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외교에도 공짜는 없다
정전협정일이 또 지났습니다. 전쟁을 중단하자고 약속한 지가 69년째인데도 싸움은 아직까지도 멈추지 않았고, 계속됩니다. 북한군은 우리 영토 포격, 서울 침공, 항공기 격추, 함정 격침, 잠수함 침투, 지뢰 매설, 납치 등 공격행위를 밥 먹듯 자주 합니다. 6·25 남침을 비롯한 모든 전쟁 책임을 대한민국에게 떠넘기는 비열함은 혈통의 문제인가 봅니다.
전쟁을 지휘한 당사자는 아니지만 김일성의 전쟁 책임을 물려받은 손자 김정은은 최근 뻔뻔하게도 목소리 높여 전쟁을 또 운운합니다. 저급한 그의 말이 피로감을 더합니다. 항간에는 "김정은이 스위스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정통 민주주의에는 눈감았고, 발달한 자유경제는 오누이 둘만 즐겼고, 심지어는 잘 보존된 자연 풍광은 보지 않았나? 오직 주민들 옥죄고 겁주며 굶겨도 미안해하지 않는 잘못된 통치 술책만 배운 것 같다."는 말이 떠돕니다.
안면에 더 두꺼운 철판을 깐 것은 중국 공산당(정부)입니다. 대한민국을 멸망시키려 출병한 것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사실을 왜곡, 합리화합니다. 그들은 6·25를 최대 피해자인 대한민국의 손해와 아픔은 쏙 빼놓고 “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도왔다(抗美援朝)”고 말합니다. 거기에 더해 북한의 공격용 핵무기는 제쳐두고, 핵미사일 방어를 위해 우리가 들여온, 순수 방어 무기인 고고도 미사일(사드)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몽니를 부립니다.
중공은 남의 나라가 ‘방어도 못 하게 하는 후안무치’를 외교라고 합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펠로시 미 하원 의장의 방문 직후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위반했다"면서도 ‘하나의 한국’은 입 밖에 내지도 못하게 합니다. 중공 당국도 스스로 모순임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공산당은 ‘국가와 국민의 기억상실증’을 유도합니다. 아니 13억 인민을 6·25에 대한 ‘부분 기억 상실증 환자’로 만들어 갑니다.
중공은 최근 대한민국 정부의 정상화 움직임을 미리 선수로 막고 나섰고, 새 정부에 압력을 가합니다. 물론 두 한국을 묵인한 우리나라 외교팀(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실책이었지만, 그 뒤의 여러 정부와 국회가 모순을 바로잡아야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바로잡아야합니다. 국회가 앞장서십시오. 명분 없는 정치 싸움은 접고, 우리가 하나의 중국을 인정했으니 중공도 하나의 한국을 인정하라는 상호호혜의 원칙을 받아들이라 천명해야합니다.
당연히 반발이 예상을 뛰어 넘어 엄청 심하겠지요. 하지만 북한과 중공, 한국과 중화민국을 천칭의 양쪽에 올려두고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이것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에 공정하고 공평했다는 기록을반드시 남겨야 합니다.
중공과 전쟁(대결)을 하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싸우지 않고 얻는 것이 최상의 정책입니다. 합리적인 대응을 위해 총력을 모아, 필요하다면 국민이 어려움을 견딜 각오를 다지도록 설득해야 합니다. 근간에 중공이 중화민국을 겁박하는 것을 보았다면(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것에 버금감), 나라 지킬 각오를 다지거나 행동하는 것을 우물쭈물하지 마십시오. 대한민국 주권을 잃는 것이 중공에게서 얻는 경제적인 이익보다 가치가 크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여유가 없습니다.
6·25 전쟁에서 숨진 미군병사를 기억하는 추모의 벽 제막 행사가 한·미 군 당국자와 유가족 등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 워싱턴 한국전 참전 기념비 터에서 열렸습니다. 130미터 벽에 전사한 병사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용산 전쟁기념관 벽에 동판으로 새겨진 사망자 명단 중 미군병사와 미군에 배속된 한국병사(카추샤)를 따로 새긴 것입니다. 늦었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좌) 1950년 겨울 춘천방향으로 진군하면서 추위에 꽁꽁 언 주벅밥 한 덩이로 허기를 달래는 국군 보병 제5사단 병사들. 그래도 조국의 자유를 지킨다는 일념에 웃음을 잃지 않았다.(종군 사진작가 신의균 씨 촬영) (우)경기도 가평군 북면 카이저길45-63에 세워진 미군참전 기념비
정전일을 전후로 경기도 가평군 일대의 미군 참전 기념비를 비롯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영연방 등의 전투 전적비와 반공희생자 위령비 등을 돌아봤습니다. 가평지역에서 활동한 학도의용대, 산악대, 희생자 위령비 등도 각각 세워져 가평이 반공의 현장임을 보여줍니다. 가평지역 참전비가 다른 곳보다 많은 것은 가평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평은 중부지역으로 침입한 북괴군이 내륙으로 진격하는 주요 통로였습니다. 빼앗기고 뺏기를 수없이 반복한 기록이 전쟁 역사로 남았습니다. 보병 제5사단은 사단가로 “가평 춘천 탈환전”의 승리를 노래할 정도였습니다. 5사단은 북괴군 10사단과 중공군 제8병단을 대적한 가평 탈환전에서 적 사살 918명의 전과를 올렸습니다.
가평의 미군 참전 기념비에는 가평지역에서 전사한 미군 384명의 명단(워싱턴 추모의 벽과 용산 전쟁 기념관에 새겨진 이름과 겹침)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와 함께 “당신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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