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된 재난, 일을 멈출 권리를
류민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매일노동뉴스 입력 2021.01.13 07:30
▲ 류민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한 해가 저물었다. 새해에도 여전히 우리는 재난의 세계를 살아간다. 마주한 재난은 코로나19만이 아니다. 감염병 위협과 함께 연이은 호우·폭염·폭설·혹한 역시 깊이 병들어 아픈 지구, 우리 생태의 맞물린 신음이다. 어느덧 일상의 재난이 됐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같은 재난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 분석하며 “홍수는 사회의 표면을, 익숙해진 삶의 방식을 쓸어 가 버린다. 하여 근원적 권력구조를, 불의를, 부패의 패턴을, 그리고 의식하지 못한 불평등을 폭로한다”고 적었다.
한 해의 시작, 쏟아져 내려온 폭설이 온 거리를 뒤덮었지만, 우리 사회 불평등의 민낯은 오히려 더욱 또렷이 드러났다. 코로나19가 그렇듯, 기후 위기의 칼날 역시 이미 일과 삶이 가난하고 불안정한 이들의 안전을 가장 먼저 위협하고 있었다.
지난해 12월20일, 포천지역의 기온은 영하 18.6도로 한파경보가 발령돼 있었다. 같은 날 오후 이주노동자 속헹은 난방이 고장난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숨을 거둔 채로 발견됐다.
이달 8일 경남 창원과 경북 울진은 기상관측 이후 가장 낮은 기온을 기록했고, 서울 지역의 기온도 지난 20년 이래 가장 낮았다. 기록적인 한파에 일부 기업에서는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거나 재택근무를 실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노동자들은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거리의 노동을 멈출 수 없었다.
환경 관련 노동자들은 하루 중 가장 추운 새벽과 아침 시간에 거리에서 쓰레기를 수거하고 제설 작업에 나서야 했다. 택배노동자들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물류창고에서 야간노동을 하면서 폭설로 배송이 지연된 물량을 감당하느라 휴일까지 분류와 배송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시민들의 이동이 제한될수록 주문이 늘기 쉬운 배달노동자들도 눈길 사고의 위험 속에서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고 있다.
거리에서, 조선소에서, 건설 현장에서, 또 다른 어느 일터에서, 감염 위협과 한파 위험에 동시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현실은 위태롭기만 하다. 체감온도가 영하 10도에서 20도를 웃도는 추위에, 장갑과 안전화를 착용해도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리기 쉽고, 눈길과 빙판에 미끄러지는 사고도 빈번하다. 기본적인 방한물품 마저도 자비로 마련해야 하는 경우가 다수이고, 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한 경우 저체온증 같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한랭질환에 걸릴 위험에 늘상 노출돼 있는 것이다.
안전보건공단에서는 겨울철 한파로 인한 한랭질환 예방가이드 및 자율점검표를 수립해 배포하고 있다. 그러나 권고 수준의 가이드라인은 실제 노동자의 작업환경을 바꿀 수 있는 힘을 현실에서 발휘하기 어렵다. 사업주가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작업 시간과 강도를 조정하고, 필요한 방한 물품을 지급하고, 추위를 피할 수 있는 휴식 공간을 마련할 책임 등을 보다 분명히 규정해야 한다. 현장의 실천에 대해 적극적 감독과 제재를 실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자의 안전이 위험에 놓일 수 있는 상황에서 일을 멈출 권리를 실현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 51조에는 ‘사업주가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에는 즉시 작업을 중지시키고 근로자를 작업장소에서 대피시키는 등 안전 및 보건에 관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같은 법 52조에는 노동자가 위험상황에서 스스로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는 권리가 나와 있다.
노동자가 다치고 목숨을 잃은 이후의 작업중지가 아니라, 사고가 일어나기 전 위험상황을 예지할 수 있는 적확한 기준을 마련하고, 이에 따라 예방차원의 작업중지가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명시된 권리가 현실에서 힘을 갖기 위해서는 이 역시 현장에 대한 감독과 제재를 확대하는 한편, 작업중지권 행사로 일을 멈춘 노동자들의 소득과 고용안정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사업주가 노동자의 안전과 이윤을 저울에 올려 두고 셈할 수 없도록, 노동자가 생계 불안과 안전할 권리를 저울에 올려 두고 망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존엄한 삶과 존엄한 노동을 위해서는 일할 권리만큼 일을 멈출 권리, 위험을 피할 권리도 중요하다.
감염병과 미세먼지, 폭우와 폭염, 폭설과 한파가 일상이 된 이 재난의 세계를 더는 노동자들의 삶을 갈아 넣는 방식으로 지탱하려 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한 해, 모든 노동자들이 안전한 삶과 안전한 노동을 위해 일을 멈출 권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사회적 노력이 절실하다.
충청남도노동권익센터 정책기획팀장 (recherche@cnnodong.net)
류민 recherche@cnnodo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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