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가 추구했던 경제를보라 글쓴이1056313lekt 작성일2005-08-13 08: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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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공개 할수록 박정희는 빛난다-3
2005/03/17 19:36 | 신문 스크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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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파병의 기적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 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 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였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간 외자 도입액은 32억 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0년 만인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 2,120만달러로 29.3배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중단액이 9,300만 달러 증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거두어 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진된다. 장병 1인당 17,000만 달러씩 국가에 기어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치에 해당되는 돈이다.
이는
장장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3년 6월 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 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 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달러와 53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그러나 1959-1965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장섰고 지금은 29배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기업이 맡았다.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땅으로 상륙했다.한진은 월남에서 1.5억달러를 벌어들였고,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수석이 박대통령에게 건의 했다."중동은 고온에다 모래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이다. 금녀,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군인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방병이 있습니다.월남 참전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1965-75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 5천만 달러, 1976년에는 24억 3,000만 달러, 19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19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오늘날의
기록과 비교해 보라. 그 엄청난 기술과 해외수주 기록을 가지고도 지금 현대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건설업이 중동 수주에 냉대를 받으면서 줄줄이 도산하고 있지 않은가?
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6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회사들과 같은 곳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깍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릭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 했다.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일자리가 갑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릿고개" 라는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1960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한참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 모두가 우리보다 3배나 더 잘살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필리핀은 1인당 국민소득 1,300달러, 우리의 11분의 1이다. 인도네시아는 968달러, 태국은 1,940달러, 북한은 580달러, 한국은 17,000달러, 모두가 한국에 비해 새카맣게 뒤떨어졌다. 박정희가 이룩한 산업화는 기적 그 자체였다.
박정희의 일자리 만들기, 그 누구도 흉내 못내
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에 어떻게 기능공을 양성해서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지금도 혀를 찰 만큼 감탄하고 있다.
첫째
그는 고등기술학교를을 만들어 기능공을 대량으로 길러내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들 기능공들의 친구가 ? 다. 기능공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게 소원이었다. 매년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 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공장장이 사장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대학가야 소용없다, 기술을 배워야 대우받는다."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유행어가 됐다.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은 들어와 공장을 지어 달라 호소했다. 박대통령의 약속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대통령의 약속을 신뢰한 외구기업들이 주주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라 중간에서 공무원들이 장난질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조립을 많이 해서 팔면 그만큼의 부품과 소재들을 앉아서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외국기업에게도 또 다른 매력이었다. 한국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둘째
그는 한편으로는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 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에 대한 기술도면들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스인 기술자료(TDP)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 있는 과학기술자들을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지도하게 했다. 생활필수품마저 고갈 됐던 당시엔 한동안 물건이 없어서 못 팔판이었다. 굶주린 배에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듯 만들기만 하면 모두가 팔렸다.
공장을
가진 기업들은 한동아안 땅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 부자가 됐다. 기업은 날로 번창하고 생산설비는 더욱 팽창했다. 그만큼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바로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당장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는 데에도 착안을 했다. 참고로 그가 얼마나 미래 지향적이었는지는 창원 공단에 나있는 광활한 도로 폭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주위의 의아심을 무릎 쓰고 그는 넓은 도로를 건설 할 수 있는 땅을 그때에 사두었다. 훗날 땅값이 오르면 넓은 도로를 건설 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빠듯한
나라 살림에서도 오늘날의 과학 단지를 만들어 냈다. 과학 단지야 말로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그들 곁을 자주 찾았다. 대통령을 좋아한 나머지 과학자들 중에는 과로를 반복하다가 순직한 이들도 꽤 있었다. 과학촌 수장들이 박대통령을 만나기 원하면 대통령은 국무회의 중에도 만나주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하니까 장관들이나 공무원들이 과학자들을 지금처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그가 며칠씩 머물던 방이 있었다. 그 방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일선 지휘소 였다.그러나 그가 떠나고난 지금까지 그 방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의 대통령들에게는 과학이 입으로만 중요했다.
국가경영능력만을
보면 박대통령은 100년에 나올까 말까한, 사람이라는 걸 필자는 믿고 있다. 외국 지도자들은 그의 국가경영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등소평이 박정희를 숭상한 이래 중국은 지금 박정희를 경제 선생님으로 모시고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베트남의 드이모이 역시 그의 성장모델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누가 뭐래도 박정희는 아시아 10대 인물중 상석에 속해 있다.
반면,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를 보자. 공공근로 사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세금을 베급해 주었다.들에 가서 풀을 뽑고 코스모스를 심으면서 절반이상을 놀다가 오면 하루에 22,000원을 주었고, 산에 가서 나무를 벤다며 소주 마시고 낮잠을 자다 오면 37,000원씩을 주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버니까 이들은 공장이나 들에 나가 힘들게 일하고 싶지 않았다. 김대중의 일자릴 만들기는 사실상 일자리 죽이기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무너진 기업 수는 사상 최고에 이르렀고, 김대중은 기업죽이기의 명수였다. 시쳇말로 쨉이도 않되는 매국-빨갱이 정치꾼이 배우지 못한 무리들을 이끌고 박정희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