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 5-6
가인과 그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거절하신 사실은 그들이 드린 제물의 형식인가? 아니면 내용인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정하심인가? 하는 것입니다.
1. 본문 5절은
“가인과 그 제물을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입니다.
1) 가인은 위선자들이 습관적으로 하듯이 그 자신도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형식적인 제사를 드려서 빚을 탕감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진정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는 조금도 자신을 하나님에게 헌신할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제사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가치하고 하나님 자신을 비웃는 그런 위선자를 보실 때 그분이 그것을 증오하시고 도저히 그것을 견딜 수 없으시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그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제기되는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 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멀리 철수시키면서 형식적으로 바치는 행위들은 여지없이 멸시하시며 배척해 버리신다는 것은 알 수가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그분에게 바치는 것이 제일 먼저 바라시는 그분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하는 증거로서 우리의 행위를 찾고 계십니다. 그것이 둘째로 그분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롱하고 있는 모든 허구에 찬 이야기들은 모두가 불신의 결과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에 자존심이 추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중재자(仲裁者)의 은혜를 멸시하고 있는 불신자들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유대인들은 어리석게도 상상하기를 가인이 잘 익은 곡식 이삭을 드리지 않고 빈약하게 절반 정도밖에 여물지 않은 곡식을 드려서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에 가인의 제물은 열납(悅納) 될 수가 없다고 상상합니다.
그것은 죄악이 점점 더 깊이 그리고 깊숙이 감추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언급해 온 마음의 부정함을 점점 더 깊이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 사실은 고기가 타는 강한 냄새가 하나님을 달래서 아벨의 제물을 받아들이게 하셨다는 것이 도저히 어불성실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타는 냄새가 아니라 믿음의 좋은 향기가 골고루 침투되어 그 제물들이 달콤한 향기를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3)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는 말씀에서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언제 가인이 자기 동생의 제물이 자기 것보다 더 하나님께 호감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 입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방법에 따라서 곧잘 점성술에 의지하면서 상상하기를 아벨의 제물은 하늘나라의 불로 태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제 멋대로 지어낸 주장에 말려들어 기적들을 발명해 내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우화들을 멀리 추방시켜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기적들에 대해서는 전혀 성경의 증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보다 가능성이 있는 점은 가인이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심판을 자기 안에 이미 형성했다는 점입니다. 그와같은 사실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알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 제사가 자기 자신보다는 그의 동생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동생에게는 기뻐하시고 자기에게는 불쾌하게 여기셨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위선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전혀 그 이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이 오직 이 세상적인 복 뿐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가인의 인격은 우리에게 악인의 모양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악인은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을 무척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자리를 가로채기를 원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사실상 외적인 행위들로 하나님 앞에서 잘 보이려고 분투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의 가식으로 포장되어 있는 한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드리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가면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열렬한 종교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혀 진실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가면뿐입니다. 후에 그들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유익이 전혀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의 원한을 터뜨리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을 털어놓는 것만이 아니라 분노를 폭발시켜서 그들이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그분의 보좌 위에서 끌어내며 타도하는 것도 불사(不辭)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위선자들의 내적인 교만이 그토록 지독해서 외관상으로는 순종의 형식을 갖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무감을 지워버립니다. 그래서 꼼짝하지 못하게 붙잡아 두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도저히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아첨으로 그분을 살살 달래려고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한편 그들은 그들의 가식적인 하찮은 것들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며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갈채를 보내지 않으면 그분이야말로 자기들에게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망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제물들에 대하여 보잘 것 없으며 무가치한 것이라고 선언하실 때 그들은 먼저 투덜거리기 시작하다가 화를 내는 것이 그들의 상태입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불경건은 하나님이 그들과 화목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조건만 내세우면서 하나님과 흥정을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거절당하면 그전부터 하나님을 대항하여 품고 있었던 맹렬한 분노로 불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것을 쏟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이 사실인즉 하나님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분노가 전혀 죄가 없는 자기 동생에게 부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안색이 변하니’ 라고 말할 때 안색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는 단수 의미를 복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가 단순히 갑작스런 격렬한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래오래 지속되는 슬픔으로부터 사악한 감정을 간직하여 질투를 하며 그것을 발산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본문 6절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가인 자신에 대하여 직접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를 하나님의 심리(審理) 공판을 받게 하여 그 악한 자가 현재 그가 내고 있는 분노는 자기에게 전혀 이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그분의 재판에 소환시키고 계십니다. 가인은 자기의 제물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받아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자기 제물에 대하여 배척하셨습니다. 때문에 격렬하게 화가 났습니다.
한편 그는 자기의 잘못으로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내면에 쌓인 악을 깨달았다면 하나님을 타이르는 기고만장한 행동을 중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 없는 동생에게 화를 내는 것도 곧 그쳤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말씀하셨는지는 모세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셨는지 또한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는지 혹은 은밀한 영감으로 그에게 충고하셨는지는 몰라도 가인은 확실히 하나님의 심판으로 구속된 것을 느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담의 아들을 비난하면서 아담의 인격에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통역자란 말을 내세우는 것은 억지 해석이며 심지어는 가혹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박식한 사람보다 경건 면에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선한 사람들이 그런 공상들을 가지고 까불면서 제안하고 있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들의 의도는 다름이 아니라 말씀의 의적인 사역을 중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사단이 계시의 색채를 칠하여 넌지시 주입시키려고 이용하는 상황을 단절시켜 버리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진정으로 고백하거니와 가르치는 순서 면에서 탈선된 공상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추구하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데에 경건한 마음을 고정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관찰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태초에서부터 직접 하나님의 음성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것은 후에 인간의 손으로 다루어질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이 더 존경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가르치는 직능이 아담에게 부여되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 자녀들을 부지런히 교훈 했다는 것에 대하여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오직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역시 모세의 말들을 너무 극심하게 제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교훈들이 대중적인 기록들에 위임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흔히 특별한 방법으로 그분의 뜻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 말씀을 존경하게 하는 ‘기초’가 있었습니다. 한편 사람들의 손을 통하여 전달된 교리는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침묵을 지킨다 해도 우리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그런 망상이 하나님의 징계의 위력을 실제로 엄청나게 감소시켜 버린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에 하나님의 음성이 아담의 귀에 그토록 낭랑하게 울려져서 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처럼 지금 가인에게도 그렇게 지시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