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 큰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전봉준이 살던 집. 전봉준 동상.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경. 전봉준 무덤. 전시관에 전시된 관군과 일본군 복식. 전봉준 심문 장면 전시물. 동학혁명 당시 연판장. 동학혁명을 이끈 지도자들. 왼쪽부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최경천, 최시형, 손병희 |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농민들의 봉기는 조선왕조를 붕괴시킨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고부의 동학농민 폭동(?)은 일개 지방수령인 고부군수 조병갑의 위법하고 부당한 수탈행위에 항거한 농민들의 작은 소요였으나,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관리들의 무능과 구태의연한 자세는 청·일 전쟁이라는 국제전쟁을 불러왔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오랫동안 종주국이던 청을 몰아내고 조선정부를 장악하더니, 마침내 조선왕조까지 병탈한 것이다.
근대 시민혁명의 발원지 전북 정읍에는 1894년 4월 7일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최초로 벌인 전투에서 승리한 황토현(黃土峴)에 건립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는데, 이곳은 1963년 동학혁명기념탑을 건립하고 매년 위령제를 지내오다가 2004년 5월 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기념관은 호남고속도로 정읍나들목을 빠져나와 정읍농산물 도매시장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덕천면사무소를 지나면 도로 왼쪽에 있고, 정읍 시내에서 124번 시내버스를 타고 덕천사거리를 지나서 황토현전적지 앞에서 내리면 된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주차장도 넓다.
동학농민혁명재단에서 운영하는 기념관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동학혁명을 주동했던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을 비롯하여 김개남(1853~1894), 손화중(1859~1895), 최경선(1859~ 1895), 최시형(1827~1898), 손병희(1861~1922) 등 6명의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국사시간에 배웠던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이 아니라 여러 명의 주동자 중 한사람에 대한 불과하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이런 의문은 중앙의 제4전시실 ‘무장농민군의 진혼’에서 ‘동학농민혁명 주요인물’이라며 6명의 흑백사진을 걸어 둔 것이며, 2층 전시실에 혁명을 모의하면서 주모자를 알 수 없도록 둥글게 원형으로 작성한 연판장을 보면서 점점 커갔다.
물론 수천 명을 지휘하는 혁명을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전시자료만 본다면 혁명을 지휘한 이들로 전봉준 등 6명 모두를 똑같게 표시한 것은 마치 BC 510년 왕정을 폐지하고 이후 450여 년간 로마공화정시대를 이끌었던 ‘동등자(同等者)중 1인’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기념관의 명확한 재정립이 아쉬운 대목이다.
전시실은 맨 왼쪽 제1전시실 19세기 조선의 자각하는 농민들, 제2전시실 체험공간, 맨 오른쪽 제3전시실은 어린이 전시실, 작은 영상실도 있다. 2층 전시실에는 동학혁명 과정과 전라도 전주감영의 함락까지의 자료들, 관군과 동학농민군 마네킹이 있다.
철종 5년(1894) 2월 15일(음력 정월 10일) 새벽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접주(接主) 전봉준이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봉기한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이 자기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운다며 비용 1000량을 농민들에게 부담시키고, 만석보를 만들면서 노역을 한 농민들에게는 수세를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번복하고 징세한 것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동고리에서 고부향교의 장의(掌議)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난 전봉준의 초명은 명숙(明淑)이었는데, 그는 키가 작고 단단해서 ‘녹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런데, 모친상을 당한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부조금까지 강제로 받자 전창혁이 항의에 나섰다가 민란의 주모자로 몰려 곤장을 맞고,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이에 분노한 전봉준은 친구 장익서, 김도삼, 태인 접주 최경선과 연합하여 동학교도 1000여 명을 이끌고 만석보를 부셔버리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빼앗은 세곡을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는데, 조병갑은 전주감영으로 도망했다.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파면하고 전라도 장흥부사 이용태를 조사반장으로 임명했다. 이용태는 조병갑을 한양으로 압송하면서 동학농민군에게는 폭동을 선처하겠다고 하여 농민들이 해산했지만, 그는 민란 발생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전가했다.
3월 22일 전봉준은 손화중·김개남 등과 김제 백산에서 8천여 명을 모아놓고 제폭구민(除暴救民), 반봉건을 구호로 내걸고 봉기했다. 이용태의 미숙한 사건처리가 동학농민군들로 하여금 조정 전체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증폭된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4월 7일 황토현 전투에서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과 보부상 2300여 명을 물리친 뒤 사기가 충천했고, 획득한 조총 600여 정으로 전투력도 크게 향상되어 고부·정읍은 물론 멀리 함평·나주까지 점령했다. 5월31일에는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성에 입성했다.
1860년 사회혼란이 청·일 등 외국세력의 침투와 천주교 등 서양문물의 영향 때문이라고 믿고, 유·불·선의 교리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며(人乃天),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며 새로운 종교를 창설한 경상도 경주출신 최제우(1824~1864)가 포교에 나서자 순식간에 수많은 신도들이 그를 따랐다. 최제우는 서학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동학이라 이름 지었는데, 포교 2년만인 1862년 그는 혹세무민 죄로 체포했다가 제자들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1864년(고종 원년) 다시 체포되어 40살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그의 사상은 조카이자 2대 교주인 최시형(1829~1898)에게 전해졌는데, 최시형은 충청도 보은에 숨어서 최제우의 사상을 정리한 동경대전(東經大全)을 펴냈다. 동경대전은 동학교의 경전이 되었다. 이렇게 최제우가 처형된 후 28년이 지난 1892년 11월 최시형은 신도들과 함께 전라도 삼례에 집결하여 포교의 자유와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고, 한양에 올라가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이것은 동학교가 전국적으로 포(包)→ 접(接)→ 도접(都接)→ 교주(敎主)등 전국적인 교단조직을 완료하여 공개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배경을 의미한다.
아무튼 전주성에서 정부와 화의가 이루어진 동학농민군은 6월 10일 모두 해산했다. 그리고 동학지휘자들은 전라도 53군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수령들의 치안유지에 협력했다. 전봉준은 전주감영에서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에서 전라좌도의 행정을 도왔다.
그러자 삼남지방에 동학 세력이 더욱 급속도로 확대되니, 불안을 느낀 정부는 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청·일 양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외세배격을 내세우며 2차 봉기에 나섰다. 이때는 전봉준이 지휘하는 호남군 10만 명 이외에 1차 봉기 때에는 반대했던 손병희의 호서군 6만 명까지 참가한 대규모 세력으로 이들은 충청도감영이 있는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을 시도했다. 공주가 무너지면 한양은 일사천리여서 관군과 일본군은 공주 함락을 막기 위하여 우금치에 최후의 방어선을 폈다.
1894년 11월 3일부터 7일 동안 40~50여 회에 걸쳐 벌인 우금치전투에서 결국 동학군이 패하고 전라도 전주로 퇴각했다. 전봉준은 11월 25일 김제 원평에서, 27일 태인, 28일 금구에서 다시 궐기했으나 연패하고, 순창에 숨어 있다가 12월 18일 한신현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여론의 악화를 고려하여 대구로 이송하여 이듬해 3월 29일 처형했다. 그의 나이 41살이었다. 당시 조정은 동학을 사교(邪敎)로 매도하고, 그 교도들을 동비(東匪)·동도(東徒)·비도(匪徒) 등으로 불렀지만,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학계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통일된 용어조차 정립하지 못하고 동학란, 동학농민봉기,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부르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외형적으로는 실패한 폭동이지만, 우리 역사상 최초로 반봉건·반외세를 주장하며 근대사회로 변화를 추구한 시민혁명으로서 이후 한말의 항일 의병, 일제강점기의 3·1운동, 해방 후 4·19혁명으로 이어진 기폭제가 되었다. 그의 고향에는 생가를 복원하고, 동상도 세웠다. 심각한 경기침체 현실에서 중국, 미국 그리고 일본 사이에 낀 한국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첫댓글 저와 같이 활동하시는 작가님이 쓴글이
신문에 기재되어 올려 봅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전효남님 전봉준장군에 관심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