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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가 화두타파하고 염불로 돌아오기까지
소동파가 폭포수 소리를 듣고 화두를 타파했는데,
오늘 이야기는 소동파를 끝으로 해서 끝맺음을 하겠습니다.
소동파의 그 오도에 대해서 여러분한테 조금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정도는 여러분들이 알고 넘어가야 되기 때문에 이야기 해드립니다.
(소식(蘇軾, 1037년~1101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지금의 사천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였고 중국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었다.
그는 또 북송사대가로 손꼽히는 유명 서예가이기도 했고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출처 : 위키백과
소동파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소동파 그러면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중국의 당나라 송나라 연간에 여덟 분의 문장가가 있었습니다.
이 소동파는 당송팔대가라고 하는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송나라 사람이지요. 시․서․화(詩․書․畵)에 능하고,
또 대단한 학식과 덕망과 변재를 갖춘 분입니다.
이분은 과거에 합격했지만, 큰 관운은 없어서 주변을 죽 돌아다니면서 요즘의 시장,
군수, 도지사 정도만 살았습니다. 유명한 소동파 이야기입니다.
불교를 대단히 좋아했기 때문에 큰스님이 있으면 꼭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거량(擧量, 법거량)도 하고 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승호라는 당대의 큰스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을 승承 빛날 호晧, 승호라고 하는 큰스님을 찾아갔는데
적어도 관찰사 정도의 직함을 띠고 오니까, 많은 수행인이 있잖아요.
이제 안 받아줄 수가 없지요. 정중하게 모시고서,
(승호스님) “대관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하고 물어요.
관직에 있으면 관대를 두르잖아요. 관직의 관대를 보고 묻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그 말이어.
(소동파) “내성은 칭가요”그랬어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칭자가요 저울칭稱자가 있습니다. 저울 아시죠?
무게를 다는 저울칭稱. “칭가입니다”하니까
(승호스님) 칭가도 다 있나? 속으로. 저울 칭稱자라?
느닷없이 칭가라고 하니까 알아들을 수가 없지.
이상해서 “칭가라니요?”하고 물으니까
(소동파) “예, 천하의 선지식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한번 달아 보는,
얼마나 도가 깊은지 달아보는 칭가란 말이요. 저울이라 그거요”
얼마만한 선지식이냐, 얼마만큼 깊이 깨달았느냐 하는 것을 자기가 달아본다는 거예요.
칭가라는 거요. 그 승호스님이 본체의 체성 공성을 증득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본체세계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이 알아. 하여튼 상당한 사람이었어.
공성증득은 아라한입니다. 얼른 소동파의 소리를 알아듣고 어떻게 말하느냐?
다음 대답이 참 재미있어.
그러니까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승호스님) “아~악!”하고 할(선사들이 방편상 내는 고함소리)을 했다고요.
그것을 선가에서는 ‘할’그럽니다. ‘할’이라고 하지마는 “아~악!”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소동파가 선지식을 달아보는 칭가라고 하니까
그 승호선사가 있는 힘을 다해서 그냥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악!”그랬단 말이요.
(승호스님) “그러면 이 소리가 몇 근이나 되오?” 이걸 달아 봐라 그거요.
이게 선문답올시다. 소위 화두타파, 견성(見性)을 하면 이거 웃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아니까 대답해요. 그러나 지식 갖고는 대답 못합니다.
소동파의 그 학문을 가지고는 대답을 못합니다.
그 때만 해도 아만이 대단히 등등 했습니다 소동파가.
8대 문장가에 들어가고 시도 잘하고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불가에서도 일가견이 있는 분이라 아만이 등등했는데
이 질문에 몸뚱이가 죽어 버렸어. 마음은 살았죠.
그냥 한마디에 녹아버린 거예요. 패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완전히 굴복을 하고 그 곳을 나왔습니다. 한 번 당했지요?
두 번째, 이제 몇 년이 흘렀어요. 공부를 많이 했어요.
대단히 훌륭한 선지식이라는 불인 요원(佛印了元) 선사라는 분을 또 찾아갔어요.
하도 유명하니까. 그 큰스님을 또 찾아갔어.
이제 다른 데로 보직을 받아서 옮겨갔을 때입니다.
가니까 불인요원선사가 이분은 대관이고 학자니까 좀 예우를 해야 되겠는데
옛날이라서 의자도 없어. 절 같은 데는 의자가 없어. 그래서,
(불인요원선사) “우리 절에는 의자가 없는데 어쩌지요?”
그랬단 말이오. 자기방에 모시면서. 그러니까 소동파가 뭐라고 했는냐?
(소동파) “아! 괜찮습니다. 화상(和尙)의 사대(四大)를 좀 빌려서 앉읍시다”
당신의 몸뚱이를 의자 대용으로 씁시다 그 말이오. 너무나 건방지지요.
화상의 사대를, 이 몸뚱이를 사대라고 그래요.
지․수․화․풍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졌으니까 사대라고 하는 거예요.
사대 색신 그러지요.
그 몸뚱이를 좀 빌립시다.
의자대용으로 씁시다. 이렇게 나온다?
그러니까 불인요원선사가 황당하지. 여러분 황당하겠죠?
이 노스님이 선을 많이 해서 지혜가 날카로워요.
화두타파해서 보림을 많이 해가면 지혜가 번뜩입니다.
이것은 나도 그것을 부인 안해. 그래 이제 노승이 이렇게 나옵니다.
(불인요원선사) “참 재미있는 말씀을 다하십니다. 아! 그럽시다.
그런데 우리가 현상문답을 합시다. 대관! 내가 문제 하나를 내겠습니다.
만일 내가 낸 물음에 대답을 하면 이 노승이 의자가 될 것이고,
내가 묻는 질문에 당신이 답을 못하면 대관의 옥대(관대)를 풀어서 나를 주시오.”
옥대. 그 관직에 있는 사람은요 옥대를 찹니다. 관대라고도 합니다.
지금 별을 단 군인들, 장군들은 권총을 차지요. 권총, 혹은 자기관직을 표시하는 별,
이것에 비유하면 맞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대답을 못하면 약속대로 하자는 거예요.
내기 합시다 그거요. 그러니까
(소동파) “좋소”
당당하지. 대석학에다가 중국을 호령하는 1급 문장가였다고요.
그러니까 어떤 일에도 청산유수지. 다만, 그때 견성까지는 못했어.
이 본체인 공(空)까지는 꿰뚫지 못했다고.
그러니까 이제 불인요원선사가 문제를 냅니다. 여러분, 이제 질문이 나옵니다.
(불인요원선사) “대관이 조금 전에 노승의 사대를 빌려서 의자 대용으로 쓰자고 했는데,
사대라는 것은 본래 공한 것이오.” 그 말 알아듣겠습니까?
사대라고 하는 것은 본래 없다 그거요.
분석해서 보면, 석공(析空)으로 들어가면 없습니다.
입자로 해서 더 들어가면 공(空)아닙니까? 그건 아시죠?
“사대가 본래 공인데 대관은 어디에다가 몸을 걸치겠소?”
이것 기가 막힌 질문인거요. 스님 말 해석하겠지요?
사대라는 것은 공(空)이요. 빌 공(空). 공(空)이지요. 일체법이 공(空)이지요.
인연으로 이루어졌으니까. 공(空)이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공(空)인데, 어디에다가 몸을 걸치겠느냐 그거예요.
이 말에 그냥 또 한번 소동파가 완전히 코가 납작해져 버렸어. 이 말에 죽어버린 거예요.
이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완전히 대패했습니다.
그날도 대단히 처참한 패자의 심정으로 되돌아갔어요.
소동파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세계적인 오늘날 대석학도 이런 질문에는 대답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선禪이, 사실은 선禪이 이런 측면에서는
반야지를 연마하는 데는 강점도 있다 이거지.
어떤 석학이라는 사람들도 이해를 못하니까 대단히 오묘하다 이렇게 말을 하지요.
그런데 선(禪)은 그게 불법의 다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선사들이나 우리나라의 불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거듭 강조합니다만 그것은 시작이죠.
자재 만현은 거기서 얼마나 올라가버린 줄 압니까? 광명 만덕님은 어떻고요.
역대로 한 소식 했다는 선사들이 겸허하지 못하고 자기가 최고인 줄 아는 경우가 많은데
모두 ‘증상만(增上慢)’들이지요.
세 번째, 또 소동파가 보직을 달리해서 다른 지방의 수령으로 갔습니다.
다른 지방의 수령으로 갔는데 이제는 두 번을 당해가지고요 아만심은 어느 정도 꺾였어.
아만심은 꺾여가지고 건방진 질문은 안 해요. 이제 못해.
상총선사라는 분이 유명하다고 하길래 또 옮긴 그 지역에 항상 상常, 총명할 총聰,
상총선사(常聰禪師)라는 분한테 또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청법을 정중하게 합니다.
이제는 건방지게 안 해. 화두타파한 사람들의 말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배워야 되겠고. 그래서 이제 정중하게 청법을 합니다.
(소동파) “큰스님을 뵈옵게 되어서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미혹한 중생에게 법을 좀 설해 주십시오.” 하고 법을 청했어.
그 상총스님이 단정히 앉아가지고 한참 말이 없으시더니, 하는 말씀이
이 한마디에 또 죽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죽지는 않으리라 했는데, 이 말에 죽습니다.
어떻게 죽나?
(상총선사) “대관은 어째서 무정설법은 들으려 하지 않고 유정설법을 청하십니까?”
이게 기가 막힌 말이라. 이 말에 죽어버렸어. 이 말 알겠습니까?
무정설법은 듣지 못하고, 들으려고 하지 않고. 사람이나 동물은 유정이지요?
무정(無情)이라는 것은요, 정(情, 마음)이 없는 물건, 저 산이나 돌 ․ 하늘 ․ 해 ․ 달 ․
물소리 ․ 바람소리 등 정이 깃들지 아니한 물건을 무정이라고 그래요.
무정설법,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는 경지는 화두타파가 되면 됩니다. 알았습니까?
그런데 이 소동파가 상총선사한테 와서 극진히 예를 다하면서
‘법을 듣겠습니다. 좋은 법문 좀 내려주소서.’ 그랬거든요.
자기는 누굽니까? 유정이지.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는 사람 아닙니까?
이건 무정이라고 안 해. 유정이라고 그래요.
‘왜 상총이라는 유정의 설법만 들으려 하고, 저 무정설법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이어.
그러니까 또 한방 맞고 케이오(KO)당한 거예요. 여기서 완전히 또 죽었습니다.
말을 못해버렸어. 죽어가지고 그 이상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정신이 나가가지고 나와요.
나와서 말을 타고 가. 그는 말을 타고 굽이굽이 산골을 넘고 넘어 몇 십리를 왔는지 몰랐어. 이 사람 머리 속에는 오직 무정설법이 뭐지? 무정설법 무정설법... 이 의심덩어리 뿐이었어. 어찌나 창피를 당했던지, 그 아만이 등등하던 당대의 최고 문장가가 세 번이나 당했으니까 완전히 사무쳐서 자기의 몸뚱이가 있는지 없는지 말타고 가는지 걸어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 일체의 사량분별과 정식(情識)이 몽땅 끊어져서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 되어버렸다.
이게 이제 견성의 문턱인 거예요. 내 책에 내가 견성할 때 써놓은 것이 있을 거예요.
아무 망상도 무슨 생각도 따라붙지 못하고 그저 무정설법, 무정설법 하면서
의심이 꽉 차면, 이렇게 하면 어떤 기연을 만나서 깨치게 됩니다.
말은 그를 태운 채로 산길만 터벅 터벅 걸어간단 말이어.
그런데 이분이 참 운이 좋았어. 전생에 선근이 있었던지,
그때 돌연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낭떠러지로 ‘쏴~아!! 쾅~쾅!!’하고
계곡을 뒤흔들며 내리치는 소리가 들리자 ‘아~앗!’ 소리를 하면서 깨쳐버린 거예요.
소동파가. 물소리를 듣고 깨쳐버린 거예요.
말하자면 무정의 설법을 듣고 깨쳐버린 거예요.
그래가지고 읊은 게송이 있습니다. 게송이 뭐냐?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舌” 이요.
계성은 그 시냇물소리(계성溪聲). 시냇물소리가 다른 소리가 아니구나.
청정법신비로자나부처님의 대 설법이구나. 그 말이어.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인가
산색, 산의 모습 또한 청정법신비로자나부처님의 모습이 아닌가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를
이와같이 깨달은 이맛을, 내가 느낀 이맛을, 밤 새 내가 알아버린 팔만사천법문을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이랴.
훗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할까.
이런 게송을 읊었어. 견성, 한 소식을 한 거지.
그런데 그 소동파가 늙어서 염불로 돌아왔습니다. 극락왕생 하려고.
이 선(禪)의 한계는 아라한입니다. 깨침은요.
그것도 자기를 버리는 공부, 그리고 두타행을 통해서
착이 떨어져야 아라한이올시다.
이제 화두타파 했으면 두타행을 하고 무아의 공부를 해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이제 아라한입니다.
상락아정의 니르바나세계는 거기서도 백천만리를 가야 됩니다.
출처:2011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