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위(東魏)의 고양태수 가사협이 530〜550년 경에 편찬한 종합 농업서적인 [제민요술] 제 9권에는 밀가루나 쌀가루에 꿀, 엿기름 등을 섞어 기름에 지지거나 튀기는 과자 만드는 법이 등장한다. 북중국에서 시행된 과자 만드는 방법은 고구려에도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645년 고구려 백암성이 당나라에 항복했을 때, 고구려의 노인과 승려가 당나라 임금에게 이락, 곤포, 미병(米餠), 무이고 등을 바쳤다는 [책부원귀]의 기록이 있다. 본래 쌀·기장·조·콩 등으로 만든 떡은 이(餌), 밀가루로 만든 것은 병(餠)으로 표시했으므로, 여기서 미병은 쌀로 만든 과자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역사에서 과자를 널리 먹게 된 시기는 7세기 이후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조리용 도구로 철냄비가 등장하면서 튀긴 음식이 발전하게 되어 당과자(唐菓子)가 만들어졌다. 이때 일본에서는 당과자 8종(매자, 단희, 도자, 갈호, 계심, 점제, 퇴자, 필라), 과병(果餠-환병, 부주,결과, 엽두, 색병, 분숙, 흔둔, 담모, 박탁, 어형, 춘병, 병향, 거여, 전병) 14종이 등장했다. 일본보다 당나라와 교류가 더 활발했던 신라에서도 이런 과자들을 먹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발전한 과자로는 유밀과(油蜜果)가 있다.
고려의 유밀과
고려 시대에는 찹쌀가루로 만든 유밀과가 인기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157년 의종 임금이 사찰에서 유밀과를 구한 바가 있다. 차문화를 적극 발전시킨 사찰에서는 차와 함께 먹는 과자를 직접 만들었던 것이다. 차문화가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퍼지면서 유밀과도 함께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 팔관회 등 국가적 행사는 물론 임금의 탄생일 등 연회에 유밀과를 중심으로 한 다과상을 차려놓곤 했다.
1296년 충렬왕은 세자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갈 때에 유밀과를 가져가서 잔치에 내놓았는데, 그 맛이 입 속에서 살살 녹을 듯하다는 평을 들으며 몽골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의 유밀과는 원나라에 고려병(高麗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밀과는 기름과 엿기름 또는 꿀을 이용한 기호식품이었다. 또한 왕이 행차할 때 고을이나 절에서 진상품으로 올리기도 했던 고급 제품이었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끊임없이 유밀과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다. [고려사] 형법금령에는 유밀과를 만드느라 곡물, 꿀, 기름 등을 허비함으로써 물가가 오르고 민생이 말이 아니므로, 유밀과의 제조를 금지하고 나무열매를 쓰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유밀과는 고려시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연회상의 단골 메뉴, 과자
조선 시대 임금들은 다양한 과자를 즐겼다. 임금님은 하루에 죽수라, 조수라, 주다소반과, 석수라, 야다소반과 등 5번 음식을 드시는데, 그 중 주다소반과(晝茶小盤果)에는 2종류의 과일 외에 강정, 정과, 조란, 율란, 강과, 당, 병 등 6종류의 과자를 올렸다. 조선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의 기록을 살피면 접대상에 과일, 약과, 다식, 그리고 당과자에서 유래한 튀김 종류의 과자를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궁중에서뿐만 아니라, 양반집에서도 약과와 다식 등의 유밀과와 강정류를 먹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잔칫상에는 이들을 높이 괴어 올렸다. 특히 과자 제조의 전문기술을 가진 사람과 고임새가 빼어난 사람들이 초빙되어 그 일을 담당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궁중연회상에는 24가지의 한과류를 모두 1자8치의 높이로 고여 올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과자는 연회상에 올라가는 전체 음식의 반을 차지하는 음식으로 성장했고, 민가에서도 혼례, 제사, 연회 때 상차림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각광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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