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 공기로 전파된다는 점 확인돼 400년 전 허균도 비슷한 진단 제시
소를 우대한 조선은 밀도살을 엄금했다. 성종 때는 밀도살자의 얼굴에 먹으로 재우(宰牛)라고 새겼다. 재(宰)는 재상의 의미도 있지만 도살의 의미도 있기에 백정을 재우군(宰牛軍)이라고도 부른다. 숙종 때는 강제로 극변(極邊)에 이주시켰다.
그래도 밀도살이 없어지지 않은 이유는 수요처가 부호들이었기 때문이다. 효종의 둘째 사위인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의 궁노(宮奴)가 우금(牛禁:밀도살 금지)을 범하고도 단속 관리를 구타했다’는 『효종실록』과, ‘천안군수 김득대(金得大)가 밀도살한 소를 시장에 내다팔다가 파직됐다’는 『숙종실록』의 기록 등이 이를 말해준다.
『조선총독부관보』 1933년 4월 10일자가 “평북 일대에 구제역(口蹄疫)이 확산되어 방역방침 엄수에 관한 평안북도 고유(告諭) 제1호가 발포되었다”고 전하는 것처럼 소 전염병에 대해 일제 때부터는 구제역이라고 썼지만 조선 때는 우역(牛疫:소 전염병)으로 썼다. 우역은 전쟁이나 기상이변 등과 함께 온다는 특징이 있었다. 병자호란(1636) 때 ‘우역이 팔도에 퍼져 소가 멸종되려 했다’는 『인조실록』의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그때 조정에서는 도살을 살인죄처럼 사형으로 다뤄 겨우 멸종을 막았다. 현재의 구제역도 이상 한파와 함께 왔는데 조선 현종(顯宗:재위 1659~1674) 때는 더 심했다. 경신(庚申)대참변으로 불렸던 현종 11~12년(1670~1671)에는 한해(旱害:가뭄)·한해(寒害:혹한)·수해(水害)·냉해(冷害)·풍해(風害)·충해(蟲害)에 우역(牛疫)에 여역(<7658>疫:인간전염병)까지 팔재(八災)가 휩쓸어 소는 물론 “굶어 죽은 백성들이 길에 깔렸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최근에는 16~19세기 전 세계적인 소빙기(小氷期)의 여파가 현종 때 조선을 강타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근 국내 최초로 구제역 바이러스가 공기로 전파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허균(許筠)도 17세기 초반에 쓴 『한정록(閒情錄)』에서 비슷한 진단을 내놓았다. 허균이 광해군 6~7년에 북경에 다녀오면서 사재로 무려 4000권의 책을 구입해 쓴 책이다. 『한정록』의 ‘소를 기름(養牛)’조에서 허균은 ‘우역의 유행은 훈김[熏蒸]에 서로 전염되는 수가 많으니 다른 소가 있는 곳에 데려가지 말고 나쁜 기운을 제거하면서 약을 쓰면 혹 살릴 수도 있다’고 썼다. 허균은 또 “소의 병은 일정하지 않지만 약을 쓰는 것은 사람과 유사하다”고도 썼으니 음미할 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