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문학동네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월요일 외 4편 / 홍지호
월요일
처음은 자꾸 지나간다
관대한 척을 하면서
키스가 있었다
하루종일 숨을 쉴 때마다
당신이 숨쉴 때 나는 냄새가
들락날락거렸다
바퀴가 터진 스쿠터처럼
처음은 지나갔고 이제 키스를 해도
당신의 숨이 들락거리지는 않는다
처음이 지나간 후에도 나는 자꾸
처음이에요 라고 말하게 되었다
처음이라고 하면 선생이 되어주니까
선생이 늘어가고
미숙함을 이해해주었다
초범이라는 단어가 형량을 줄이는 것처럼
처녀작을 태워버리고
차기작을 발표한 작가가 있다면
그리워하겠지
형량은 늘어날 것이다
찾고 있던 신에게
질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처음으로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
나를 만든 건 처음이지요?
세상을 만든 것도 처음이지요?
그러면
봐줄 수도 있을 거 같다
시사회
의자가 있다
의자가 있다고 믿는다
의자가 있다고 믿는 믿음이 있다
의자에 당신이 앉는다
의자에 앉는 당신이 있다
극장에서
나는 주로 의자들과 영화를 봤다 그런 영화가
더 좋았다
우리는 흰 까마귀가 울거나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케이크를 먹거나
사람이 사람을 살리거나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이 죽어버리는
이상한 장면에서 동시에 울었다
그래서 좋았다
그래서 그 장면들은 정말로 복선이었으므로
복선인 거 같다고 말하지 못했다
주인공이 케이크를 엎어버리는 장면에서는 혼자 웃다가
동시에 웃던 장면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돌아가고 싶다 당신이 혼자
울고 있는 장면에는 자막이 없을 때
서로가 꼽은 명장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당신이 혼자 울고 있었다고 그래서 우는 척을 했다고
영화 속에서
흰 까마귀가 죽었다 살아나는 것 같은 이상한 장면들은 복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극장에서
의자는 영화의 전개과정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을 수 있다
의자가 있다
당신이 앉았던 의자가 될 것이다
당신이 앉았던 의자라고 믿는다
당신이 앉았던 의자라고 믿는 믿음이 있다
의자에 앉았던 당신이 있다
상영중인 영화가 아름답지 않다거나
의자는 없다고 생각해도
극장에는 의자가 많다
일요일
버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버리기 위해서 쓴다
쓰게 되면 버릴 것들이 생기니까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는 사랑해서 너를 썼나
너를 쓰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나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에게는 언제나 순서가 문제였지만
순서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오늘의 안식은 어제의 기념
계절은 바뀔 것이나
기념은 계속될 것이다
어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날이므로
어제를 쓰기 위해
오늘은 계속 버려질 것이므로
사랑의 창조자여
네가 일요일과 월요일 중 어느 쪽이 한 주의 시작인가에 대해 골몰할 때
오늘은 지나가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올 것처럼
오늘이 온다
가끔 너는
버리기 위해 너를 썼냐고 물을 수 있다
그건 내가 너를 쓴 의도와 다른 것이지만
너는 그럴 수 있고
너는 물을 수 있지만 나는
대답해줄 수 없다
나를 창조한 나의 피조물이여
나의 사랑하는 비문이여
너를 내가 썼다
내가 너를 썼다고 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 사랑하는 자여
문장에는
순서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다
토요일
친구야 너는 육손이였지
친구들에게
여섯 번째 손가락이 있던 자리를 보여줄 때
나는 너의 흉터가 부러웠어 친구들의 눈동자와
여섯 번째 상상력과
기차를 타면 자꾸만 풍경이 지나간다
풍경은 한 번도 지나간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귀밑에서 손가락이 만져졌지
친구야 너는 토요일에 죽었지
다른 친구들의 눈동자가
너의 사인(死因)을 자살이라고 적을 때
나는 추락사라고 쓰고 있다
어떤 책에는 신이 인간을
여섯 번째 날에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여섯 번째 날에 태어난 사람들이 자꾸 돌아다닌다
지나가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신의 손가락 개수가 궁금했었어
그건 쓰여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가 육손이였으면 좋겠다
여섯 번째 날에 세어볼 수 있게
너처럼 잘라버렸다면
상상으로라도 아플 수 있게
네가 잘라버린 손가락을 무의미라고 부를 때
나는 말해주지 못했다
무의미는
무의미한가
친구야 오늘은 토요일이야
너는 토요일을 셀 수 있었지
내일은 무의미한 예배를 드리자
귀밑에서 자꾸 의심이 자란다
심호흡
당연한 것들이 뒤집어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감정적으로
소리가 빛보다 빨라지는 순간 같은
비명과 절규가
미칠 수 있는 범위에서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순간처럼
진리는 만장일치겠지?
만장일치가 가능하다면
손이 발이 되도록 박수를 칠게
모든 지문이 다 사라질 때까지
소리를 지르면서
이해하는 척하면서 만장일치를
우리보다
나와
너가 좋아
물 한 방울이 더 좋아 최대한 흩어진 채로 우리는
뭉칠수록 위험해지니까 휩쓸거나
휩쓸리지 말자
아직도 홍수가 신의 심판이라고 생각해?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물속에서는 비명을 지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물속에서는 비명을 봤다는 비문이 가능해지잖아
간절하게 진리를 갈구하던 사람들이
거울을 보고 슬퍼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거울을 보다가
눈이 마주쳤으면 좋겠다 지문이 생기면
눈이 마주쳤을 때 느낌을 오래 간직하리
라고 다짐해야지
홍지호 : 1990 강원도 출생.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과 재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