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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아론의 조상
출 6:14-27
14 그들의 조상을 따라 집의 어른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니 이들은 르우벤의 족장이요
15 시므온의 아들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소할과 가나안 여인의 아들 사울이니 이들은 시므온의 가족이요
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들의 족보대로 이러하니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요 레위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17 게르손의 아들들은 그들의 가족대로 립니와 시므이요
18 고핫의 아들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요 고핫의 나이는 백삼십삼 세였으며
19 므라리의 아들들은 마흘리와 무시니 이들은 그들의 족보대로 레위의 족장이요
20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
21 이스할의 아들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요
22 웃시엘의 아들들은 미사엘과 엘사반과 시드리요
23 아론은 암미나답의 딸 나손의 누이 엘리세바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으며
24 고라의 아들들은 앗실과 엘가나와 아비아삽이니 이들은 고라 사람의 족장이요
25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부디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였고 그는 비느하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레위 사람의 조상을 따라 가족의 어른들이라
26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27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
출 6:14 [아론과 모세의 족보] 이스라엘 각 집안의 어른들은 다음과 같다. 르우벤은 이스라엘의 맏아들로 그의 아들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인데 이들이 르우벤 가문을 이루었다. 15) 시므온의 아들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소할과 가나안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울인데 이들이 시므론 가문을 이루었다. 16) 레위의 아들들의 이름을 태어난 순서대로 말하자면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이다. 레위는 137세까지 살았다. 17) 가문별로 말하면 게르손의 아들은 립니와 시므이이다. 18) 고핫의 아들은 아므람과 이스할과 헤브론과 웃시엘이다. 고핫은 133년을 살았다. 19) 므라리의 아들은 마홀리와 무시인데 이들이 그 태어난 순서대로 본 레위 가문을 이룬 사람들이다. 20) 아므람은 자기 고모인 요게벳에게 장가 들어 요게벳이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 아므람은 137년을 살았다. 21) 이스할의 아들은 고라와 네벡과 시그리이다. 22) 웃시엘의 아들은 미사엘과 엘사반과 시드리이다. 23) 아론은 암미나답의 딸이요 나손의 누이인 엘리세바에게 장가 들어 엘리세바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다. 24) 고라의 아들은 앗실과 엘가나와 아비아삽인데 이들이 고라 가문을 이루었다. 25) 아론의 아들인 엘르아살은 부디엘의 딸 가운데에서 한 여인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 여인이 비느하스를 낳았다.' 이상이 가문별로 본 레위 일가의 어른들이다. 26)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대로 편성하여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이들이 바로 이 레위 일가의 아론과 모세이며 27) 애굽의 바로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라고 말한 이들도 이 아론과 모세였다.
본문은 모세와 아론의 사역이 아니라 족보입니다. 출애굽과 광야시대에 중심인물로 활약한 모세와 아론 가문의 조상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출애굽 역사가 그들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을 따라(14-15) 본 족보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족보가 아니라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 지파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레위 지파의 아론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들의 족보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본문의 ‘어른’이란 단순히 연장자가 아니라 한 가문의 지도자, 즉 족장을 의미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은 레위 지파를 소개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할 뿐이고, 참 목적은 레위 후손인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대한 그 당위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르우벤 지파(14)가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야곱의 아들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간통(창 35:22)하여 장자권이 상실되었지만, 모세와 아론을 중심으로 레위 지파를 소개하기 위하여 혈통을 서열에 따라 족보를 기록한 것입니다. 시므온의 아들(15) 중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아니라 시므온의 첩 가나안 여인의 아들로 그와 그 후손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족장으로 받아주셨습니다.
레위의 아들들(16-27) 레위의 아들들은 게르손, 고핫, 므라리입니다. 그 중 고핫의 아들 아므람은 모세와 아론의 아버지이며, 게르손은 레위의 장남입니다. 그의 자손들은 출애굽 후 광야에 머물 때에 회막에서 성막과 장막에 관련된 일을 맡았고(민 3:25), 성막의 기구들을 메어 날랐습니다. 고핫은 레위의 차남입니다(18). 그의 자손들은 회막 안 지성물에 대한 일을 맡았고(민 4:4), 이를 메고 날랐습니다(민4:15). 고핫의 아들은 모두 4명이었지만 헤브론이 족보에서 생략된 것은 출애굽과 광야생활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므라리는 레위의 셋째 아들로 막내입니다(19). 이들은 성막의 부속품에 대한 일을 맡았고(민 3:36), 메고 날랐습니다. 레위 족속은 가나안 정복 후 열두 성읍을 차지하였습니다(수21:7). 20절부터는 아론을 중심으로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모친 요게벳까지 기록한 것은 그 가문의 중요성을 고조시킨 것입니다. 이스할과 웃시엘(21)가문이 간략하게 기록된 것은 그들의 업적 중 기억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핫의 셋째 아들 헤브론이 생략된 것도 그가 크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유다 지파의 족장인 암미나답의 딸 나손을 아내로 맞이하여 나답과 이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낳았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후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 직분을 행하였으며(민 3:4), 엘르아살이 죽은 후에는 비느하스가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삿 20:28).
적용: 모세와 아론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셋째인 레위의 후손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은 자신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천국의 일꾼으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구원받는 것은 나중에 갈 천국행 티켓을 미리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는 것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순간부터 우리는 천국 열차에 올라타고 천국을 향해 계속 달려가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눈이 뜨여야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천국에 갔던 두 강도와 같이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은 바뀝니다.
하늘의 족보를 자랑하라
출애굽기 6:14-27 / 이상호 목사
성경에 가문을 길게 기록해 놓은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아브라함의 가문에 기록되었음을 큰 자랑인양 교만하게 다른 사람들은 짐승 취급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 자손이면 무엇하나 육적인 족보가 천국을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족보가 하늘에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없는줄 아느냐." 이 말은 너희들이 영적으로 하늘과 닫지 못하면 발에 차이는 쓸모없는 하나의 돌보다도 못하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하나님과 상관없을 때는 독사의 자식이 되었고, 제사장의 자식이라도 범죄하니 비참하게 전사하고 가문이 몰락되었으며, 인간 취급받지 못한 죄인이라도 주님 앞에 엎드리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고, 사형장의 이슬로 꺼져가는 생명도 주님 모시니 주님과 함께 낙원에 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와 '그레데'에서 목회하고 있는「디도」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사람들로 "끝없는 족보"에 마음을 두지 않도록 가르치라고 말합니다.(딤전 1:4, 딛 3:9절) 이런 형식적이고 또 무의미한 행위들을 어리석고 허탄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약교회 안에서도 이 족보로 교회가 많은 분열과 혼란을 가져오는 폐단이 되어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되었습니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람을 따라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너와 나와 십자가의 피로 우리가 서로 가족으로 맺지 않았느냐 잠시잠간 살다가 끝날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나를 따르라 우리함께 천국가서 살자고 하신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족보를 중히 여깁니다. 조상 중에 벼슬에 올랐던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누구의 몇 대 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별 볼일이 없다면 족보가 아무리 화려하다해도 다 부질없고 소용없는 일 아닙니까? 화려한 족보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말로 족보가 밥 먹여 주지를 않습니다. 사실 사람의 족보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족보뿐 아니라 과거 도취증에 빠진 자들도 있습니다.
현재는 초라하여 고개도 들 수 없는 형편인데 과거의 자부심으로 현실을 헤쳐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옛말만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본격적인 섭리를 보여 주기 전에 갑자기 이스라엘의 두 주역인 모세와 아론의 혈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끼어든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혈통에 관한 본문의 기록은 우연히 또는 돌발적으로 삽입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되는 애굽으로부터의 민족해방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멀리는 「아브라함」에게, 짧게는 70여명의 식솔을 이끌고 애굽으로 들어왔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약속이 대를 이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른다 해도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일점일획의 변함도 없이 그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들의 족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 하시려고 본문에 갑작스럽게 「모세」와 「아론」을 중심으로 한 두 지도자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족보의 독특성입니다. 14∼15절은 야곱의 아들 '르우벤과 시므온의 가계'입니다. 16∼20절은 모세와 아론에 이르기까지의 '레위 지파의 계보'이고, 21∼27절은 '레위 지파에 속한 여러 집안의 가계'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장자인 르우벤 지파의 가문도 아니고 둘째 시므온의 가문도 아닙니다. 셋째 레위의 후손입니다. 12지파를 다 소개하든지 아니면 레위지파 하나만 소개하면 몰라도 3지파를 소개하는 것은 모세와 아론이 지도자가 된 것은 자신들의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나타내기 위함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레위의 자손 중에 차남인 고핫의 후손인 모세와 아론이 민족의 지도자로 선택된 것은 또 하나님의 은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출애굽을 앞둔 이 시점에서 족보를 밝히는 것은 왜일까요? 그리고 사도 바울은 족보를 마음에 두지 말라고 했는데, 성경은 오늘 본문의 족보를 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의 족보는 「모세」와 「아론」의 가문을 자랑하려고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그 조상들이 남겨놓은 업적을 기리기 위함도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누렸던 벼슬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까? 이 족보는 하나님의 약속이 대를 이어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인 족보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거나 되려는 분은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다짐할 것은
1. 땅에 벼슬 자랑 말고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된 벼슬 자랑하라.
여러분은 어느 족보에 여러분의 역사를 기록해 놓으시렵니까? 아니 여러분은 어떤 족보를 가지고 있습니까? 조상자랑 족보는 잊으십시오.
우리 믿는 사람은 새로운 족보를 가져야 합니다. 육체의 피가 흐르는 계보가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힘있게 흘러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약속을 이루어지게 하는 영적인 족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상중 영의정이 지금 자녀들에게 무슨 능력과 힘이 되겠습니까?
과거 조상이 천민이었다해도 그것이 무슨 기죽을 일이겠습니까?
과거 뿌리가 왕족이었다 해도 새끼손가락 끝이라도 힘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하늘의 영적 족보는 다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다면 그 약속은 수십대를 거쳐가면서 지켜 나가고 있습니다. 조상 중에 하나님의 족보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겼다면 자손은 수십 아니 수백 배의 열매를 따게 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손들에게 내가 권력이나 재물이나 지식이 이만하였다고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에 땀과 눈물에 흔적을 많이 남겼다고 자부심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나 직장에서 장으로부터 무슨 훈장을 받은 것을 자랑말고 주님의 이름이 적힌 사령장을 목사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의 조상이 무엇을 했는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머님이 "나는 눈만 뜨면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너를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께 부탁한다." 이보다 더 좋은 유산은 없는 줄 압니다.
「다윗」(시39:6절)에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고백한대로 자손에게 물질 물려주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자손에게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추호도 변함없이 대를 이어 자손들을 지킴 받게 하고 축복 받게 하는 것입니다.
2. 땅의 것 못 물려주어도 하늘의 축복의 대를 물려줌을 자랑하라.
출애굽기 20장 5∼6절을 보면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아가노라면 그것이 우리 자손들에게 축복의 힘으로 대를 이어 작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하면 무려 천대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으셨던지 다윗을 일컬어 「내마음에 합한 사람」(행13:22절)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살아생전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죽은 후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흡족하게 받았습니다. 다윗에 대한 축복이 후손인 「솔로몬」에게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부귀를 누렸던 시절이 바로 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 시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은 감사해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야 하는데, 사람이란 넉넉해지고 편해지면 딴 생각을 하게 되어있는 모양입니다.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애굽의 바로의 딸을 데려와 재미를 붙이더니 모압, 암몬, 에돔과 시돈, 그리고 헷 여인까지 불러들여 아내를 삼았습니다.(왕상 11:1절)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방인들과 정을 통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왜입니까?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왕상11:2절)는 걱정이십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은 이방여인들을 연애하기 시작합니다. '후비'가 칠백 인이고, '빈장'이 삼백 인이나 되어서 솔로몬을 섬기는 궁 안의 여인들이 일천 명이나 되는데도, 몇 안되는 이방여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마음대로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의 마음이 이방 왕비들을 좇아 다른 신들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나타나셔서 경고를 하셨지만, 듣지를 않습니다. 참다 못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는 진노하십니다. 그리고는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왕상11:12∼13절)
「솔로몬」의 한 행위를 보면 괘씸해서 당장이라도 전부 다 빼앗아버리고 싶지만, 「다윗」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듯 대를 이어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신실한 신앙이 대를 잇는 축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한 저주 역시 대물림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겠다.」(출20: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 영적인 족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는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는 분명하게 나와 자손들에게 그 영향력을 끼치게 되어있습니다.
아름다운 믿음의 족보에 죄로 인한 얼룩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깃들여 있는 영적인 족보,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대물림하는 믿음의 가문을 만들어 가십시오. 그리하면 이 민족을 바른 길로 인도할 민족의 지도자,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낼 신앙의 지도자, 사회의 각 분야를 선도하여 이끌어 갈 훌륭한 인물들이 우리들의 신앙적인 가문에서 속속 키워져 배출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조상이 주의일 많이 해서 하늘나라 족보에 많은 기록이 남아 있음을 자랑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자손들이 세상 것 많이 물려받지 못해도 하나님 축복의 약속장을 받았음을 자랑하게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가문이 다 이런 복된 가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출애굽기 6:28-7:7 / 김경호 목사
만약 하나님께서 만인이 부러워하는 자리를 만들어 놓으시고 "너 이리와라!"라고 부르신다면, 명예와 부와 권세를 한꺼번에 부여잡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여 부르신다면 누가 그 부르심을 마다하겠습니까? 아마 서로 빽쓰며 하나님께로 나아가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개 그렇지 않은 곳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모세에게 파라오 앞에 나가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자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저는 말이 어눌한 사람입니다" 이사야도 핑계를 대었습니다. " 저는 입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어디 그런 핑계가 하나님 앞에서 통합니까?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화가나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언제나 "그러나"를 말합니다. "그러나"로 핑계를 댑니다. 안되는 조건을 앞세우고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찾아내서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풍랑을 보내 요나가 탄 배를 뒤흔들어 놓으시고 마침내 요나를 희생시켜 바다에 던졌을 때에야 바다가 잔잔했습니다. 큰 고기가 요나를 삼키고 몸부림치다가 요나를 어느 곳에 밷어 놓았는데 그곳은 바로 그가 도망가 반대로 가려했던 그 장소-니느웨 였습니다. 하나님의 "그러나"는 인간의 "그러나"를 삼켜 버립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리인데 처음부터 고분고분 따라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들은 황상 먼저 저항하고 갖은 발버둥을 다치다가 결국은 그 길로 갑니다. 각자의 마음에 격정와 흥분을 가라앉히고 관조하여 보면 우리는 결국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크건 작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오늘 임명받으시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임직하는 분,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모두가 당신의 제자로 임직 받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몇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최선을 다하십시오.
흑인 민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반체제 운동가이고 미국 시민의 존경을 받는 흑인 운동가 흑인 지도자 이십니다. 늘 그늘에서 사람 취급 받지 못햇던 흑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거리의 청소부 일지라도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 베토벤이 음악을 작곡하듯, 세익스피어가 희곡을 쓰듯 그렇게 여기 한 청소부가 있었다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켈란 젤로가 그림을 그리고 베토벤이 음악을 작곡하고 세익스피어가 희곡을 쓰는 것은 다 최선을 다하는 삶의 내용을 말합니다. 지금 흑인들이 하는 것은 거리의 청소부나 사람들이 보기에 하찮아 보일지 모르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맡은 일이 큰일 이건 작은 일이건 자기가 처한 위치와 환경이 어떠 하든지 그곳에서 자기의 최선을 다한다면 결코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청소부가 된 것을 한탄하기 전에 자기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백인을 이기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최고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요구하십니다. 달란트의 비유도 작은 일이라도 내가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일이라고 합니다.
둘째, 마지막까지 하는 것이 진짜입니다.
오늘 본문에 모세는 80세에 부름받고, 아론은 83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인을 좋아하십니까? 노인은 이제까지 자기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이제는 아무 전제 없이 하나님을 따르는 삶에 전적으로 귀의 할 수 있는 시간, 마지막 찬스를 가진 분들입니다. 뭐 모든 것을 다 경험했는데 이제야말로 몸 가볍게 나설 수 있는 분들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 가느라 앞 뒤를 볼 경황이 없지만 노년은 자기 인생을 크게 되돌아 볼 수 있는 때입니다. 그 자리에서 젊어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도 분명히 볼 수 있고 얼마남지 않은 길을 통해 가장 뜻있는 길에 나설 수 있는 기회. 새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분들입니다. 대개 노인은 보수적이고 안주하려하고 젊은 세대와 갈등을 가지고 젊은 세대들이 기피한다는 일반적인 노인에 대한 통념을 성서는 송두리째 깨어버립니다. 이것이 성서의 어른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젊어 한때 운동을 하다가, 학생 때 아주 높은 이상과 꿈을 갖다가도 졸업 후에 무섬게 변신하는 젊은이들을 가슴 아프게 보아왔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한 시골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 였습니다, 그가 대통령의 집무가 끝나자 그는 다시 그 시골 침례교회의 주일학교 반사로 되돌아가 지금까지도 그 교회에서 교사를 하신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그가 존경받은 이유입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셋째, 그러면 무엇을 하자는 거냐?
최선을 다하고 최후까지 하는데 무슨 일에 부름을 받는 것이냐? 하나님께 충성하고 맡은 바 직분을 감당하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어떤행위를 뜻하는 것이냐? 성가대는 찬양하고 교사는 가르치고 집사는 교회 살림하는데 그 기능적인 일 뒤에 있는 목표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중국 도문 시를 방문했을 때 도문 시장이 베푸는 조그만 만찬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시장이 밖에 나가 우리를 인도해온 기사와 가이드를 찾았습니다. 방문한 목사들이 그들은 따로식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구태어 자리를 마련하고 그들을 초청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아주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 저 사람들은 "사람을 사람대접 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하는 좋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모세가 무슨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내 백성, 고통 받는 내 백성을 구원히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내 백성이라 하셨고 그들을 제대로 사람 대접하는 세상으로 불러 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서로 사람대접 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고 우리 안에서도 그렇고 우리는 서로 대접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뜨거운 경험이 있어야 밖에서도 남을 잘 대접하고 존경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훈련하고 서로 존중하고 대접할 줄 아는 훈련이 중요합니다. 그런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집사님들은 장로님들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장로님들은 집사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어른들은 젊은 사람, 어린 사람들을 격려하고 관심을 가지고 젊은 이는 어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풍토를 가져야합니다. 만에 하니라도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삐뚤어진 눈을 가지고 매사를 회의적으로 보고 부정적인 말로 상처를 주고, 어떤 일 뒤에 나쁜 의도를 항상 가정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주변에서 시각을 바로잡아 줘야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끼어 있는 공동체가 판단 능력이 약하다면 그런 부정적인 말에 금방 휩싸이고 무하뇌동하고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 지 모르는 혼란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 나라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말을 다 할 수 있고 그런 것들을 그대로 다 나열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말에 책임을 지는 훈련을 하는 것이며, 서로 다른 의견을 토론하고 비판하더라도 그 안에 하나의 공동의 의지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지 방향없이 아무것이나 받아 들이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 공동체에 속하든지 우리가 있는 그 곳이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신바람 나는 공동체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제 아이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졸업식이 다 끝나고 마지막 한 순서가 남았습니다. 거창고 도교장선생님의 말씀 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주춤 주춤 가방을 챙기는데 등단한 교장선생님께서 "뒤에 서계신 학부모님 들을 위해 재학생이 자리를 양보해 드리라"고 하셨고 재학생들이 일어나 나가고 좁은 통로 한편으로는 학부모들이 들어와 앉는 혼란한 시간이 한참 흘렀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자리를 양보 하려면 진작 양보하게 할 것이지 이제 다 끝나가는데 무슨 양보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왠걸, 그로부터 꼭 한시간 동안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계속되었습니다. 매우 감명깊은 말씀이었는데 그중에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진주교대 졸업식에 휠체어 없이는 한발도 못 움직이는 뇌성마비 아들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졸업을 하는 진 풍경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들과 함꼐 학교 다닐 결정을 하였느냐고 했더니 그 어머니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내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돕기 위해, 항상 그의 곁에 붙어서 그를 돕기 위해 수능 시험을 함께 치렀고 함께 입학하여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고 지금은 그의 옆에서 함꼐 졸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머머니에게 이 아들은 둘도 없는 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만나게 되는 어떤 사람도 이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듯이 사랑받는 사람들이고 이세상 어떤 사람도 이 어머니가 이 아들을 소중히 여기듯 소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맡은 직분은 그것이 교회 안의 직분이든 교회 밖의 직분이든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일에 여러분들이 부르심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출애굽기 6:28-7:7 / 조재진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끝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과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은 구원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뭔가 열심히 합니다. 불교인이 참선도 하고, 시주도 많이 하고, 선한 행위도 열심히 하는 것은 구원 얻기 위해섭니다. 천리교인들이 막대기를 두드리면서 신발이 닳도록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도 구원받기 위해서지요. 천주교인들이 봉사하는 일에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선한 일을 통해 혹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인들과 삶이 다릅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사는 것은,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섭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삽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명, 혹은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목사면 목사대로, 평신도면 평신도대로 소명이 있습니다.
소명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성도들이 방황한다는 것은 이 소명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낙심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가장 비참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살 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며 사는 성도의 삶은 너무 귀합니다.
그러나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많은 장애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있을까요?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를 들으리이까?”(출6:30) 라고 자신감 없이 주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입이 둔한자이오니’ 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얼마나 부족한지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자신에게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어문제였습니다. 그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섰을 때 말을 더듬지 않고, 조리 있게 또박또박 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여러 번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모세의 이 기도만은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입술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유창한 언어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대신 아론의 도움을 받게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고쳐주지 않고 대신 아론의 도움을 받게 하셨을까요?
이와 비슷한 경우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 후서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를 괴롭히는 질병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하지만 바울은 이 질병 때문에 침체에 빠지기도 하고 이것 때문에 얼마나 자주 넘어졌던지 이 질병을 사단이 자기 몸에 심어놓은 사신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 질병을 없이해달라고 기도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간단하게 그 질병을 치료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에게 언어 구사 능력을 부어주지 않았고, 또 사도바울의 질병을 치료해주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창조주가 아닙니까? 바로 왕을 간단하게 쳐부술 수 있도록 육백 만 불의 사나이처럼 바꾸어 놓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 속에 있는 타락한 본성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타락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에게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지만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인간의 삶을 깊은 어두움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말도 잘하게 하고 강한 힘도 주어서 한방에 바로 왕을 날려버리게 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교만할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그 치명적인 약점은 모세로 하여금 철저하게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 입니다. 질병 때문에 바울은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해도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 질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의 약점, 바울의 질병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을 완전하게 하지 않고, 그들을 무엇인가 부족한 상태로 내버려두십니다. 약한 부분을 그대로 내 버려두십니다. 그리고 그 약한 부분으로 인해 그들은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게 하십니다.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을 늘 답답하게 하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원망하지 말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답답한 문제들,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그 문제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제일 먼저 들어야 할 말씀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말을 잘못하는 지도자가 얼마나 우스운 꼴입니까? 더욱이 바로 앞에 서야 하는 모세에게 있어서는 정말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말이 시원찮으니까 바로가 답답해하겠지요. 그래서 아론이 대신 말을 했습니다. 아마 바로는 말을 제대로 못하는 모세를 보면서 속으로 무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친구 어디 가서 말이나 제대로 배워오지 않고...”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한번 출7:1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하나님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세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모세 자신이 신이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바로에게 마치 신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가 모세를 볼 때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고 신처럼 우러러 보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모세를 통하여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말을 잘못해서 바로 앞에 서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말을 잘못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을 잘해서 바로를 설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모세가 아닙니다. 모세의 설득으로 바로가 이스라엘을 내 보내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말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도 유창한 말에 설득당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말을 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능력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바로 왕 앞에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모세가 말을 잘하고 못하고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모세를 높일 것입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신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생명의 삶 8월호에 실린 웨인 라이스의 “화끈한 예화”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한 어린 소녀가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칠 수 있는 곡은 오직 ‘젓가락 행진곡’ 뿐이었지요. 소녀의 부모는 소녀가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도록 가르칠 훌륭한 피아노의 대가를 찾아주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물론 소녀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지요. 드디어 소녀와 소녀의 부모가 피아노의 대가의 저택에 첫 레슨을 위해 도착했습니다. 피아노의 대가의 거실에는 아름다운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습니다. 소녀는 곧장 피아노로 뛰어가더니 소녀가 아는 유일한 곡인 ‘젓가락행진곡’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부모들은 이를 저지하려 했지요. 그 때 피아노의 대가가 들어와 소녀가 계속 치도록 그냥 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후에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소녀 옆에 앉아서 소녀와 함께 연탄을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계속 그 단순한 ‘젓가락행진곡’만 연주하고 있었는데 피아노의 대가가 연탄을 하자 피아노 소리가 달라졌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피아곡이 된 것입니다. 소냐가 치는 그 곡에 피아노의 대가가 손가락 몇을 더 얹어 준 것에 불과했는데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의 능력은 자신, 자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능력은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모자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여러분들을 불신자들 앞에서 신과 같은 존재가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그렇게 보이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두 번째,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역의 장애를 예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하더라도 언제든지 장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의 사역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일부러 악하게 만들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본래 의미는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강퍅한 마음 그대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은 두 종류입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신 자기 힘을 믿고, 자기 돈을 믿고, 자기 권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롬1:28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둔 사람입니다. 오늘 바로 왕과 같은 경우입니다. 반면 다른 한 종류는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더 이상 자기 힘, 자기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세상적인 판단으로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더 강하고 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은 돈과 권력, 세상적인 지식을 자랑합니다. 바로 왕을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는 한 나라의 왕이요. 권력과 군대의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약한 자,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반대입니다. 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고, 사람의 지식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을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권력보다 더 강하고, 세상의 어떤 물질보다 더 부요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바로 그 사람이 사실은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사실을 확인 시켜줍니다. 지금 바로 왕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퍅한 바로 왕이 쉽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왕이 동의하지 않는 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기 때문에 바로 왕의 강퍅함, 바로 왕의 군사력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과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5절을 보십시다.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만나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데도 일이 잘 안될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막힘이 없고 다 잘되면 사람들은 교만하기 쉽고 방종하기 쉬워집니다. 반면 어려운 일, 사역에 장애가 생기게 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긴장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어려운 문제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성도들은 어려움을 당할수록 더 큰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번 열린교회 수련회 때 비가 계속 왔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기도를 안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참 놀라운 것은 차를 타고 장소를 이동할 때 막 비가 쏟아집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면 비가 그치는 겁니다. 해변에 가서 해수욕을 할 때는 해가 빛나기도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수련회를 마치고 와야 하는데 풍랑 때문에 배가 뜰 수 없었습니다. 수요일 저녁 배로 와야 하는데 결국 배를 못타고 반석교회에서 수요예배를 그냥 드렸습니다. 이틀 동안 부산으로 올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 이튿날 새벽 몇 명의 청년들만이라도 보내려고 첫 비행기를 알아보기 위해 공항에 나갔는데, 공항에서는 청년들 전부가 다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왔습니다. 그런데 열린교회 지체들이 탄 그 비행기만 부산으로 왔고 그 다음부터는 내리 결항이 되었습니다.
또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번 열린교회가 수련회를 떠날 때 어떤 분들이 많은 후원금을 냈습니다. 너무 풍성해서 도무지 무슨 일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손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원금이 비행기를 타는 항공료와 어쩌면 그렇게 딱 들어맞는지... 마치 하나님이 열린교회 청년들 곁에 서서 ‘염려하지 마 내가 함께 하잖아, 돈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준비해 놓았어!’라고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운 일, 장애를 만나게 되면 하나님은 드디어 놀라운 일들을 시작하십니다. 보십시오 바로 왕이 거역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을 대적할수록 하나님의 이적이 애굽 온 땅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와 바로 왕의 대결에서 열 가지 재앙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애굽 온 땅에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에 어려움이 닥쳐오면, 하나님의 능력도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로 함께 계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또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 모르는 애굽 땅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삶에도 이런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은 모세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상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살고, 하루 종일 찬송가만 울려 퍼지는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도원을 만들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성도들이 할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는 것은 우리들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심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작은 어려움에도 넘어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약한 우리들을 통해 불순종하는 세상과 싸우십니다. 우리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삼으시고 세상의 악을 이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팔십세였고, 아론은 팔십 삼세이었더라
세 번째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모세와 아론의 나이를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와 대결하면서 출애굽의 위대한 일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들의 나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몇 살에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했습니까? 모세는 팔십 세, 그리고 아론은 팔십 삽 세였을 때입니다. 우리가 볼 때 은퇴하고 저 뒤로 물러가 있을 나이입니다. 성경이 굳이 이들의 나이를 밝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은 나이와 관계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닙니다. 주님께 얼마나 올바른 헌신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편집진들이 모여서 백과사전에 실린 소위 위대한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통계를 낸 적이 있었답니다. 인류역사에 괄목한 만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 34%정도는 오십 세 이하에, 35%는 육십대에, 그리고 23%는 칠십대에, 나머지 8%는 팔십대에 그 위대한 일을 성취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류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66% 정도는 육십 세 이후에 그 일을 성취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참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저는 아직 시작도 안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실 나이가 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자기 고집이 생기고 자기 생각, 자기 아집이 점점 더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안듣습니다. 저도 겨우 나이 사십대 중반인데도 다른 사람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느새 제 고집이 생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팔십이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오늘 모세와 아론에게서 배워야할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나이 팔십세, 팔십 삼세가 되었는데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자기 할말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인생의 경험이 많고 아는 것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본문 6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곧 그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곧 그대로 행했다는 성경의 표현은 참 중요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just as”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만 그대로, 다른 이야기 하지 않고, 다른 주석도 달지 않고, 이상스럽게 해석도 하지 않고 그 말씀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인생의 경험이 많으면 대체로 말도 많은 법입니다. 요령만 늘어가고, 자기 고집도 생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든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려면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 한마디씩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데 그들의 삶을 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바로왕과 많은 갈등, 하나님의 기적등,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계속됩니다. 그런데도 모세와 아론은 자기들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아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 내 야망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평생 해야 할 일입니다. 혹시 교회생활 40년, 50년 했다고 할 말이 많습니까? 혹시 내 나이가 얼만데... 라고 하면서 나이와 경륜을 드러내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이 행하라고 하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와 아론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겐 위대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혹시 나는 부족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주저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모세는 “나는 입이 둔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에겐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모세와 바울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나를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결단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제부터 나이와 능력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명은 가문을 새롭게 한다
출 6:14-27
지난 주간 중국 요녕성의 심양, 안산, 단동, 등을 다녀왔습니다. 출발할 때만해도 할 일도 많아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회에 제천의 목사님들이 서로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고, 가서 함께 경험한 내용들이 너무 좋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중국에 도착하여 안산을 거쳐 북한 신의주시의 맞은편인 단동에 갔습니다. 생애 처음 가까이 본 북한의 도시와 북한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아팠고, 정말 이 민족이 통일이 되어야 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동안 통일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이 좀 막연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더 마음에 다가옵니다. 압록강을 배를 타고 수풍댐까지 거슬러 가면서 바로 눈 앞의 강변의 북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총을 들고 서 있는 북한 병사들, 철로 작업에 동원되어 나온 주민들,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우리가 손을 흔드는데, 그들은 거의 무표정으로 보았고, 가끔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밤이 되니까 이쪽 단동시는 불이 환하게 켜 있고, 다리의 조명과 건물들의 간판이 휘황찬란한데, 북한 신의주시는 암흑의 도시였습니다. 그 밤에 깜깜한 북녁땅을 보며 기도했습니다. “살아계셔서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얼어붙은 저 북녁땅을 녹여주시고,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저 악마의 정권을 무너뜨려 주시고, 저 땅에 복음이 들어가서 하루 속히 주님을 찬양하는 주님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 북한 사람들을 위해 목숨 걸고 사역하는 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어떤 분은 통일이 되면 우리의 고통이 더해질 것이라고 통일에 대해 달갑지 않게 말하기도 하지만, 통일은 이 민족이 21세기에 이루어야 할 가장 큰 과제라 생각됩니다. 통일된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 세계에 더욱 귀한 영향력을 끼칠 것을 기대해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욱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 주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모세가 낙심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 낙심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다”, 나는 여호와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까? ‘나는 너의 구원자 하나님이다’, ‘나는 너를 돌보는 아버지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전능자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낙심합니까? 우리의 상황 때문입니까? 상황이 어려워져서 낙심합니까?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능력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능력이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족보가 나옵니다.
(14절) “그들의 조상을 따라 집의 어른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은 하녹과 발루와 헤스론과 갈미니 이들은 르우벤의 족장이요”,
참 이상한 말씀입니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바로의 강력한 반응으로 낙심가운데 있는 모세를 하나님이 위로하셨습니다. 모세를 위로하시다가 족보가 나옵니다. 그것도 이상한 족보가 나옵니다. 야곱의 12아들 중, 위의 세 아들, 르우벤, 시므온, 레위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 족보가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까지만 나옵니다. 그리고 초점을 모세와 아론에게 맞추어서 나옵니다.
이것을 보며 생각해 봅니다. 신학적으로 잘못된 편집이 아닐까? 이 대목에서 왜 족보가 나올까?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 족보를 통해 모세를 격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직접 위로해 주시다가 이 족보를 통해 격려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족보를 보면 재미있습니다. 저는 순흥(順興) 안(安)씨로 시조로부터 30세 손이고, 문성공 안향(안유) 할아버지의 27대손입니다. 문성공은 파가 아닙니다. 순흥 안씨는 크게 1, 2, 3파로 나뉘어지고, 이 파가 더 나뉘어져서 총 17개 파가 있습니다. 그 중에 저는 1파에서 찬성공파에 속합니다. 찬성공파에는 최고 벼슬을 하신 분이 영의정이셨고, 제 직계에서는 병조판서를 지내신 분이 최고의 벼슬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확히 저는 순흥 안씨, 찬성공파 병조판서댁의 문성공 27대손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족보를 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족보를 이야기하며 조상을 자랑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실 조상 가운데 무슨 벼슬을 했고, 쟁쟁한 인물이 많았다라고 하는 것, 오늘 우리들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자부심은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들의 삶에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족보는 뿌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족보는 흐름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흐름 속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제 출애굽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이 족보를 통해 하나님은 모세를 격려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 중에 ‘르우벤’이 누구입니까?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첩이자 자신의 서모인 빌하와 동침하여 간통을 한 아들입니다(창35:22). 그래서 아버지 야곱이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길 때, 르우벤에게 말합니다. ‘르우벤아 너는 맏아들이요 영예가 드높고 그 힘이 드세다. 그러나 네가 으뜸이 되지 못할 것이다’(창49:3~4절).
이 일로 장자권이 요셉에게로 넘어갔고, 후대에 르우벤 지파에서는 인물이 나지 않습니다. - 다음으로 시므온과 레위의 족보가 나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누구입니까? 야곱의 둘째와 셋째 아들들인데, 그들 역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혈질의 사람으로 살인자입니다. 창34장에 보면 야곱의 가족들이 세겜 성읍에 머무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사건이 생깁니다. 세겜 성의 추장이 야곱의 딸이요, 시므온과 레위의 누이인 ‘디나’에게 반하여 그녀를 강간하여 욕되게 합니다. 그리고는 디나를 자기 부인으로 달라고 합니다.
이때 시므온과 레위가 음모를 꾸밉니다. 할례받지 않은 사람에게 누이를 줄 수 없다고 하여 온 세겜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게 합니다.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통증이 심한 3일째에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읍의 모든 남자를 죽입니다. 거룩한 할례의식을 추악한 음모의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이 일로 주변 민족들의 미움을 살까봐 야곱의 가족은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이때 아버지 야곱이 진노했습니다. 야곱이 생애 마지막에 이 두 아들에 대해 예언을 할 때, 저주를 합니다(창49:5~ ). ‘너희도 그렇게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직속 조상의 이야기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지파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모세의 족보는 그렇게 좋은 족보가 아닙니다. 레위지파는 저주받은 지파였습니다.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가문의 모세를 하나님이 사명자로 세우시고 들어쓰셨습니다.
그러면 왜 형편없는 3 사람을 조상으로 한 족보를 공개하셨습니까?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모세를 선택해서 쓰는 이유는 조상이 잘 나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조상덕을 본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혈통이 뛰어나지 않기에, 모세도 그렇게 잘나고 뛰어난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족보이야기를 마친 후에 중요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26~27절)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 ‘이 아론과 모세’요, ‘이 모세와 아론’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세,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 가운데 지명하여 부른 바로 ‘이’사람, 조상이 잘 나서도 아니고, 자신이 유능해서도 아닌 바로 ‘이’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명자로 불리워지고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 볼일 없던 그들의 가문이 이제는 새로워질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모세와 아론의 가문이 새로워집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되면서 가문의 역사가 새로워집니다. 별 볼일 없는 가문이 놀라운 가문이 됩니다. 이제 저주받았던 레위지파가 축복의 가문으로 제사장 지파가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교훈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사명은 가문을 새롭게 한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 족보를 통해 모세에게 하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별 볼일 없던 너의 가문이었지만, 너와 너의 가족, 자손들을 통해 새 역사를 써내려가겠다’, ‘네가 나의 사명을 붙들고 살면, 그 사명을 위해 살면 너의 집안을 새롭게 하겠다’, 하나님은 이 족보를 통해 모세를 위로해 주십니다.
출애굽기는 모세오경에 속합니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로와의 싸움이 시작되고,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 중요한 순간에 모세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내가 너를 통해 가문을 새롭게 하겠다’,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이 택하신 명문 가문이 되실 원한다면 주님이 택하시고 주님이 부르신 사명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이 시대에 택하시고 부르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가문에 새역사를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문에 새역사가 쓰여지기를 축원합니다.
중국 심양에서 두개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동관교회라는 중국인교회는 역사가 135년이 된 교회이고 최초로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여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한 교회로, 현재 주일날 5부예배로 1만 1천명이 예배를 드리는 큰 교회입니다. 그리고 서탑교회는 1913년에 한국인들이 가서 세운 교회로 내년이 100주년이 되는 교회입니다.
지금 현재 서탑교회는 조선족 성도 1,000 여명, 중국인 성도 1,500 여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인구 800만의 심양시에서 수많은 교회 중에 이 두 교회가 큰 교회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서탑교회에서 수요저녁예배를 드렸는데, 이 교회는 일제치하에서 고달프던 당시 봉천으로 불렸던 심양에 와서 '봉천서탑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하였고 해방전 한국인이 6~700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자 많은 교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한국 가는 길이 막혔을 때 미처 출발하지 못하고 남은 교인들이 10 여명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남아서 교회를 지키는데, 중국 공산정권으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고, 교회 건물도 빼앗기게 됩니다. 그들은 핍박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켜 나갑니다.
그중에 처녀 집사로 ‘오애은’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교회를 이끌게 됩니다. 1979년에 중국에 문화혁명이 일어나서 종교적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자, 10여분의 나이든 성도들이 시정부청사 앞에서 데모를 합니다. 옛 교회 건물에 들어가서 청소를 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그 당시에는 목숨을 건 데모였다고 합니다. 겨우 교회건물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아 문이 열려 들어가게 되자 바로 그곳에서 나오지 않고 버텼고 공산당 시정부도 교회 건물을 회복시켜주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교회가 다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고 부흥을 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심에는 일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교회를 돌보며 목회를 해 온 ‘오애은’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오 목사님은 자신의 동생의 자녀들 중 한 딸을 택해 양녀로 삼고 신학을 공부시켰습니다. 한국에 보내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공부를 시켜서 한국의 목사를 사위로 삼고, 그 조카딸에게 그 교회의 목회를 시켰습니다. 중국에서는 한국의 목사가 담임목사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조카딸이 담임목사가 되었는데, 그분이 '오명방' 목사님입니다.
오 목사님은 고모에 뒤를 이어 목회를 잘 하고 있었는데, 심양의 큰 교회 동관교회에 어려움이 생기자, 그 교회에서 부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동관교회까지 담임하게 되었는데, 그 큰 교회가 네 파로 갈려서 어려움이 있었는데, 오 목사님이 부임하여 매일 성경공부와 예배를 통해 다시 회복하고 부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서탑교회는 신학교까지 세워서 지금까지 수많은 조선족, 한족 목사들을 배출하여 중국 전역에 파송했습니다. 서탑교회 원로목사이신 오애은 목사님으로부터 지금의 오명방 목사님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한 가문이 중국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귀한 일입니다. “사명은 가문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역과 민족을 새롭게 하기도 합니다.
몇 년 전, 경상북도 영주시의 순흥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순흥 안씨의 기념비들이 있고, 또 문성공 안유 선생의 유적들이 남아 있는 소수서원이 있습니다. 제가 본관이 순흥이어도 직접 가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지역에 가니까 남다르더라고요.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고, 1541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문성공의 사묘를 조성하고, 그것을 발전시켜 ‘백운동 서원’이라 명명하였고,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 선생께서 나라와 임금에게 보고를 해서 서원을 공인하고, 국가의 지원으로 제대로 세워 이름을 소수서원이라 바꾸었습니다.
그 서원에는 문성공 사후에 그려진 초상화도 있었습니다. 문성공 안유 선생은 벼슬을 하면서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무당과 미신을 타파하고, 불교를 멀리하게 하였습니다. - 저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조상을 두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되지만, 사실 저의 집안의 족보가 기독교의 복음과 관련된 것은 없습니다.
이런 가문에 경주 김씨 집안의 딸로 저의 어머니가 시집을 오게 되었는데, 저의 집안에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신앙을 따라 저와 제 동생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제 자녀들과 조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저의 때부터 본격적인 믿음의 가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저는 제 자녀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제 믿음의 가문, 가계를 이어나갈 것이니 무슨 직업을 갖고 살든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살라고 말할 것입니다. - 여러분, “사명은 가문을 새롭게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문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신앙을 확실히 물려주어 가문의 새로운 역사, 믿음의 역사가 계속 물려지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내 부모님이, 내 조상이 어떻게 살았건, 그것 가지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어떤 분은 ‘우리는 뼈대있는 집안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뼈대있는 집안이다’라는 그 말은! 우리 집안은 살은 없고 뼈만 남아있다는 말이다! 는 말임. 뼈만 남아 있는 집안을 자랑하지 마시고, 또 반대로 우리 집안은 내세울 것이 없는 집안이라고 하며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내 대에서부터 새로운 믿음의 가문을 써내려가는 역사가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미신을 섬기는 집안이었지만 하나님은 나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믿음의 새 역사를 위한 가문으로 만드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격려하십니다. ‘모세야 내가 너를 택했다. 너는 별 볼일 없는, 비천한, 저주받은 가문의 사람이지만 내가 너를 택했다. 너로 말미암아 새 역사는 시작된다. 그러니 모세야 너의 생을 나에게 맡겨라, 내 생각과 내 계획을 너를 통해 이루겠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너무나도 귀한 분들입니다. 여러분 집안에 너무나도 귀중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문에 새 역사를 쓰기 위해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옆 사람과 인사하십시오.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명은 우리의 가문을 새롭게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가문)이 주께 돌아오게(예배하게) 되리”,
여러분으로 인해 여러분의 가문에 새 역사가 쓰여지게 되고,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가문으로, 축복의 가문으로 변화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와 아론의 족보
출애굽기6:14-22, 마태복음1:1-6 / 이성희 목사
혈연, 학연, 지연이란 삼연주의란 말을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우리 나라는 합리성보다 정이 앞서는 정적 사회이기 때문에 삼연과 무관하게 살기는 힘이 드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의 일입니다. 피난길에 나선 선조는 팔도의 감사들에게 되도록 많은 병사를 모집하여 한양에 집결시키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졸지에 급하게 모은 병사들은 문자 그대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도계도 넘기 전에 패주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유난히 전라도의 병들만이 한양에 오는 도중 연전연승하여 한양에 도달하였습니다. 전라병들이 연전연승을 하게 된 기적의 원인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전라감사 권율 장군의 뛰어난 지휘력과 작전력입니다. 둘째는 급하게 조직한 부대이지만 그 편성의 묘입니다. 전라병들은 광산김씨 부대, 여산송씨 부대 등 가문부대를 중심으로 싸운 것입니다. 항렬이 높고 연로한 분을 대장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연로하여 걷지도 못하여 업혀 다니는 부대장이 많았다고 합니다. 결속된 구심력과 가문의식이 뒷받침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혈연을 절묘하게 활용한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혈연, 학연, 지연의 삼연주의 가운데 항상 혈연이 제일 앞섭니다. 우리 역사에서 삼연주의는 또한 망국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세도, 4색 당쟁, 시화, 지역차별 등이 삼연에 근거한 것들입니다. 이런 요인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가장 뿌리 깊은 땔래야 뗄 수 없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혈연 사회에서 족보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족보는 후한 시대(950년)에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1467년 안동권씨 족보인 성화보가 최초이었다고 합니다. 소위 양반 가문의 전통을 이어주며, 집안끼리 화목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 족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족보에서 이름 파낸다"는 말은 가장 저주스런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을 하고 성경에는 족보 이야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4에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디도서 3:9에는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족보 이야기는 헛된 것이니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족보 이야기를 좀 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창세기를 비롯하여 성경 중간 중간에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족보는 중국이나 우리 나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족보의 사전적 의미는 '부계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한 종족의 계보'라고 합니다. 전통적 족보는 부계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유전 공학 발달로 그 것도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세계적 유전학자인 브라이언 사이크스교수는 전 인류는 모두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하와의 딸 33명으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은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인류의 뼈에서 DNA를 추출하여 연구하였습니다. 1994년 이탈리아의 북부 빙하 층에 묻혀 있는 5천여 년 된 사람의 냉동유해를 검사했습니다. 이 검사를 통해 인류의 유전자가 모계 족보를 따라 앞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희석되지 않은 채 그대로 전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앞으로는 모계 족보를 만드는 것이 더 과학적일 것 같습니다.
성경의 기자들은 내용의 전환기에 족보를 정리하는 성경의 관례를 따라 족보를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모세와 아론의 족보를 밝혀 두는 것입니다. 모세의 가족적 배경은 레위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먼저 레위의 두 형인 르우벤과 시므온의 자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조상을 따라 집의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모세의 조상들은 집의 어른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족보 이야기는 재미없는 부분입니다. 흔히들 읽을 때에 뛰어 넘기도 합니다. 신약의 예수님의 족보도 "낳고, 낳고"가 계속되면 지루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 족보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주님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모세와 아론의 족보에서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인 이스라엘에서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시작됩니다. 출애굽을 논하기 전에 애굽에서 살게 된 원인과 근거를 밝힙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렸을 때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야곱은 70인의 식솔을 데리고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시 출애굽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5:16에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애굽에 살 때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나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고통 당합니다. 고통을 인하여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해방하시려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출현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조상들과 맺은 언약이 후손에게 그대로 전수됨을 확인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는 말씀을 그대로 이루십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하나님은 후손에게 그 언약이 주어짐을 약속하셨습니다.
언약은 조상들과 맺었지만 그러나 실제로 땅은 후손들이 차지합니다. 조상들은 후손들이 잘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조상들이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언약만 받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이 이루어지는 것은 후손들입니다. 조상들은 억울합니다. 모든 부모는 항상 자신의 자녀들과 후손들을 위한 희생제물입니다. 누구나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위한 희생제물이며 나는 내 자녀를 위한 희생제물입니다.
맥스 루카도는 "과거의 후손은 바로 우리다. 또한 우리는 미래의 부모이며 전대의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일을 이어받은 후계자이고 후원자이며 우리가 씨뿌리지 않는 숲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사람들과 동질적인 존재들입니다.
족보를 기록한 이유는 모세와 아론이 이끌 백성들이 그들의 동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그 백성들이 자신의 동족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을 이끄는 모세와 아론이 그들의 동족이라는 신뢰성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족보를 통하여 모세와 아론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둘째, 해방자 모세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해방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 가운데서 된 일입니다. 모세의 출생, 성장 그리고 그의 역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서 되어진 하나님의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에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노루가 통솔하는 사자 군대보다 사자가 통솔하는 노루 군대가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의 중요성을 말하며 지도자는 본래적으로 지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밥 얀디안이 쓴 '다윗 섬김의 리더십'에 보면 최고의 리더로 이끌어주는 6단계를 설명하면서 "은총의 뜻을 깨달아라", "하나님과의 교감을 유지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감에서 지도자가 탄생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타고난 보스(the gifted boss)란 말도 합니다. 타고난 보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리더십을 가진 자를 의미합니다.
바울의 리더십의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로마서 1:1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1:15에는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라고 합니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며 자신의 리더십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시려고 그 가문을 활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서 모세의 선택도 출애굽도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시려고 요셉의 가문을 이용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을 마태는 마태복음 처음에 적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로서 내려오는 권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서 내려왔기 때문에 하늘로서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하늘로서 오는 세례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일을 주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권위를 직접 주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모세의 족보는 가문의 수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왜 하필 하나님께서 모세의 가문을 이용하셨을까요? 왜 레위 지파에서 모세를 택하셨을까요? 레위는 이스라엘의 셋째 아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첫째 아들인 르우벤과, 둘째 아들인 시므온을 소개합니다.
르우벤은 이스라엘의 장자이었으나 아버지의 소실을 범한 과실로 장자권이 요셉에게 돌아갔습니다. 역대상 5:1에서 르우벤에 대하여 소상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우리말에 족보에서 이름을 파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서운 징벌이고 저주입니다. 그런데 르우벤이 그 꼴이 되었습니다.
시므온은 가나안 여인을 취하여 사울이란 아들을 낳았습니다. 당시에 족장의 후손들이 가나안 여인을 취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하여 며느리를 취할 때에 가나안의 딸 중에서 하지 말라고 그의 종에게 부탁하여 가문에서 리브가를 취하였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창세기 34장에 보면 세겜 사람들을 무참히 죽은 살인자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사람들에게 욕을 당했을 때에 오리비들인 시므온과 레위는 할례를 이용하여 칼로 그들을 죽였습니다(창 34:25). 세겜에서 야곱이 당한 가족적 비극의 장본인들입니다. 세겜을 피비린내 나게 한 살인자들입니다. 라이트푸트라는 주석가는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는 여기에 기록된 사실만으로도 명예를 지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적나라하고 솔직하고 수치를 감추지 아니하는 자세가 이 족보에는 나타나 있습니다. 가장 추한 일을 스스로 적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가장 추한 사람들의 일을 가문의 족보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가문이 수치스럽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문을 빛낼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처음에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족보는 예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난다는 약속의 성취입니다(창 3:15). 예수님 족보에 네 여성의 이름이 거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시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대를 잇는 며느리입니다. 라합은 가나안의 기생이었습니다. 룻은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로 취급하던 이방인 과부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는 남의 부인인데 다윗이 그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게 하고 취한 사람입니다. 천한 조상에서 예수님은 탄생하셨습니다. 천한 우리를 구하시려고 천한 경험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족보는 천한 것을 가리지 않고 적고 있습니다. 아니, 하필이면 천한 것만 골라서 적고 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역사요 족보입니다.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은 분개합니다. 일본이 근대사를 왜곡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일본은 고대사도 왜곡하여 가짜 토기를 묻어놓고 다시 발굴하여 일본의 역사를 수천 년 앞당겼습니다. 얼마전 이 모든 것이 탄로 나서 역사 교과서를 다 고친다고 합니다. 고대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근대사를 왜곡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을 이상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열등의식의 발로입니다. 역사는 진실을 쓰는 것입니다. 수치를 수치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치를 감추고 거짓으로 꾸미는 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진실을 감추고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1961년에 권총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의 가문의 변사는 뿌리가 깊습니다. 헤밍웨이의 아버지와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그의 아들 그레고리가 성전환하여 여자 교도소에서 죽었습니다. 한 때는 의사였던 그가 알콜 중독으로 고통을 당하다 죽은 것입니다. 이런 비참한 가문도 있습니다.
반면에 존 스커더라는 분의 가족이 있습니다. 이 가문은 다른 어떤 가족이 도저히 깨지 못할 선교적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존 스커더와 그의 아내 실론은 인도 선교사입니다. 그들에게는 10자녀가 있었습니다. 아들 중의 하나는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아홉 자녀는 다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아홉 자녀 중 다섯명은 의료선교사입니다. 그들이 인도에 선교한지 100년이 되던 1919년에 세 명의 증손자가 인도를 향해 출항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서른 한 명의 자손이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일곱명의 자녀는 다른 곳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소모적인 족보 자랑은 하지 맙시다. 건설적인 족보 이야기를 합시다. 여러분의 가문을 통하여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가문의 족보에 기록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