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
김수영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 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취(醉)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向)하여서도 무관심(無關心)하다.
주검의 전면(全面) 같은 너의 얼굴 위에
용(龍)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병풍은 허위(虛僞)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비폭(飛瀑)을 놓고 유도(幽島)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병풍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병풍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 뒤에서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의 인장(印章)을 비추어 주는 것이 있다.
(『현대문학』 14호, 1956.2)
[어휘풀이]
-유도 : 저승의 섬,
저승을 의미하는 유도(幽都)의 음(音)을 따서 병풍의 그림을 설명하고 있음.
[작품해설]
이 시는 시인 스스로 자신의 현대시의 출발작이라 할 만큼 높이 평가하는 작품으로, 죽음을 노래하면서도 감상에 빠지지 않는 고도의 감정적 절제가 돋보이는 주지적 경향이 모더니즘 시이다. 이러한 감정의 절제는 거의 모든 문장이 ‘끊어 준다’ ⸱ ‘무관심하다’ ⸱ ‘있다’ 등의 평서형 종결 어미를 취하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또한 이 시는 ‘병풍’ ⸱ ‘용’ ⸱ ‘낙일’ 등 우리고유의 동양적 정서를 함축하는 시어를 통해 죽음의 현대적 이미지를 동양적 정서 속에서 제시한다. 이 시의 화자는 문상(問喪)을 와서, 주검을 가리고 있는 ‘병풍’을 바라보며 죽음을 형상화하고 있다. 즉 ‘병풍’ 뒤에 누워 있는 주검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병풍에 그려져 있는 예술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인생의 허무감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병풍’은 화자의 인식의 추이 과정에 따라 사전적의미 ⤑ 죽음의 의미 ⤑ 예술의 의미로 발전 ⸱ 확산된다. 1⸱2행에서는 화자가 병풍을 대면하는 상황으로, 여기에서 ‘병풍’은 단순히 가리래가는 일상적 사물일 뿐이다. 이와 같은 병풍은 3⸱4행에서 ‘주검에 취한 사람처럼’.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하다’는 표현을 통해 죽음의 이미지와 관련되고 5⸱6행에 이르면 완전히 죽음을 뜻하는 의미 기호로 제시된다.
‘용’은 하늘로 오르는 ‘상승’의 이미지이며, ‘낙일’은 하루해가 서산으로 지는 ‘하강’의 이각미지임을 생각할 때, 그것은 분명해진다. 화자는 이제 ‘주검의 전면 같은’ 병풍의 그림 속에서 동양적인 죽음을 발견한다. 화자는 7행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가르쳐 주는 병풍에서 진정한 예술의 세계는 먼저 개인적 감상을 배척해야 함을 깨닫는다. 8행에서는 ‘허위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위치해 있는 병풍을 보여 줌으로써 허위와 가식의 세계에 우선하는 예술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9행의 ‘비폭’과 ‘유도’로 시선을 옮긴다.
10⸱11행에서는 두 가지 의미의 주검이 나타난다. 하나는 예술의 주검인 주검인 병풍이요, 또 하나는 실제 주검인 시신(屍身)이다. 따라서 ‘내 앞에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는 구절은 영원한 예술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싶어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담겨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병풍은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12⸱13행은 1⸱2행에서의 병풍을 마주하고 있는 화자의 상황을 다시 한 번 보여 준다. 그러나 앞에서는 병풍과 화자의 관계가 ‘끊어 준다’ ⸱ ‘무관심하다’라는 단절의 상태임을 비해, 여기서는 ‘바라보다’ ⸱ ‘비추어 주다’의 단절의 극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화자와 ‘병풍의 주인 육칠옹해사’와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예술의 병풍처럼 그의 영혼도 영원할 것임을 믿게 되는 것이다.
[작가소개]
김수영(金洙暎)
1921년 서울 출생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토쿄(東京)상대 전문부에 입학했다가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
1947년 『예술부락』에서 시 「묘정(廟廷)의 노래」를 발표하여 등단
1958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시집 『달나라의 장난』 발간
1968년 사망
1981년 김수영문학상 제정
시집 : 『새로운 도시의 시민들의 합창』(공저, 1949), 『달나라의 장난』(1959), 『거대한 뿌리』(1974),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9), 『김수영전집』(1981),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1984),『사람의 변주곡』(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