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임나'는 가야 여러나라의 우두머리가 되는 나라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성왕대의 소위 임나재건 논의의 의미.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근초고왕대의 가라7국 정복 이래 성립된 한성시대의 질서 - 가야 여러나라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의도였을 겁니다. 반면 신라 입장에서 그것은 반드시 저지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가야가 다시 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내물왕대에 금성이 왜군에게 점령당했던 악몽이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으니까요.
임나재건 논의와 관련한 신경전은 백제 신라가 동맹국이라는 선입관에서 보면 이상한 기록이지만 기록을 토대로 시대상을 새롭게 그려놓고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흔히 120년 나제동맹이니 하면서 백제-신라가 오랜 동맹관계였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통설이었지만 조금만 따지고 들어가도 그 허구성은 금방 드러납니다. 이미 동성왕 말기에도 탄현에 목책을 세우는 심상챦은 기사가 보이고, 무령왕 대에는 공세적 입장에서 활발한 대고구려 전쟁을 전개하지만 신라와의 합동작전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성왕 대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제가 혈성/오곡원 전투에서 대패하며 고구려에게 밀려나는동안 신라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사실상 백제-신라간 동맹이라는 것은 비유왕~동성왕 대에만 해당되는 것이며, 성왕 대에는 고구려가 돌궐의 침략을 받은 틈을 타 북진하던 당시의 지극히 일시적인 관계였을 뿐입니다. 그 직전에조차도 도살성-금현성의 예에서 보이듯이 양국은 결코 동맹관계가 아니었지요.
고구려에 잃은 땅을 되찾고 국세를 회복할 수 있는 두번 다시 없을 기회를 포착한 백제 측에서 이해로써 신라 측을 설득하여 합동작전을 전개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애초부터 '120년 의리'의 동맹이 아니라 철저한 이해타산에서 비롯된 합동작전에 불과한 것이었고, 따라서 10군을 얻은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하고 바로 '배신'하여 180도 돌아섰던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겁니다. 백제와 달리 고구려에 대해 별로 악감정도 없고 고구려 영토를 욕심내서 모험을 걸 이유도 없는 신라니까요.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에 관한 건 삼국유사에 너무나도 유명한 의미심장한 기사가 전하고 있으며, 일본서기에 전하는 백제 측의 전언에서도 '고구려와 신라가 연계하여 백제를 치려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실제로 관산성 대전 직후 고구려군이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했지요.
어차피 철저한 이해타산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간의 일에 '신뢰'의 개념을 집어넣으려는 것이 오히려 억지스럽게 느껴지네요. 진흥왕은 이전에 성왕이 했던 '못된 짓거리'들에 분노해서 그걸 응징하려고 배신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 나라의 군주로써 이해타산을 저울질하여 움직였을 뿐입니다.
다만 성왕이 왕녀를 신라로 시집보낸 것은 위계의 차원으로 보기보다는 실질적인 설득노력의 차원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백제에게 있어 주적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였고, 6세기 전반 백제인의 세계관에서 신라는 속국에 불과했으니까요. (양직공도에 나오는 백제 부용국중에 사로국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성왕은 눈앞에 펼쳐진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인정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의 관념에서는 여전히 시골구석의 소국에 불과한 신라이므로 충분히 설득해서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이미 성왕의 관념을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설득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성왕이 온 나라를 들어 신라공격을 시도한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단순히 신라의 '배신'에 '분노'해서뿐만이 아니라, 성왕이 추진해오던 백제 재건의 전략적 입장에서 갑자기 너무나 커져버린 신라를 도저히 그냥 놔 둘 수가 없는 일이니까요.
첫댓글백제 모대왕님의 말씀이 나름 일리 있다고 보여집니다. 성(명)왕이든 진흥태왕이든 각자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으니까요. 문제는 그런 점들을 감안해도 진흥태왕과 신라가 성(명)왕을 전사시킨 후 취한 행동입니다. 적국 군주에게 최소한도의 예우를 갖추었더라도 문제의 확대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점만큼은 유능한 군주인 진흥태왕의 태도가 선뜻 납득되지 않는군요.
아마 "新羅가 明王의 頭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百濟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新羅王이 明王의 뼈를 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라는 일본서기의 횡설수설한 내용 때문에 예우 문제가 나왔군요.. 머리는 본국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예를 갖추어 백제로 돌려 보냈다고 분명히 예의 갖추었는데..북청계단에 머리를 묻었는지? 뼈를 묻었는지?..좌우지간 都堂이란 곳에 남의 왕의 뼈를 묻어도 되는 장소인지요??
신라에 대해 악의적인 적대감으로 편찬된 일본서기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내용 자체도 오락가락 하는 것으로 신뢰성도 없지요!.. 신라 진흥왕 보다도 더 문제인 것은 백제의 태도입니다..만일 그런 경우가 생겼다면 무슨 댓가를 치루더라도 그 뼈를 반드시 되돌려 받도록 최선을 다해야지요..신라는 왕도 아닌 일개 대야성 도독에 불과한대도 되찾아 오는데 하물며 대왕의 시신을...그런 노력의 흔적조차 보이질 않으니 이상한게지요...고구려도 왕의 도굴당한 시신을 되찾기 위해 어떠했는지요?
김준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적국 군주의 목을 쉽게 벤 것 자체에 대한 것인듯 합니다만... 사실 '전사'라고는 하지만 성왕이 포로가 되어 처형되었으니, 당연히 백제인의 입장에서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겠죠. 여기서 진흥왕이 조금만 다르게 처리했어도 상황이 달라졌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물론 왕의 존재 여부 자체가 국가 기강과 권위를 뒷받침해주기는 하지만, 왕 한 명 안 죽인다고 과연 신라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성왕의 경우 병법에도 밝은 왕이었으니 살려 보내는 것이 다소 걸릴 수는 있어도, 큰 문제가 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김준수님이나 신농님 의견대로 예우를 갖추어 살려보내면 물론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또한 성왕이 감명을 받아 보다 우호국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저는 결과론에 따른 것으로 비록 이후 진평왕 선덕,진덕여왕때 그리고 무열왕때 까지 매우 시달리기는 했으나 최후의 승자는 신라였습니다..만일 당시 성왕을 살려보냈다면 가야와 왜국까지 청병을 하여 쳐들어 온 마당에 그병사들이 전멸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대가야도 그대로 살아남고..결국은 신라만 왜소해 진 상태로 결과론에 비해 결코 나아졌을게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신라에서 국사가 편찬 되었던 때가 진흥왕때 거칠부에 의해서 편찬 되었던걸로 압니다..그 후에 편찬되었던 사서는 국사의 영향을 받았을것이기에 일본서기에 왜곡된 부분을 고쳐잡고 신빙성을 두는 겁니다..사서를 해석할때 당시의 상황과 사서를 주도적으로 편찬하는 편찬자의 영향력도 고려해야 합니다...성왕의 유골을 백제에 돌려주었다는 기록도 없을뿐더러 ..도당에 묻었다는건 돌려줄 의사가 전혀 없다는 의지로 판단됩니다...진흥왕의 배신과 유골을 돌려주지 않은 후로..신라는 고립이 되었고 후에 당나라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죠...진흥왕을 저평가 할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연유가 아닌가 합니다..
일본서기에 왜곡된 부분을 누가 고쳐잡았는지요??그리고 신라의 국사가 삼국사기처럼 목판본 활자로 여러권 찍어낸 것도 아닐것인데 무슨 그 후에 편찬된 사서가 국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지???..그리고 일본서기가 더더욱 신라 국사와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고 보면 일본서기는 적대관계에 있는 신라를 악의적으로 폄허한 그냥 일본서기일뿐이지요...일본서기 내용도 가려가면서 믿어야지요..자체 내용조차 횡설수설인데요...뭘!
그리고 신라에서는 점해왕 3년(249)에 남당을 궁궐 남쪽에 지어 251년부터 이곳에서 정사를 집행하던 곳을 남당 또는 도당이라고 합니다..그런데 궁궐 남쪽에 지은 남당에 무슨 북청계단이 있나요??남청계단이라면 그럴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일본서기 자세히 읽어보시지요..저는 도무지 그넘의 일본서기 내용이 워낙 오락가락하여 술 취한사람 횡설수설하는것보다도 더욱 알아듣기 힘드네요..^^
국사편찬후 김부식의 삼국사기까지 사서가 편찬되지 않았나요..국사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을 거라는 얘기입니다..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읽지 않아도 여러사서를 통하여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접하고 있죠..고대사 대부분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영향에서 해석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조금만 유추해 보시면 됩니다..점해왕 3년에 지은 남당이 진흥왕때까지 도당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죠..또한 점해왕때의 남당 역활이 진흥왕때에도 똑같은 역활을 했을 거라고 단정지을수도 없고요.
일본서기가 왜곡이 심하다고 무조건 무시할수는 없죠...왜곡된 부분을 그 당시의 상황에 맞게 고쳐 바로 봐야 하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우리 사서에 없는 부분도 일본서기에는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보조적인 자료로서 채택되어야 하고..또한 우리 역사학자들도 당시상황에 비추어서 일본서기의 왜곡된 부분을 수정하고 바로잡아 보면서 우리역사를 해석하는 걸로 압니다...
무조건 무시하는게 아니지요. 당연히 선별해 가면서 해석해야지요. 일본서기 내용이 심한 편견과 적대감이 뚜렷이 보이는그런 부분들은 곧이 믿을수는 없지요..일국의 왕의 머리를 신라 도당의 북청계단에 묻었다면 엄청난 사건인데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전설이나 구전등 어느 한가지도 흔적이 없는데도 김부식이 신라왕실의 후손이라서 삼국사기에서 빼어 버렸다고 말해야 하나요???
그리운길님 이건 위의 본문 내용과는 전혀 관련을 지을수가 없는 내용입니다..님의 말씀대로 주한미군이 북한군과 밀약을 통하여 휴전선과 경기도 강원도 지역을 차지할 경우..우리에게는 자국의 이익이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그야말로 최악의 손해일 뿐이지요..여기에 무슨 이해가 필요할까요?
그럴 일 자체가 없겠죠. 6세기의 저 상황은 일단 고구려가 북쪽에 신경쓰던 상황이었고, 마침 신라가 백제를 견제할 정도로 성장하자 고구려 측에서 신라와 밀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과 북한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북한 유사시 미-중(혹은 여기에 일, 러 추가) 간에 밀약이 오갈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에 남한이 빠질 것 같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은 있는듯 하군요.^^;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하고 바로 '배신'하여 180도 돌아섰던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겁니다.<==바로 이 대목 때문에 말한겁니다..제가 알기론 그때 백제 - 신라 -가야 연합작전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현실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니..그런 생각이 들더군요...또한 그러한 행위는 후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이해 할수 없을 뿐더러 장기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라고 생각되기에 말해 본겁니다..시시비비를 따져 오늘을 생각해 보는것도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만...
일본서기에는 백제 - 신라 - 가야 연합작전이라고 나오죠...또한 삼국사기 열전편 거칠부전에는 진흥왕 12년....백제와 더불어..........나옵니다..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11년 3월 기록을 참조 하기 바랍니다.즉, 삼국사기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백제와 신라가 연합작전으로, 일본서기는 백제 - 신라 -가야 연합작전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운길님께.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다지만, 만약 그때 신라가 '배신'을 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 생각엔 다시 옛날처럼 고구려-백제의 틈바구니에서 전전하는 부용국 신세로 전락했을것 같은데요. 오히려 진흥왕의 결단으로 신라는 비로소 삼국 중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던게 아닐지요? 물론 그 결과 여/제의 협공 특히 '복수심에 불타는' 백제의 파상공세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지만요. 그런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 그냥 시골구석의 부용국으로 남는 것이 장기적인 국익에 부합한다고 보시는거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겠네요. ^^
물론... 성왕의 머리를 굳이 북청계단밑에 묻어서 백제의 적개심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가질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어차피 붙잡힌 성왕은 죽여야 했고, 그렇다면 어차피 이후에도 백제와 원수지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국내의 사기진작에 활용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겠지요.
일본서기가 성왕의 머리를 북청계단에 묻었다고 단정지은 것도 아니지요..도도가 땅에 묻었다고도 하지요..그리고 주구장창 신라와의 적대감을 가지던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그렇게 부풀려 기록할 수도 있잖아요??..그런 의문은 백제가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고구려가 도굴당한 미천왕 시신을 찾아오듯이 반드시 그렇게 노력했어야 하는데 전혀 흔적이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일본서기 내용이 올바르다면 백제 위덕왕은 그야말로 자기때문에 전사한 부왕을 팽개친 짐승보다 못한 자에 불과하지요..할애비 원수의 나라 신라공주와 혼인한 무왕은 이건 뭐..........&
붙잡힌 왕과 수십 성과 맞바꿀 수도 있죠...꼭 죽여야 한다는 등식은 성립할수가 없죠...한강하류를 확보한 상태였고 ,,양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죽이는 것보다는 수십여성과 맞바꾸는게 신라입장에서는 옳았다고 보여지는데요....서동설화는 백제무왕이라기 보다는 김서현과 만명부인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있게 보여지는데요..위덕왕의 입장에서는 약해진 국력으로 어찌할수 없을뿐더러,,돌려주지 않은데 무슨 수로 돌려받습니까...혜왕은 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고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죠..법왕은 혜왕의 아들이고,,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니...무왕의 조부가 성왕은 아니죠..
아니 사로잡은 왕과 수십 성을 맞바꾼다??..그건 글쌔요..아마도 코메디상에서나 나올수 있는 픽션이지요...차라리 철저하게 속국으로 만들어 내정간섭과 조공을 받으면 되지요..아니면 아예 죽여서 후환을 없애든지??..그리고 결론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하여도 막대한 이익을 얻으면 된다..그게 역사다라고 말했다면 어떠한 행위가 전쟁이었다면 적어도 병법상으로는 百濟 牟大王님의 주장은 진리 그차체입니다.
첫댓글 백제 모대왕님의 말씀이 나름 일리 있다고 보여집니다. 성(명)왕이든 진흥태왕이든 각자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으니까요. 문제는 그런 점들을 감안해도 진흥태왕과 신라가 성(명)왕을 전사시킨 후 취한 행동입니다. 적국 군주에게 최소한도의 예우를 갖추었더라도 문제의 확대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점만큼은 유능한 군주인 진흥태왕의 태도가 선뜻 납득되지 않는군요.
아마 "新羅가 明王의 頭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百濟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新羅王이 明王의 뼈를 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라는 일본서기의 횡설수설한 내용 때문에 예우 문제가 나왔군요.. 머리는 본국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예를 갖추어 백제로 돌려 보냈다고 분명히 예의 갖추었는데..북청계단에 머리를 묻었는지? 뼈를 묻었는지?..좌우지간 都堂이란 곳에 남의 왕의 뼈를 묻어도 되는 장소인지요??
신라에 대해 악의적인 적대감으로 편찬된 일본서기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내용 자체도 오락가락 하는 것으로 신뢰성도 없지요!.. 신라 진흥왕 보다도 더 문제인 것은 백제의 태도입니다..만일 그런 경우가 생겼다면 무슨 댓가를 치루더라도 그 뼈를 반드시 되돌려 받도록 최선을 다해야지요..신라는 왕도 아닌 일개 대야성 도독에 불과한대도 되찾아 오는데 하물며 대왕의 시신을...그런 노력의 흔적조차 보이질 않으니 이상한게지요...고구려도 왕의 도굴당한 시신을 되찾기 위해 어떠했는지요?
김준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적국 군주의 목을 쉽게 벤 것 자체에 대한 것인듯 합니다만... 사실 '전사'라고는 하지만 성왕이 포로가 되어 처형되었으니, 당연히 백제인의 입장에서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겠죠. 여기서 진흥왕이 조금만 다르게 처리했어도 상황이 달라졌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신라가 성왕을 전사시키지 않았다면 윤리,도덕적으로는 칭송받을 일이나 전쟁의 생리로 병법상 가장 멍청한 행위일 뿐이지요..결국 후환을 두게 되어 훗날 역으로 시달리거나 멸망당하는 경우가 생기겠지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물론 왕의 존재 여부 자체가 국가 기강과 권위를 뒷받침해주기는 하지만, 왕 한 명 안 죽인다고 과연 신라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성왕의 경우 병법에도 밝은 왕이었으니 살려 보내는 것이 다소 걸릴 수는 있어도, 큰 문제가 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김준수님이나 신농님 의견대로 예우를 갖추어 살려보내면 물론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또한 성왕이 감명을 받아 보다 우호국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저는 결과론에 따른 것으로 비록 이후 진평왕 선덕,진덕여왕때 그리고 무열왕때 까지 매우 시달리기는 했으나 최후의 승자는 신라였습니다..만일 당시 성왕을 살려보냈다면 가야와 왜국까지 청병을 하여 쳐들어 온 마당에 그병사들이 전멸당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대가야도 그대로 살아남고..결국은 신라만 왜소해 진 상태로 결과론에 비해 결코 나아졌을게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신라에서 국사가 편찬 되었던 때가 진흥왕때 거칠부에 의해서 편찬 되었던걸로 압니다..그 후에 편찬되었던 사서는 국사의 영향을 받았을것이기에 일본서기에 왜곡된 부분을 고쳐잡고 신빙성을 두는 겁니다..사서를 해석할때 당시의 상황과 사서를 주도적으로 편찬하는 편찬자의 영향력도 고려해야 합니다...성왕의 유골을 백제에 돌려주었다는 기록도 없을뿐더러 ..도당에 묻었다는건 돌려줄 의사가 전혀 없다는 의지로 판단됩니다...진흥왕의 배신과 유골을 돌려주지 않은 후로..신라는 고립이 되었고 후에 당나라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죠...진흥왕을 저평가 할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연유가 아닌가 합니다..
일본서기에 왜곡된 부분을 누가 고쳐잡았는지요??그리고 신라의 국사가 삼국사기처럼 목판본 활자로 여러권 찍어낸 것도 아닐것인데 무슨 그 후에 편찬된 사서가 국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지???..그리고 일본서기가 더더욱 신라 국사와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고 보면 일본서기는 적대관계에 있는 신라를 악의적으로 폄허한 그냥 일본서기일뿐이지요...일본서기 내용도 가려가면서 믿어야지요..자체 내용조차 횡설수설인데요...뭘!
그리고 신라에서는 점해왕 3년(249)에 남당을 궁궐 남쪽에 지어 251년부터 이곳에서 정사를 집행하던 곳을 남당 또는 도당이라고 합니다..그런데 궁궐 남쪽에 지은 남당에 무슨 북청계단이 있나요??남청계단이라면 그럴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일본서기 자세히 읽어보시지요..저는 도무지 그넘의 일본서기 내용이 워낙 오락가락하여 술 취한사람 횡설수설하는것보다도 더욱 알아듣기 힘드네요..^^
국사편찬후 김부식의 삼국사기까지 사서가 편찬되지 않았나요..국사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을 거라는 얘기입니다..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읽지 않아도 여러사서를 통하여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접하고 있죠..고대사 대부분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영향에서 해석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조금만 유추해 보시면 됩니다..점해왕 3년에 지은 남당이 진흥왕때까지 도당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죠..또한 점해왕때의 남당 역활이 진흥왕때에도 똑같은 역활을 했을 거라고 단정지을수도 없고요.
일본서기가 왜곡이 심하다고 무조건 무시할수는 없죠...왜곡된 부분을 그 당시의 상황에 맞게 고쳐 바로 봐야 하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우리 사서에 없는 부분도 일본서기에는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보조적인 자료로서 채택되어야 하고..또한 우리 역사학자들도 당시상황에 비추어서 일본서기의 왜곡된 부분을 수정하고 바로잡아 보면서 우리역사를 해석하는 걸로 압니다...
무조건 무시하는게 아니지요. 당연히 선별해 가면서 해석해야지요. 일본서기 내용이 심한 편견과 적대감이 뚜렷이 보이는그런 부분들은 곧이 믿을수는 없지요..일국의 왕의 머리를 신라 도당의 북청계단에 묻었다면 엄청난 사건인데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전설이나 구전등 어느 한가지도 흔적이 없는데도 김부식이 신라왕실의 후손이라서 삼국사기에서 빼어 버렸다고 말해야 하나요???
초기 삼국기록을 담은 중국사서와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초기 삼국기록이 많이 다릅니다..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초기 삼국의 기록을 국사의 영향을 받은 여러 사서들을 중심으로 집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만약에 주한미군이 북한군과 밀약을 통하여 휴전선과 경기도 강원도 지역을 차지할 경우 ..우리 입장에서는 그것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이해해야 하는지요...
그리운길님 이건 위의 본문 내용과는 전혀 관련을 지을수가 없는 내용입니다..님의 말씀대로 주한미군이 북한군과 밀약을 통하여 휴전선과 경기도 강원도 지역을 차지할 경우..우리에게는 자국의 이익이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그야말로 최악의 손해일 뿐이지요..여기에 무슨 이해가 필요할까요?
그럴 일 자체가 없겠죠. 6세기의 저 상황은 일단 고구려가 북쪽에 신경쓰던 상황이었고, 마침 신라가 백제를 견제할 정도로 성장하자 고구려 측에서 신라와 밀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과 북한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북한 유사시 미-중(혹은 여기에 일, 러 추가) 간에 밀약이 오갈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에 남한이 빠질 것 같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은 있는듯 하군요.^^;
'이해'하는것과 '용납'하는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해'는 하겠지만 '용납'은 할 수 없겠지요.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왜 하셨는지는 '이해'가 안 갑니다만;;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하고 바로 '배신'하여 180도 돌아섰던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겁니다.<==바로 이 대목 때문에 말한겁니다..제가 알기론 그때 백제 - 신라 -가야 연합작전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현실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니..그런 생각이 들더군요...또한 그러한 행위는 후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이해 할수 없을 뿐더러 장기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라고 생각되기에 말해 본겁니다..시시비비를 따져 오늘을 생각해 보는것도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만...
그당시 백제 - 신라 -가야가 무슨 연합 작전중이었는지요????.
일본서기에는 백제 - 신라 - 가야 연합작전이라고 나오죠...또한 삼국사기 열전편 거칠부전에는 진흥왕 12년....백제와 더불어..........나옵니다..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11년 3월 기록을 참조 하기 바랍니다.즉, 삼국사기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백제와 신라가 연합작전으로, 일본서기는 백제 - 신라 -가야 연합작전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운길님께.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다지만, 만약 그때 신라가 '배신'을 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 생각엔 다시 옛날처럼 고구려-백제의 틈바구니에서 전전하는 부용국 신세로 전락했을것 같은데요. 오히려 진흥왕의 결단으로 신라는 비로소 삼국 중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던게 아닐지요? 물론 그 결과 여/제의 협공 특히 '복수심에 불타는' 백제의 파상공세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지만요. 그런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 그냥 시골구석의 부용국으로 남는 것이 장기적인 국익에 부합한다고 보시는거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겠네요. ^^
물론... 성왕의 머리를 굳이 북청계단밑에 묻어서 백제의 적개심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가질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어차피 붙잡힌 성왕은 죽여야 했고, 그렇다면 어차피 이후에도 백제와 원수지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국내의 사기진작에 활용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겠지요.
일본서기가 성왕의 머리를 북청계단에 묻었다고 단정지은 것도 아니지요..도도가 땅에 묻었다고도 하지요..그리고 주구장창 신라와의 적대감을 가지던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그렇게 부풀려 기록할 수도 있잖아요??..그런 의문은 백제가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고구려가 도굴당한 미천왕 시신을 찾아오듯이 반드시 그렇게 노력했어야 하는데 전혀 흔적이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일본서기 내용이 올바르다면 백제 위덕왕은 그야말로 자기때문에 전사한 부왕을 팽개친 짐승보다 못한 자에 불과하지요..할애비 원수의 나라 신라공주와 혼인한 무왕은 이건 뭐..........&
붙잡힌 왕과 수십 성과 맞바꿀 수도 있죠...꼭 죽여야 한다는 등식은 성립할수가 없죠...한강하류를 확보한 상태였고 ,,양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죽이는 것보다는 수십여성과 맞바꾸는게 신라입장에서는 옳았다고 보여지는데요....서동설화는 백제무왕이라기 보다는 김서현과 만명부인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있게 보여지는데요..위덕왕의 입장에서는 약해진 국력으로 어찌할수 없을뿐더러,,돌려주지 않은데 무슨 수로 돌려받습니까...혜왕은 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고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죠..법왕은 혜왕의 아들이고,,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니...무왕의 조부가 성왕은 아니죠..
百濟 牟大王 님께...결론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하여도 막대한 이익을 얻으면 된다..그게 역사다...그렇게 말하신다면 저도 할말은 없죠..
아니 사로잡은 왕과 수십 성을 맞바꾼다??..그건 글쌔요..아마도 코메디상에서나 나올수 있는 픽션이지요...차라리 철저하게 속국으로 만들어 내정간섭과 조공을 받으면 되지요..아니면 아예 죽여서 후환을 없애든지??..그리고 결론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하여도 막대한 이익을 얻으면 된다..그게 역사다라고 말했다면 어떠한 행위가 전쟁이었다면 적어도 병법상으로는 百濟 牟大王님의 주장은 진리 그차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