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지엄한 사신이라기보다는 장사꾼처럼 유들유들하고
반지르르 기름기가 도는 얼굴을 한 요의 사신을 떠올리면 인종은 지금도 속이 뒤집혔다.
아니, 실제로 인종은 그토록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장사꾼은 처음 보았다. 비단 10만 필에 은
10만 냥이라는 거금을 거의 공짜로 받아 가면서도 마치 자기네 나라가 손해 보는 것처럼 굴
었던 것이다.
‘억울한 일이었어. 정말 억울한 일이었어, 전 호위. 자네도 분명 그리 생각할 거야.’
앞서 가던 전조는 마침 비틀거리며 객잔을 나오던 늙은 주정꾼을 부축하는 참이었다. 대낮
부터 술이 취한 듯 노인의 걸음은 아예 갈지자였다. 전조는 주정하는 노인을 다독여 계단에
앉히고는 안에서 차가운 물을 얻어다 먹이기 시작했다. 노인을 보살피는 전조의 눈은 언제
나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인종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자네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군.’
``폐하께서는 그저 억울해하는 것으로 끝나시겠지만, 정작 그 세폐를 감당해야 하는 백성
들을 생각해 보소서. 엄청난 세폐를 마련코자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폐하
께서 나라가 힘이 없음을 억울해하신다면 그 때문에 고생하는 백성들의 슬픔까지 더욱 자상
히 살펴 주십시오. 그이들 또한 모두 고귀한 이 땅의 백성이 아니더이까."
인종은 문득 한숨이 나왔다. 자기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스스로도 놀라울 지
경이었다. 그것은 분명, 어느 날 허름한 객잔에서 느닷없이 “진실로 저 하늘이 보시기에는
황제도, 백성도 모두 다 똑같은 하늘의 자식일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난 다음일
것이다.
솔직히 인종은 그 말을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에 전조가 그토
록 충성스럽고 반듯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종이 몰랐더라면 전조는 그 자리에서 참수를 당해
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엄청난 역천逆天의 말을 했던 것이었다. 어찌 당금 천하의 지배자인
천자를 한낱 백성과 똑같다 할 수 있는가. 천자는 천자고, 백성은 백성이다. 하늘로부터 지
배자의 권한을 받은 것은 자신이고, 백성들은 그 지배를 받도록 태어난 미천한 존재에 불과
한 것이다.
그런데도 인종이 가슴 서늘했던 것은, 황제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만큼 충성
스러운 전조에게서 지극히 당연하게 그 말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전조가 진심으
로 천자와 백성을 똑같은 하늘의 아들로 보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러한 역천을, 동시에 전조
가 갖고 있는 그 가없는 충忠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황제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
었다. 그저, 황제는 그저, 조금 더 전조의 곁에 있으면서 그 의미를 찾아보도록 노력하는 수
밖에 없었다. 천자, 역천, 그리고 하늘의 백성들 그 모든 것의 의미를.
“북리 군왕부요?”
문득 전조가 놀란 얼굴로 노인을 보았다. 대충 술이 깬 노인은 여전히 주정처럼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래, 북리 군왕부. 우리 도련님이 바로 북리 군왕부 소왕야시지. 그런데 지금은`....... 우리
도련님이 불쌍허이. 그렇게 좋으신 분이 다리병신이 된 것도 모자라 소왕야 자리에서도 쫓
겨나게 됐으니. 나쁜 놈들! 세 놈 다 자기가 소왕야라 주장하지만 왕야가 될 재목은 우리
도련님밖에 없어.”
객잔 바로 옆에서 알록달록 물건을 늘어놓고 팔고 있던 방물장수가 노인의 말에 혀를 찼다.
“영감, 웃기는 소리 말아. 북리현, 그 개망나니 소왕야가 뭐, 좋은 사람? 아이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그런 소리 말게!”
“일 년 전이라면야 나도 그 말을 믿었겠지. 그때만 해도 북리현, 그 작자도 꽤 괜찮은 축에
들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을 보라고. 술과 여자에 절어 사는 것도 모자라 남의 부인을 납치하
질 않나, 패거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패질 않나, 위아래도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욕설을 퍼붓
고, 그런 천하의 망나니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제 다리를 다쳐 그 망나니짓 안 보는
거 생각하면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니까. 당장 영감만 해도 아무 잘못도 없이 단지
그 망나니 공자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군왕부에서 쫓겨난 거 아닌가. 그래
서 이렇게 술 구걸을 하고 다니면서도 두둔할 맘이 나는가 말이요.”
“아니야. 다 내가 잘못해서 쫓겨난 거네.”
“무슨 잘못? 정신 차리라고 충고한 잘못? 제발 사람다워지라고 타이른 잘못? 그게 잘못이
면 세상에 잘못 안 하는 사람이 없겠다.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다리 다쳐 사내구실도 못
할 병신, 일찌감치 폐해 버리고 한꺼번에 아들이 셋이나 나타났다는데 그 중에 괜찮은 사람
을 골라 소왕야로 삼으면 북리 왕야께서도 얼마나 좋아하시겠냐고.”
“이, 이, 닥치지 못해!”
노인은 벌컥 화를 내며 일어섰지만 술기운에 겨워 제풀에 넘어지고 말았다. 전조가 서둘러
부축하며 조용히 방물장수를 돌아보았다.
“군왕부에 아들이 셋이나 나타났다는 게 무슨 소립니까?”
“아, 성안에 쩌르르 난 소문을 못 들으셨소? 젊은 시절 북리 왕야께서 평민 처녀에게 본
숨겨 놓은 아들이 있었다지 않소. 이번에 소공자가 몸이 저렇게 되니까 대를 이으려고 다시
그 아들을 찾은 모양인데, 글쎄, 어떻게 된 게 한꺼번에 세 명이 나타나 다 자기가 아들이라
고 나섰다지 뭐요. 그것도 모두 다 왕야의 신물을 지니고서는. 허엇, 왕야께서야 골치가 아
프시겠지만 우리야 뭐, 사실 재미있잖소. 세 명의 소왕야라니. 저자에서는 누가 진짜인지 내
기까지 벌이는 모양입디다.”
전조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북리 군왕부 사건은 이제껏 지극히 비밀스럽
게 처리되었다. 살인 사건이 연루됐기도 했거니와, 국경 군왕부의 후계자를 찾는 일인지라
함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안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두 다
알고 있고 심지어는 그걸로 내기까지 하고 있다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냈다? 가짜 중의 한 사람이? 대체 뭘 노리고?’
“전 호위, 혹시 섬서성에서 해결해야 될 사건이라는 게 바로 북리 군왕부의 사건이었나?”
황제가 다가와 생각에 잠겨 있는 전조를 깨웠다. 전조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표정으
로 황제를 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이거, 전 호위가 다시 오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나 또한 그 일과 상관이 있
네.”
“예?”
전조가 깜짝 놀라 인종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