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7월 8일,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경상 우수사 원균과 함께 연합 수군을 이끌고
한산도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일본 수군을 박살내고
한산 해전 직전까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수군이 정박했던
견내량에 정박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592년 7월 9일,
조선 수군은 견내량에서 출항하여 가덕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탐망군이 보고 하기를
[안골포에 왜선 마흔여척이 정박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
이순신은 이억기,원균 등과 의논하여
안골포의 일본 수군을 격파할 계책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때 날은 저물고 있었고 맞바람이 불어 항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조선 수군은 7월 9일의 밤을 거제의 온천도(칠천도)에서 지냈습니다.
한편 안골포에는 일본 연합 함대의 제2군과 제3군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지휘하는 제2군과 제3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군이 1592년 7월 6일에 조선 수군과 먼저 싸우기 위해
웅포에서 출항하자,
다음날인 7월 7일에 부산에서 출항하여 제1군의 뒤를 쫓았습니다.
그러나 1592년 7월 8일 제2군과 제3군이 가덕에 도착 했을때,
한산에서 제1군이 궤멸되었고,
이 비보는 그날 가덕의 일본 수군에게 알려졌습니다.
이에 가덕의 일본수군은 조선 수군이 두려워 감히 제1군을 돕지 못하고
오히려 안골포로 이동 했던 것이었습니다.
1592년 7월 10일 새벽,조선수군은 온천도에서 출항 했습니다.
이때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에게
[본도 우수사는 안골포 밖 가덕 변두리에 진을 치고 대기하다가
아군이 접전하면 복병을 남겨 두고 빨리 이곳으로 오시오.]
라고 약속하고
전라 좌수영 수군을 선봉으로 학익진 대형을 형성하여
안골포로 항진 하였습니다.
그들의 뒤를 경상 우수사 원균의 수군이 따랐습니다.
조선 수군이 안골포에 다다르자
이순신이 안골포구 선창의 일본 수군을 바라보니,
대선 21척,중선15척,소선6척으로 구성된 일본 수군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중 삼층방 대선 1척과 이층방 대선 2척이 포구 밖을 향해 떠있었고
나머지는 포구 안에 고기 비늘 처럼 정박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구의 지형을 살펴보니
포구는 좁고 얕아서 썰물때 뭍이 들어날 정도이며
좁은 해로는 조선수군의 판옥전선이 입퇴하기에 어려워 보였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일본수군을 안골포 밖으로 유인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 하였으나,
한산의 일본 수군 패전 과정을 잘 알고 있던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유인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또한 조선수군과의 교전시 전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달아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본 수군은 현위치를 고수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적과 교전할 것을 명했고,
조선 수군은 안골포구를 교대로 드나들며
천자,지자,현자 등 각종 총통들과 장전과 편전 등의 각종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습니다.
교전이 시작되자 가덕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라 우수사 이억기는
약속대로 가덕에 복병을 남겨두고
안골포로 이동하여 일본 수군을 협공 하니
조선 수군의 공세는 더욱 맹렬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의 맹공에 삼층방 대선과 이층방 대선에 탑승하고 있던
일본 수군병들은 대부분 사상 하였고,
일본 수군은 사상자들을 소선에 옮기면서
다른 배의 수군병들을 소선을 통해 층각대선에 탑승케 하여
조선 수군에 대항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형적 이점과 분투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의 막강한 화력에 일본 수군의 피해는 커져 갔고
하루 종일 전개된 해전에서 일본수군은 최소 20척 이상의 전선을 손실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마침내 일본 수군은 열세를 절감하며 배를 버리고
뭍으로 도주하여 산속으로 숨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뭍으로 도주하는 일본 수군을 막지 못했으며,
또한 일본 수군이 숨어든 산 속에 많은 피난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순신은 궁지에 몰린 일본 수군이 피난민들에게 보복을 할까 염려되어
일본 수군이 버리고 간 배들을 소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을 안골포에서 1리쯤 떨어진 지점으로 물렸습니다.
그날밤,일본 수군은 몰래 산에서 내려와
남은 배들을 타고 부산으로 도주 하였습니다.
다음날인 7월 11일 새벽,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다시 안골포를 포위공격 하니,
일본 수군은 이미 사라진 뒤 였습니다.
이순신이 어제의 격전지를 둘러보니
포구 안팎으로 흘린 피가 가득하여 곳곳에 붉은 빛이 자욱 하였고
전사한 일본 수군의 시체를 쌓고 불태운 시체더미가 12개 였으며
타다남은 뼈다귀와 손발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날 오전 10시,조선수군은 양산강과 김해포구,감동포구로 이동하여
일본 수군을 찾으려 하였으나 일본 수군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대형을 장사진으로 형성하고
가덕 외각에서 동래 몰운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수군 전선을 배열하여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기를 흔들고 포를 쏘며 시위 하였습니다.
그리고 탐망군에게
[적의 많고 적음을 확인하고 오라.]
는 명령을 주고 가덕 응봉과 김해 금단곶 연대 방면으로 보냈습니다.
그날 밤 8시,경상 우수영 탐망군 허수광이 보고하길,
[김해 금단곶 연대를 탐망하러 올라가니
산봉우리 작은 암자에 늙은 중 한 명이 있기에
같이 연대로 올라가 양산과 김해의 으슥한 곳과 두 고을을 바라보니
적선이 나뉘어 정박한 수가 약 100여척 정도 되었는데
늙은 중에게 적선의 동정을 물으니
대답하길
`날마다 50여척이 떼지어 드나들며
본토에서 이 강으로 들어오다가
어제 안골포 해전에서 발생한 포소리를 들어
간밤에 거의 도주하고
다만 배 몇 척만 남아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보고 하였습니다.
그날이 저물 무렵,이순신은 조선수군을 잠시 천성보에 머물게 하여,
이는 일본 수군으로 하여금
조선 수군이 오랫동안 여기에 머물 것이라는 착각을 유도시킨 다음,
밤을 이용하여 회군 하였습니다.
다음날인 7월 12일 오전 10시,조선 수군이 한산도에 이르니
한산도에 상륙한 일본 수군병들이 바닷가에서 졸고 있었는데
7월 8일의 한산 해전 이후
매일 굶어서 잘 걷지 못하고 피곤한 상태 였습니다.
덕분에 거제의 조선군과 백성들은 이미 일본군 3명의 목을 베었고
나머지 일본 수군병들은 초롱 속의 새처럼 한산도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때 이순신과 이억기의 전라도 수군은 식량이 바닥난 상태여서
경상 우수사 원균에게 한산의 일본군 처리를 맡기고
다음날인 1592년 7월 13일에 본영인 여수에 귀환 하였습니다.
한산 해전과 안골포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은
부산 인근을 제외한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되찾았습니다.
이 2차례의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19명이 전사하고 119명이 부상당했으나
단 1척의 배도 손실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일본 수군은 한산 해전과 안골포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 격멸은 커녕,기본 전략인 수륙병진 작전이 완전히 좌절 되었습니다.
또한 부산 인근을 제외한 남해의 활동 영역을 모두 상실하였습니다.
이 2차례의 해전에서 특별편성된 일본 연합 수군 1만명이 사실상 몰살 당했으며
최소한 79척 이상의 전선을 손실하였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한산의 패전으로 인해
일본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잃었고
일본 수군은 용맹과 전의와 싸울 기회를 상실하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전금지령을 선포 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것은 수륙병진 작전 뿐만 아니라 전라도 침공 계획,서해 침공 계획
궁극적으로 대륙 침공 계획의 무산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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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7월 10일 안골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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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28 02:06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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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조선에서 보면 참 다행이었지만 일본에 있어서는이네요.
전에는 엠파이어 어스로 재미있게 역사를 풀어 주시더니 이번에는 임진록으로.. 잘 보고 있습니다.
오.. 임진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