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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묵상글 ( 사순 제3주일. - 이제부터는 이 사랑을! , - 예수님의 초대에 응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 4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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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08 05:40
- 이제부터는 이 사랑을!
저는 오늘 주제를 ‘생명인 물인 사랑’으로 잡아봤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생명의 물을 마셔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생명의 물인 사랑이 필요하고,
저세상에서도 영원히 살게 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물인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도 저세상에서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 물을 마셔야지 살 수 있고,
마시기 위해서는 목이 말라야 하고 타는 듯이 목이 말라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누가 더 목말라 할까요?
주님과 우물가의 여인 사이에 누가 더 목말라 합니까?
누가 더 사랑합니까?
누가 더 사랑이 필요합니까?
필요하긴 우물가의 여인이 더 필요하고,
그래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 다섯 남자나 사랑했습니다.
사랑이 필요했지만 주님을 사랑한 것은 아니라 남자를 사랑한 것이고,
사랑했지만 남자가 충족해주지 못하였기에 다섯이나 사랑한 것입니다.
그때 마침 주님께서 여인에게 나타나셨지만
여인이 아직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그래서 주님과 우물가의 여인 사이에서 더 사랑한 것은 주님이었으며,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고 목말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목말라 하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목말라 합니다.
주님과 우물가의 여인 사이처럼 주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길 주님께서 더 목말라 하시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길 우리가 더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먼저 물을 달라고 간절히 청하시며
우리도 당신을 목말라 하도록 수작을 부리십니다.
그렇습니다.
물을 달라고 하심은 우리의 사랑에 대한 간청이요
우리의 목마름을 일깨우려는 주님의 수작입니다.
네가 다섯이나 사랑했는데도 여전히 목마르지 않으냐?
너는 이제 목마르지 않을 사랑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수작을 통해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일깨우시면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계속 목말랐구나!
그러니 이제는 목마르지 않을 사랑을 찾아야겠구나!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사랑이 주님이구나!
이것을 깨달아야 하고 이제부터는
다른 사랑이 아니라 이 사랑을 목말라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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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예수님의 초대에 응한 사마리아 여인처럼....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꾼이라도 이 이야기를 자신이 쓴 것이라 말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사랑받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제 우리가 들었던 탕자 혹은 탕부의 비유와 같이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처음에는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이해를 도와주시면서 더 깊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가는 방식은 참으로 아름답고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한 번 이 이야기의 장면을 우리 마음의 눈으로 드려다 볼까요?
한낮이었습니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사람들은 물론 동물과 새들까지도 모두 지쳐 늘어져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런 한낮에 물을 길으러 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이 여인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어떤 식으로든 소외되어 있었떤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에 오직 예수님만이 물을 마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당시의 현실을 감안할 때 그들 사이에는 대화가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랍비는 공공장소에서 여자와 말을 할 수 없었고, 아주 엄격한 랍비들은 자기 아내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여인은 사마리아인이었고, 예수님은 유다인이셨습니다. 두 집단 사이에는 오랜 적대의 역사가 있었고, 이 여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놀라운 대화가 시작될 무대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묵을 깨시며 단순히 물을 달라는 요청으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곧 여인에게 "살아있는 물(생수)"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생수"란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을 의미했고,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쓰신 그 단어, 즉 "생수"를 그렇게 이해한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그것을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끄십니다. 물은 분명 생명을 의미합니다—자연적 생명은 물론이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더 깊이 확장하여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예레미야서의 한 구절을 염두에 두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하느님은 "생수의 원천"으로 묘사되며,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과 대조됩니다(2,13). 우리 인간과는 다른 자비의 원천, 용서의 원천, 사랑의 원천으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당신이 줄 수 있는 물은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샘물은 끊임없이 솟아나는 신선한 샘물이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삶"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생존에 만족하고, 그 다음에는 편리함에 안주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매일 이 우물에 오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주는 "흐르는 물" 정도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마르지 않는 살아 있는 생명의 근원을 주시려 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 여인의 마음속 깊은 생각을 드러내 주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이 사마리아 여인의 실용적인 마음을 꿰뚫으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전까지 이 여인은 단순히 수다스럽고 호기심 많은 모습이었을 뿐, 개인적으로 깊이 관여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의 삶에는 많은 혼란이 있었지만, 그것이 절박한 탐구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종교 문제에 대해 개방적이고 관용적이었으며,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의 신앙을 바리사이보다 훨씬 더 객관적으로 논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알아맞히신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기며 이런 예수님과 대화를 이어가는 사마리아 여인의 지식을 한 번 잘 들여다 봅시다. 그러면 이 여인이 사마리아인과 유다인의 종교 전통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또 메시아, 즉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마저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믿음에 열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천천히 이 여인의 영을 아주 깊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이 아직 자각하지 못한 영혼의 갈증을 달래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갈증을 경험하고 있는가요?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2). 이 시편은 갈망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우리의 모든 기도는 이런 갈망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어제도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이 갈망이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갈망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런 느낌을 진실하게 느낄 수 있을까요?
광고 회사들은 매일 우리의 실제 필요가 아닌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온갖 기지를 발휘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제품 없이도, 어쩌면 더 잘 살 수 있는데도 그들은 어떤 경우 터무니 없는 과장 광고를 통해 그 제품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게 만들어 결국은 그 제품을 사게끔 만듭니다. 이런 광고 때문에 속은 경우가 여러분도 있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이 갈망 없이도 잘 살 수 있을까요? 신앙이 없이도, 아니 절대적이고 무한한 사랑의 근원의 존재, 하느님이 우리 삶에 없어도 되는 삶이 우리의 기본 상태일까요?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1) 이 갈망은 우리 존재의 일부로서 저절로 솟아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욕망은 모방적이며, 곧 다른 사람을 따라 배우는 것이라는 철학자의 주장에 동의해야 할까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욕망은 어떨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귀소 본능을 가지고 있을까요? — 마치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근원지로 되돌아가는 본능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향한 자연스러운 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욕망을 실제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리와 분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으며,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 돌아가려는 욕망의 뿌리라고 신앙은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비난의 기색 하나 없이 말씀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이웃들에게 열정적으로 "그분이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 맞혔습니다."라고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비난이 있었다면 이 여인은 더 깊은 숨을 곳으로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난이 없는 사랑의 현존 안에서 이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혼란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었고, 그 혼란 너머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마리아 여인은 마침내 근원(하느님)까지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영적인 사랑의 기치를 누가 따라 잡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매 순간 우리 곁으로 다가와, 아니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오시어, 메마른 영혼을 지닌 우리에게 대화를 청해 오십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한 번 잘 살펴 보십시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물을 얻어 드셨습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진정하고 영원한 생명의 샘으로 초대해 주시고 그 물을 마시게 해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인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분의 일, 즉 아버지의 일이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버지께로 모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이 사마리아 여인의 고을 사람들이 예수님과 대화를 마친 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우리 삶을 되돌아봅시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나의 체험이 되었나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직접 경험해야만 그것이 마침내 '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대화를 청해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여 이 대화에 들어서기를 바란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죄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또 우리의 자격이나 가치에는 아무 상관도 하지 않으신 채 우리를 우리 존재의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깊이 숙고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잘잘못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즉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해 주시는 것, 또 해 주실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 즉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여정에 있어 가장 큰 관건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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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개인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회복의 은총을 실천하는 길 - 아홉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치유와 화해의 정의를 살아가는 법을 배워 보십시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하느님의 회복하는 정의
개인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회복의 은총을 실천하는 길
2026년 3월 7일 토요일
작가이자 활동가인 아드리엔 메리 브라운(adrienne maree brown)은, 우리가 하느님의 회복적 정의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상처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는 개인적 회복력과 맞닿아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공동체 안에서 정의와 화해를 이루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삶과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그 은총을 실천해야 합니다:
회복력은 우리가 상처로부터 다시 일어서는 길을 이해하는 방식이며, 다시 살아나는 은총의 힘입니다. 인간의 현실 안에는 트라우마와 억압이 자리하고 있지만, 고통의 전과 중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온전함과 아름다움이 존재합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마야 안젤루(Maya Angelou)가 "침범할 수 없는 장소"라 부른 곳이 있으며, 언제든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상처보다 더 큰 존재입니다. - 개인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도, 세대를 이어서도, 조상들의 삶 속에서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벌하도록 사회화되고, 훈련받으며, 격려받고, 허락을 받습니다. 대부분의 삶에서 벌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시작됩니다. "타임아웃", 체벌, 교내 봉사, 정학, 퇴학, 소년원, 교도소, 독방, 심지어 사형까지… 비록 우리의 정치적 신념이나 의도가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상처를 주거나 우리를 도전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징벌적 행태를 되물림합니다. 이렇게 해서 벌의 악순환은 계속 이어집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당신이 머무는 어떤 자리에서든 벌의 악순환을 끊는 것입니다….
회복은 공동체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치유를 이루는 은총의 행위입니다. 변혁적 정의는 책임을 받아들이고, 관계를 깊게 하며, 경계를 분명히 하고, 더 큰 공동체적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줍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 변혁적 정의를 실천하십시오.
인내와 대화, 중재와 열린 마음, 건강한 경계, 그리고 해로움의 뿌리를 뽑아내는 선택을 하십시오. 사람을 내치거나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관계를 끊어 버리는 방식 대신, 자비와 회복의 길을 택하십시오. 개인적으로 이러한 은총을 살아갈수록,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도 더 큰 책임과 연대를 지지할 수 있게 됩니다.
References
adrienne maree brown, Holding Change: The Way of Emergent Strategy Facilitation and Mediation (AK Press, 2021), 166–167, 171–172.
Image Credit: Jordan Heath, untitled (detail), 2018, photo, New Zealand,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강과 호수가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의 위대한 분수령을 봅니다. -- 정의가 원한 없이 넓게 흘러가며, 우리를 우리의 상처보다 더 큰 사랑 안으로 이끌고,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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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의 장면’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다섯 번이나 결혼하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지만, 결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빈 물동이를 들고 우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한 사마리아 여인과 자신을 내어주어도 결코 다할 수없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샘솟는 물을 들고 우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렇게도 목말랐던 이 여인은 이제 마침내 일곱 번째 남자, 완전한 사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목마른 두 영혼의 만남, 이 아름다운 만남은 곧 ‘십자가에 메달리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드러내 줍니다.
오늘 우리 역시 사랑과 생명에 대한 목마름으로, 영과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여기 ‘양주 올리베타노 수도원이라는 우물’에 물을 기르러 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샘솟는 물”(요한 4,10)을 마시겠다고 이 ‘거룩한 미사’에 함께 모였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요한 19,28)라고 하셨던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라고 청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 아름다운 만남의 때는 십자가에서처럼 우물가에서도 “정오 무렵이었습니다.”(요한 4,6). 그리고 우리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때입니다”(요한 4,23). 바로 이때가 서로 상종하지도 않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진 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성전 휘장을 찢으신 때요(마태 27,51),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과 몸을 쪼개어 오시는 바로 지금입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녜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요한 4,10) 아느냐?
이 질문은 ‘대체 무엇을 목말라해야 하는지?’, ‘그것을 채워줄 자가 누구인지?’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첫째 주제”는 “하느님의 선물”, 곧 “생수”(요한 4,10.11)입니다. “물”은 성경에서 생명과 탄생의 시작을 드러냅니다. 창조 때는 물 위에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우주의 질서를 세우셨고, 노아의 홍수는 죄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고, 요르단의 물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선물”인 “생수”를 마시는 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바로 이 “물”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쏟아진 구원의 물이요(요한 19,34 참조), <제1독서>에서 예표된 호렙의 바위에서 터져 나온 생명의 물이요(출애 17,6), 하느님을 예배하게 하는 영이며 진리이신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히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오늘 <복음>의 둘째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요한 4,25)라고 말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6)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로마 5,1)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이제, 이 아름다운 만남의 마지막 장면을 보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만남의 마지막은 신앙고백으로 마무리 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이방인 백부장이 “참으로 이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고백했듯이,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마리아인들이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요한 4,42)
이처럼 만나는 이를 믿는 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 이만큼 아름다운 만남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만남이 바로 오늘 복음의 우물에서의 만남이요, 또한 십자가에서의 만남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에서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물’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부분인 짧은 복음을 중심으로 보았으며, ‘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제자들과의 대화부분인 긴 복음은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 중에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이 이루어지는 일’, 그래서 ‘하느님 아닌 그 어떤 것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일’, 아니 ‘모든 일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일’, ‘하느님이 내 안에서 샘솟게 하고 그 물을 이웃에게 퍼주는 일’, ‘이웃들과 함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고백하는 일’, 그리고 ‘영과 진리로 아빠 아버지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일’을 몸소 실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
주님!
빈 물동이의 목마름으로 샘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당신을 만남이
믿는 일, 사랑을 고백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소서.
주님!
십자가의 우물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시게 하소서.
당신을 만남이
몸을 쪼개는 일, 장벽이 무너지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을 부수어 샘솟는 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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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일곱 가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그중에 ‘목마르다’라는 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목말랐을까요? 십자가를 지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세 번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렸으니 물을 먹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마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목마른 것은 다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르셨던 것은 ‘진리’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거짓과 위선’에 빠져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공과 발전’이라는 욕망에 빠져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분노와 원망’에 빠져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2026년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도 ‘목마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부부를 체포해서 미국의 법정에 세웠습니다. 명분은 ‘마약’의 유통이라고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매장량이 많은 베네수엘라의 ‘석유’에 대한 욕심입니다. 미국의 정유회사가 베네수엘라에 가서 석유를 미국으로 가져오게 하겠다고 합니다. 베네수엘라의 국민이 잘살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이민세관국의 직원들이 불법 이민자를 조사하고, 체포하고, 감금하고, 추방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무고한 미국의 시민이 총격받아 사망했습니다. 불법 이민자를 찾아 체포하려는 ‘실적’에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그런 과정에서 불법이 자행되고, 그런 과정에서 소중한 생명이 죽었습니다. 오바마, 클린턴 전직 대통령도 이민세관국의 폭력과 불법을 비판하였습니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임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덴마크의 영토인 ‘그린란드’를 갖겠다고 합니다. 명분은 ‘미국의 안보’라고 하지만 그린란드에 매장된 지하자원에 대한 욕심입니다. 미국은 강하고, 미국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고, 미국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욕심입니다. 그러나 이런 욕심은 마치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목마르기 마련입니다.
2026년 사순 제3주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목마르다’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을까요? 아니면 트럼프 대통령처럼 ‘재물’에 대한 목마름으로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을까요? 현명한 스승은 배고픈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현명한 스승은 배고픈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준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이 없어도 그물을 가지고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물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그물은 교회(敎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교회는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교회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황하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알려 줍니다.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참된 행복의 길을 안내합니다. 참된 행복의 길은 자비를 베푸는 겁니다.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겁니다. 옳은 일을 행하는 겁니다.
두 번째 그물은 성사(聖事)입니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표징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를 통해서 위로받습니다. 혼인성사는 성가정의 축복이 됩니다. 견진성사는 신앙을 굳건하게 합니다. 신품성사를 통해서 교회의 봉사자가 선별됩니다. 교회의 봉사자로 선별된 사제는 독신과 순명 서약을 통해서 교회의 신앙을 선포하고, 보존할 사명을 받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언제든지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표징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서 성사의 표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시는 겁니다.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시는 사람은 늘 감사하면서 살게 됩니다. 감사에는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차원의 감사를 드리면서 사는지 돌아봅니다.
첫 번째는 만약에 감사입니다. 만약에 아들이 대학교에 합격한다면, 만약에 복권이 당첨된다면 감사드리는 경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감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두 번째는 때문에 감사입니다. 좋은 결과가 생겼기 때문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건강검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승진했기 때문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는 이런 감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세 번째는 그럼에도 감사입니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큰 불행이 찾아오지 않았음을 감사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욥 성인은 바로 이런 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식들의 생사를 몰라도 감사드렸습니다. 온몸에 부스럼이 생겼어도 감사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에도 감사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드렸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양식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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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끝도 없는 갈망을 영원히 채워주실 분, 주님!
꿈많던 어린 시절, 꽃 같던 청춘 시절, 우리 모두 잔뜩 기대했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질 인생이 마치 멋진 드라마에 등장하는 특급 주연배우의 인생처럼 탄탄대로가 펼쳐지길...내 삶이 고급진 인테리어 잡지 화보처럼 우아하고 고상하게 전개되길....
그러나 막상 다가온 현실은 어떻습니까? 기대와는 너무나 상반된 경우가 많습니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현실은 결코 내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 절대로 만만치 않다는 것을 배워갑니다. 희망 사항과는 달리 우리네 인생은 마치 퀴퀴하고 후질구레하며 어두컴컴한 뒷골목 같습니다. 우리네 인생, 결코 호화롭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에서 따스하고 환한 햇볕이 드리운다거나 멋진 무지개가 뜨는 순간은 한순간입니다. 대부분의 순간은 비참과 슬픔을 그저 묵묵히 견뎌내야만 합니다. 얼마나 더 굴욕을 견뎌내야 하는지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삶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는 참으로 컸습니다. 그러나 기대만큼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잔뜩 기대했던 결혼생활에서의 기대가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대낮에 물을 길으러 몰래 공동 우물가를 찾았습니다. 때는 햇빛이 가장 강렬한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대체로 근동 지방에서는 정오 무렵, 너무나 뜨겁고 건조하기에 가급적 외출을 삼갑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하필 정오 무렵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정오 무렵 우물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인은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통 이스라엘 아낙네들은 한풀 더위가 꺾인 저녁 무렵 우물가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시간 거기서 여성 특유의 잡담과 뒷담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은 그들의 시선, 그들의 입방아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사실 다섯 번이나 남편을 교체했던 사연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다섯 번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내면의 상처가 깊었던 것입니다. 남자로부터 받은 충격이 컸던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컸던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녀의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여인은 혹시나 하고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 헤매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사마리아 여인은 기적처럼 예수님과 일대일로 만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 가련한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여인의 채워지지 않는 죽음과도 같은 갈증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비하신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여인은 서서히 자신이 처한 비참한 실상을 파악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끝도 없는 갈망을 영원히 채워주실 분이 바로 자기 앞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야말로 제 평생의 갈증을 채워주실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동반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밀어붙이지도 않습니다. 그릇되게 살아온 삶에 대해 질책하지도 않습니다.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놔주십니다.
그렇다고 그냥 방임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 자극도 주시고, 다른 한편으로 격려도 하십니다. 천천히 인내롭게 과정을 밟으면서 그를 영원한 구원의 샘물로 인도하십니다. 참된 동반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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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사마리아 여인의 아픈 가슴을 한번 봤으면 합니다.
오늘 주일 복음을 보통 이야기할 때 통상 천주교 개신교 다 아울러서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 보통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가지고 만약 신부님들이 강론을 하신다면 상당히 힘든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각각 개별적인 사안이 많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말하면 법리를 따지는데 논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한정된 시간 내에 그리고 가톨릭 같은 경우엔 상대적으로 개신교에 비해 강론에 할 애하는 시간이 더 작기 때문에도 상당히 힘들 수 있습니다. 저는 만약 오늘 복음을 제가 신부님이라면 최소한 열개의 논점이 있습니다. 저는 그 중 하나의 논점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어제 토요일 오후 늦게 시간 상 표현하려면 초저녁이라고 해야 할지 제가 영세받은 본당 주변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대가 저녁 미사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가다가 자매님 한 분이 성당을 향해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토요일 미사 참례하시는 모양이었습니다. 예전에 영세 때부터 뵈었는데 이제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십니다. 그분을 보면 1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게 실감이 납니다. 한 십년 정도는 제가 그분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아마 제가 2년 전쯤인가 우연히 다른 건 모르지만 그분에 대해 한 가지 알게 된 가정사가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횟수로 15년 성당에 다니는 기간을 감안하면 최근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이분이 성당에 나오시더라도 아주 밝았습니다.
이건 제가 보는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상당히 어두운 게 역력했습니다. 제가 알게 된 가정사는 바로 아들이 신부였다는 것입니다. 옷을 벗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충격으로 어떻게 돌아가신 모양입니다. 오랫동안 다닌 교우는 아들이 신부였다가 옷을 벗은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별로 오래되지 않은 신자는 잘 모를 겁니다. 그리고 특별히 성당에서 활동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가령 성목요일 감실조배 같은 것 외에는 미사만 오시거든요. 오늘은 본당에 갈 생각입니다. 한 달 정도는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한 달 전 주일미사 때 제 앞에 이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제가 지금까지 봤을 때 아들은 모르겠지만 보통 보면 옷을 신부가 벗게 되면 성당은 대개 나오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들 근황은 모르지만 아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자매님은 그런 상황에서 자매님까지 성당을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저는 타교구이지만 실제 제가 영세를 받고 알게 된 신부님이 옷을 벗게 된 신부가 딱 한 분이 있습니다. 전주교구 신부님인데 이름은 어떻게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분이 처음 유섬이 길 도보순례 때 첫날에 초남이성지에서 출발해 점심식사 때까지는 같이 합류를 했고 마지막 거제성당에 우리가 마지막 미사 때 전주에서 자가로 오셔서 미사를 집전해 주신 신부님이었습니다.
저는 유섬이 길 걷고 나서 공연이 마산과 전주에서 있었는데 마산에서 봤습니다. 그때 우연찮게 이해인 수녀님을 잠시 뵙기도 했습니다. 이건 예전 어떤 글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더 전주에 가서 또 봤습니다. 그건 그때 도보순례 때 아주 정이 많이 든 자매님과 함께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때 갔을 때 자매님 형제님도 오셔서 같이 관람했습니다. 마침 그때 저는 오른쪽 편 제일 앞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데 바로 옆에 어떤 분이 제 말투 때문에 어디서 왔냐고 해서 마산에서 왔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두 번 보게 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이 사실 신부님 어머니였습니다. 지금도 제가 그분 얼굴을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잠시 대화를 나눌 때 그분의 얼굴에서 느끼는 감정을 저는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신부라는 것에 대해 아주 뿌듯한 자부심이 있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우연히 제가 전주교구 자매님과 그때 인연으로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이고 윤지충 바오로 압송로 순례도 여러 차례 같이 했기 때문에 언제 통화를 하다가 이 신부님이 옷을 벗게 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제가 언급한 두 아들을 가진 자매님의 공통점은 아들이 더 이상 신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원래는 신부였지만 말입니다. 전주에 그분은 그때 공연장에서 뵙고 그 이후로는 잘 모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분도 많은 상실감을 느낄 것입니다. 아마 어제 뵌 자매님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상 누가 비난을 하지는 않아도 스스로가 위축이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일복음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고 또 어제 뵌 자매님이 떠오게 됐습니다. 마침 이 복음을 묵상하다가 그랬습니다. 왜 떠올랐는가 하면 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가슴 속에 있는 마치 우리나라에서 표현하는 한과 같은 한을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여러분은 어떤 한 같은 게 있다는 걸 느끼시는지요? 사실 표면적으로 나타난 복음만 보면 전혀 그런 게 있다는 걸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좀 더 복음에 나오는 그당시 시대적 배경과 환경을 보면 이 여인의 가슴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한이 있다고 불 수 있습니다. 이건 묵상이니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몇 명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문란한 여자였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저는 그런 측면으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당시 시대적 배경으로는 남자가 일찍 죽었을 수도 있고 또 죽으면 여자 혼자 살기 힘들기 때문에 재가를 해야 하는 그런 특수한 사정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오 무렵에 여인이 물을 긷기 위해 오는 것자체에서 바로 힌트가 있습니다. 그 시간은 가장 햇빛이 강한 시간이기 때문에 우물가에는 다른 사람이 오지 않는 시간이었다고 추론하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 됩니다. 이런 추론을 했을 때 그 여인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던 시간이 바로 정오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추측을 해보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몇몇의 남자를 거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입방아 같은 것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자기는 남자와 재가를 여러 차례 한 게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세상은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란한 여자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말입니다. 원래 인간은 심리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입방아를 올리더라도 좋은 것을 올리는 것보다 좋지 않은 면을 올리고 싶은 경향이 다분한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사실 오늘 복음의 이 사실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설사 그 여인이 부정한 여인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 부정적인 모습만 보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 현실에서라도 그렇다고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는 오죽하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을 한번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저는 무조건 부정을 긍정으로 보자는 이갸기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보긴 보되 또 다른 면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남자가 그리워서 여러 남자랑 살았다고 하는 생각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는 측은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저는 어제 뵌 본당의 자매님을 뵐 때마다 그 아들이 신부 옷을 벗었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는 그분을 뵐 때마다 가슴 한켠에는 마음이 조금 아팠습니다. 연민 같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사마리아 여인과도 같은 마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아들이 신부 옷을 벗었다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그런 마음 말입니다. 어떤 누가 그런 사실에 대해 돌을 던지지 않아도 말입니다. 저는 오늘 주일은 제가 영세를 받은 본당으로 갈 생각입니다. 다음주는 아치에스 행사가 있기 때문에 협조단원이라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제가 다녔던 본당에도 이와 같은 현상 때문에 지금 저는 피부로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사실입니다. 있지도 않은 없는 사실을 사람들이 저를 모함하려고 악의 적인 소문을 내 아주 힘들게 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이 있어 몇 분이 또 성당을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불교 용어로는 직접 표현하지 않겠습니다만 이럴 때 불자들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벌을 어떻게 다 받을 것인가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복음에도 나옵니다. 형제를 실족하게 되면 어떻게 되게 된다는 사실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말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드려야 합니다. 개신교 식 표현으로 하면 신령, 진실한 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사람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신령한 영이 아니라 악마의 영으로, 하느님의 사람들을 대적하는 악령으로, 가득차 성당에 나와 하느님을 숭배한다고 거룩한 체 하며 위선적인 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을 불경한 여인으로 볼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에게도 생명의 물을 주시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남자가 여러 있었다는 그 사실을 언급을 했지 그 여자의 도덕성을 언급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또 그걸 부정적인 면으로 인식을 하지도 않으셨던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달리 보셨을 겁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살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말입니다. 우리도 이래야 합니다. 저는 앞 글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 어머니는 첩도 아니고 후처도 아닙니다. 제 아버지의 정실 부인이었습니다. 설사 제 어머니가 후처라고 해도 만약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하면 저 같으면 숨기려고 해서 그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사실을 덮으주려고 해야 그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이라면 뒷담화를 할 수도 있지만 뒷담화를 해도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어떻게 있지도 않은 그런 사실을 지어내 거짓소문을 내면서 어떻게 주일에 하느님을 경배한다고 성당에 갈 수 있는지 저는 그런 양심은 어떤 양심인지 정말 한번 보고 싶습니다.
정말 신령으로 진실한 예배 즉,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가슴 속에 있는 말 못할 아픈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여야만 한다고 하면 조금은 지나칠 수 있겠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어느 정도 연민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있어야 그래도 하느님 얼굴을 뵐 면목은 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정도 면목이 있어야 미사를 참례해도 참례한 보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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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4,5–42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 만남은 교리 논쟁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주님은 먼저 부탁하시는 분으로 우리 앞에 서십니다.
그리고 그 부탁은, 사실 우리 안의 깊은 갈증을 드러내는 초대가 됩니다.
성 예로니모는 성경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우물가의 여인은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합니다.
그러나 질문하고, 대답하고, 다시 묻는 동안
그녀의 마음은 “정보”가 아니라 만남으로 열립니다.
주님이 주시는 “살아 있는 물”은
무언가를 더 소유하게 하는 물이 아니라,
더는 속이지 않아도 되는 진실의 물입니다.
아낌 주간의 복음은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아끼며 살고 있는가?
혹시 “생명”을 아끼지 못하고
두려움·비교·소비만 아끼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오늘도 우물가에서 기다리십니다.
갈증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은총이 시작되는 자리임을 알려 주시려.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그 살아 있는 물을 “말로만” 알지 않고,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으로 파견됩니다.
주님,
제 안의 갈증을 숨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주시는 살아 있는 물로
제가 진실해지고, 가벼워지고, 사랑할 힘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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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김준수 신부님.
1982년 김지하 시인은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에서 『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하나 타는 가슴속 목마름에 기억이 내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작금의 현실이 그렇지 않지만, 타는 목마름이 어찌 민주주의만이겠는가? 인생이란 멀고도 험한 길을 가다 보면 자주 목마름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 (=인정과 관심, 환대와 보살핌의 목마름)에 직면하게 되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신앙의 여정 곧 내적 여정엔 더더욱 영혼의 타는 목마름(=사랑과 생명을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을 느끼고 느껴야만 합니다. 목마름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목마름의 절박함으로 울부짖다 보면, 마침내 목마름은 해갈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독서의 이스라엘 백성, 특별히 복음의 사마리아 여인은 인생과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의 어제와 내일을 보여 주는 안내인이며 길잡이입니다.
제1독서 탈출기의 사건은 바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도달하기 이전에, 사막 횡단 여정을 통과해야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 보입니다. 오랫동안 핍박과 착취 속에서 살아온 그들에게는 분명 이집트와 그 종살이에서 벗어난 감동과 감격으로 밀어닥친 여러 어려움을 잘 참고 견디어 왔지만, 사막이란 혹독한 상황 앞에서 그들은 차츰차츰 주어진 막막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피부로 느끼면서 불평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사막에서 목마름은 생명과 직결되는 고통이었기에 그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17,3)라며 모세에게 불평을 터트립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상황이었다면 그들처럼 지도자에게 항변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고 모세 역시 별다른 묘안이 없었기에 하느님께 나아가 백성의 소리를 전달하며 부르짖자, 하느님께서 “내가 저기 호렙의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서 있겠다.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17,6)라고 응답하십니다. 일부러 하느님을 시험할 수는 없겠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절체절명의 다급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순간 진정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나 할까,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런 순간 하느님을 향하여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간절한 울부짖음의 순간이 바로 영적 목마름의 순간이며 이런 목마름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영적 투쟁은 치열하고 심각해지겠지만 바로 이 순간이 바로 하느님을 향한 내적 정화와 단련의 시간입니다. 이런 절박함을 통한 깊은 내성內省을 통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발가벗겨진 순수한 신앙과 화장이 지워진 민낯’으로 하느님 앞에 서 있게 됩니다. ‘마싸와 므리바’의 본뜻은 시험과 다툼이고, 마싸와 므리바는 장소 이전에 바로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숨겨진 영적 상태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17,7참조) 이런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내적 투쟁을 겪을 때 진정으로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만나고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있음과 하심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아버지의 일을 완수하시기에(4,34참조) 사마리아의 시카르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지치시고 시장하셨기에 우물가에 앉으셨는데 그곳으로 아빠 하느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이끌었습니다. 이미 다섯 명의 남편들과 더불어 살아왔기에 타인과 의미로운 관계를 맺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 그 시간에 그곳에 이미 와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느 때든지 그분이 우리에 앞서 그 시간 그 자리에 먼저 와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4,7)라고 청하였지만, 그 여인의 눈에는 자신이 타인에게 항상 차별을 받아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목마른 한 존재로 보여 지지 않고 종교와 인종 그리고 성의 차별의 덫에 빠져 주님의 청을 거절합니다. 우리 역시도 삶을 살아오면서 누군가가 우리의 인정과 사랑과 관심이 필요할 때 그들의 절박한 간청을 여러 이유를 들어 거절하지 않았는가를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반성해야 합니다. 그 여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깊은 내면에 있는 사랑에 대한 갈증과 생명에 대한 목마름을 꿰뚫어 보시고 또한 아버지께서 이 여인을 당신에게 이끄신 뜻을 깨달으시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4,14)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이 지금 그 여인 앞에 있어야 할 이유를, 그리고 나에게 물을 좀 다오, 라고 한 까닭을 밝히십니다. 그녀의 처지는 바로 지금 우리의 처지이고 그녀는 바로 되어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4,15)
닫히고 부서진 마음으로 살아온 그 여인이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그녀의 마음에 부어지기”(로5,5 참조) 시작하자 영원한 생명을 채워주신 하느님께 대한 예배 장소를 질문하는데 이 또한 우리를 대신한 절대적이고 궁극적으로 필요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하게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그때에는 모든 사람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것이다.”(4,21~23)하고 언약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영’(4,24) 이시기에, 영이시고 진리인 예수님 안에서 아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사람은 누구나 외부의 어떤 장소나 공간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 영혼 안에 내주하시고 내재하시기에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아빠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 (로5,5) 영과 진리 안에서 참된 예배를 어디서든지 어느 때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똑같은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길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난 일은 우연도 필연도 아닌 오직 사랑의 사건, 곧 은총의 사건이며 이를 체험한 사마리아 여인이 단지 예수님을 선생님에서 그리스도로 호칭이 변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린 최초의 복음 선포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난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듣고-체험한 그 사랑과 생명을 함께 나누도록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아빠 하느님의 계획이었고 예수님은 그런 아버지의 뜻 곧 사마리아 여인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면서 사랑과 생명에 목마른 모든 이를 다 당신께 이끌도록 우리를 구원의 선포자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오늘 사순 제3주일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마음에 간직할 은총을 청하면서 감사송을 들어 봅시다. 『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청하시면서, 이미 그 여인에게 친히 신앙의 선물을 주셨으며, 또한 거룩한 사랑의 불을 놓으시려고, 그 여인에게 신앙의 갈증을 느끼게 하셨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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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목마름을 채워 주시는 예수님
요한 성인은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이야기를 유일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루카 복음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은 진리를 찾고 영원한 영적 가치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서로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다인이 사마리아인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처음에는 경계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집니다. 의심은 신뢰로 바뀌고, 삶에 대한 불만과 공허 속에 있던 그녀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침내 그녀는 예수님을 믿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전하는 증인이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복음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특정한 장소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든 어디든,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순 시기의 전례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의 샘이 되심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인간은 물질적인 풍요만으로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여러 번의 결혼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마음 안에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깊은 갈망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물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시어, 그녀가 영원한 생명의 물, 곧 은총의 물을 깨닫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도 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갈증 속에서 하느님께 부르짖었고, 하느님께서는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평과 약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비로이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은 예상하지 못한 열매를 맺습니다.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세상의 구원자로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추수의 비유로 설명하시며, 우리 주변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마음들이 많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사순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향해 걸어갔던 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여정 속에서 많은 이들이 넘어졌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 곧 하늘 나라로 인도하시는 길이십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듯이,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따뜻하게 대해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고 사랑과 선행으로 이웃을 대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렇게 하여 서로를 이어 주는 사랑의 다리가 되고, 참된 형제애를 이루어 가도록 합시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무엇에 목말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채우고자 애쓰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정말 내 마음의 갈증을 채워 주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2. 편견, 상처, 거리감 때문에 마음을 닫아 둔 사람은 없는지, 그리고 그 벽을 허물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묵상해 봅시다.
3. 다른 이들에게 어떤 모습의 신앙인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내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지는 않은 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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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례받은 자매님께서 “신부님! 세례받은 후 제 삶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냥 기쁘고, 사람들이 다 좋아 보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책에서 회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는 세례받은 이의 삶을 크게 변화시키므로, 여기서 ‘자기 삶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더 이상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바라보지 않고, 다른 모든 이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무수한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서 모든 생명의 참된 중심이신 그분 주위에서 함께 움직인다는 것을 긍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쿠르트 코호, ‘죽음에서 생명에로’ 중에서)
아마 이 글의 내용을 앞선 자매님께서 체험하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면 필요한 것이 참으로 많아집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늘어나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이 협조자가 아닌, 경쟁자가 되었을 때 당연히 편안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면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만이 자기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된 한 여인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7)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과 혼혈되었다고 해서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랍비가 길에서 여자와 말을 섞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장 뜨거운 정오 무렵에 물을 길으러 온, 상처 많고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물을 청하는 것 같지만, 사실 여인에게 믿음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구원은 경계 밖의 사람에게도 열려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여기서 두 가지 물이 나옵니다. 야곱의 우물물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입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아무리 마셔도 다시 목마른 현세적인 만족인 쾌락, 물질, 사람에 대한 집착 등을 의미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과 구원의 은총입니다.
세상의 것은 세상 물이 다시 목마른 것처럼, 인정받아도 또 허전해지고, 많이 가져도 또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또 사랑받아도 불안하게 되고, 성공해도 또 공허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목마릅니다. 인정에 목마르고, 위로에 목마르고, 성공에 목마르고, 관계에 목마릅니다. 이런 목마름에서 벗어나려면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십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이 여인은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향한 호칭의 변화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적대적인 호칭이라 할 수 있는 ‘유다 사람’이라고 했다가, 호기심과 존중의 마음이 생기면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기의 숨겨진 과거(다섯 남편)를 꿰뚫어 보는 영적 권위를 인정하면서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라면서, 세상의 구원자로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우리 내면에 자리한 ‘깊은 갈증’이 참 많습니다. 세상의 성취, 물질, 타인의 인정이라는 유한한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목말라하는 우리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도 먼저 다가오셔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이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기쁘게 지금을 살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고난을 이겨내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무조건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 힘으로 반드시, 반듯하게 꿈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김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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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여정
“세상의 구원자이신 주 예수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샘이 솟으리라.”(요한4,14)
우리 삶은 무수한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과연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의 기쁨, 만남의 평화, 만남의 행복등 만남의 축복은 끝이 없습니다. 늘 새롭게 만나야 할 주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이 참 각별한 느낌으로 와닿습니다. 길을 걷느라 지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 시카르라는 “야곱의 우물”가에 앉으셨고 때는 정오이니 무척 더웠을 날씨입니다. 주님의 인간적 면모가 마음에 친근히 와닿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과 이어지는 대화가 깊은 묵상감입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주도권을 잡으신 예수님의 청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같습니다. 마실 물을 청하는 목마른 사람들, 또 하나의 예수님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반문입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관행상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천시하여 상종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사마리아 여인의 깊은 내면을 보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다섯 남편을 지녔던 여자라면 그 내적 갈증은 헤아릴수 없이 컸을 것입니다. 물을 달라는 청은 구원에로의 초대였던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이 상징하는 바 오늘 여기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바로 여기 진짜 <야곱의 우물>인 예수님이 계십니다
바로 제1독서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 모세에게 불평하자 모세는 하느님께 부르짖었고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이제 내가 저기 호렙의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서겠다. 네가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
물이 터져 나온 호렙의 바위가 상징하는 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시편은 “구원의 바위앞에 환성을 올리세” 노래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 부족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촉구합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이에 근거합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러므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이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그동안 베풀어 주셨던 기적들을 기억하는 믿음이었다면 이런 불평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닯았습니다. 사마리아여인은 내적 갈망은 구도자의 모범이라 할 만합니다. 주님을 목말라 찾는 우리 역시 또 하나의 사마리아여인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를 향합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 자체가,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가 살아 있는 야곱의 우물이자, 생수가 터져 나오는 바위요, 생명의 물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샘, 생명수의 샘,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 생명수인 성령을 모시러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수는 바로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성령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희망-사랑, 신망애가 하나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이 되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니 결코 목마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사마리아여인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세 가지 귀한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1.“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내 삶의 자리가 예배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이기 때문에 어디나 주님을 만나는 예배터가 됩니다. 제자들이 돌아오자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또한 귀한 두 번째 깨우침이 됩니다.
2.“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대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육신의 양식은 결코 영적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참양식이요 삶의 의미이자 목표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영육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3.구원은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됨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다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 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오늘 지금 여기 영의 눈이 열리면 씨뿌림과 수확이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선교의 기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비전이 너무 생생하여 놀랍고 부럽습니다.
마침내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기를 청하자 예수님은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셨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한 말은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의 고백을 대변합니다. 사마리안여인 하나에게 붙은 선교의 불이 사마리아아전역에 타오르게 되었음을 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언제 어디서나 <세상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모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당신은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시니,
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물을 주소서.”(요한4;42,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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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10 추가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물’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요한 4,13-19)”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5-2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생명의 물’이신 분”이라는 ‘계시’(가르침)이고, 그래서 요한복음 7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그리고 묵시록 21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도 연결됩니다.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묵시 21,6-7).”
그런데 이 말씀들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과
사실상 ‘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배고프지 않음’과 ‘목마르지 않음’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뜻합니다.
반대로, ‘배고픔’과 ‘목마름’은, 아직 구원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 등을, 또는 고통스러운 인생살이 등을 뜻합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에 시달리는 존재입니다.
육신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걱정할 일이 없는 부자라고 해도 영혼의 배고픔과 영적인 목마름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에서 우리를 완전히, 또 영원히 해방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7).”
2) 사마리아 여인은 ‘인생의 갈증’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즉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의 남편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도
상징적인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물론 그 여인의 실제 사생활을 나타낸 말씀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뜻은 같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는,
“너의 종교가 무엇이냐?”로 해석되고,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는,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로 해석됩니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은, “너는 여러 종교를 전전했지만”으로 해석되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는, “지금 네가 속해 있는 종교도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니”로 해석됩니다.
그 여인은 참된 구원의 길을 알려 주는 종교를 찾아서 여러 종교를 전전하지만 ‘참 종교’를 만나지 못한 채로 계속 구원의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었지만, 그것은 유대교를 겉으로만 흉내 낸 것이었고, 올바른 신앙이 아닌, ‘형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22절에 있는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이라는 말씀은 그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인생의 갈증’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면서 여러 종교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있고, 종교가 아닌 어떤 학문이나 사상 등을 찾아다니는 경우도 많습니다.
3) 우리는(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로 등록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성사는 신앙생활의 시작일 뿐입니다.
신앙의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2베드 2,20-21).”
신앙생활은, 갈증을 해결해 준다고 끈질기게 속이는 ‘가짜 생명수들‘의 유혹에 맞서 끊임없이 싸우는 생활입니다.
사순 시기는 그런 ‘가짜 생명수들’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한 ‘저항력’을 키우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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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08. 사순 제3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4,5-42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과 물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살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물 없이는 채 이틀도 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이 영적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 말씀이 꼭 필요하지요. 둘째, 이곳에서 저곳으로 흘러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은 끊임없이 흘러야만 썩지 않습니다. 또한 흐르며 지나간 자리에 생명이 움트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말씀은 내 마음에서 손과 발로, 행동과 실천을 통해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야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지요. 셋째, 다른 것을 깨끗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입니다. 오물이 묻어 더러워진 부분을 물로 씻어내면 깨끗해집니다. 마찬가지로 탐욕과 집착, 죄와 허물로 더러워진 우리 마음을 주님 말씀으로 성찰하고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어 우리 마음과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육신이 갈증을 느끼면 물을 마셔야 하듯, 영혼이 참된 행복에 대한 갈망을 느끼면 주님 말씀을 내 안에 받아들이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 마음을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주시는 하느님 말씀의 신비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해가 중천에 떠서 따갑게 내리쬐던 정오 무렵,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우물가를 찾습니다. 근동 지방에서 한낮의 더위는 말 그대로 ‘살인적’입니다. 따가운 직사광선은 화상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올라가는 고온은 탈수증세를 일으키지요. 그래서 그곳 아낙네들은 더위가 한풀 꺾이는 해질녘에 물을 긷기 위해 우물가로 모여들었는데, 이 우물가에서 이루어지는 잡담과 뒷담화에서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그런 자리가 너무나 불편했기에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 무더운 한낮에 물을 길으러 왔던 겁니다. 그건 그녀의 복잡한 ‘사생활’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기를 다섯 차례나 반복했고, 지금은 여섯번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 속 외로움과 공허함을 남자와의 관계 안에서 채워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늘 자기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줄 무언가에 목말라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시어 마실 물을 청하십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기 위해 청하신 게 아닙니다. 그녀로하여금 자신이 정확히 무엇에 목말라 있는지, 그 목마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녀를 당신과 나누는 영적 대화에 초대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손에 들린 두레박 속의 물을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이 말씀에서 ‘물’은 ‘세상의 물’, 즉 우리가 추구하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즐거움들을 상징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 명예 같은 세속적 조건들이나 육체적 쾌락을 통해 영적 갈망을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것들을 아무리 들이켜도 마음 속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것들을 찾게 되지요. 그런 상태가 계속되면 우리 영혼은 심각한 ‘탈수증세’에 빠지고 맙니다. 심한 갈증을 느끼는 이들이 탄산음료를 마시면 몸 속 수분이 빠져나가 더 심한 갈증으로 괴로워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물’로 영적 갈망을 채우려고 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당신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 즉 하느님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환자의 건강상태는 그를 꾸준히 진찰하고 치료한 주치의가 가장 잘 아는 것처럼, 내 영혼의 상태는 새 삶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가장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스스로의 의지와 사랑으로 당신을 받아들이고 일치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해지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고 하십니다. 고질적인 가뭄 문제로 고통받는 마을 주민들에게 식수를 지원해주면 일시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이 다 떨어지고 나면 또 다시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요. 그렇기에 그 마을 주민들을 도울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그 마을에 큰 저수지를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러면 가뭄 문제에 보다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갈증이라는 문제도 그렇게 대처하라고 하십니다.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채워서 영적 갈망을 일시적으로 ‘해결’하려고 들지 말고, ‘영원히 물이 솟는 샘’인 하느님 말씀을 내 마음 깊이 받아들여서 영적 갈망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라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닮아 일치를 이루어야만 완전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분을 내 안에 모시고, 그 말씀대로 실천함으로써 그분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 속 공허함은 어느 새 사라지고, 충만한 기쁨이 가득 차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당신이 그녀의 마음 속 갈망을 참된 기쁨과 행복으로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세상의 물’을 찾아 헤매지 말고, 당신 말씀을 듣고 따름으로써 그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물’을 마시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그 말씀대로 예수님을 자기 안에 받아들입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이제 ‘낯선 유다인 남자’가 아니라, 자신을 완전한 행복과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주는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앞서 만났던 여섯 명의 남자들에게서는 절대 채우지 못했던 공허함을 일곱번째로 만난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완전히 해소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녀는 물동이를 우물가에 버려둔 채 고을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그분을 통해 얻은 구원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만나 삶의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린 이들은 그것을 자기 혼자만 누리지 않지요. 그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함으로써 그들도 자신과 같은 기쁨을 누리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도 그래야겠습니다. 주님 말씀을 잘 듣고 받아들이며 따름으로써, 행동과 삶으로 널리 선포함으로써 모두의 마음을 충만한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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