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6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주일을 주의 은혜 안에서 지내게 하시고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이 시간 주님과의 영적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생명의 양식을 얻어먹기 원합니다.
이 종의 입을 크게 열어 주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채우게 하소서.
나의 마음이 결국 없어지고 쇠할 세상의 존재물에 빼앗기지 않기를 원하오니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주의 성령을 내게서 멀리하지 마소서.
나는 주님의 것, 주의 소유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이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나를 장악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고전 7:25-40
제목 : 인간의 제도를 넘어 하늘의 기쁨인 영생을 누리라.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가지 않는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열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36 그러므로 만일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합당하지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그 약혼녀의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원하는 대로 하라. 그것은 죄짓는 것이 아니니 그들로 결혼하게 하라.
37 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38 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
39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 나의 묵상
사도 바울은 처녀에 대하여 직접 주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은 없지만 주의 충성스런 종으로서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처녀는 결혼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환난이 임박하였기 때문이다.
아내가 있는 남편은 아내와 헤어지려고 하지 말 것이며 헤어졌으면 다시 결혼하려고 애쓰지 마라.
장가를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고 처녀가 시집을 가도 죄짓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람들은 육신에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다.
형제들이여, 환난의 때가 가까워졌으므로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고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뻐하는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물건을 사는 자들은 그것을 사지 않은 것처럼 하며 세상의 물건을 쓰는 자들은 그것을 다 쓰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라.
왜냐하면 이 세상은 다 지나가기 때문이다.
내가 여러분들을 향하여 원하는 것은 근심이 없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장가를 가지 않은 사람은 주의 일을 위하여 염려해서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할 것이로되 장가를 간 사람은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것인가 하면서 염려하게 될 것이다.
시집가지 않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혼을 모두 거룩하게 하려고 애쓰지만 시집을 간 여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인하여 염려하게 될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여러분의 유익을 위하여 하는 말이다.
또한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되게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으로 하여금 마음이 나뉘지 않게 하여 주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약혼녀에 대하여 자기의 우유부단함으로 약혼녀의 혼기도 지나고 해서 결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이 되면 그렇게 결혼을 하면 된다.
결혼을 한다고 해서 죄짓는 것이 아니므로 결혼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마음에 정한 것이 있고 또 특별히 결혼할 이유도 없으면 약혼녀와 결혼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도 잘 하는 것이다.
결론은 결혼을 하는 것도 잘 하는 것이지만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더욱 잘하는 것이다.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편의 주관 하에 있지만 남편이 죽으면 거기서 자유로워져서 자기의 뜻대로 시집갈 수 있다.
다만 주 안에서만 시집갈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재혼하지 않고 그냥 혼자 사는 것이 더욱 복이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한 이것들은 성령께서 주신 말씀인 줄로 믿는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 무언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든 결혼을 하려고 애쓴다.
세상에서 주로 결혼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기준에서 좀 모자라거나 부족한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지극히 외적인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농촌이나 시골의 총각들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렇게 시골에 살면서 결혼하지 못하고 부모랑 같이 살거나 아니면 혼자 사는 노총각들을 보면 동네사람들은 측은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제3국에 있는 처녀들과 돈으로 연결된 결혼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경우 얼마 살지 못하고 결국 이혼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로 인하여 가정이 파탄이 나고 아이들은 상처받고 심한 경우는 엄마도 아빠도 보지 못하면서 고아가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혼자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당연히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꿈을 꾸었고 또 그렇게 결혼하여 두 명의 아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이 세상이 행복하다 할지라도 세상의 외형은 다 지나간다.
성경은 이렇게 쇠락의 법칙을 증거한다.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렇다.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죄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의 심령 안에 아들의 생명이 있으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자유함이 있다.
해도 죄짓는 것이 아니고 안 해도 죄짓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이유는 창세전에 하나님의 뜻으로 주신 영생을 얻는 것이며 그 영생을 누리는데 있다.
물론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의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아서 하와를 만들어 결혼을 시키고 가정공동체를 이루셨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결혼을 하라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결국 아내로 인하여 남편도 죄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돕는 에제르로 아내를 지으셨지만 그 아내는 에제르가 아니라 오히려 남편을 멸망하게 만든 장본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남자를 남자 되게, 여자를 여자 되게 만드시는 이는 오직 참 에제르 되시는 하나님밖에 없으시다.
시쳇말로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해보고 죽는 것이 낫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는 세상적인 기준일 뿐이고 주님 안에서는 진짜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그런데 오늘 바울의 권면은 가능하면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낼 수 있으면 그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말을 한다.
왜냐하면 마음을 흐트러뜨리거나 나뉘게 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혼자 사는 것도 괜찮다.
세상적인 정욕에 자신을 빼앗기지 않고 주를 위하여 온전히 드릴 수 있다면 말이다.
목사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그런데 과연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무슬림들이 자식을 많이 낳아서 자기들의 세력 곧 이슬람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현실이다.
그래서 이에 맞서서 기독교도 자녀를 많이 낳아서 이에 대응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 땅에서 숫자를 많게 하여 기독교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것이다.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이 세상에서의 숫자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력이 작아서 핍박을 받을지언정 숫자나 외연을 넓혀서 그 세력을 확장하여 다른 종교에 비해 기죽지 않고 다스리면서 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에 있지 않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결코 그 믿는 자가 많지 않을 것임을 주님께서도 암시하신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눅 13:23-24)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참 믿음을 가진 자)를 보겠느냐 하시니라.
사람은 끊임없이 숫자나 눈에 보이는 것 또는 손에 잡히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 혹은 하나님의 뜻의 성취와 실패를 가늠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서 세상의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들어서 세상의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없는 자 비천한 자 멸시받는 자를 들어서 세상의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보다 높고 그분의 길은 사람의 길보다 높으며 주의 뜻은 사람의 뜻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넓고 높고 크시다.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재단하거나 판단하려 한다면 큰코다치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이며, 사람의 생각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 좋은 것이 진짜 좋은 것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다.
지금까지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뜻으로 살아왔던 나의 지난날의 과오를 엎드려 회개하며 주의 영으로 깨닫게 하셔서 이제는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회개의 영으로 주의 보혈을 힘입어 세상적 정결이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 정결함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뜻은 높고 깊어 가히 사람으로서 헤아릴 수가 없나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창세전 하나님의 뜻이 영생일진대 그 영생에 초점을 맞추어 살라하심은 이 땅에서부터 맛을 보고 누리는 영생이 실재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완전한 영생을 얻기 전에 이 땅에서부터 육신으로 그리고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맛을 보고 누리는 하늘의 영생은 오늘도 나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을 뛰어넘는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의 열매임을 믿습니다.
하여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됨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살게 하소서.
오늘 이곳 현지인 목사들에게 줌과 통역을 통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내 말이 아니라 오직 진리이신 주의 말씀 곧 복음만 증거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