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 이 한마디로 많은 종교인들이 나에게 질탄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은 죽었다. 아니 내가 믿고 있던 신은 철저하게 내 믿음을 배반한 채 죽고 말았다. 나는 한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기 그지없던 학생에 불과했다. 작은 것에도 만족할수 있는 성격을 지닌 나는 아무 탈 없이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고,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죽음에 관한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일은 터지고 말았다. 말로만 듣던 마적 떼가 우리 마을을 습격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어리석은 행동...정의감에 불타던 아버지는 마을을 지키겠다며 여러 마을사람들과 함께 마적떼와 맞섰고, 나는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몸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볼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마을 경비대는 애초에 마적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경비대와 함께 마적떼에 맞선던 아버지도 싸늘한 시신이 된게 아니겠는가.
나는 비겁했다. 뒤에서 들리는 비명소리가 분명 어머니의 그것임을 알았지만 뒤로 돌아볼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목숨을 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죽는 것이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나이어린 내가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간다는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깨달아 버렸으니까. 난 어리석은 인간이라 겪기 전에는 깨닫지 못하나보다.
본능이란건가? 우연히 옆마을에 도착한 나는 집을 전전하며 어찌어찌 목숨을 이어갔고, 시간은 꽤나 빠르게 흘렀다. 나는 항의하고 싶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죽여버린 마적떼의 시체를 씹어먹어도 울분이 풀리지 않을것 같았다. 그래서 한때는 하루를 꼬박 걸어 왕성으로 찾아가 보기도 했다.
왕? 왕도 신과 함께 죽었다. 마적떼를 섬멸할 기사단을 기대하고 갔던 나는 경비병의 발길질에 바닥을 굴러야 했다.
유난히 어머니 품을 좋아했던 나라 얼마간은 차가운 길바닥에서 하는 노숙이 힘들었지만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길바닥에서 잠을 이루고 나서...나는 어머니 꿈을 꾸기도 했다. 이따금 꿈속에서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꿈속의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금방이라도 '사랑스러운 내 아들'이라고 말하며 나를 안아줄 것 같던 어머니는 스펀지에 뿌린 물처럼 주변으로 스미며 사라졌다.
어머니 꿈은 꽤나 많이 꾸었지만 어머니를 안아본 적은...어머니가 나를 안아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어머니는 한번도 미소짓지 않았던 것 같다. 혼자 도망간 나를 질책하는 것일까. 나는 한동안 괴로움에 휩싸였다. 더 이상은 어머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난 결심을 했다. 어머니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가리라고...그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기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 내 눈앞엔 푸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하늘은 물과 닿아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수평선이란 건가보다.
저렇게 넘실거리는 푸른 세상속 어딘가엔 어머니가 있지 않을까? 나는 어머니를 찾고 싶었다. 언젠가는 저 파랑속에 숨어있는 어머니를 찾을 거라는 작은 가능성에 기대를 건 나는 주저없이 파랑에 동화되었다.
파랑에 동화된다는 것이 조금은 힘들었지만 지금까지 겪은 고통에 비하면 참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신은 죽었다. 왕도 죽었다. 아버지도 죽었다. 어머니도 죽었다. 마을사람들도 모두 죽었다. 이젠 나도 죽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