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좋아하는 영화 장르가 있겠지만
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그리 편안하게 즐기지는 않는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 '박쥐' 등의 영화는
시놉시스만 보고도 안볼 결심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번 영화는 꼭 보고 싶었다
왠지 그동안 박 감독이
영화제 출춤을 위해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닐까 하고
약간의 혐의를 두고 있던 사람으로써 이번 작품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이 작품이 그야말로 박찬욱감독 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약간의 미스테리는 담았지만
멜로 장르에 비교적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반가움 때문이다
(예술영화와 대중영화의 경계는 애매하지만)
배우들의 눈에도, 대사에도, 장면에도 그야말로 독기를 쫙 빼버린 순한 영화라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
그래도 박찬욱 감독이니 가끔 눈을 가려야 할 장면도 나오긴 한다
개봉날짜를 손꼽아 기다린 데는 무엇보다 탕웨이를 오랫만에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기 때문이다
오래전 김태용 감독의 작품 '만추'에서
현빈과 너무나 멋진 눈빛 연기를 보여줬던 탕웨이 아닌가
이 작품에서도 역시 눈빛연기가 일품이다
어눌한 한국어가 그녀의 연기 깊이를 조금 상쇄시키는 것 아냐? 하고 생각할 즈음
중국어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연기는 단박에 살아난다
남편을 살해한 가장 강력한 용의자와 열정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로 만난 두 사람
어쩜 두 사람의 관계는 이런 사회적 연결장치가 아닌
눈빛으로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사 박해일은 그 눈빛 하나로 그녀를 믿고 싶은, 형사가 아닌 한 남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탕웨이 역시 피의자가 아닌 진실한 정이 그리운 여인이 되어가고
속이고 있는 듯
감추고 있는 듯
더 깊이 파헤쳐야 하는데 이미
그녀의 눈빛에 형사로서의 신분을 던져버린 남자
곧 밝혀지겠지만 그냥 이 남자의 따뜻함에 녹아들기 시작하는 여자
우연한 기회로 그녀의 실체를 다시 조사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 여인을 그리 험하게 다루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 여인을 보호하려면 다소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건으로 또 엮이게 되는 두 사람
다 정리되어 불면증을 앓고있는 한 형사로 돌아온 알았는데...
파국으로 치닫을 수 있는 여러 정황들을
감독은 두 남녀의 눈빛에 교묘하게 녹아내어 관객인 우릴 혼란스럽게 만든다
박찬욱 감독은 지금 시름에 겨워하고 있다고 한다
내심 영화제의 트로피까지 가져왔으니 흥행은 절로 따라올 것이라 믿었는데
영화가에선 그렇지 않은가 보다
박찬욱 감독의 장르를 좋아했던 팬 층에서 다소 동요가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박찬욱스럽지 않은 영화라고.
난 독기 빠진 다소 슴슴하게 만들어진 게 더 좋은데....
그래도 마지막 장면은 정말 박찬욱 감독스럽게 만들었다
탕웨이의 바닷가 씬.
그 만이 만들 수 있는미장센을 다 담아 보여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조용히 들려오던 정훈희의 목소리
맑은 목소리로 힘을 빼고 부르는 '안개'는 정말 멋졌다
이 영화와 너무 어울린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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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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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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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 가 다오~~>
새삼 이 가사를 곱씹어 보니 이렇게 애절한 노래였구나 생각된다
정훈희와 함께 부른 가수가 처음엔 송창식인지 몰랐다
정훈희의 목소리에 잘 녹아들지 않는 것 처럼 느껴졌다(나만 그런가?)
저 남자 목소리는 누구지 했다가 알아보곤 깜짝 놀랐다(이것도 나만 그런가?)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영화관을 나섰어도
난 아직 영화 속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운전해서 집에 도착했건만 아직 영화는 진행 중인 듯 느껴졌다
한동안은 장면 하나하나
눈빛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
자꾸 반추하게 될 것 같다
좀 시간이 지나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본다면
그 땐 다른 의미로 다가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