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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 내면의 풍경 - 미셸 슈나이더
출판사 서평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로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하나인 ‘페미나 바카레스코 상’을 수상한 작가 미셸 슈나이더가 또 한 명의 음악가에 대해 써내려간 책이 한국에 소개된다. 바로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 슈만의 삶과 음악을 다룬 《슈만, 내면의 풍경》(원제: La tombee du jour)이다.
고통의 시인 횔덜린을 통해 들여다보는 슈만의 황혼
우리는 하나의 징후다, 더는 아무 의미도
더는 아무 고뇌도 아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는
거의 잃어버렸다
낯선 땅에서 언어를.
_횔덜린,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슈만, 내면의 풍경》은 횔덜린이 쓴 위 시의 시구를 일곱 개 장의 제목으로 차용한다. 하나의 징후일 뿐, 그 어떤 말로도 분명해지지 않는 고통을 노래하는 시를 접하고, 슈나이더는 자연스럽게 슈만을 떠올린다.
저자는 정신적인 고통을 ‘고뇌’, 육체적인 고통을 ‘고통’으로 부르며 단어 자체를 분리하여 설명한다. 두 예술가를 괴롭힌 것은 당시 대부분의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겪었던 ‘고뇌’가 아닌 ‘고통’이다. 고통은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다. 차라리 물성에 가까운 개념이다. 횔덜린은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나는 돌로 되어 있다”고 토로했고, 슈만은 어머니에게 “저는 하나의 조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고뇌에 빠진 인간은 그 속에서 자신을 지탱할 수 있으나 고통에 빠진 인간은 자신을 잃는다. 고통 속에서는 언어도, 의미도 없다. 이처럼 저자는 ‘고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슈만 음악 곳곳에 숨겨진 고통의 징후들을 더듬는다. 이러한 징후들은 어스름하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오직 ‘황혼의 시간(원제의 뜻)’을 닮았다. 그리하여 저자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들여다보는 슈만의 고통은 오직 황혼 속에서만 어렴풋하게나마 볼 수 있다고.
슈만이 평생에 걸쳐 음악으로 토로했던 고통의 미학
저자는 슈만의 음악을 ‘후모어(Humor)’라는 단어로 정리한다. 후모어는 평소 우리가 쓰는 ‘유머(humor)’와 같은 단어다. 그러나 슈만의 후모어는 그저 유머에 그치지 않는다. 해학이나 풍자도 아니다. 즐거운 유머와 가라앉는 기분이 음악으로 융합된 결정체를 의미한다. 유쾌함 속에 가라앉는 침울함, 음울한 선율 속에 솟아오르는 열정을 뜻한다. 후모어 속엔 황홀한 고통이 있다. 『유모레스크 op.20』에서 ‘유모레스크(humoresque)’의 의미는 ‘익살스러운 곡’이지만, 슈만은 피아니스트 헨리에테 포이크트에게 이 곡이 자신이 만든 가장 우울한 곡이라고 털어놓는다. 이런 태도에 대해 저자는 일관성 없는 관점을 취한다고 슈만을 비난하는 대신, 이것이야말로 작품의 심오한 이중성을 반영한다고 평가한다.
후모어와 함께 ‘먼 곳’, ‘낯선 곳’, ‘조각’, ‘내면’이라는 단어가 슈만의 악보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도 결국 특별한 고통의 정서다. 즉 ‘멀고’, ‘낯설고’, ‘조각난’ 감정이지만 분명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감정인 것이다. 저자는 슈만의 음악이 우리 안의 생경한 감각을 끌어내는 점에 주목한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는다면 ‘고통’이 이처럼 매력적이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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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음악에 실려 부유하다가 현실에 안착..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F-A-E (Frei aber Einsam)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도 F-A-E
활발한 열정가, 우울한 몽상가
"슈만은 두 개의 필명을 사용했다
오이제비우스는 우울한 몽상가,
플로레스탄은 활발한 열정가를 표상한다"
"이 모든 소리, 여행, / 지상의 잡다한 꿈을 가로질러
/ 아주 낮고 은밀하지만 주의 깊은 영혼을 지닌 이에
게 / 말 거는 하나의 소리'
"여기서 음악가가 그 자신에게 제기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갈가리 찢긴 노래, 대답 없는 질문이다. 적어도 언어를 통한 대답은 없다..." 바로 이것이다. 옛 곡조에서 온 광기, 그 정확한 이름을 찾으려 하지 마라. 우울 아래 묻힌 사랑하는 이의 이름
가차 없는 형벌인 양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이 옛 곡조의 이름을'
"이미 어둠 속에 몸을 담근 새가 가져오는 죽음의 노래"
고통은 특정한 누군가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세상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때때로 자신의 삶보다 자신의 고뇌에 더 집착하는 것은, 오직 고뇌만이 삶을 충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고통은 '나'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일반
적인 '우리'와 관련한다. 고통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는 특정한 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고통을 '내가 갖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나'라고 할 수 없는 나와, 내가 더 이상
속하지 않는 세상 사이에 '고통이 있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
고통을 하나의 고뇌로 보자면, 그것은 자신을 존재하게 할 대상을 찾지 못한 고뇌다. 그것은 그 어떤 '나'도 고려하거나 생각할 수 없는 아픔, 이름 없고 얼굴 없는 아픔, 인격 없는 아품이다."
"음악은 고통의 극단이다.
'고뇌 속에는 쾌락이 감추어져 있지만 고통은 그렇지 않다. 고통 속에는 허무가 있을 뿐이다. "
'고뇌 속에는 말할 수 있는 즐거움이 남아 있다. 적어도 고뇌에 대해 말할 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말하고 싶은 욕망, 충동까지를 앗아가 버린다. "
"슈만의 음악은 쾌락의 원리 너머에 있다. 또한 언어의 원리 너머에 있는데, 아마도 이 둘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고통은 다른 범주, 이를테면 반복, 죽음의 충동, 비참의 범주에 속한다. "
"이 음악은 종종 힘겹고,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음악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건드린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광기, 우리 자신의 죽음을.
"마치 그런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될까 봐, 그로부터
나올 수 없을까 봐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존재의 고통, 그것은 그저 존재의 고통이다"
(슈만, 내면의 풍경 -미셸 슈나이더)
정신은 부유하려 하고 높은 곳에서 오는 소리를 들으러 달려가려 하는데, 현실은 자꾸 땅에 내동댕이쳐지는 느낌 ... 자꾸만 땅으로 끌어내려지는 느낌...
꿈 깨라고 말하는 소리, 땅에 발을 딛고 살라는 꾸짖음. 관계들, 연걸고리들 . . 그래서 현실에서의 관계보다, 저 높은 곳에서 연결되는 관계를 꿈꾸었었는지도.
살아 있는 작가와 굳이 연결되고 싶어 하지 않았던
마음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몸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징후'였기 때문에.
저 멀리에서 오는 알 수 없는 이끌림은
상실된 기억들 틈에서
간신히 들려오는 부름을 알아차리는
순간적인 깨어남인지도.
꿈과 현실이 뒤바뀌어,
꿈꾸는 순간들이 사실은
깊은 현실 속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들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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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 내면의 풍경 - 미셸 슈나이더
"슈만의 음악은 오래전부터 해석이 불가능했다. 분노와 신비와 감정에 넘치는 [크라이슬레리아나]를 해석할 수 있는가? 슈만 음악의 위대한 연주자들은 그것을 '해석'하지 않는 이들이다. 말하려, 표현하려, 의미를 두려 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들은 슈만이 자신을 해석하도록 자신을 내맡긴다. 다짐도, 비장한 효과도, 의도도, 표현도 없이. 그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잃어버린 미지의 언어를 배우듯이 슈만을 연주한다. [어린이 정경] 제1곡의 [낯선 나라와 사람들]처럼 낯설고 이국적이다. 그 연작의 기초가 되는 주제는 변조된 고통의 모티브다. 혹은 뜻밖의 불협화음, 절분법으로 귀착되는 긴앞꾸밈음이다. 타격 입은, 하지만 유일하게 대위법적인 전개에서 나온 화음으로 이루어진 그런 경계라고나 할까. [새벽의 노래], 곧 노래에 대한 향수를 옲는 노래가 그런 것이다." p55
절분법: 강박에 휴지부를 두고 약박의 음을 강조하는 리듬법
긴앞꾸밈음: 본음표의 앞에 그 절반의 길이로 앞꾸밈음을 나타내는 작은 음표
"[나비]의 초판에는 장 파울의 소설 <개구쟁이 시절>의 끝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저 소리 좀 들어봐!' 흥분한 볼트는 멀리서 들려오는, 달아나는 듯한 화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자기 형이 그 화음과 더불어 떠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클라라 비크의 주제에 의한 즉흥곡] 초판(1833년)의 피날레 역시 이런 작별 인사의 몸짓 중의 하나로, 여기서 우리는 밤에 떠나가는 친구를 떠올릴 수 있다. 변주의 근거로 쓰인 주제는 춤곡의 형태로 푸가 한가운데에서 되풀이되지만, 마치 분절된 듯 그림자에 먹히고 만다. 이윽고 그 주제가 중단된다. 반복되리라고 예상한 'E음'은 제때 나오지 않고 지체하다가 고통스러운 침묵 후에, 주저하는 분산화음으로 겨우 들려올 뿐이다. 이어 그 악절이 끝까지 펼쳐질 듯하지만, 또다시 두 번째 부분(C#, D, D#)으로 끊겨 다시 중단되고 無속으로 사라진다. 귀를 기울여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 종말은 극도로 강하고 광기에 넘친다. 이 죽음의 광경, 이 소멸에의 동의를 슈만은 1850년에 그 악보를 개작할 때 한결 차분해진 피날레로 바꾸었다." p85
"저음부와 주제 사이의 이 리듬 차이를 보여주는 많은 예들이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는 [클라라 비크의 주제에 의한 즉흥곡]의 첫번째 변주다. 왼손의 옥타브가 강하게 건반을 때리는 동안, 오른손의 화음은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슈만은 첫 박자에 실행 불가능한 악센트를 요구하는데, 그때 이미 화음은 시작된 다음이다). 두 손은 끊임없이 서로 길을 잃고, 서로 겹쳐지고 서로에게서 도망친다. 사육제에서 가면들이 서로를 쫓고 서로를 피하는 것처럼. 저음부의 옥타브 사이에는 일종의 메아리가 있다. 저음부의 옥타브가 오른손 화음의 배음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순간, 왼손의 화음은 거의 사라져버린다(이 작품의 다른 변주곡 또한 두 손 사이의 이런 대조를 자주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다윗동맹춤곡] 제1부 속에서 멜로디의 음은 첫 박자와 줄곧 어긋나 있고 첫 번째 박자와 네 번째 박자에 강세를 두는 타란텔라 춤곡으로 된 제6곡('매우 빠르게')에서 강세는, 오른손은 세 번째와 여섯 번째 박자에, 왼손은 두 번째와 네 번째 박자에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사육제]의 [파가니니] 속에서, 왼손은 박자에 앞서 '포르티시모'를 치고 오른손은 '스타카토', '피아노'를 연주한다. 오른손의 연주 박자가 뒤처져 양쪽이 어긋나는 것이다." p91
타란텔라 춤곡: 셋잇단음표 박자 계열로 연주되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의 춤곡.
"슈만의 음악에서는 조성상의 조바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5도권을 거의 따르지 않고 건조한 자르기, 강조된 반음계, 예기치 않은 잠수가 있을 뿐이다. (...)
우리는 몇몇 음정 속에서 고전적인 하모니 속에 자리 잡은 뜻밖의 불연속성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 불연속성이야말로 급변하는 기분을 소리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크라이슬레리아나] 제1곡의 원래 테마는 점차적으로 더 벌어지는 일련의 음정으로 전개된다. [사육제] 제11곡 [키아리나]의 점점 커지는 음정의 고통스러운 긴장은 보다 덜 악마적이긴 하지만 결국 마찬가지다.
'멀리 떨어진' 음계로 자주 돌아가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
슈만의 하모니는 귀에 거슬리는 큰 음정(9도, 7도 도약음)을 드물게만 사용하고, 전체적으로 다분히 조성 음악에 머물러 있다. 거기서는 조성에 대한 기묘한 집착(정신병자의 고정된 시선이나 강박관념을 연상시키는)까지 엿보인다. 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몇몇 작품들(앞서 인용된 [사육제]의 모티브가 그 좋은 예다)속에서 상승하는 기분(고양, 도취)과 하강하는 기분, 곧바로 다시 떨어지고 추락하는 것, 강박적인 하강의 모티브, 축소된 하모니, 다른 조성을 향한 모든 시도가 이전 조성으로 되돌아오는 그 불가피한 회귀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확인한 바 있다.
하지만 실제로 조성이 잘못 놓이는 일은 없다. 그것은 다만 위장일 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조성은 표면적으로만 낯설게 나타난다. (...)" p97
5도권: 옥타브 내의 12음을 음정 관계로 나열한 원모양의 도표이다. 장단조에서 조바꿈은 대개 이 5도권에 있는 조성의 앞, 뒤 조성(C장조의 경우 F장조와 G장조)으로 이루어진다.
>이 치밀한 묘사와 분석은 정말 숨이 막힌다. 대단했다.
솔직히, 정말 솔직히 고백컨대 '이 작자가 어디까지 헛소리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런 궁금증으로 이 책을 끝까지 읽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역자후기를 읽었다.
이런 책은 오랜만이다. 분명히 그 어느 책에서도 나오지 않은 슈만의 음악에 대한 분석은 숨이 막히고, 눈부시다. 그러나 슈만의 내면에 대한 글은 '정말 헛소리다' 음악에 대한, 정신분석에 대한 작가의 직업만으로도 내가 넘보기 어렵겠지만 지금 이 순간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다만 슈만에 대한, 슈만의 내면의 정신상태에 대한 글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표현된 가상의 인물로 대체된다면 '그럴 수 있겠다'로 말을 바꿀 수 있다. 작가는 그런 생각으로 이 책을 쓴게 아닐까?
슈만에 대한 책으로써 이 책을 읽는다면 말리겠습니다. 그러나 슈만의 음악을 분석하고자, "슈만에 대해 정확하게, 자세하게 안다"라는 분이 읽으신다면 탁월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https://m.blog.naver.com/cookiedesign/220189925977
이 음악은 종종 힘겹고,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음악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건드
린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광기, 우리 자신
의 죽음을. 슈만을 연주할 때 우리는 쇼팽이나 브람스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마치 그
런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될까 봐, 그로부터 나올 수 없을
까 봐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왜 하필이면 이런 음악인
가? 이런 음악은 상처 입은 살갖, 일상의 균열, 완만한 고
통의 점령, 돌연 민낯을 드러낸 삶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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