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녀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문학예술』 24호, 1957.4)
[작품해설]
1945년 처음 모더니스트로 출발한 김수영은 도시 문명의 비판과 신기성(新奇性), 암담하고 불안한 시대 사조 등을 표현하였으나, 당시의 유행성이나 시사성(時事性)을 극복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1950년대부터는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겪어야 했더 지성(知性)의 방황과 고민을 육성(肉聲)으로 읊었다. 특히 「병풍」은 당시 모더니스트들의 유행적인 시사성, 관념성, 생경성(生硬性)을 극복, 지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평가받은 바 있었다. 4.19 이후 강렬한 현실 의식과 저항 정신에 뿌리박은 그의 새로운 시정(詩情)의 탐구는 여러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前衛的)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시는 눈을 소재로 하여 ‘순수한 생명 – 눈’과 ‘불순한 일상성(日常性)- 기침⸱가래’라는 대립적 관념을 지적(知的)으로 탐구하고 있는 주지주의적인 작품이다. 이와 함께 현실에 대한 울분의 토로와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내포하는 현실주의 특징도 동시에 지닌다. 순수 공간인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눈은 비순수 공간인 땅에 떨어진 다음에도 ‘살아 있다’고 외친다. 여기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의 본질적 현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눈의 순수성을 통해 불순하고 타락한 일상적 상황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라는 구절을 통해서 ‘눈[雪]’은 불의를 보고 감지 못하는 정의의 ‘눈(眼)’이라는 또 다른 함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때의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는 시적 화자 자신의 내면의 결의를 드러내 주는 매개물이 되며, 기침을 하고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를 뱉는 행위는 불의에 대한 저항의 외침을 표상한다. 이처럼 이 시는 무채색인 눈과 유채색인 기침과 가래를 대립시켜 눈[雪]의 순결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새벽까지 살아 있는’ 눈[眼]을 통하여 정의를 향한 의지를 제시한다. 이렇게 김수영은 차츰 현실 의식과 저항 정신의 시 세계를 구축해 간다.
[작가소개]
김수영(金洙暎)
1921년 서울 출생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토쿄(東京)상대 전문부에 입학했다가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
1947년 『예술부락』에서 시 「묘정(廟廷)의 노래」를 발표하여 등단
1958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시집 『달나라의 장난』 발간
1968년 사망
1981년 김수영문학상 제정
시집 : 『새로운 도시의 시민들의 합창』(공저, 1949), 『달나라의 장난』(1959), 『거대한 뿌리』(1974),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9), 『김수영전집』(1981),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1984),『사람의 변주곡』(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