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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34편) *
* 개혁의 좌절, *
아까운 광해군
전쟁이 만든 왕세자 선조(14대)의 뒤를 이은 광해군 이혼 은 조선 왕조 사상 연산군에 이어 쿠데타로 실각한 두 번째 왕이다.
1592년 조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조선에는 선조 다음의 후계자가 없었다.
당시 선조에게는 왕비인 의인왕후가 있었지만 그 사이에 자식이 없었고,
후궁 공빈 김씨 와의 사이에서 장남 임해군과 둘째 광해군을 두었으며, 서자만 무려 13명을 두었다.
그 중 둘째인 광해군은 자그마치 16년 간이나 세자로 있다가 선조가 찹쌀밥을 먹고 덜컥 죽는 바람에 겨우 왕위를 계승했다
(광해군)
원래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어야 할 첫째 아들 임해군은 조일전쟁 당시
순화군과 함께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에 갔었다
그러나 임해군은 함경도 백성들을 비롯해 국경인, 국세필 등에게 포박되어 순화군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져(회령의 변) 수감 되었다가 여러차례 석방 협상 끝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에게 얼마나 찌질하고 못되게 굴었으면 백성들이 왕자들을 팔아 넘기누? ㅉㅉㅉ..)
잠깐 여기서..멈칫!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는 듯 하다 백성들은 위정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단지 내 배를 채워주는 자가 성군인 것이다
하여 왕자들을 왜군에게 넘겨준 백성들을 보며, 그들의 행동에 대해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신지?
임해군은 본래 성질이 포악한 데다가 포로가 되었던 정신적인 압박으로 인해 포악함은 더욱 심해져 길거리를 헤매었고, 민가에 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상민을 구타하는 행패를 부렸다
심지어 마음에 드는 여자를 빼앗기 위해 사람을 시켜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할 정도 였으니.
두 말하면 잔소리!
인간 말종인 셈이었다
또한 선조의 총애를 받던 순빈 김씨의 아들 순화군은 임해군 못지 않게 뻑하면 사람을 패 죽이는 패악을 일삼다가 요절 했다.
순화군이 죽인 사람이 수십 명인데도 선조는 그를 싸고 돌았으니 그 아비에 그 아들인 것이었다.
*요대목에서 잠깐 순화군 에대하여 ^^*
선조의 서자이자 임해군, 광해군의 동생인 순화군(順和君, 1580~1607)은 조선 왕실 역사에서 매우 복합적이고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이름은 이보(李𤣰)이며, 어머니는 순빈 김씨입니다.
그에 대한 주요 역사적 사실을 정리해 드립니다.
임진왜란과 국경인에서의 포로 생활
임진왜란 당시 순화군은 형인 임해군과 함께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로 파견되었습니다.
하지만 회령에서 국경인 등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지면서 왕자로서는 이례적으로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약 1년 뒤 강화 협상을 통해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격란(激難)'과 문제적 행보*
실록에 기록된 순화군의 성품은 매우 거칠고 포악했다고 전해집니다.
포로 생활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혹은 타고난 성정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선조조차 제어하기 힘들 정도의 기행을 일삼았습니다.
민가 침탈: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거나 사사로이 형벌을 가해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잦았습니다.
*살인 사건*
궁녀를 살해하거나 대궐 밖에서 민간인을 죽이는 등 수많은 악행이 보고되었습니다.
*처벌의 한계*
선조는 아들의 잘못을 꾸짖으면서도 차마 극형에 처하지 못하고 유배를 보내거나 가택 연금(위리안치)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요절과 사후*
순화군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후 사후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습니다.
사후에도 그의 악행은 조정에서 큰 논란이 되었으며,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패륜 왕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되는 불명예를 안았습니다.(요기까지ㅎㅎ)
(내 그럴줄 알았다니께~)1592년 4월 조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 왕조는 살아남느냐 무너지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게 되었다
이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가면서 전쟁의 지휘권을 왕세자에게 넘기려고 했다.
이른바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가 발생한 것이었다.
중국에 청병하는 것은 선군을 위해 주선하는 일을 내 어찌 감히 심신을 다 바쳐 만에 하나라도 도움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그 나머지의 기무는 분조에서 처리하도록 하라.
회복의 희망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 선조실록 *
결국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광해군은 18세가 되고 나서야 왕세자의 자리를 받아내 피난가는 아버지를 대신해 의병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드디어 7년간의 참혹한 전쟁이 끝났다
선조 입장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련함 보다는 피난 떠난 왕으로서 느끼는 창피함이 더 컸을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것이 노량해전 에서 이순신이 사망했고,
같은 해 류성룡은 조일전쟁의 책임을 지고 고향에 돌아갔으며,
1599년 권율 역시 노환으로 사망했다
즉 전쟁의 영웅들이 조정에서 없어진 것이다
단 명! 선조의 가장 큰 라이벌로 자란 광해군만 빼고..
* 위협받는 후계자의 자리 *
전쟁을 통해 광해군은 다음 왕으로서의 자질을 채워 나가고 있었고,
백성의 지지도 높았다.
이런 광해군이 선조는 과연 예뻐보였을까?
안 그래도 후궁 소생을 세자로 삼아 찝찝한데 정치적 라이벌로 성장했으니 자신의 입지가 불안한 선조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아들이 아닌 정치적 라이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광해군 인생에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조일전쟁 후 왕비였던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계를 밝히던 51세의 아버지 선조가 19세의 어린 왕비를 맞이하니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였다
광해군보다 9세나 어렸던 인목왕후는 1606년 떡하니 아들을 낳았고 선조는 그렇게 바라던 적장자를 55세가 되어서야 얻었다
(그 나이가 되어 자식을 얻다니 그 능력만 좋음? ㅎㅎ)
도망간 아버지를 대신해 모진 전쟁을 겪어낸 광해군 입장에서는 하루 아침에 갓난 아이에게 왕세자 자리를 뺏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상실감이 컸을까?
안 그래도 선조가 광해군을 떫게 보던 와중에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의 눈치를 보면서 거기에 빌붙으려는 신료들이 줄을 섰으니 이 소인배들이 소북파 였다
이때 찬밥 직전이 된 광해군의 편이 되어 준 인물들이 대북파인 정인홍, 이이첨, 허균 등이었다
* 광해군의 즉위와 개혁 *
사림의 원로이자 조일전쟁 때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북인의 영수 정인홍은 광해군 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선조에게 상소했다가 귀양을 갔으며,
선조는 광해군에게 '세자'라는 명목으로 문안도 오지 말라고 구박을 주었다
그런데 정인홍을 유배 보낸 직후인 1608년 2월 1일 선조가 덜컥 죽었다
1586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자그마치 41년만이었다.
하여간 엄청 오래 왕 노릇을 해 먹었다.
선조가 죽은 다음 날 25세의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즉위를 지지했고, 34세의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왕세자가 된지 16년 만의 일 이었다
당시 서모인 인목대비는 광해군 보다 아홉살이나 어렸고,
적자인 영창대군은 겨우 3살 이었으니 인목대비가 아무리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떫었어도 대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사실 소북의 영수였던 영의정 유영경은 선조가 죽으면서 광해군에게 내린 선위교서를 공포하지 않고 감추었다가 발각되었고 그 순간 죽음이 찾아왔다.
이래서 소북은 확실히 몰락하고 말았다.
광해군은 험난한 전쟁을 온 몸 으로 겪은 왕이라 백성들의 궁핍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황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광해군 조정은 경기도 일대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전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 힘을 기울여 신증동국 여지승람' '국조보감' 등을 다시 편찬했으며,
역사상 최고의 의서인 허준의 '동의보감'이 간행되었다
또한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전란으로 황폐화된 농지를 다시 측량하고, 경작지를 확대하여 국가 재원을 확충했다
한편 대륙에서는 여진이 부상하고 명이 쇠퇴하는 조짐이 확연해지자 광해군과 북인정권은 과거의 은원을 묻어둔 채 일본과 수교 했다
수교조건은 선릉 (성종의 묘)과
정릉 (중종의 묘) 을 훼손한 범인의 인도 요청이었고 전쟁중 범인이 어느 놈인지 알리 없는 일본 조정이 아무 사형수나 몇 명을 넘기자 그들이 주범이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처형하고 수교를 단행했다
또 광해군이 명.청 교체기에 양대국의 눈치를 살피면서 처신한 외교 솜씨도 하수의 솜씨가 아니었다
그 덕분에 조선은 국제분쟁의 회오리에서 한 발짝 비켜날 수 있게 되었다
광해군은 인륜을 저버리고 황음무도하였다 하여 조선조 내내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진 인물 이다
그러나 근자에 들어서 광해군이 재평가되고 있다구습을 타파하고 피폐된 국토를 재건하기 위해 내정을 충실히 했으며,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하려 했던,
아주 괜찮은 왕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35편)
개혁의 좌절, 아까운 광해군
조일전쟁 극복의 주역북인 조일전쟁 후 조선은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7년에 걸친 조일전쟁의 후유증은 대단히 심각했다
인구는 거의 절반으로 감소했고, 경작지는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경상도는 경작하는 땅이 겨우 전 토지의 6분의 1에 불과할 정도였다
거기에다 기근, 전염병이 창궐해 백성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선이 해야 할일은 새로운 국제 역학 관계를 면밀히 검토하여 전쟁을 피하는 것이 첫째였고,
그 다음에는 정쟁(政爭)을 중단하고 모든 국력을 국가 재건에 쏟아 부어야 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광해군이 즉위했다.
당쟁사에서 광해군때에 정권을 잡았던 북인(北人)에 대한 언급은 찾아 보기가 어려운데, 이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성공한 서인들에 의해 북인들이 모조리 처형되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북인의 인물 중의 하나인 이이첨 이 대표적인 간신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지만,
이는 서인들이 1623년 인조반정 으로 정권을 잡은 후 이이첨과 그의 세 아들을 참형에 처한 다음 간신이라는 꼬리표를 만들어 붙인 것이다(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것 이라네~ 쩝쩝)
요대목에서 이이첨에 대하여 쪼매 알아보갑시다 ^^
* 이이첨 *
이이첨(1560~1623)은 조선 중기 광해군 시대를 상징하는 파란만장한 인물이자, 북인(대북) 세력의 영수였습니다.
뛰어난 문장력과 지략을 가졌으나, 극단적인 정치 행보로 인해 오늘날 역사 속에서 ‘간신’ 혹은 ‘풍운아’라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을 수행하며 세자 옹립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위협을 제거하며 광해군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동반자로 부상했습니다.
이이첨의 이름이 역사에 강렬하게 각인된 이유는 폐모살제 때문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가두는 폐비 논의를 주도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던 사대부들에게 큰 반발을 샀고, 결국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북' 세력을 이끌며 인사권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했습니다.
특히 문장에 능해 광해군의 신임을 독차지했으며, 당시 조정 내에서 그의 권세는 왕을 위협할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도망치다 붙잡혀 결국 처형되었습니다. (요기까지 ^^)
광해군과 북인정권은 각종 정책을 시행 하여 전란 복구에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소수였던 북인들은 광해군이 세자 시절에 있었던 과거사 정리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
정인홍은 북인의 영수였던 조식을 문묘에 종사하려다 실패하자 이언적(서인) 과 이황(동인)의 문묘 종사를 반대해 서인과 동인, 남인까지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대북의 영수 정인홍은 강직한 선비였으나 융통성이 전혀 없는 인물 이었다.(이궁~내 발등 내가 찍기! 유도리라는것 좀 새싹 키우듯 키웠으면 광해군을 살렸을것 아님?)
광해군은 재위 5년에 일어난 '칠서의 옥(七庶의 獄)'을 기화로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 (金悌男)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재위 10년에는 인목 대비(仁穆大妃)까지 폐모시킴 으로써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는 정인홍, 이이첨, 허균, 백대연, 정호 등 대북이 주도했으나, 효(孝)를 최고의 덕으로 여겼던 당시로서는 서인에게 덜미를 잡게 할 온당치 못한 처사였다.
이 사건은 원래 소수였던 대북을 더욱 고립시켰으며, 후에 서인들은 이를 명분삼아 반정을 일으키게 되었다
대북의 사상은 의와 명분을 유난히 강조하고 실천하는 사상이었으므로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강직한
정신이 서인(西人)을 훨씬 능가했다.
그래서 조일전쟁 때도 가장 많은 의병장이 북인(北人)에서 나왔지만,
반면 포용력이 떨어지고 융통성과 임기응변을 몰라 적을 많이 만들어 스스로 고립되는 단점이 있었다.
* 사림(士林)의 분열 *
선조 때 사림파가 훈구파에게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정권을 잡자마자 사림파는 곧바로 분열 되었다
김효원(金孝元)의 이조전랑 임명을 찬성하는 동인과 김효원의 임명을 반대하는 심의겸(沈義謙)을 주축으로 하는 서인으로 분열된 것이 붕당(朋黨)의 시작이었다.
그 당시 잘 나가는 김효원(金孝元)의 임명을 반대한 이유는 윤원형의 사위와 김효원(金孝元)이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었다.(원~이건 웬수 사이도 아닌데..)
동인들은 선조때 일어난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에 연루된 자가 많아 실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세자책봉 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실각했다.
광해군을 밀었던 서인이 탈락하는 과정에서 동인들 중 서인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주장하는 이산해 등 강경파들은 북인이 되었고,
관대한 처벌을 주장하는 류성룡 등은 남인이 되었다.
이 남북 분당은 학통에도 좌우 되었다
북인들은 주로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의 문인인 반면, 남인은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들이었다
남명 조식(曺植)은 벼슬을 거부하고 평생 지방에 머물면서 후학을 기른 실천적 성리학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오건, 정인홍, 김우웅, 최영경, 정구, 곽재우 등이 배출되었다.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로 유명한 화담 서경덕(徐敬德)은 평생 처사로 일관한 학자였으며그는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다음 산림에 은거 하면서 허엽, 박순, 박지화, 서기, 한백겸, 이지함 등을 길러냈다.
이렇게 북인은 현실정치에 깊이 간여하지 않은 파벌이었는데 조일전쟁이 그런 북인들을 정치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뒤도 안 돌아보고 튄 선조와 달리 북인들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쪽빨군 과 정면으로맞섰고 선조는 명분과 실천을 앞세운 북인들을 내세워 난국을 타개 하고자 그들에게 정권을 맡겼다.
북인은 광해군 때 까지 정권을 잡고 있다가 인조 반정이 일어남으로써 서인들에 의해 모조리 처형되어 정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정권을 잡은 서인 중에서도 노론이 조선 멸망 때까지 정치의 주류가 되면서 유심적이고 비실용적인 사조가 만연하여 그것이 조선 쇠퇴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노론은 실사 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무조건 잡학으로 치부하여 천대했으며 그들이 신봉하는 성리학도 케케묵은 교조적인 면만 강조하면서 개혁사상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 바람에 허세와 위선이 판을 치고 무기력하고 안일한 풍조가 나라 전체에 만연하여, 조선은 아무런 대책없이 멸망을 향해 줄달음쳤던 것이다
요대목에서 실사구시란 ?
실사구시는 조선 후기 실학정신의 핵심을 관통하는 사자성어로, 그 의미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한자 풀이
실(實): 열매/실제 실
사(事): 일 사
구(求): 구할 구
시( should/是): 옳을/이 시
직역하면 실제적인 일에서 옳은 것을 구한다 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뜻을 넘어, 학문적 태도를 강조합니다.
막연한 추측이나 낡은 이론에 매달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사실과 증거를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합니다.
당시 조선 사회를 지배하던 성리학의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쟁(예: 예송논쟁 등)에서 벗어나, 실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고자 했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에 의해 독자적인 학문 방법론으로 정립되었습니다.
김정희의 실사구시: 그는 금석학(비를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할 때 단순히 책에 적힌 내용을 믿지 않고, 직접 산에 올라가 비석의 이끼를 닦아내며 글자를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실사구시의 전형입니다.
실학파: 정약용, 박제가, 홍대용 등 실학자들은 이 정신을 바탕으로 농업 기술 혁신, 상업 장려, 서양 과학 기술 수용 등을 주장했습니다.요ㅡ까지)
권력을 거머쥔 인간들은 나라에 대한 걱정은 🐭뿔도 않고 제 새끼, 제 집구석, 제 문중, 제 당파만 어떻게 잘 먹고 잘사나 하는 연구만 했다
그러다 보니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조선은 점점 낙후되어 갔던 것이다.
그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
* 광해군의 취미 - 친국(親鞫) *
광해군의 취미 중 하나가 친국(親鞫)이 있다.
즐긴다 라는 표현 이외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취미이다
친국(親鞫)이란 중죄를 지은 죄인을 추국하는 현장에 왕이 배석하여 직접 추궁하는 것을 말한다
추국하는 과정에서 피와 살이 튀고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처참한 경우가 많은데 고문 때문에 추국(親鞫) 도중에 죄인이 죽는 일도 흔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지간히 강인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앉아서 버티기 힘들다
두 번이나 사화(士禍)를 치른 폭군 연산군도 단 한번도 친국(親鞫)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세종대에는 단 한번의 친국이 있었다고 하는데 광해군 때는 자그마치 210회나 친국(親鞫)이 있었다.
친국 마니아라나 할까?
원~광해군은 친국시 날씨가 춥거나 무더운 것을 가리지 않았고,
국가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도 만사를 제쳐놓고 친국(親鞫)에 임했다.
추국 때마다 왕이 배석하니 백관들은 걱정이 되었고 일이 밀려도 여러 차례 나오지 말라고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친국(親鞫)을 할 때는 의금부 당상들과 3정승, 판서, 언론 3사의 수장들 그리고 전임 대신들까지 모두 나와 왕을 배석해야 했다
그러나 친국(親鞫)이 너무 잦고, 또 그게 뭐 그리 볼 게 있다고 꼬박꼬박 감기에 걸려 콜록콜록 거리면서 나오겠는가
광해군은 대신들이 나오지 않은 날에도 혼자 나와서 친국(親鞫)을 감행했다.
친국 마니아가 된 원인은 무엇일까?
*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36편) *
조선 최고 공평과세 대동법
조선에서는 본래 세금을 크게 3가지 측면에서 나누어 징수했다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세,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
각 지역의 특산품인 공물을 나라에 바치던 세금제도인 공납이 있었다.
이 3가지 중에서 가장 문제가 심했던 것이 바로 공납~
공납은 중앙관청에서 각 지역의 특산물을 조사해 지역별로 내야 할 물건과 양을 정해주면, 각 고을의 수령들이 다시 세금을 내야 할 몫을 정해주던 방식 이었다
즉 붓이 유명한 지역은 붓을,
사과가 유명한 지역은 사과를 내도록 한 것이 공납이고 세금의 납부 기준은 '집집마다' 였다
따라서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 다 각 지역의 특산물로 세금을 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풍토가 변하다 보니, 생산량이 줄거나 그 지역에서 더 이상 나지 않는 물건도 생겨났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자기 앞가림만 살피는 관리들에 의해 잘 헤아려지지 않았다
백성들은 어쩔수 없이 비싼 값을 주고 정해진 물건을 사서 낼 수밖에 없었고
하급 관리와 상인 (대납가) 들이 공물을 구해서 나라에 바치고, 대신 그 비용을 백성들에게 과도하게 물리는 '방납'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 방납의 폐단이 얼마나 심한지
예를 들어보자!
애써 사과 100개를 준비해 갔는데 관리가 받아 주지 않는다
관리가 지정한 대납가(물론 뒷거래가 오고 간)납품하는 사과만 받겠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백성들은 비싼 사과를 사서 납품을 해야 한다
그리고 비싼 사과를 통해 얻은 이익은 대납가와 관리들이 차지한다
실록에 의하면 실물가보다 무려 10배의 이익을 취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먹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이룬~얼마전 계란 파동은 난리도 아닌거였네? 근데 계란값은 예전 가격대로 왜 더 안 내려가는 것이지? 도리도리..)
이렇게 방납의 대가로 백성의 부담을 한층 가중시켰던 것이 바로 공납이었다
광해군이 시행한 개혁정치의 핵심은 '대동법'이었다
대동법은 지역의 특산물 대신 쌀을 내게 하는 세금제도로 '대동'이란 공자가 말하는 이상사회를 말한다!
우리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세금제도라는 뜻이 담겨있다
1608년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에 이은 광해군의 결단으로 경기도 일원에서 처음 시행되었으며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땅을 가진 지주 에게만 쌀로 세금을 거두는 제도 였다
(이원익)
이율곡이 최초로 제안한 대동법(수미법)은 선조 때 시행 하려 했다가 기득권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광해군은 조일전쟁 이후 국토가 반 이상 황폐해져서 농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지자 기득권의 극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동법 시행을 강행 했다
이전까지는 마을의 호수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토지 소유와 관계없이 집만 있으면 대지주나 깡통이나 똑같이 세금을 내야했다.
엄청 불공평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동법의 시행으로 토지의 소유 정도에 따라 차등과세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광해군 만세!)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공평과세가 그간 기득권층의 반발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드디어 광해군 때 시행된 것이다!
어느 사회이건 자신의 작은 이익 때문에 개혁을 원치 않는 썩어 빠진 기득권층이 있다.
( 일전에 방영하는 드라마 '군주'에서 처럼 허♡호 미워할꼬야! ㅠㅠ)
그들은 나라야 망하든 말든 제 이웃이 길에 나앉든 말든 저와 제 자식 배만 부르면 그만인 속물 들이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만 없어져도 세상은 지금보다 몇 배나 살기 좋아질 것이다 ( 흑표개인생각)
공평과세인 대동법은 1608년 시행되기 시작했으나, 처음에는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되었고,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데는 이후 무려 100년이나 걸렸다 .
돈 많은 놈들이 세금을 내지 않던 좋은 세월을 누리다가, 별안간 소득액에 따라 세금을 내게 되니 그들이 부담해야 할 세금액이 엄청 많아졌다!
그러니 반발이 말도 못하게 거셌고 그런 상황 에서 그들과 타협하고 달래가며 시일을 끌다 보니 100년이란 세월이 지나간 것이다
(대동법 시행에 평생을건 김육)
그러나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완전히 실시될 즈음에는 대동법 자체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자신의 땅을 소작하는 농민들에게서 소작세를 거둘 때 아예 자신이 내야 할 대동세까지 얹어서 받았기 때문에 대동법을 시행한 취지가 그냥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뜨그랄~)
* 칠서의 변과 계축옥사 *
1614년 광해군 5년, 서인의 거두인 박순의 서자 박응서와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문장가 서양갑을 비롯한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김경손 등 서자 7명이 역모를 모의하다 체포 되었다
모두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이 서자들은 자신들의 뜻을 죽을 때까지 펼 수 없음을 깨닫고, 현 세상을 뒤엎어 새로운 세상 으로 바꾸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모의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과 동래를 왕래하던 은장수를 문경새재에서 살해하면서 적발되었다
거기에 이이첨이 끼어들어 별것 아닌 사건을 대규모 옥사로부풀렸다.
칠서들의 역모에 영창대군과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인목 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개입했다는 혐의가 드러나면서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이 칠서의 변이다
칠서사건 후 김제남은 능지처사 되었고, 영창대군도 폐서인이 되어 강화에 유배 되었다가 다음 해에 살해되었다
이이첨의 지시를 받은 감시인이 영창대군을 방에 가둔 채 불을 계속 때서 쪄죽게 만들었다고 한다(왜그랬어유?)
광해군 10년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하고(당연히 저주했겠지... 아버지와 아들을 죽인 불구대천지 원수였을테니..)
의인왕후까지 저주했다 하여 언론 3사가 집중 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거기다 역적의 집안이 어떻게 일국의 국모 자리를 맡을 수 있느냐며 명분을 만들어 들이대자 결국 대비는 폐비가 되어 서궁에 갇히고 말았는데
후에 이 처사가 광해군의 자충수가 되었다
당시는 이미 이항복, 이원익, 심회수, 기자헌 등의 온건파들이 멀리 귀양가 있을 때라 일이 잘못 돌아가는 것을 제지할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