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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7.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좋은 옷을 입히시는 하느님.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7:07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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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7.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07. 05:44
- 좋은 옷을 입히시는 하느님
누구의 사랑이 참사랑인지는 배반했을 때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배반했을 때 사랑을 거두는지 그래도 사랑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인 우리는 늘 사랑의 배반을 경험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했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의 사랑은 큰데 너의 사랑은 작다고 생각하고,
그러고는 그런 너는 사랑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의 사랑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답을 바라는 아주 차원이 낮은 사랑이라고 치부하지 말 것입니다.
정말 보답을 바라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사랑의 가치를 알아주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금보다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사랑을 줬는데
그 사랑의 가치를 모르니 사랑의 가치를 모르는 자는
사랑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 사랑을 진정 금보다 귀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나라도 내 사랑을 가치 있게 여기고 포기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남이 내 사랑의 가치를 몰라준다고 사랑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주도권을 포기한 것이요,
너에 의해 내 사랑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사랑은 너에 의해 내 사랑이 좌우되지 않기에,
내가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것이지 네가 사랑할 만하기에 사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랑을 그만두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작은아들처럼 내 사랑이 싫다고 떠나도
그런 아들이 아버지에게는 가여울 뿐이지 괘씸하지 않고
그래서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그런데 참사랑은 내 사랑을 떠난 사람을 괘씸하게 여기지 않고
가엾게 여길 뿐 아니라 여전히 귀하게 여깁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의 행동에서 나타납니다.
쫄쫄이 굶고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가장 맛있는 송아지 고기를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힙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그런데 그저 받아주는 것만도 대단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큰아들에게
이런 아버지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불만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벌을 받아야 하고 죗값을 치러야 할 놈에게 좋은 옷 입힐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에게 작은아들은 당신 사랑을 떠나 고생고생한 것으로
이미 충분히 벌 받고 죗값을 치른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죄인 취급할 생각이 없고 돌아온 것이 오히려 고맙기만 한 것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부모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이 이해가 갑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병들고 자기보다 먼저 죽는 것이 제일 불효이듯이
하느님도 우리가 죄로 인해 영육 간에 아픈 것이 제일 마음 아프시고,
그래서 죄를 지어도 좋으니 죽지 말고 살아만 다오!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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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7. 사순 제2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모든 것을 사랑하면 그 사랑 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하느님의 회복하는 정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
2026년 3월 6일 금요일
리처드 신부는 불의가 일어날 때 그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은총과 사랑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온전하고 궁극적인 메시지는 회복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주로 응보의 정의만을 이해해 왔습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엄격한 보복처럼 들린다는 것을 저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흑백 논리와 복수의 색채가 짙은 성경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성경 말씀이 동일한 영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같은 의식의 수준에서 기록된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는 것은 근본주의 신앙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분법적 사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마치 건강한 자아와 틀을 먼저 세운 뒤에야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강한 이분법적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사람의 아들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마태 25,32-33)와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역설을 받아들이기 전에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본적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기본적인 정직과 명확성이 없다면 비이원적 사고는 그저 순진해 빠진 것이 되고 맙니다. 먼저 건강한 이분법적 사고를 익힌 뒤에야, 그것이 지혜와 자비의 차원에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놀랍지 않게도, 예수님께서는 이분법적 분명함은 물론이고 비이원적 지혜와 자비를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인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에고는 악인들이 영원히 벌을 받고 선한 이들(곧 우리 자신과 같은 이들)이 완전히 상을 받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다른 이들이 벌을 받아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생각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영혼이 다른 이를 지옥불에 던져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하느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1]
하느님의 사랑이 정말 그렇게 크고 보편적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은 곧 배움이며,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나 위대하여 결국 우리 모두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 그 사랑을 참으로 보게 된다면 감히 거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그 사랑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게 되고, 하느님—곧 사랑—께서 마침내 승리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곧 하느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정의"이며, 우리의 협소한 응보적 정의를 삼켜버릴 것입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어린 소녀였을 때, 하느님은 가혹한 감독자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어머니(정신분열증을 앓으셨습니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을 보실 때마다 손가락을 흔들며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지옥에 갈 거야.”
이 말은 저를 두렵게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비롭고 따뜻한 수녀님들과 본당 신부님들을 만나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1950~60년대에 이분들은 저에게 사랑과 자비, 돌보시는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1990년대에 저는 리처드 신부님과 CAC(Center for Contemplation and Action)를 만나 제 영혼을 계속 길러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80대에 접어들었고, 매일 하느님께서 저를 가까이 품어주시며 인도해 주심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Mary W.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CONSPIRE 2016: Everything Belongs, session 3 (CAC: 2016), MP4 download. Unavailable. See also “Universal Love” Daily Meditation, December 8, 2016.
[2] Adapted from Richard Rohr, Everything Belongs: The Gift of Contemplative Prayer (Crossroad Publishing, 2003), 133.
Image Credit: Jordan Heath, untitled (detail), 2018, photo, New Zealand,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강과 호수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의 위대한 분수령을 봅니다. -- 정의가 원한 없이 넓게 흘러가며, 우리를 우리의 상처보다 더 큰 사랑 안으로 이끌고,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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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탕부(蕩父)의 비유"라는 불멸의 이야기!
네 복음 저자들 가운데 오직 루카만이 "탕자의 비유"라는 불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작은아들이 큰아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그 가정 안에서 정말로 약자(underdog)였습니다. 큰아들은, 감히 말하자면, 가장 나쁜 유형의 형이었습니다. 부모 같은 따뜻한 마음은 없이 부모처럼 굴었던 셈이지요. 그는 냉혹하고 판단적이며, 시기하고 통제적이고 자기-의로움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 자존심마저 잃게 된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그의 형은 가장 우울한 형태의 체면과 체통을 대표하는 사람이었기에 작은아들이 집을 나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두 아들보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작은아들을 "탕자(蕩子)"(prodigal son)라 부릅니다. prodigal(방탕한)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prodigus에서 온 것으로, "풍성한, 낭비하는"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리고 한자 탕(蕩)이라는 단어도 "털어 없앨", "쓸어버릴" 등의 뜻을 지니고 있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다 써 버리든가 내어 준다는 뜻을 지니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은 풍성하고 무모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보다 더 그러했습니다! 아버지는 자비와 용서에 있어서 풍성하고 또 무모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탕자(蕩子)의 비유"라기보다 "탕부(蕩父)의 비유"라 불러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이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큰아들로 비유되고 있음을 금방 눈치챘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모두 예수님을 찾아와 함께하려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을 큰아들의 모습 속에 완벽하게 담아내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작은아들을 칭찬하신 것은 아닙니다(이야기의 초점은 다시 말하지만 아버지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약자가 "강자"보다 아버지의 자비를 더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조금은 극단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탕자"이어야만 "탕부"를 알아볼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분명히 "풍성하고 무모한"(prodigal)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그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 끌어안고 다정히 입을 맞추었다."고 루카 복음 저자는 전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준비해 온 회개의 말을 끝까지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어서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어라…." 그 반지는 그가 품꾼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임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따뜻하고 온전한 용서이며, 사실 용서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라면 어떤 이야기든 지어내실 수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방탕한 아들이 심하게 벌을 받는다든지, 아버지가 조건과 제약을 내걸고 일정한 시험 기간을 두었다든지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그러하듯이 말이지요.…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그런 그림자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용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내 줄 뿐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해 가는 데 있어 가장 깊은 토대로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나'나 '너'의 잘잘못에 연연하는 자세로 신앙의 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처럼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돌아가고자 마음 먹고 또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인이고 아버지 하느님의 풍성하고 무모한 자비에 힘입어 아버지 곁을 떠나 방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해 주시는 정성 가득한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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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7.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7-18)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과 신뢰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비록 아들이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했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일이기에,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또한 이 사순시기에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돌아가서
아버지께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품으시는
그 사랑에 안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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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7.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원준 선생님의 구약성서의 인물을 잘 듣고 있습니다.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예언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언자는 미래를 알려주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알려주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고대 근동에 있었던 나라의 예언자를 함께 살펴보면 좋습니다. 이집트에도 ‘신관’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예언자는 ‘사후예언(事後預言)’이 많았습니다. 지금 왕의 업적과 능력을 예전에 있었던 예언의 결과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언이 있었기에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드러내기 위해서 예언을 지금 만드는 것입니다. 아카드에도 ‘신관’이 있었습니다. 왕의 후계자를 위해서 ‘신탁’을 받았습니다. 신탁이 좋지 않으면 다른 후계자를 내세워 후계자를 죽이고, 다시 신탁받았습니다. 신탁이 좋게 나오면 그때 비로소 왕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웠습니다. 이집트와 아카드의 예언자는 모두 정권과 함께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정권의 통치 수단으로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정권의 비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왕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어긴다면 과감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대부분의 예언서가 그렇습니다.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언서가 구약성서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망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로니아로 유배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왜 이스라엘이 망했는지 성찰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벌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변의 나라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권에 반하는 이야기를 했어도 구약성서의 예언서는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아합왕은 바알과 야훼 신을 함께 섬기려고 했습니다. 마치 한국이 미국과 중국과의 외교를 균형있게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정치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은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반(半)’만 믿는 것은 하느님을 ‘반역(反逆)’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왕과 권력이 약자의 것을 빼앗고 생명을 짓밟을 때, “당신이 살인하고 그 땅을 차지하지 않았느냐”고 외치며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모스는 나라가 번영하고 종교의식이 화려할수록 가난한 이들이 짓밟히는 현실을 고발하며, 하느님께서는 제사와 축제가 아니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원하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과 제도, 신앙의 외형에 안주한 백성에게 “주님의 성전이라는 말로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외치며, 회개 없는 신앙은 오히려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사야는 군사력과 외교 동맹에 의지하려는 정권을 향해 말과 병거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외치며, 참된 평화는 힘의 균형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에서 온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고,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이 온다고 했습니다. 여인이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는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신앙이 없는 과학과 이성은 목적지를 잃어버린 배와 같습니다. 신앙이 없는 물질과 자본은 많은 사람의 희생을 요구할 뿐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만 하면,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기만 하면, 하느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하고, 눈처럼 희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큰아들을 봅니다. 큰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 그와 같은 판단을 하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큰아들처럼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규정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을 따르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하심에 맡겨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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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7.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gBn/2012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 집 나가니 그렇게 좋디?
언젠가 저희 수도회 연례 피정 강사로 성서학을 제대로 전공하신 박사 신부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 일주일간 오전 오후 계속되는 강의의 주제는 오로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돌아온 탕자였습니다.
저는 당시 정말이지 크게 놀랐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복음서 한 대목으로 그토록 다양하고 깊이 있는 해석과 분석, 묵상과 성찰이 가능하다는 것에. 그래서 저 역시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 연례 피정 때 배운 둘째 아들에 관한 묵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고 있습니다.
잘못이란 잘못은 다 저지르고 난 후, 굶어 죽기 일보 직전에야 생각을 바꿔,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번 주목해보십시오.
저 같았으면, 분노를 겨우 눌러 참으며 사무실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밖에 둘째 아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오면 그랬을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쭈뼛쭈뼛 사무실로 들어오는 그를 향해 이렇게 호통을 쳤겠지요.
“꼴 좋~다!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 집 나가니 그렇게 좋디?”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겠지요? “지금 돈 얼마나 남았어?”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게 처신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동구 밖 어귀까지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제나저제나 둘째 아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십니다. 이윽고 거지 중의 상거지가 된 둘째 아들이 멀리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둘째 아들의 모습임을 확인한 아버지는 조바심이 나 더 이상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노구의 몸이란 것도 잊은 채 아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나가십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꼭 껴안으십니다.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잘 돌아왔다!”란 말씀만 한없이 반복하시며 그의 등을 토닥이십니다.
중죄인이자 불효자, 패륜아이자 문제아인 둘째 아들을 극진히 환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우리 하느님의 실체이자 본 모습입니다. 아버지 품에 안겨 있는 둘째 아들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이런 교훈을 우리에게 건넵니다.
“인간은 뭐니 뭐니 해도 하느님 아버지 품에 안겨 있을 때, 하느님 집 문간 안에 머물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꼭 끌어안고 놓을 줄을 모르시는 아버지의 행복한 얼굴은 또 다른 한 가지 불멸이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우리의 귀환만이 중요하지 지난 죄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아버지, 미래지향적 아버지십니다.”
우리도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큰 죄를 짓고 아버지를 떠나갈 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완전히 아버지께로부터 등을 돌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죄인인 가운데서도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맺은 마지막 끈, 세례 때의 그 첫 마음을 끝까지 간직해야 합니다. 그 가느다란 마지막 끈으로 인해 우리는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고 구원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 역시 성장해나가면서 심한 성장통을 겪습니다. 과오를 범하면서, 빚나가면서, 실수하면서 그렇게 성장합니다. 그럴 때마다 호통을 치고, 불벼락을 내릴 일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을 환대하시는 아버지처럼 또다시 그를 환대하고, 또다시 따뜻하게 안아주고 기다려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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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tory.kakao.com/ 黃Dami 매일묵상 09:00 추가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서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비유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대목이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말이지 단출합니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입니다.
전에는 이 비유를 묵상할 때마다, ‘나는 과연 첫째 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안에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동시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죄 없다고 큰소리치며, 돌아온 동생을 손가락질하는 큰아들의 모습과 크게 가슴치며 탄식하는 작은아들의 이미지, 그리고 사랑밖에 모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사실 큰아들은 작은아들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판공성사 좀 보라고 외쳐도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판공성사 본 지가 5년,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량한 이웃들을 큰 궁지로 몰아넣는 패악을 저질러놓고도, 반성하기는커녕 큰소리치고, 의기양양하게 활보하는 적반하장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 큰아들입니다.
우리는 부단히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온 이후에 또 한 가지 과제가 생깁니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큰 죄인이다.’‘나보다 더 큰 죄인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고 외치기만 하면서 살아서는 또 안 될 일입니다.
이제는 작은아들에서 아버지에게로 넘어갈 순간입니다.
죽을죄를 짓고 돌아왔지만, 두 손을 활짝 벌리고 뛰어나와 맞이하신 아버지의 크신 자비를
온몸으로 느낀 작은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그 한없는 따뜻함, 그 극진한 환대를 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이제 밥 먹듯이 용서할 때입니다.
치유 받고 구원받은 자로서 이제 틈만 나면 치유와 구원의 손길을 펼칠 때입니다.
탕자의 귀환을 통해 드러난 영적 순환(큰아들☞작은아들☞아버지), 그것은 오늘 우리네 일상생활 안에서 부단히 되풀이되어야 할 아름다운 스토리입니다.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계시는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헨리 나우웬 신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비의 영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고 선하고 자비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요한 23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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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7.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탕자의 눈물
조용필 가수 노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를 자정이 되기 전에 유튜브로 들었습니다. 오늘따라 이 노래를 듣고서는 예전 성당 누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가사 하나 하나를 곱씹으며 가사에 감정을 이입을 하니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에 하늘나라에 가서는 그곳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세상은 아니지만 그곳에선 정말 누나라고 마음 편하게 불러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제목을 조금 달리 개사를 해봤습니다. 그러다가 자정을 넘겼습니다.
어젯밤에 제가 올린 글 몇 편을 연달아 내렸습니다. 제가 집에 자정쯤에 늦게 귀가를 했는데 귀가한 후에 아침에 올릴 묵상글 제목 하나를 생각하고 새벽에 일어나 올리려고 했다가 자꾸 어찌된 것인지 오늘은 그만 조용필 가수 노래에 마음이 먹먹해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이나 묵상하자고 해서 봤는데 돌아온 탕자였습니다. 오랜만에 복음 묵상글을 올려보려고 많은 생각을 하다가 지금 타이핑을 하고 있습니다. 제 가슴도 먹먹하고 해서 이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조금 전까지 가사의 내용을 누나라는 대상을 이입해 생각한 것처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용서를 비는 장면의 내용을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가 용서를 구하며 눈물로 통회를 하는 걸로 묵상주제로 삼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사순 때는 아마도 큰아들에 대해 한번 제가 재조명했으면 한다고 하는 내용으로 묵상글을 올린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 제 기억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 글 내용에 댓글을 남기신 분이 박윤식 형제님이 긴 댓글을 남기셨습니다. 거기까지만 생각이 납니다. 제가 다시 검색해 찾아보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영감의 동물이기 때문에 복음묵상도 같은 주제를 가지고 해도 그때 그때 느낌과 영감이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는 기본 맥락은 같지만 보는 각도가 다를 수 있어서 느낌이 다를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 언급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게 더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동일한 주제에 대해 어떤 복음을 묵상을 한다고 했을 때 동일한 내용 틀에 박힌 그 주제만 생각한다면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묵상글을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난 묵상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해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독백 형식으로 서술하겠습니다.
아버지, 저는 과거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작은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어떻게 아버지께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유산 가운데 제가 차지할 몫을 아버지께 요청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도 큰 불효였습니다. 제가 아버지였다면 불호령을 내렸을 텐데 아버지께서는 그런 저에게 제 요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또 형과 같이 있으면서 같이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아 훌훌 아버지 품에서 떠나 제 자신의 삶을 아무도 간섭받지 않고 자유로운 몸으로 살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 품을 떠났던 것입니다. 처음엔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품에 있었을 땐 방탕한 생활의 유혹이 있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아버지의 품 밖에서는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해서 여자들과도 허랑방탕하게 지내며 즐겁게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땐 너무나도 행복했었습니다. 그런 행복한 생활을 평생할 수 있을 거란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근데 그만 재산이 어느듯 너무 낭비를 한 나머지 탕진이 됐기 때문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품을 팔아야 할 지경이 됐던 것입니다. 급한 마음에 마을 이곳저곳 다니면서 품을 팔려고 했는데 아무도 해 주지를 않게 돼 그만 꼼짝없이 굶어 죽게 된 상황이 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얼마나 막심한 불효를 저질렀는지를 말입니다. 저는 이미 제가 불효를 한 것에 대해 감히 아버지께 용서를 청할 용기조차 낼 수 없었던 천하의 불효막심한 아들이었고 또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아들이었지만 도저히 이젠 아들이라고 말할 수조차도 없는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그때 생각한 게 있었습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는데 저는 그런 낯짝도 없지만 그래도 아들의 자격으로는 용서를 청할 수는 없겠고 또 그렇게 할 자신도 없습니다. 그럼 품팔이꾼으로 삼아주십사하고 하면 그 정도는 자비를 베풀어주시면서 용서를 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작은 희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아버지,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조차도 없는 아들입니다만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다면 그런 기회를 한 번만 주실 수 있다면 다시는 절대 아버지의 가슴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겠다는 걸 약속드리겠습니다. 부디, 아버지 이번 한 번만 눈물로 용서를 청하옵니다.
아버지를 뵈면 이런 마음으로 말씀을 드려야만 아버지께서 조금이라도 용서를 해 주실 것이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자. 아버지가 용서를 해 주시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내가 저지른 죄이기 때문에 달게 받아야 되고 죽어야 할 상황이면 죽음으로써라도 아버지께 용서를 빌고 죽어야 그나마 그게 아버지께 속죄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테니 그렇게라도 하자. 하염없이 아버지의 질책을 생각을 하니 두렵기만 하구나. 어느듯 저 멀리 내가 살았던 아버지집이 보이는구나. 이게 몇 년 만인가.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만 하네. 어떻게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아버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근데 이게 왠 일인가. 저 멀리 보이는 분이 아버지 모습인데 분명 아버지이시다. 연로하신 아버지는 그간 언제나 돌아올까 하고 늘 노심초사하시며 눈물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저 멀리 오는 사람이 아들임을 단박에 알아보셨던 것이다. 신발도 신지 않으시고 바로 달려오시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버지께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큰 불효를 저지는 자식입니다. 아니, 자식이라고 말도 할 수 없는 놈입니다. 부디, 용서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서를 해 주신다면 머슴으로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버지......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 아들 맞구나. 어디 보자 죽었다가 살아온 내 아들 맞구나. 이렇게 아버지는 아들을 목놓아 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던 것이다.
오늘 복음의 스토리를 감정이입이 돼 한번 재구성해봤습니다. 이 내용은 아버지께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고 통회를 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니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탕자가 뉘우친 것은 여러 내용이 있겠지만 무엇을 가장 크게 뉘우쳤을까요?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게 되면 자유로울 것 같았지만 처음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재산이 탕진이 되고 하면서 막상 죽게 됐을 때 그제서야 아버지의 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때 아버지의 품을 저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바로 신앙안이라는 동의어로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는 어쩌면 신앙이라는 울타리가 때로는 우리의 삶을 속박하고 구속하는 틀처럼 생각할 수있는데 사실 이 틀이 결국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된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 있을 땐 그 물 속이 답답한 것 같아 밖을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에 나가게 된다면 그곳은 바로 물고기에게는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신앙이라는 삶도 바로 이 물고기의 삶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그늘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의 포도나무 가지에 잘 달려 있어야 우리는 나중에 우리가 예수님의 자녀로서 잘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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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7.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5,1–3.11ㄴ–32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수군댑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함께 음식을 먹는군.”
예수님은 그들에게 비유로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되찾은 아들(탕자의 비유)’을 들려주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 떠나
모든 것을 탕진하고,
굶주림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 깨닫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겠다.”
그가 돌아올 때,
아버지는 멀리서 보고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회개를 끝까지 보고 나서가 아니라,
돌아오는 움직임 자체를 은총으로 받아들이며 먼저 품습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비유에서 아버지의 행동을
하느님의 자비로 읽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계산된 판결이 아니라
잃어버린 이를 되찾는 기쁨이며,
돌아오는 이를 벌주기보다
살아 있게 하시는 사랑의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맏아들의 분노는
“정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이 식어버린 마음의 경직을 드러냅니다.
암브로시오의 시선은 우리를 향해 묻습니다.
나는 죄인이 돌아올 때 기뻐하는가, 아니면 화가 나는가?
나는 사람을 ‘자격’으로 판단하는가, 아니면 ‘회복’으로 바라보는가?
돌봄 주간의 토요일,
주님은 공동체에게 한 가지를 가르치십니다.
돌봄은 정답을 말하는 일이 아니라, 돌아올 길을 열어주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 길의 시작은
상대가 완벽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달려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맏아들의 마음으로
타인을 재단하지 않게 하소서.
돌아오는 이에게 먼저 달려가신 아버지처럼
저도 자비의 걸음을 배우게 하소서.
상처 난 관계가
당신의 기쁨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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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7. 사순 제2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영근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3&id=2129853&menu=4770
■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 혹시 이런 분들 계신가요?
1.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 적이 있다 or
나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때가 있다 or
예수님 십자가를 생각하며 울은 기억이 있다
2. 나는 자주 미사에 참석하고 매일 기도한다
주일미사는 당연 참례하고 평일미사도 가끔 참석한다
묵주기도를 가끔식 드리고
개인적인 기도는 매일 하는 편이다
예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가지만 더 살펴봅니다.
3. 나는 가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or
이 세상에는 좋은 사건, 착한 일 , 아름다운 이야기 보다는
나쁜 사건, 악한 일, 슬프고 화나는 이야기가 자주 일어난다
또한 착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고난받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나는 이러한 사실 때문에 가슴 아프다
위의 세가지 조건을 만족하시는 분들은 참 잘하시고 계십니다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아주 적지도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암튼, 그런분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 싶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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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말하기 전에 잠깜 점검합시다
먼저 생활양식 확인해 봅니다
1. 항상 은총상태를 유지하다
2. 자주 미사 참석하다
3. 예수님 십자가 수난을 매일 묵상하다
4. 묵주기도 등 매일 기도하다
5. 세상에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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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좋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1.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소망 하십시요
하느님은 인간에게 더많은 은혜를 주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2. 예수님 십자가 수난을 매일 묵상하되,
자신과 다른 영혼의 구원을 지향으로 하십시요
3. 묵주기도, 하느님자비심 기도를 천천히 드리되,
예수님 수난과 성모님 통고를 묵상하시며 하십시요
성모님께 나와 함께 해주심을 말하십시요
4. 성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 하십시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함은 최고의 희생입니다
5.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소망 하십시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바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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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해보시기 바랍니다
한번만 이벤트로 하는것이 아니라
매일 꾸준히 생활양식으로 하십시요
이왕 신앙생활 하는것, 화끈하게 가보십시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령님의 여러가지 은사를 받는것
2.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는것
예수님을 직접 만나뵙게 되면 무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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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129855&menu=4770
■ 사제와 사도직을 수행하는 사람을 위한 기도
** 사제와 사도직을 수행하는 사람을 위한 기도
하느님, 오늘은 사제와 사도직을 수행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저희는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정하상 바오로와 아펜젤러 목사와 안창호를 기억합니다
또한 당신께 영광드린 수많은 유명무명의 평신도들을 생각합니다
성자 예수님, 주님께서는 인류를 너무 사랑하시어
십자가 수난의 희생과 부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그리고 첫미사를 집전하시고 계속 지키라 하셨나이다.
성자 예수님 고맙습니다. 성부 하느님 감사 드리나이다.
거룩하신 성부 하느님,
저희가 우리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계속 미사드릴수있게 은혜 베푸소서
만군의 주님, 저희는 당신께 미사 드리는것이 참 좋습니다.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거행하는 사제들을 보호하소서
자비로우신 성부 하느님,
평신도 사도직을 충실히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인도하소서
당신께 바라는 어린 양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소서
다락방 기도모임을 인도할 사제를 보내소서
다락방 기도모임을 이룰 양들을 보내주소서
그루터기 공동체와 전인격의 영성화도 허락하소서
하느님, 당신 영광을 위하여 그리하소서
자애로우신 성모님, 어머니께서는 하느님의 은혜가 가득하십니다
어머니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인 사제들을 보호하소서 또한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도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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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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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7.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00 추가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5-32)”
1)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회개하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여라.” 라고 ‘모든 사람’을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작은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권고이고, ‘큰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라는 권고입니다.
‘작은아들’은 세리들 같은 죄인들, 또는 죄인이라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이고, ‘큰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또는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인데, 처음부터 ‘작은아들’과 ‘큰아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상황에 따라서 ‘작은아들’이 되기도 하고, ‘큰아들’이 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모습을
동시에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의의 심판’을 내려 달라고 간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합해서 생각하면, ‘작은아들’은 ‘회개한 죄인’이고, ‘큰아들’은 ‘회개해야 할 죄인’입니다.
2) 하느님은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지만, 그 ‘기다림’은 ‘무한정’이 아닙니다.
‘심판의 날’은 하느님의 기다림이 끝나는 날입니다.
우리는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언제까지 기다려 주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는 작은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다가 정신을 차린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루카 15,14-17), 만일에 돈이 아주 많아서 늙어 죽을 때까지 곤궁에 허덕이는 일이 없었다면?
인간 세상의 실제 현실을 보면, 그렇게 살다가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불효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처럼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금 회개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아니더라도,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때서야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3) 뉴스를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왜 저런 악인들을 내버려 두시는가?
자비도 필요하겠지만, 때로는 ‘정의의 심판’이
더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큰아들’이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더라도, 죄에 대해서는 합당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생각.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너 자신이 지은 죄부터 회개하여라.” 라고 말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중간쯤에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어떤 끔찍한 사건의 실제 피해자라면?
나의 ‘큰 상처’와 ‘원한’은 그대로 남아 있고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어서, 하느님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는데, 가해자는 회개했다고 해서 용서받고 하느님의 잔치에 참석해서 잔치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런 상황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이해하는 것은, 또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단,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해서 ‘정의의 심판’을 소홀히 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일에 스테파노 순교자가 순교 때에 박해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지 않고 ‘정의의 심판’을 청했다면?
그리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바오로 사도를 만났을 때,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인정하지 않고
형제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면?
<그런데 스테파노 순교자는 박해자들이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바오로 사도를 만났을 때, 분명히 크게 기뻐하면서 반가워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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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7. 사순 제2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00
https://bbs.catholic.or.kr/b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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