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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8장 1장 ~ 19절
그러자 맛탄의 아들 스파티야와 파술의 아들 그달랴와 셀레마의 아들 유칼과 말키야의 아들 파술이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들에게 고한 말들을 들었으니, 말하기를 1)
Then Shephatiah the son of Mattan, and Gedaliah the son of Pashur, and Jucal the son of Shelemiah, and Pashur the son of Malchiah, heard the words that Jeremiah had spoken unto all the people, saying, 1)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성읍에 남아 있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의하여 죽을 것이나 칼데아인에게 나가는 자는 살리라. 그가 자기 생명을 약탈물로 가질 것이므로 그가 살리라. 2)
Thus saith the LORD, He that remaineth in this city shall die by the sword, by the famine, and by the pestilence: but he that goeth forth to the Chaleans shall live; for he shall have his life for a prey, and shall live. 2)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 성읍이 반드시 바빌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겨지리니 그가 그것을 취하리라." 하더라. 3)
Thus saith the LORD, This city shall surely be given into the hand of the king of babylon's army, which shall take it. 3)
그러므로 고관들이 왕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왕께 간구하노니 이 사람을 죽이소서. 이는 이 사람이 그러한 말들을 그들에게 말함으로써 이 성읍에 남아 있는 전사들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며, 이 사람은 백성의 안녕을 구하지 아니하고 해를 구함이니이다." 하니 4)
Therefore the princes said unto the king, We beseesch thee, let this man be put to death: for thus he weakeneth the hand of the men of war that remain in this city, and the hand of all the people, in speaking such words unto them: for this man seeketh not the welfare of this people, but the hurt. 4)
시드키야는 예루살렘을 점령한 느부캇넷살에 의하여 세워진 왕입니다. 그런 왕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의 고관들이 바빌론의 군대가 철수하자 예레미야를 죽이자고 나서는 모습입니다. 기회주의자들의 모습입니다. 적어도 예레미야는 상황과 관계없이 일관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고관들은 바빌론의 점령당시에는 침묵으로 있다가 그들이 떠나자 예레미야를 죽여야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시드키야왕이 말하기를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노라. 이는 왕은 너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더라. 5)
Then Zedekiah the king said, Behold, he is in your hand: for the king is not he that can do any thing against you. 5)
그 신하의 그 왕입니다. 백성의 눈치를 보는 왕은 겸손해보일 수 있지만 위기에서 책임과 결단력이 없는 우유부단함으로 그 백성들을 사지로 내모는 무능한 왕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왕에게 결정권한이 있는데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빌라도의 모습이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빌라도와 시드키야는 직접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죄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시대에 있어서는 문재인이 백신을 자신의 결정 사항이 아니라고 회피하는 것과 닮았습니다. 문재인은 대통령의 권한으로 살인에 대한 책임을 가진자입니다. 그것을 자신이 부인하고, 그것이 법적으로 살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는 하나님앞에서 살인을 저질렀으며, 그에 대한 책임은 문재인 개인에게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O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그러나 그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쓸모없어진 소금은 밖에 내어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장 13절
자신은 아무 결정권한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소금은 짜야 그 주변을 썩지 않도록 하여줍니다. 썩는 것은 곧 우리가 모두 사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과 같고 사탄이 권세를 잡은 이 땅이 더이상 썩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망설이지 말고 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옵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
마태복음 6장 13절
시험이라고 번역한 temptation은 망설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앞에서 망설이지 않았고, 옥합을 깬 여인도 그 값을 계산하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시험이라고 번역된 temptation에 접어든다는 것은 곧 순종하지 못함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생각하기 이전에 벌써 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망설이는 자와 망설이지 않는 자의 차이는 곧 믿음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생각으로는 믿지만 계산으로는 믿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이 적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은 믿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있음과 없음만이 존재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분께서 너희를 더욱더 잘 입히지 아니하시겠느냐?
Wherefore, If God so clothe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to day is, and to morrow is cast into the oven, shall he not much more clothe you, O ye of little faith?
마태복음 6장 30절
O ye of little faith = 믿음이 적은 자들로 번역함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a little faith가 아닌 little faith이기 때문입니다. a가 없는 little는 부정형이 되어 믿음이 없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오 너희 믿음이 없는 자들아, 그분께서 너희를 더욱더 잘 입히지 아니하시겠느냐?
일루미나티와 그들의 수하들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갈 지옥에 대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일루미나티들은 죽으면 잠드는 것이라 생각하고, 영원히 잠들지 않고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국가인 존레논의 imagine에 no heaven, no hell below us라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Imagine there's no heaven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It's easy if you try
시도해 보면 어렵지 않죠
No hell below us
우리 밑에 지옥은 없고
https://blog.naver.com/yujmmm/223073656497
존레논의 이매진의 가사는 일루미나티를 분석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정보를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곡은 일루미나티의 국가라고도 불리우며 그 내용이 그들의 강령과도 같아서 지금 진행되는 무소유, 공산주의의 개념이 가사에 담겨있음이 드러나 보입니다.
이들이 이토록 용감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도 계시지 않으며 그들을 위한 지옥도 없다고 믿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장 눈에 보이는 사탄이 주는 권세와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로써는 이해할 수 없지만 똑똑해보이는 그들이 진리에 눈을 가려서 무학자들도 깨닫는 진리에 들어오지 않음은 그들의 죄의 댓가라고 여겨집니다. 그들의 마지막의 모습은 존레논이 보여주었습니다. 사탄은 존레논의 진정한 영광을 바라지 않으며, 그들의 용도가 더 이상 필요없으면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암살범들의 바이블이 된 베스트셀러!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미스터리 공개!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https://tv.naver.com/v/10949351
존레논을 죽인 채프먼이 읽고 있었다는 호밀밭의 파수꾼도 존레논의 이매진과 같은 류입니다. 그들에게는 사람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가축이며, 죽이고 또 키워서 죽이면 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그들의 죄를 짓는 것에까지만 그렇게 이뤄지고 현실은 죄인과 죄만이 남게 됩니다.
그런 일루미나티들에게 한가지 충고하자면 지옥은 당신들이 느껴지는 것처럼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애써 no hell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발 당신만은 돌이키십시요. 그곳은 당신들의 악한 행위보다 더 잔인한 곳입니다. 당신들도 그곳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면 일루미나티들 존레논처럼 스스로 솎아내지요? 일루미나티들은 필요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당신이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일루미나티 수하로 당신이 아직 살아있는 것은 자기보호라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명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입장에서는 당신은 이쑤시개와 같은 도구고 쓰다가 던져버릴 것일 뿐입니다.
당신은 스스로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사명의 작동됨과 사탄의 도구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야만 합니다. 아무리 사탄의 수하들이라도 사탄의 도구됨을 선택하고 자신을 소멸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하나님의 사명의 작동됨으로 스스로를 보호하지만 사탄에게 속아서 자기파괴라는 소멸의 길을 속아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루미나티들은 속고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일루미나티와 그의 수하들은 시드키야왕과 그의 신하들처럼 비겁하게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꿉니다. 심지어 그들 자신을 기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루미나티에 충성한 사람들이 잠시 그들이 제공하는 이 땅의 영광을 누리다 존레논처럼 배신당하고 소멸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들에게 이미 시작된 지옥의 예고편입니다.
이글을 일루미나티가 읽을 가능성은 없는데 왜 일루미나티에 대한 글을 쓰는 가는 믿음의 속성 때문입니다.
적은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믿음과 믿음없음만이 존재하며, 주저하고 망설이는 믿음은 곧 믿음없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하는 믿음의 소유자인 당신이나 사탄을 굳게 믿고 있는 일루미나티나 믿음없음은 동일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글은 일루미나티와 동일 선상에 있는 저와 당신을 위한 글이 됩니다.
O ye of little faith?
그러자 그들이 예레미야를 붙들어 그를 감옥의 뜰에 있는 함멜렉의 아들 말키야의 지하감옥에 집어넣었는데 그들이 예레미야를 줄로 내리더라. 그 지하감옥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에 빠졌더라. 6)
Then took they Jeremiah, and cast him into the dungeon of Malchiah the son of Hammelech, that was in the court of the prison: and they let down Jeremiah with cords. And in the dungeon there was no water, but mire: so Jeremiah sunk in the mire. 6)
O 그때에 왕궁에 있는 내시들 중의 한 사람인 에디오피아인 에벧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지하감옥에 집어넣은 것을 들었는데 그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아 있으니 7)
Now when Ebed-melech the Ethiopian, one of the eunuchs which was in the king's house, heard that they had put Jeremiah in the dungeon; the king then sitting in the gate of Benjamin; 7)
에벧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8)
Ebed-melech went forth out of the king's house, and spake to the king, saying, 8)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로 악을 행했나이다. 그들이 그를 지하감옥에 집어넣었으니 그가 있는 곳에서 굶어 죽을 것 같나이다. 이는 성읍에 더 이상 빵이 없음이니이다." 하더라. 9)
My lord the king, these men have done evil in all that they have done to Jeremiah the prophet, whom they have cast into the dungeon; and he is like to die for hunger in the place where he is: for there is no more bread in the city. 9)
왕이 에디오피아인 에벧멜렉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여기서 너와 함께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지하감옥에서 끌어내라." 하므로 10)
Then the king commanded Ebed-melech the Ethiopian, saying, Take from hence thirty men with thee, and take up Jeremiah the prophet out of the dungeon, before he die. 10)
고관들과 에벧멜렉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드키야의 매우 유약한 모습이 보입니다. 느부캇넷살이 누군가 유다의 왕으로 삼을 때에는 힘을 모아 반격할 만한 배포를 가진 자를 왕으로 삼을리가 없는 것입니다. 시드키야는 느부캇넷살이 보기에 매우 무능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왕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에벧멜렉이 그와 함께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의 보고 밑으로 내려가서, 헝겊과 헌 옷가지를 취하여 그것을 지하감옥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줄로 내리게 하고 11)
So Ebed-melech took the men with him, and went into the house of the king under the treasury, and took thence old cast clouts and old rotten rags, and let them down by cords into the dungeon to Jeremiah. 11)
에디오피아인 에벧멜렉이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너는 헝겊과 헌옷가지를 네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다 대라." 하니 예레미야가 그렇게 하더라. 12)
And Ebed-melech the Ethiopian said unto Jeremiah, Put now these old cast clouts and rotten rags under thine armholes under the cords. And Jeremiah did so. 12)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들어올려 지하감옥에서 그를 끌어내었더니 예레미야가 감옥의 뜰에 머무니라. 13)
So they drew up Jeremiah with cords, and took him up out of the dungeon: and Jeremiah remained in the court of the prison. 13)
O 시드키야왕이 사람을 보내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주의 전에 있는 셋째 입구로 그에게 데려오게 하여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내가 네게 한가지 묻겠노라. 내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 하니 14)
Then Zedekiah the king sent, and took Jeremiah the prophet unto him into the third entry that is in the house of the LORD: and the king said unto Jeremiah, I will ask thee a thing; hide nothing from me. 14)
예레미야가 시드키야에게 말하기를 "만일 내가 그것을 왕께 밝힌다 해도 왕께서 결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내가 왕께 조언을 드린다 해도 왕께서는 내게 경청하지 아니하시리이까?" 하더라. 15)
Then Jeremaih said unto Zedekiah, If I declare it unto thee, wilt thou not surely put me to death? and if I give thee counsel, wilt thou not hearken unto me? 15)
여기서 번역에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의미로 보면 "내게 경청하시겠나이까?"로 번역함이 맞습니다. 그런데 죽이지 않겠나이까와 듣지 않겠나이까는 차이가 없어보입니다, 같은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보존학회의 직역은 의미가 깨집니다.
예레미야가 시드키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왕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이 단정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 할찌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개역개정 예레미야 38장 15절
개역개정의 번역이 매우 부드럽고 의미전달에 어색한 부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드키야왕이 예레미야에게 은밀히 맹세하여 말하기를 "우리에게 이 혼을 만드신 주께서 살아 계시거니와,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너를 주지도 아니하겠노라." 하니 16)
So Zedekiah the king sware secretly unto Jeremiah, saying, As the LORD liveth, that made us this soul, I will not put thee to death, neither will I give thee into the hand of these men that seek thy life. 16)
시드키야는 예레미야를 살려주는 것에 대해서는 맹세하지만 그의 말을 경청하겠다고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는 시드키야의 일관된 자기 신념처럼 느껴집니다. 왜냐면 시드키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한두번 거절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살려주기는 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에는 아직도 자신의 신념에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살려주는 일보다 예레미야의 말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것이 더 크고 중대한 일인데 그것을 소홀히 여기는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매일의 삶의 사건들 즉 생계가 걸린 일들이 중해보이나 실제로는 위의 말씀의 기록된 내용처럼 주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시드키야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일 네가 바빌론 왕의 고관들에게 의심없이 나아가면 네 혼이 살겠고, 이 성읍도 불로 살라지지 아니할 것이요, 너와 네 집이 살 것이나, 17)
Then said Jeremiah unto Zedekiah, Thus saith the LORD, the God of hosts, the God of Israel; If thou wilt assuredly go forth unto the king of Babylon's princes, then thy soul shall live, and this city shall not be burned with fire; and thou shalt live, and thine house: 17)
만일 네가 바빌론 왕의 고관들에게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그때는 이 성읍은 칼데아인들의 손에 주어져서 불사름이 될 것이며, 너도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리라." 하더라. 18)
But if thou wilt not go forth to the king of Babylon's princes, then shall this city be given into the hand of the Chaleans, and they shall burn it with fire, and thous shalt not escape out of their hand. 18)
시드키야왕이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나는 칼데아인들에게 항복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노니 이는 칼데아인이 나를 그들의 손에 넘겨주어 그들이 나를 조롱할까 함이라." 하나 19)
And Zedekiah the king said unto Jeremiah, I am afraid of the Jews thet are fallen to the Chaleans, lest they deliver me into their hand, and they mock me. 19)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시드키야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나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모두 잠시 내곁에 있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함께 끝까지 계시고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시드키야처럼 다른 사람의 시각을 의식하며 사는 삶의 과정은 고통스러움이고, 그런 삶의 결과는 불순종의 파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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