은 것일까.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언론의 마녀사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확인되지 않은 자극적인 기사와 방송을 보며 저급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일부 시민들의 관음증도 그의 죽음에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약과 아무 관련 없는 사생활을 방송에 내보낸 소위 공영방송의 추악한 민낯은 두고두고 언론사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경찰이나 언론 모두 피해자의 인권은 염두에 없었다. 그의 죽음은 경찰과 언론의 합작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드라마로 꼽는 <나의 아저씨>,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의 배우 이선균을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 드라마를 그다지 즐기지 읺는 나도 <나의 아저씨>는 두 번 봤다. 볼 때마다 울컥하고 마음 따뜻한 아저씨 이선균의 연기에 위안을 받았다. 오물통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더러운 오물을 사방에 뿌려대는 쓰레기 언론이 우리가 사랑하는 배우 이선균을 앗아갔다고 통분하는 지인을 보며 나도 같이 울고 싶었다.
새해 벽두에 일어난 야당대표 공격 사건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단순한 상해가 아니라 목숨을 노린 정치 테러이며 살인미수로서, 살아난 것이 천운이라고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사건의 전모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국 정치의 극단적인 양극화와, 증오와 혐오의 정치가 낳은 사건이라는 데에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야당대표를 범죄자로 단정하는 권력자와 이들의 나팔수 노릇하는 언론들이 그를 악마화하는 데 앞장서면서 정치인들의 증오와 혐오는 국민들의 마음까지 병들게 했다.
그런데 한국 언론에서 피해자의 생명을 걱정하거나 사건 자체를 파헤치고 끝없는 적대와 보복의 정치를 문제 삼는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피해자를 서울로 이송했다고 해서 지방 의료에 대한 무시, 헬기 특혜 등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야당 대표의 생명을 노린 암살 미수라는 사건의 본질은 사라지고 언론이 앞장서서 다시 적대감을 키우고 갈라치기 하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피해자가 여당 대표였다면 어땠을까. 언론들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에 그런 걸 문제 삼는다고 패륜이라고 아우성치지 않았을까. 게다가 일부 유튜브는 이를 자작극이다, 젓가락으로 찔렀다 같은 가짜 뉴스를 퍼트리고 있다. 가짜 뉴스를 엄단하겠다던 정부는 이런 명백한 가짜 뉴스에는 손을 놓고 있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언론의 역할이다. 그 역할을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달리 적용한다면 그것은 언론이 아니라 흉기가 된다. 한국이 망한다면 그 원인의 80프로는 언론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경제적, 문화적 발전과 함께 선진국이 되었다고 좋아하던 것이 엊그제인데 언론은 수십 년 전 군사독재 시절보다 더 후퇴했다. 대다수의 언론이 사명감은커녕 특정 정치권력과 한편이 되어 편 갈라 싸우는 데 앞장선다.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다. 언론만 바로 선다면 현재와 같은 극단적인 증오와 보복의 정치도 발붙일 곳이 없어질 것이고 우리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한국의 언론이 바로 설 희망이 있을까.
출처: 고양신문 2024. 01. 14 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