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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있어야 합니다!
참고말씀: 출33:11; 왕상19:21; 마10:16; 21:1-11; 막11:2; 눅19:32,33; 엡6:1-4; 딤전1:1,2
읽을말씀: 마21:6-9
주제말씀: 마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첫째, 우리는 함께 매여 있는 관계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마21:2)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는 어떤 관계로 표현될 수 있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함께 매여 있는 관계”로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뱃바게의 맞은편 마을에 나귀와 그 나귀 새끼가 함께 매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마21:2)
사실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도 함께 매여 있습니다. 무엇으로 매여 있습니까? 교사와 학생의 경우는 같은 반으로 묶여 있으며, 부모와 자녀는 한 가정으로 묶여 있습니다. 언제까지 묶여 있습니까? 학생의 경우는 졸업해서 상급 부서로 진급(進級)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갈 때까지이므로, 그 때까지는 꼭 함께 매여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독립해서 스스로 가정을 이룰 때까지 부모에게 매여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누가 이 둘을 함께 묶어 두었습니까? 얼핏 보면 사람이 결정한 것 같아도, 실상은 하나님이 일정기간 우리를 교사와 학생 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묶어 두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11)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들었더라.”(왕상19:21) 바울과 디모데처럼 말입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딤전1:1,2)
마찬가지로 자녀가 우연히 어떤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것 같아도,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 깊으신 경륜에 따라서 부모와 자녀를 한 가정으로 묶어놓으신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그러니 함께 매여 있는 동안에는 무슨 생각을 말아야 합니까? 이 같은 매임을 속박(束縛)이나 구속(拘束)으로 여기려는 생각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이것은 속박이나 구속이 아니라 보호와 양육, 훈련 등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것을 무엇처럼 여겨야 합니까? 안전벨트나 안전 고리, 안전로프 등입니다. 만일의 경우 각종 위험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고 붙들어주기 위함입니다.
알다시피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이리의 소굴 같은 곳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10:16 상) 즉 각종 이단(異端)이나 사이비(似而非)를 비롯해서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은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달성된다는 ‘쾌락주의’(快樂主義), 종교적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 정신적ㆍ육체적인 욕망 및 세속의 명예나 이익을 억제해야 한다는 ‘금욕주의’(禁慾主義), 복을 비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복주의신앙’(祈福主義信仰), 내적인 직관이나 영적인 체험을 통해 무엇이든지 직접적으로 체험하려는 ‘신비주의신앙’(神秘主義信仰), 이성과 지성을 우위로 해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해석하려는 ‘자유주의신학’(自由主義神學),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 인간의 기원을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진화에 두는 ‘진화론’(進化論, theory of evolution), 세계와 인생에는 아무 가치가 없으며, 개선이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염세주의’(厭世主義)나 ‘허무주의’(虛無主義),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無神論, atheism), 세상의 것은 다 더럽고 교회의 일만 깨끗하다는 ‘성속이원론’(聖俗二元論), 돈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는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나 돈이 신이 되는 ‘맘몬이즘’(Mammonism), 복음보다 율법을 더 중시하는 ‘율법주의 신앙’(律法主義信仰, Legalism),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부정하는 ‘동성애’(同性愛) 등 위험요소들로 가득한 정글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지금 어떻습니까? 교사와 학생 또는 부모와 자녀는 “함께 매여 있는 관계”임을 깨닫고, 매여 있는 동안에 교사(부모)는 주의 교훈과 훈계로써 학생(자녀)을 잘 양육하고,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학생(자녀)는 교사(부모)에게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하고 있습니까?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엡6:1 상)
둘째, 우리는 곁에서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입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마21:6,7)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는 또 어떤 관계로 설명될 수 있습니까? “곁에서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입니다. 어째서입니까? 학생(또는 자녀)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가장 가까이에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되리니, 풀어서 당신에게로 끌어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마21:2)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지시하신 대로 가서 “주가 쓰시겠다”고 말할 때, 누가 그 곁에서 함께 들었겠습니까? 어미 나귀입니다.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눅19:32,33)
이로 보건대, 교사나 부모의 최고의 기쁨의 순간은 언제이겠습니까? 우리 반 학생이, 내 자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그 곁에서 목격하고 마음껏 축하해줄 수 있는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모든 교사나 부모에게 속히 이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축하해주는 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학생(또는 자녀)이 그 부르심을 완수할 때까지 옆에서 동행해주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어린 나귀만 끌고 왔습니까? 아닙니다. 어미 나귀도 함께 끌고 왔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7절 상) 어째서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6절)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왜 나귀와 나귀 새끼 둘 다 풀어오라고 하셨을까요? 우리는 이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부르심(Calling)은 나귀 새끼가 받은 것이지만, 그 나귀 새끼가 그 부르심을 완수하기까지는 어미 나귀가 곁에서 함께 해주고 응원, 지지해주어야 한다는 암묵적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요? 즉 나귀 새끼의 런닝메이트(running mate)가 되라는 그런 메시지 말입니다.
사실 나귀 새끼는 지금까지 아무도 태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들어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막11:2) 그러기에 이 같은 부르심이 처음에는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내 안정감을 찾았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어미 나귀가 자기 곁에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긴장되고 어려울 때 누구부터 찾게 되고 또 마땅히 누구부터 찾아야 합니까? 담임교사입니다. 담임교사란 항상 그런 존재, 곧 곁에 있어만 줘도 든든하고 힘이 되는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경우도 어렵고 힘들 때 누구부터 찾게 되고 또 마땅히 찾아야 합니까? 부모입니다. 부모와 자녀는 언제나 곁에서 서로를 응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교사나 부모만 응원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학생이나 자녀도 그 교사 내지는 부모를 응원해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학생은 담임교사가 앞으로도 교사의 사명을 계속 잘 감당하도록 응원해주어야 하고, 자녀는 자신의 부모가 앞으로도 계속 부모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지지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는 곁에서 서로를 응원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언제나 곁에서 서로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며 끝까지 동행해주고 있습니까? 어미 나귀가 어린 나귀 곁에서 묵묵히 동행해주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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