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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글은 천부인과천부경 카페에서 퍼온글~~
(1 번에서 계속. 이 글은 1 번 낭하리 고각을 해독해 보고 그 실증을 위하여 현지 답사를 해 본 결과로 앞의 해독문을 실증하는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정리하면서 객관적 입장으로 부정해 보려 했으나 필자는 부정 할래야 부정할 수 가 없다. 이 글을 읽어 보시는 독자님들의 반론을 바란다.)
2.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낭하리 고각(古刻)해독과 현지 탐사 정리
이 필자가 찍은 이 고각(古刻)사진이나 전해오는 그림, 또는 인테넷 사진은 거꾸로 된 것이고 그 거꾸로 된 이유가 있었다.
* 필자가 바로잡아본 그림
1.서론
2. 옛 기록이나 전설로 본 증거
3. 지명이 말해주는 증거.
4. 웅녀 상이 말해주는 증거.
5. 황웅상이 말해주는 증거
6. Y자 같은 길이 말해 주는 증거
7. 그간 낭하리 고각 사진은 그간 왜? 거꾸로 되어 있었을까?
8. 天地人 마크의 정체
9.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10.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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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필자가 신지녹도문자, 수메르 우르문자, 초기 가림토, 원시 한자인 금문 등을 해독하여 독자님께 전체 메일을 보내는데 독자님이 낭하리 고각(古刻)의 해독을 의뢰 했다. 필자는 임승국님이 번역 주해한 한단고기에도 그 그림이 실려있고 또 여러 문헌에도 실려있던 그 그림을 한번 보고는 어떤자의 낙서인줄 알고 그냥 지나처 버린 일이 있는데 독자님의 질문을 받고 다시 검토해 보니 이 낭하리 고각 그림은 꺼꾸로 뒤집혀 있어 그간 해독이 되지 않았음을 알고 우선 바로 잡아 보니 대략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어서 필자카페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 114 번에 올린바 있었는데 이는 그림이 원시글자인 신지녹도전자, 초기 가림토, 또는 금문이 혼재되 있어 인류가 글자를 만드는 시초가 되므로 이는 우리 국보뿐 아리라 세계 인류 문화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하고 길이 보전해야된 귀중한 문화 유산이라 했다.
더구나 이 그 고각 그림, 글자는 필자의 기대 일지 모르나 잘 분석해 보면 이 그림은 신비하게도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필자의 해독만으로는 그 고각 그림이 왜 환숫(桓雄)을 말하는지 확증이 부족함으로 현지 답사를 하여 더 증거를 찿고자 2006.11.23 일 음력 개천절 전날 현지를 방문 하고 다음날 까지 현지를 조사 했었다.
그 결과 그간 환단고기에도 써 있드시 이 고각의 흔적은 확실히 환숫을 모델로 그려진 것이며 환단고기에 전해지는 전설이 전혀 허무 맹낭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증거들이 너무 많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낭하리 고각은 우리 학계에서는 그간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중국 일본학자들이 몰려 와 탁본이나 사진을 찍어 간다는 것인데 만약 우리 문화 유산을 우리가 해독을 하지 못하고 동북공정을 하려는 중국인, 또는 우리 역사를 말살 하려는 일본 학자가 먼저 해독하여 발표 하고 이를 정설화 한다면 이는 우리 한국인의 망신이고 또는 다시한번 우리 단군실화가 신화로 추락하게 될지도 모르니 다급한 생각이 들어 필자의 기대일지도 모르는 초승달과 샛별(금성)이 만나는 "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만큼은 아직 실증이 되니 않은채 이 글을 정리하고 여러 독자님께 알린다.
2. 옛 기록이나 전설로 본 증거
우선 옛 기록인 환단고기에 나오는 이야기 부터 다시한번 읽어보자.
* ...亦嘗聞南海道 郎河里 之溪谷及鏡珀湖先春嶺與夫烏蘇里以外巖壁之間時或有發見彫刻非梵非篆人莫能曉此 非神誌氏之所作古字 ...太白逸史神市本記
( 또한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 낭하리(郎河里) 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의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은 알수가 없는것 이라 했으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글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 大辨說註曰 南海縣 郎河里 之溪谷巖上有神誌古刻 其文曰 桓雄出獵致祭三神 又曰 大始傳古只憑口舌久而 後乃形以爲畵 又復畵變而爲之字盖文字之原...
(대변설大辯說>>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 大始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만 의지한 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 진시황때 서불(徐示)이 불로초를 구하러 다닌 흔적이라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또 인터넷에 올라 있는 글을 보면
*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하였다.
그 개량된 형태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篆字)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또한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 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에서 보이고 있다. (이하 생략)
3. 지명이 말해주는 증거.
위 환단고기 내용만으로 낭하리 고각이 환숫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면 그 지명에서 혹 환숫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까? 필자는 낭하리 고각을 탐사하고 돌아와 다음 일요일 혼자 등산을 해 가며 더 곰곰히 행각해 봤다.
지금 그 동네 이름은 남해군 양아리(南海郡 良阿里) 양이 마을 이라 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기록에는 남해현 낭하리(南海縣 郎河里)라 한다. 그렇다면 낭하리가 양아리로 된것은 선인들이 왜? 낭하리 라고 했는지 그 뜻을 몰라가지고는 한자로 보나 어음 으로 보나 그렇게 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쓰는 한자가 정립된것은 삼국 초 이니 낭하리 그 전 우리 말로는 뭐라고 했을까?
지금 전국에 걸쳐 있고 우리가 맥도 모르고 부르는 우리 행정 지명과 촌노들이 말하는 우리 지명을 비교해 보자. 몇가지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지명 중에 大田 이 있는데 과연 우리 선조들이 대전 이라고 했을까? 이는 큰 밭 이란 뜻의 한밭 이 한자로 기록하다 보니 大田이 된것이고 작은고개 라는 애오개가 이제 아현동 이 됬으며 전에 말한 필자의 고향 틀무시는 지금 기지시리(機池市里) 인데 그 이유는 틀무시는 애초 틀못이던것이 틀은 베틀機자를 쓰고 못 은 못 지池를 쓴것이며 市는 틀못에 우리가 그 즐겨 붙이는 약방의 감초격 접미사 이, 즉 갑순이 갑돌이 하는 이 가 붙어 틀못이 > 틀무시 가 되고 그러다 보니 里에 불과한곳에 市 가 붙었으며 이 순수한 우리 지명을 한자로 쓰자니 機池市里 가 되었다 했다.
그렇다면 낭하리(郎河里)도 한자가 들어 오기전 분명 우리 말이 있었을 것이다. 뭐라고 했을까? 필자는 걸으며 생각 하다가 깜짝 놀랐다. 그 전 우리말로는 틀림없이 '앵무리' 였을 것이다.
왜 앵무리 인가? 한자로 기록되는 郎 은 바로 삼시랑(三侍郞)을 말 한다. 가림토를 창제한 사람도 삼낭(三郞) 을보륵이고 ‘고려팔관잡기에 또한 말하되 삼랑(三郞)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를 뿌리고 재물을 관리하는자를 업(業)이라하고 교화와 복에대한 위엄을 주관하는자를 랑(郞) 이라하고 무리를 지어 공 이름을 주관 하는자를 백(伯)이라 하니 즉 옛날 하느님 시대에 발달된 풍습이다.’ (高麗八觀雜記亦曰三郞倍達臣也主稼種財理者爲業主敎化威福者爲郞主聚衆願功者爲伯卽古發神道也)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郎은 분명 삼시랑을 말하고 그 이외도 우리 사서에서 삼시랑은 그냥 간단하게 郎 이라 한 기록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郎, 즉 삼시랑은 환숫, 밝달임금(단군) 등 삼신을 받드는 직책이고 또 지금 전라, 충청지방의 할머니 들이 자녀를 10 여명 이나 낳았고 누가 " 할아버지와 금슬이 좋아 자녀를 많이 두었느냐?"고 물으면 " 금슬은 무슨 놈의 금슬? 삼시랭이 가 주책이 없어서 그렇게 됬다고 한다. 즉 삼시랑은 옛 부터 우리의 임신과 출산을 담당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지금 국어사전에서 화랭이 를 찾아보면 이는 ' 男巫', 즉 남자 무당으로 나오는데 화랭이의 원 말은 환한나라 앵이(앙이, 옹이)즉 환한것이 송판의 앵이 처럼 뭉처진것을 말하니 바로 환앵이가 화랭이가 되고 이것이 화랑도(花郞道) 가 됬으며 또한 이것은 풍월도(風月道) 라 하는데 風은 바람이고 月은 달 인데 달 은 우리말로 음달 양달 하는 달 이기도 하니 풍월이란 바달 > 밝달 이며 환숫께서 세웠다는 배달(培達)은 바로 밝달 의 변음이고 또 단군왕검의 우리말은 밝달임금 이다.
따라서 위 앵무리 의 앵 은 옹이, 앙이의 앙 에 우리말에 거의 붙어 다니는 접미사 이 가 붙어 앵이가 되고 이 앵이 한자로 바꿔 쓰면서 환앵이가 무당인 화랭이가 되고 또 이것이 화랑(花郞)이 되듯 이 앵이 郎 이 됬을 것이다.
또 앵물이의 물 은 낭하리의 하 가 물河자 이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낭하리 석각 그림이나 또 그 석각 앞에 바닷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앵무리 의 리 는 지금 里 가 아니고 위 틀못이 가 틀무시 가 된것같이 앵물이> 앵무리 가 됬을 것이다.
또 위 낭하리 고각위 산 정상에 단군성전이 있는데 이 건물은 지은지는 몇십년 되지 않으나 예전에는 석굴이 있었던 자리였으며 지금도 그 석굴에서 수도를 하시던 77 세되신 선사님? 과 그 할머니를 보좌하고 있는 부부가 단군성전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선사님은 다른지방의 음력 개천절을 지내러 가셨다 하므로 필자는 만나지 못하고 그를 보좌 하고 있는 분께 설명을 듣고 질문했다.
" 그럼 그 선사님은 혹 1960년대까지 진도 지방에 남아있던 단군의 도를 세습한 세습무인 당골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펄쩍 뛴다. 무당이 아니라 선사 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군의 도를 전하는데 선사(仙師)란 우리 말이 아니다. 단군때는 단군왕검 혼자 전국에 그의 도를 펼 수 없으니 각 지방에 심시랑 또는 단골> 당골레를 두고 사법 행정, 무속, 즉 누가 분쟁이 있으면 팔결 해결해 주고 또 아이들 혼인날짜나 제례뿐 아니라 심지어 굴뚝 고치는 날 까지 관장 하신 분이 있었고 일반 백성은 보리때 보리 한말, 벼때 벼 한말씩 바치고 그저 아이들 감기만 들었어도 단골집을 드나들기를 지금 단골집 드나들듯 했으며 그래서 지금 단골의 어원이 바로 이 단골이다.
그는 단군의 도를 세습 하였으니 세습무(世習巫)라 하는데 지금 무당은 단군의 도는 전혀 아는바 없이 당골무의 하는것을 어깨넘어로 보고 그저 신이 내려 흉내나 내고 푸닥거리나 하니 단군의 도와는 전혀 관게가 없는 강신무(降神巫) 일 뿐인데 그 분은 무당이면 같은 무당인줄 알고 펄쩍 뛴것이다.
그분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산 원래 이름은 금산(錦山)이 아니라 성모산(聖母山)이란다. 이는 필자도 이미 알고 있었드시 이성계가 여기 석굴에서 기도를 드리고 왕이 되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는다고 서약했으나 막상 건국하고 왕이 되자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을 수 없으니 비단금(錦) 자를 써서 錦山이 됐다는 것이다. 그럼 그 전에는 뭐라고 했을까? 바로 성모산 이라는데 성모는 마리아가 아니다. 우리 민족에게 성모란 단군의 어머님이신 곰례(熊女) 일 것이며 그렇다면 이 산 이름은 웅녀산 이었을 것이다.
그럼 왜 이산이 웅녀 산인가? 하긴 여기에는 전에서 부터 임신과 출산을 관장했던 삼신할매, 즉 아기를 낳으려면 빨이 나가라고 우리의 볼기짝을 때려 엉덩이가 시퍼렇다는 그 몽골반점의 원인 삼신할매인 웅녀나 또는 그를 대신하는 삼시랑, 당골레가 수도를 했고 일반 백성이 그 당골래 한데 기도를 드리기 위해자주 올라오다 보니 이 산이 웅녀 산이라 했을 것이고 이를 신성시 하기 위해 성모산 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4. 웅녀상이 말하는 증거.
그렇다면 그 웅녀의 흔적이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
" 성모님 상이 어디 하나라도 있습니까?"
" 예 있지요"
그는 나를 단군성전 뒷쪽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제단이 차려져 있고 아주 오래된 여인상이 하나 있긴 한데 그간 비 바람에 마모 되었는지 눈 귀 코 등이 모두 마도되어 있었다.
" 이분이 바로 성모님 이십니다. 아주 오래된 것이지요"
필자는 사진을 찍어 여러 독자님께 올리려고 했으나 그는 촬영금지 팻말을 가리키며 촬여을 금지 시켰다.
" 아니 사진 촬영을 해서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여러 사람이 여기에 와서 우리 뿌리를 찾게 해야 할것 아닙니까?"
" 선사님 께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 성모님 상이 세상에 공개되면 단군의 목을 치러 다니는 광신도들이 그냥 놔 둘것 같습니까?"
이상 말은 들어 보면 이 산 원 이름이 웅녀산 이었고 환웅과 웅녀는 한 쌍이니 환웅과 연관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낭하리 석각이 환숫과 관계가 있다는 한단고기 설이 전혀 낭설일 수가 없고 또 옛부터 전해지는 전설은 전혀 허무맹낭한 이야기 만은 아니며 또 필자의 그간 해독은 완벽 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 기록에서 진시황때 서불(徐市)가 불로초를 구하어 왔다는 흔적이라는 말은 진시 황때는 이미 지금 한자의 전신인 대전(大篆), 소전(小篆)이 있었고 위 낭하리 고각은 신지녹도전자, 초기 가림토, 금문등이 혼재해 있으니 진시황때 서불 보다는 최소한 2 천년은 앞섰을 것이며 또 낭하리 고각에는 영지 버섯이라는 불로초의 흔적이 전연 없으니 서불의 불로초 이야기는 일단 배제 해야 한다.
또 신지녹도전자 등을 해독해 보면 이것이 대변설의 주 에서 말 하듯 글자 만듦의 시초는 될 망정 그것이 최치원이 보고 해독했다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일 수도 없다.
5. 황웅바위 상이 말해주는 증거
환단고기를 보면 이곳에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가 천제를 내내던 곳 이라 했다.그렇다면 사냥은 한 군데서 할 수 없으니 여기 저기 환웅상 바위가 있어야 한다. 필자는 아래 이 낭하리 고각 그림해독에서 수레를 탄 사람을 황웅상 이라 했다. 그 이유는 이 그림 전체에서 보듯이 이 수레를 탄 사람은 전체 그림 비율로 보면 너무 큰 사람이고 또 天가가 밀고 있는데 天이란 하늘일 수도 있지만 금문으로 볼때 하늘을 이고 있는 大자 즉 네 활개를 펴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 있어서 하늘같이 위대한 사람이 과연 누구 일까?
이 석각 그림과 같은 바위를 찾아 보니 여러군데 있었다. 즉 보리암 뒤에 위 석각 그림과 같이 환웅을 밀고 올라가는 비슷한 바위가 보였다.
물론 아래사진은 수레도 없고 바퀴도 없으며 또 수레를 밀고있는것이 天 자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바위를 보고 이는 환웅이 사냥을 다닌다고 비정하고 추정했을 것이고 이것을 위 그림으로 나타낸것이 아닌가?
다음은 정말 위 석각 그림과 방향도 똑 같은 바위가 바로 낭하리고각 부근에 있었다.
물론 아래사진도 수레도 없고 바퀴도 없으며 또 수레를 밀고있는것이 天 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림이란 사진이 아니고 추상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바위를 보고 이는 환웅을 높히기 위해서 환웅이 사냥을 하러 다닌 흔적이라고 했을수도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전설이 됬는지도 모르고 이것이 환단고기에 기록 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6. Y자 같은 길이 말해 주는 증거
위 낭하리 고각을 보면 우선 첫번에 아래와 같은 Y 자같은것과 꺼꾸로 된 Y 가 같은것이 양쪽으로 붙어있는데 먼저 필자는 이것은 일종의 지형 이며 후세인들이 그 자리를 찾아가 천제를 지내라는 지도일수도 있다고 했다.
필자는 낭하리 고각을 찾으려 상주 해수욕장에서 보리암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를 올라가며 찾으려고 헤맸지만 도처히 찾을 수가 없었고 등산객들도 모른다 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쌍홍문 근처에서 그곳에 등산왔던 어떤 아기씨 둘 을 만나 친절히 안내받고 그 들은 현장까끼 안내 해 줬다.
그 낭하리 곡각이 있는 위치는 이 보리암 코스보다 등산로 입구에서 국도를 따라 자동차로 한 20 분으 더 가야 한단다. 필자는 그들의 차를 얻어타고 그곳으로 갔다.
그 고각있는 길은 철조망으로 길은 통제 해 놓았다. 그러나 돌맹이로 지질러 놓은 그 돌을 치구고 들어가 보니 그곳에 올라가는 오솔길은 먼저 보리암 올라 가는길 보다 암벽도 적고 경관도 좋았다.
생각해보니 5 천년전 선조들은 구태어 보리암 등산로를 택하지 않고 이 길을 택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즉 그때는 보리암은 그만두고 불교가 생기기 전이니까 구태어 그 급경사이며 암벽 투성이인곳으로 다녔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또 그 바로 위가 웅녀 신상이 있는 토굴이니 일반 백성들은 당연히 낭하리고각이 있는 이 길로 다녔을 것이며 지금 보리암 등산로 같은것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산 중턱까지 올라가자 Y 자형 세갈래 길이 나오고 이제 좌측으로 조금가면 그 현장이란다.
아래 사진상으로는 Y 자길이 선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출입구를 막아 길이 너무 피페해 졌고 거기다가 장마까지 져 길 흔적이 거의 사라졌지만 분명 좌측 덤불 뒤로는 좌측으로 가는 길이 선명하고 우측도 마찬가지 였다.
그렇다면 저 Y 자 밑에 붙어있는 꺼꾸로 된 Y 자는 어디 있을까?
우리가 올라올때 아스팔트 국도에서 철망을 처 놓은 샛길로 올라왔다 즉 ㅗ의 세갈래 길을 올라 왔는데 그곳 지형은 산 줄기로 약간 높았으며 그렇다면 옛날 길은 ㅗ 자의 양쪽 끝이 처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옛날길은 Y 와 꺼꾸로된 Y 자가 붙어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이는 분명 그 석각이 있는 장소를 가는 지도라는 추측이 맞는다.
" 여기서 더 올라가면 또 Y 자 같은 세갈래 길이 또 나오나요?"
그 낭하리 고각을 안내해준 아가씨들 한테 물어 봤다.
" 이런 길은 여기 밖에 없는것 같은데요"
" 그럼 저 Y자 같은 것이 붙은 그림은 석각의 지형이라는 제 추즉이 맞는것 같습니다"
좌측으로 조금 더 가니 드이어 현장이 나온다. 그 현장이 얼마전 까지만 해도 그대로 방치해 놓았다 했는데 지금은 남해군에서 철책을 두르고 안내 판도 써 붙였으니 고마웠다. 필나는 이 안내판을 보고야 이것이 경남 기념물 제 6 호임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올라 오는 길은 막아 놓고 누구 보라고 이 안내판을 써 붙였을까?
7. 그간 낭하리 고각은 왜 그간 거꾸로 되어 있었을까?
드디어 그 석각본을 촬영 할 수 있었는데 남해군청에서는 하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사진으로는 세밀한 선이 잘 보이지 않을것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해 가기때문에 자주 탁본을 하면 자획이 마모 될 수도 있어 사진이나 찍으라고 그 새겨진 선에 힌 페인드를 칠해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현장에 들어와 이 거북바위를 한 바퀴 돌아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에서 찍다보니 아래 사진과 같이 그림이 꺼꾸로 된다. 즉 우리가 들어온 반대 방향은 게곡의 절벽이고 다른곳으로는 이 현장에 들어 올 수가 없다. 그러니까 여기에 와서 탁본이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들어온 방향에서 이 거북바위를 한바퀴 돌아가 찍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렇게 찍으면 사진이 아래와 같이 꺼꾸로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부근의 지형과 지질을 조사해 보았다. 이 부근엔 바위가 없고 땅도 그냥 흙 뿐이다. 그렇다면 이 거북바위는 몇 만년전 위에서 굴러 내려와 여기에 가로 세워져 밖힌것일 것이고 바닦이 바위가 아니니 그간 지각 변동, 또는 침강에 의해서 단군때 가로 누어져 있던것이 그후 옆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이 바위를 원래대로 가로 세워 놓는다면 이 고각 그림은 이 거북 바위의 머릿 부분이 되며 그림도 바로 서게 된다. 필자는 바위 위에 올라가 다시 찍어 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그림이 바로 잡아 졌다.
그러니까 위 환단고기에 "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 는 말은 정말 환웅이 천하를 순시하며 여기까지 오셨을 수도 있겠지만 환웅께서는 중국 본토, 즉 고조선 유적지에서 밝달나라를 세우시기도 바뿐데 여기까지 멀리 오셨다는것 보다 삼시랑, 또는 당골레 들이 여기에 산재해 있는 환웅상 바위를 보고 환웅이 사냥나온것이라 말 할 수도 있고 또 이 산은 위 삼신할미인 웅녀신상에 치성을 드리느라고 자주 다니는 곳이며 옆에 환웅상 바위가 있으니 여기 세워진 거북바위 위에 낭하리 고각 그림, 글자를 새겨 놓고 이 바위를 병풍삼아 그 앞에 제물을 차려 놓은다음 그앞 에서 삼신께 천제를 지냈다고 보는것이 옳은 해석일것이다. 즉 이 바위 위에 제물을 차려놓고 천제를 지내기에는 바위가 너무 적다.
즉 아래 사진 석각의 반대방향이 들어 오는 입구이니 이 사진을 찍으려면 한 바퀴 돌아와 찍어야 되며 이 석각 쪽 방향은 계곡의 절벽이 되니 길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고각본을 탁본 한다거나 사진을 찌으려면 당연히 그 고각본을 머리로 두도 찍어야 할것이다.
8 天地人 마크의 실체
필자는 낭하리 고각 해독에서 아래 그림은 천지인 마크라 했다.
즉 위 T 자중 ㅡ 은 금문상 하늘이고 ㅣ 은 사람이며 우측 많이 펴진것 같은 ㄴ 은 신지녹도전자 하나의 나 에서도 설명했드시 누리, 즉 땅이다. 그렇다면 T 자옆 점은 무엇인가? 필자는 이는 지는 해 이거나 새로 솟는 샛별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 마크는 천지인 마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답사 해 본 결과에 의하면 이 점 은 일단 무시해도 좋다. 그 이유는 바위에는 석회 성분이 섞겨 있을 수도 있고 그 석회 성분이 그간 빗물에 녹아 구멍이 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 낭하리 석각을 안내해준 아가씨 들께 구멍을 집어보며 그 위치와 깊히를 측정해 보도록 했다.
이 구멍들은 비단 이 뿐이 아니다. 심지어 이미 파 놓은 그림 선에도 있는데 이것을 표 하기 위해 단풍잎을 따서 표시 했다.
9.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다음 사진은 낭하리 고각 그림이 있는데서 조금 더 올라가 좌우 암벽을 상징하는 고각 그림에서 좌측으로 추정되는 바위까지와 와 환웅상 바위를 찍은것이다.
우선 낭하리 고각 그림 그 부분 부터 보자.
이 고각 그림에서 좌 우측으로 세워진것은 암벽이고 그 아래 口 자는 암벽으로 들어 가는 문 으로 추정하며 그 아래 반달 같은것과 물아래 점은 물에 비친 초승달과 샛별(금성)이 만나 물위에 비치는 그림이라고 해독 했었다.
아래 사진은 이 고각 그림의 좌측으로 추정되는 암벽과 환웅상 바위를 찍은것이다.
아래 사진은 고각 그림 우측으로 추정되는 산 높이까지이어진 바위들인데 환웅 바위와 좌우측 바위가 한꺼번에 보이는 사진은 가시덤불과 게곡 절벽으로 길이 없어 찍지를 못했다.
그러나 이 사진보다 더 실질적으로위 석각의 암벽과 암벽 문을 나타내는 바위는 바로 보리암 밑 쌍홍문에 있었다. 먼저도 말 했드시 낭하리 고각은 사진처럼 일정한 장소를 모델로 하여 그린것이 아니라 웅녀산 전체의 특이한 경치중에 특이한 장소만 뽑아 그린것 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아래 口 자 모양으로 된 굴 입구 부터 본다.
바위 문을 더 들어가서 찍었다. 멀리 반달형 상주해수욕장 바닷 물도 보인다.
그렇다면 그 문위 석주도 있어야 한다. 석주를 찾았다. 앞에 바닷물도 보이지 안는가?
다음은 필자의 기대 일지 모르나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라는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 물위에 비치는 장면이다. 이 초승달이 뜨는 때는 음력으로 초사흘 이면 항상 뜨겠지만 그렇다고 샛별과 가까이 만날때는 그 공전궤도 등이 다르니 자주 만날 수가 없을 것이고 어쩌면 일년에 한번만 만날수도 있으며 그것이 개천절 전날 저녁이거나 개천절 새벽 이라면 이는 정말 환상적이다.
즉 달력도 없었을 원시에 그저 눈이 오면 겨울이고 더우면 여름인 그 때 하늘을 연 개천절의 정확한 날짜를 무엇으로 알았을까? 하늘의 달과 별의 움직임을 보고 알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 환상적 장면은 개천절 전날 저녁이나 개천절 이른 새벽에 찍어야 하는데 하필 그날 구름이 끼고 빗발이 날려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쌍홍문앞의 상주 해수욕장, 그리고 낭하리 고각 앞에서 바닷물 사진은 찍었다. 바닷물은 석각 그림에서와 같은 반월형이다. 그렇다면 석각 그림의 반달은 단순한 바닷물 그림인가?
그러나 독자님중 나리 님의 증언에 의하면 나리님은 낙시를 하러 자주 그곳에가는데 음 10 월 상달이면 유난히 바다물이 잔잔하고 또 낙시를 하려면 새벽에 나가는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 못하고 대략 한달전 새벽 5 시 30 분~ 6 시 사이에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 환상적 물 그림자를 나타내고 있는것을 보았다 한다. 그분은 절대 저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금년은 윤달이 끼어서 정확한 개천절이 약간 빗나갈 수도 있지만 한달전 이라면 거의 평소 개천절과 비슷하게 맞는다.
그러나 그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는 시기는 꼭 개천절 뿐이 아니고 매달, 아니 몇달에 한번씩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이는 더 실증을 요하는 사항이다.
10. 결론
이상을 보면 이 낭하리 고각은 절대 할일없는자가 그린 낙서가 아니다.
낭하리 고각 해독에서 말했드시, 또는 위 대변설 주에 말했드시 이는 그림이 글자로 변하는것이며 또 어느것을 보나 이 고각은 5 천년 이상은 됬을것이고 그렇다면 그때는 쇠 붙이 조차 만들어 지지 않았거나 또 쇠가 있다해도 흔할때가 아니니 청동 정이나 별똥별 떨어진 강한 돌 쪽등, 시원치 않았을 연장을 가지고 이 그림글자를 새긴다는것은 보통 성의가 아니면 않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 글자는 그림이 원시 글자로 변하는것이니 이는 우리 국보뿐 아니라 인류 문화 유산이 될 수 있다는것이며 따라서 유네스코 등에 등록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의 기대 일지 모르나 그저 꽃이 피면 봄 이고 더우면 여름이며 낙옆이 지면 가을이고 눈이 오면 겨울인줄 알던 원시에 하늘을 연 개천절을 정확하게 알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초사흘 달과 샛별이 만나는날, 이것이 개천절을 알리는것 이라 한다면 이는 우리 조상의 천문 관측 기술이 그만큼 세밀 했다는 것이니 이 환상적 하늘의 편지를 말로 더해 무엇하랴?
그러나 그 하늘의 신비가 일어 나지 않는다면 초승달 그림은 단순한 그 앞에 있는 바닷물 그림이라 해야 하고 또 그 물아래 비치는 샛별 이라는 점도 그냥 빗물 구멍이라 하고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할 뿐이다.
좀더 자세하고 재미난 내용은 다음 3~4 번 "여담 낭하리 고각 탐사기" 에 써 있다.
부디 중국, 그리고 일본 학자가 해독하기전 뜻 있는 분들과 관계 당국에서 관심을 가져 점 더 세밀히 감정한다음 유네스코에 등재해 주기 바란다.
-끝-
* 다음 3. (여담) 남해 낭하리 고각 탐사기 는 필자가 낭하리 고각을 탐사하면서 각종 실수 했던 일과 주접을 떨었던 내용을 순 육두문자로 재미있게 써 놓았으니 그냥 재미로 읽어 주시라.
책 '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저자
고대 문자 연구가
카페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운영자 http://cafe.daum.net/chunbuinnet 우리: 구 길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