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펜스코리아의 문제청년님의 글을 옮겨 온 것입니다. 물론 동의를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디코에 글을 쓸 수 없으므로) 나중에라도 문제청년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삭제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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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1차대전 당시 보-포 합동 공격 전술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후티어 전술과, 1918년 독일군의 춘계 대공세 당시 후티어 전술을 구사한 독일군의 선봉에서 맹활약한 돌격대(Sturmtruppen)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주제에 있어서는 제가 예전에 역사 웹진에 연재한 바 있는 '20세기의 강철 기병 - 전차의 등장'이란 글에서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간단하게 추가하여 몇 가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개전 이래 지금까지 어느 쪽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이 구사할 필승 전술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영국과 프랑스가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차를 개발하여 그 결과 보병·전차 합동 전술을 창안하게 되었다면, 이 시기의 독일은 당시의 보병·포병 합동 전술의 효율성을 더욱 극대화하는 데에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개념의 전술을 상징하는 두 가지 핵심 요소를 꼽는다면, 바로 후티어(Hutier) 전술과 돌격대(Sturmtruppen)의 조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후티어 전술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자.
후티어 전술은 1917년 9월 당시 동부 전선에서 독일 제 8군을 지휘하여 리가(Riga)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오스카 폰 후티어(Oscar von Hutier)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전투에서 그는 수적으로 열세였던 독일군을 지휘하여 러시아군의 강력한 드비나(Dvina) 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하루만에 리가를 점령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1차대전의 공격 전술의 꽃이요 현대 공격 전술의 기간(基幹)으로까지 평가받고 있는 이 전술의 본질은 바로 새로운 개념의 포병과 보병의 합동 전술이었고,
그 구체적인 양상은 다음과 같다.
먼저 포병 전술의 경우, 지금까지는 공격 개시 며칠 전부터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하여 쉴새없이 포격을 퍼부어 주로 적의 참호와 철조망 등 방어 진지를 최대한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이러한 장기간의 준비 포격은 자신의 공격 의도를 적에게 노출시켜 기습을 불가능하게 하였고, 무인 지대를 포탄 구덩이로 뒤덮어서 보병의 신속한 공격의 발목을 잡았으며, 또한 튼튼한 대피호를 갖춘 참호의 경우 적에게 생각만큼의 피해를 주지 못한다는 것이 점차 명확해졌다.
이와는 달리 후티어 전술은 공격 개시 5시간 이내에 집중적으로 준비 포격을 실시하는데, 이 때 고폭탄, 유산탄, 가스탄, 연막탄 등을 골고루 사용하여 적 진지를 대혼란에 빠뜨려 적의 저항 의지를 꺾는다.
또한 목표물 역시 이제까지의 전방 진지와 포대뿐만이 아니라, 적의 지휘 본부, 통신 시설, 병력 집결지 등을 포함하여 적으로 하여금 적절한 전선 통제와 부대 지휘가 불가능하도록 하였다.
결국 이러한 포병 전술의 핵심은 기습을 달성하고, 보병의 신속한 공격을 보장하며, 적을 전멸시킨다기보다는 혼란에 빠뜨리고 사기를 떨어뜨려 궤멸시킨다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보병 전술 역시 위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지금까지는 보병들로 하여금 단단한 밀집 대형을 유지하게 하고 제파적으로 적진에 투입하여 적 방어선 전체에 걸쳐 동일한 수준의 압력을 가하였는데, 이러한 전술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솜므 전투에서의 영국군의 공세였다.
하지만 이 전술은 말하자면 적의 강한 지점에 힘을 집중한다는 개념이었는데, 참호전에서 방어측이 가지는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공격측의 대규모 인명 손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반면 후티어 전술에서는 소규모 부대에 보다 큰 재량권을 주어서 인접 부대와의 엄호 하에 은폐·엄폐물을 이용하여 적진으로 접근한 다음, 적의 방어 태세를 살펴서 강한 지점은 우회하고 약한 지점을 골라서 공격한다.
그리하여 적진 깊숙이 침투하게 되면 고립된 적의 방어 거점은 후속 부대에 의하여 포위·섬멸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병 전술에 힘과 속도를 더욱 실어 준 것이 바로 돌격대였다.
빌리 로어(Willy Rohr) 대위와 헤르만 가이어(Hermann Geyer) 대위의 이론에 따라 조직된 이 부대는, 1917년 1월부터 일반 부대에서 병사들을 차출하여 철저한 훈련 과정을 거쳐 양성한 정예 부대였다.
1918년의 대공세에서 선봉에 나서게 될 돌격대의 본질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화력과 속도였다.
850명으로 구성되어 대위의 지휘를 받는 돌격 대대의 경우, 경기관총 24정, 중박격포 8문, 경박격포 8문, 화염 방사기 8정, 경포 4문 외에도 다수의 중기관총과 기관단총, 총류탄 발사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처음에는 전진하는 탄막 포격을 바짝 뒤따라 진격하다가, 야포의 사거리를 넘어서게 되면 강력한 자체 화력을 이용하여 적의 저항을 꺾고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적의 강한 지점은 피하고 약한 지점을 공격하면서 끊임없이 전진, 또 전진해야 했고, 보급이나 증원을 위하여 멈춰서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그들 앞으로 새로운 부대가 임무 교대하여 진격 속도를 계속 유지하였던 것이다.
'기습을 받은 적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돌격대 전술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독일군의 전술은 전차만 없었을 뿐, 2차대전의 전격전 이론과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즉 기습의 효과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강력한 화력으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신속하게 후방으로 침투하여 적을 혼란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려서 궤멸시킨다는 것은, 전격전의 3대 요소, 즉 기습(Surprise), 속도(Speed), 화력의 우세(Superiority of Fire)를 모두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루덴도르프는 이러한 돌격대 방식의 훈련을 전 부대로 확대 실시하는 한편, 1918년 2월 15일에서 3월 10일까지 열차 10,500량을 쉬지 않고 운행하여 병력과 장비를 전선으로 실어 날랐다.
그리하여 공세 개시 직전까지 공격의 선봉에 나설 44개 '기동 사단', 이들을 증원하게 될 30개 '공격 사단', 그리고 이들이 점령한 영토를 수비할 100개 '참호 사단'을 서부 전선에 배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가공할 만한 공격이 가장 먼저 시작될 곳은, 이미 2년 전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의 목숨을 집어 삼켰던 솜므 전선이었다...
말은 장황하고 어려울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결국 후티어 전술의 본질은 과거 수천년간 이어져 온 전술의 일반 원칙, 즉 적을 기만하고 적의 측면과 배후를 기습하여 혼란에 빠뜨리고 사기를 떨어뜨려서 괴멸시킨다는 아주 당연한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전술에 있어서 돌격대는 강력한 화력과 강철같은 체력, 그리고 숙달된 전술 능력을 통하여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하였지요. 마치 20년 뒤의 2차대전에서 독일의 기갑부대가 그러하였듯이 말입니다.
사실 1차대전의 경우 대부분의 고위 지휘관들은 병력과 물자는 엄청나게 늘어난 반면, 서부 전선이라는 극히 좁고 참호화되어 있는 전장에서 이러한 병력을 어떻게 기동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인지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총력전 하의 동원 체제를 최대한 이용하여 더 많은 대포, 더 많은 포탄을 끌어모아서 적진을 초토화할 수만 있다면, 그 뒤에는 용감한 병사들이 맨몸으로 정면 돌격하여 전선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장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쪽에서 더 많은 대포를 동원하면 저 쪽에서도 더 많은 대포를 동원하고, 이러한 과정이 상호 반복되면서 전장의 화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다 보니, 결국 이것이 1차대전 하면 떠오르는 악몽같은 대량 살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군이 선택한 해결책으로서의 후티어 전술과 돌격대 역시, 궁극적으로는 독일에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그 때까지 독일군이 기동력에 있어서 인간과 가축의 힘에 의존하였다는 점을 들고자 합니다.
위의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돌격대 전술의 경우 대원들에게 초인적인 힘과 체력, 그리고 의지력을 요구하는 전술이었으며, 또한 그들에게 병력을 증원하고 물자를 보급하는 것은 여전히 트럭보다는 우마차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미 1차대전의 전장 환경은 인간과 말 등의 짐승이 맨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위험한 상태로 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술의 변화를 통하여 일시적으로 전선을 돌파할 수는 있었지만, '승리'한 독일군 역시 '패배'한 연합군 못지 않은 피해를 입고 제대로 증원이나 보급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던 것입니다.
실제 상황을 통하여 후티어 전술의 양상을 살펴 보도록 하죠.
1918년 3월 21일 개시된 독일군의 제 1차 춘계 대공세, 즉 제 2차 솜므 공세는 약 보름간의 공세 기간 동안 연합군 전선을 돌파하고 무려 60Km 이상 전진하는 대전과를 거두었습니다.
2년 전 같은 곳에서의 제 1차 솜므 공세 당시 영국군은 넉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고작 10Km도 전진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군도, 패배한 연합군도 모두 24만 명에 달하는 비슷한 규모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오히려 독일군의 경우 사상자의 대부분이 최정예 부대인 돌격대였기 때문에 더욱 뼈아픈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죠.
그 뒤 5차까지 이어진 독일군의 공세에서 결국 독일군은 어느 한 곳에서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10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었으니, 이것이 바로 후티어 전술의 실상인 것입니다.
사실 이 후티어 전술을 말하면 꼭 같이 나오는 것이 바로 구로 전술입니다.
1918년 독일군의 마지막 대공세인 제 2차 마른 공세에서 샹파뉴 지역을 맡고 있던 프랑스의 앙리 구로(Henry Gouraud) 장군의 유연 종심 방어 전술로 인하여, 이미 사기가 떨어진 독일군의 후티어 전술을 저지해낼 수 있었죠.
하지만 사실 유연 종심 방어 전술이라는 것은 그 이전에도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1915년의 루스(Loos) 전투 당시의 독일군 진지, 1917년의 독일군의 힌덴부르크 방어선, 1918년 3월 제 2차 솜므 공세 당시 영국 제 3군의 방어 진지 등에서도 이미 수 개의 참호선에 병력을 차등적으로 배치하여 적을 살상 구역으로 최대한 끌어들여서 막대한 인명 손실을 강요하는 방어 전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로 전술으로서 후티어 전술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후티어 전술의 주역이 인간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이 말은 곧 앞으로의 전쟁에서 기동전의 주역은 인력이나 축력 등 근육의 힘이 아닌 기계를 이용한 동력의 힘을 이용한 기갑 차량이 맡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첫댓글 즉 결국 돌격대는 적진을 직접 공격하는게 아니라 고대 전쟁에서의 기병대처럼 적 후방으로 우회하여 공격하는 기동대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