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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산을 베개삼아 누운다는 침산정............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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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산을 베개삼아 누운다는 침산정............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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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까치구멍 집과 도토마리집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산을 베개 삼아 누운 다는 침산정(枕山亭)을 들러본
다. 그런데 이곳을 가기 전에 먼저 마을 회관 앞에 있는 서낭당을 잠깐 보고 가기로 한다, 서낭당이란 마을을 수
호하는 서낭신을 모셔 놓은 신당(神堂)을 말한다. 본 뜻 서낭은 마을의 터를 지켜주는 신(神)인 서낭신이 붙어 있
는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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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신은 원래 성황(城隍)에서 온 말로서 한 나라의 도성을 지켜주는 신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토속 신으
로 변하여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 암튼 수호신의 덕분이었을까?. 20년 전만해도 이 마을은 아이들의 웃음소
리가 황목분교 운동장에 가득했었고 골짜기마다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이 많아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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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당에서 온 동네사람들이 모여 정성을 다해 풍년을 기원하고 공동체의식을 소중히 여기며 새해를 맞이했던 황목 사람들의 옛이
야기는 그저 이야기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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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낭당도 예전에 비해 아름다운 미풍양속은 사라졌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마을에선 정월보름 서낭당 동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맥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나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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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녹화 사업으로 화전(火田)을 일구던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이주해 떠나고 이제는 수골과 수안골을 합해 40
여 가구가 이 마을 주민의 전부다. 김녕김씨 집성촌으로 이 마을은 지금도 밭농사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으며 약
초와 고추농사가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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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중심부인 다락골과 수안골이 만나는 지점에 서낭당(西娘堂)과 마을 회관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옛 모
습 그대로 잘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과 단합이 잘 되고 있음을 대략 짐작
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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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엄청난 굵기의 당숲 나무들이 말해주듯 산골 깊은 곳에 위치한 까닭에 황목 서낭당은 일제강점기와 새마
을 사업에도 무탈하게 옛 모습 그대로 맥.을 이어 오고 있다. 본시 서낭(西娘)의 낭(娘)은 아가씨의 뜻 외에 ‘어
머니’의 뜻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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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쪽을 중심으로 혈통이나 상속이 이루어지는 사회, 즉 모계 사회(母系社會)로 서녘에서 오신 어머니 즉
마고이시며 삼신할미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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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정(枕山亭)은 특이하게도 열십자(十)형태의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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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정(枕山亭)이란 산을 베고 누워있다는 뜻을 가진 정자의 이름이 말해주듯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마을은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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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이제 침산정(枕山亭)으로 향한다, 작은 언덕길을 돌아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이 마을을 대표
하는 침산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 하나가 고풍스럽게 서 있다. 침산정(枕山亭)은 특이하게도 열십자(十)형태의
건물이다. 침산정(枕山亭)이란 산을 베고 누워있다는 뜻을 가진 정자의 이름이 말해주듯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
여 마을은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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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정자 내부로 들어가 보려고 기웃 거렸지만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는 없었고 외부로 돌면서 볼 수밖
에 없는 상황이다. 황목마을에 있는 침산정(枕山亭)은 실은 비지정문화재로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1499에 위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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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정은 1947년 김이섭(金理燮, 1892.6.17~1960.10.26)선생이 건립한 국내 유일의 열십(十)자 형태의 정자로
서 동, 서로 방을 드리고 남, 북으로 마루를 배치하여 가운데는 문을 달았고, 동, 서 2개의 방은 사방에 문을 배
치하여 항상 개방할 수 있게 하여 어느 방향에서건 소통을 할 수 있게 하였으며, 베흘림 모양의 대들보 및 지붕
의 모양도 특수한 모양을 한 특이한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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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후 김이섭 선생은 지인들과 시와 담소를 나누고 문중의 대, 소사를 의논하는 장소로 사용하며 가꾸었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장하고 있던 편액, 시화 등이 훼손·멸실·도난 되고 건물도 노후하여 수리가
불가피하던 차 김이섭 선생의 손자인 김종춘(金宗春)이 봉화군의 비지정문화재 보수사업비와 자부담을 하여
2014년 정자 본체 수리, 2015년 담장을 설치하여 현재의 상태로 보수·중창하였다. 그 덕분에 침산정을 깔끔한
모습으로 단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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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김이섭(金理燮) 선생은 조선말,일제시대를 보내면서 벼슬은 하지 않고 한학을 하며 김녕김씨 충의공파 26
대 암돌문중 종손으로 살면서 문중 대·소사를 총괄하고 엄격하게 자기관리를 하였고 봉화, 안동 등 경북북부지
방의 각 문중 및 유명 문인들과 폭 넓은 교류를 하면서 한평생 올곧게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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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김씨가 침산정이 위치한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황목(黃木)동에 거주하게 된 계기는 8대손 김문기가 단종
복위운동에 연관되어 처형당한 후 역적의 집안으로 몰리어 복권이 되지 않자 18대손 김세건(金世建)이 경기도
양주에서 1686년 이주함으로써 세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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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金文起, 1399~1456) 선생은 조선 전기의 인물로서,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혹은 마암(馬巖)이
다. 충북 옥천군에서 태어나 1426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치르는 3년 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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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관직에 나아가 예문관 검열, 병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는데, 수양대군(세조)이 1453년 계유정난을
통해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 등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한 뒤 1455년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공
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로 있으면서 1456년(세조2년) 6월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려다가 김질, 정창손 등이 밀
고하여 다른 사육신들과 함께 능지처참 되었는데 이를 병자사화(丙子士禍)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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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 선생은 병자사화의 주역 임에도 불구하고 추강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에 성삼문, 이개,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하위지 등 6인만이 사육신으로 기록되고 본인은 빠져 있어서 6인보다 늦게 신원이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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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6년 병자사화 후 성삼문 등 6인은 숙종17년(1691년) 즉 235년 만에 신원이 회복되고, 단종은 숙종24년(1698년)
에 신원이 복권되었다. 한편, 추강이 지은 육신전 기록에 빠진 김문기는 성삼문보다 40년 후인 1731년에 신원
됨으로써 275년 만에 후손들이 밝은 하늘을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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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정(枕山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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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사림에 거론되지 않음으로 뒤늦게 병자사화의 주역들이 신원됨을 알게 된 김문기 선생의 8세손 김이휘가
숙종 43년(1717년)에 신원을 호소하다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죽게 된 이후 그의 장손 김정구의 상소를 영조7년
(1731년)에 받아드려 신원이 회복(복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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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정조2년(1778년) 충의(忠懿)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정조15년(1791년)에 불천위에 봉해지게 된 후, 이후 고
종7년(1870년)에 충신정려의 왕명이 추가되었다. 참고로 2021년 8월 현재 봉화의 현존하는 정자는 104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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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귀(當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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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돌아오는 길에 당귀(當歸)재배 밭을 보았다. 당귀(當歸)라는 의미는“마땅히 돌아온다"라는 뜻을 의미한다. 우리가 잘 아는 당귀는 몸에 좋은 여러 가지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효능이 보혈제
로 특히 부인들에게는 성약(聖藥)이라 할만한 약초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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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와 허리의 냉증, 생리불순이나 생리통, 히스테리, 갱년기 장애, 두통, 빈혈 등에 두루 좋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어혈이 뭉쳐 생기는 여성 질환 등에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여성호르몬 분비를 원활히 해주어 여
성 건강에 특히 좋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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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효능 :당귀(當歸)
모든 풍병(風病), 혈병(血病), 허로(虛勞)를 낫게 하며 궂은 피를 헤치고[破惡血] 새 피를 생겨나게 한다. 징벽(癥
癖)과 부인의 붕루(崩漏)와 임신 못 하는 것에 주로 쓰며 여러 가지 나쁜 창양(瘡瘍)과 쇠붙이에 다쳐서 어혈이
속에 뭉친 것을 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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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로 배가 아픈 것을 멎게 하며 온학(溫瘧)을 낫게 하고 오장을 보(補)하며 살이 살아나게 한다. 기혈(氣血)이
혼란된 때에 먹으면 곧 안정된다. 그것을 각기 해당한 곳으로 가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상체의 병을 낫게
하려면 술에 담갔다 쓰고 겉에 병을 낫게 하려면 술로 씻어서 쓰며 혈병에 쓸 때에는 술에 축여 쪄서 담이 있을
때에는 생강즙에 축여 볶아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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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당귀물로 목욕을 하면 혈액순환 개선 효과는 물론, 신경 안정 효과도 있으며, 상처를 아물게 하고, 통증
을 감소시키는 효과까지 있다고 하니 만병통치 약초인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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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귀의 이름과 꽃말에 대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는 시집을 가는 신부에게 친정 부모님은 상비약으로 사용하도록 말린 당귀를 꼭 챙겨주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시대 군역 의무는 오로지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인 백성들의 몫이었다. 백
성들은 가족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농사를 지어야 하기에 제발 전란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빌었을 때다. 이
거는 예나 지금이 같은 상황이지만... 그러나 백성들 뜻대로 되지 않고 왜구와 오랑캐가 자주 쳐들어와 수시로 장
정들은 전쟁터로 나가야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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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마다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들의 짐 속에 부인들은 기력이 떨어졌을 때 먹고 회복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
아오세요'라는 간절한 아내의 마음을 담은 의미로 당귀를 넣어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본초강목에 따르면 당귀
는 설사, 복통, 치통, 종기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이 '당귀(當歸)'라는 이름과 꽃말(재회)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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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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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 참당귀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승엄초·승검초·승암초라고도 불렀다. 꽃은 보라색이며 8~9월에
핀다. 열매는 타원형이며 두툼한 뿌리에서는 강한 냄새가 난다. 우리나라에는 기름당귀·왜당귀·사당귀 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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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귀 전설]
옛날옛날 어느 산골짜기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마음씨 고운 처녀가 산 너머의 큰 마을의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
게 되었다. 그 마을의 달라진 풍토나 기운 때문일까? 여인은 냉병이 발생, 아이도 못 낳고 고생고생 병앓이를
계속 하다가, 결국 시집에서 소박을 맞게 되었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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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친정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을 넘으며, 허기긴 배도 달랠 겸 향 좋은 어떤 풀을 뜯어 먹었는데요. 신기하
게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병증이 호전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친정에 도착해서도 계속 그 풀과 뿌리를 달
여 마시며 냉병을 치료, 건강한 몸을 되찾아 다시 시집으로 돌아 갈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하여 사람들은 그 이후에, 몸이 약해 시집에서 소박맞고 온 여인들은 이 풀을 먹으면 당연히 시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으로 ‘마땅할 당(當)’에 ‘돌아올 귀(歸)’ 당귀(當歸)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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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당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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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귀(當歸)복용법
당귀로 술을 빚어 마시기도 하는데, 당귀주는 잎을 잘게 썰어서 꿀에 버무린 다음 소주를 부어 꼭 막고 2~3일 지난 뒤 마시거나,
당귀 뿌리를 썰어서 소주에 부어 꼭 막고 3개월 정도 놓아둔 다음 불그스레해지면 마신다. 설사가 나거나 배가 더부룩할 때는 먹으
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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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당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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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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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북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1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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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석 잘 보내셨는지요
항상 자상한 글사진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감사 합니다.
님께서도 추석명절 잘 보내고 계시지요?
저도 덕분에 명절 잘 보내고 있답니다.
항상 많은 관심과 사랑 다시한번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