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마주치는 거기에서 도가 있다.
마음이 청정(淸淨)한 것이 부처요,
팔만 사천 무진한 부처님이 있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이 청정(淸淨)한 그 자리가 참된 부처이다.
진리(眞理)는 원래 말이 없다. 무언(無言)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대각(大覺)을 이루어 49년 동안 설법(說法)하였지만,
중생을 위해서 부득이해서 한 것이지 그 진리 자리는 말 못 하고 글로 써낼 수가 없다.
그래서 없는 가운데 무법설법(無法說法)이 시명설법(是名說法)이라.
설법할 게 없는 게 이름이 설법(說法)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다만 이 자리는 언어 문자가 전부 떨어졌는데 부득이해서
여러 사람을 위하여 말과 문자로 하는 것이고 또 목격이도존(目擊而道存)이라.
눈이 마주치는 거기에서 도가 있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그래야 알지, 이 진리(眞理)를 말이나 글을 가지고 알려고 하면
백 년을 말하고 백 년을 글 써내도 말은 말이고 글은 글이지
이 자리를 그려내지 못하고 써내지 못하는 것이다.
추야장천상하원융(秋夜長天上下圓融)
일색노화명월왕래(一色蘆化明月往來)
가을 물 긴 하늘에 위와 아래가 원융하고
한 빛 갈대꽃에 밝은 달이 왕래하네.
이것이 오늘 여러분에게 하는 간단한 설법인데 내가 늘 말하지만,
종사(宗師)가 자리에 앉기 전에 법문(法門)이 다 되고
또 청중이 자리에 앉기 전에 법문이 다 된 이 도리를 알아야지
입을 가지고 무엇이라고 하고 글을 가지고 무엇이라고 하는 거기에 걸리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다 문(門)밖의 소식인데
문 안의 소식과 문밖의 소식이 따로 있으랴마는 말하려고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월침야수광명장(月沈野水光明藏)
난토춘산고불심(蘭吐春山古佛心)
달이 들 물에 잠겼으니, 광명을 감추었고
난초가 봄, 산에서 옛 부처의 마음을 토하네
법문(法門)은 우리가 일상생활 하는데 다 있으니
일상생활 하는 밖에서 진리를 찾지 말고 불교를 찾지 말아라.
그러므로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밥 잡술 때를 당하여 법의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사위대성(舍衛大城)에 들어가서 차제로 걸식(乞食)하여 본처(本處)에 돌아와서
공양을 마치고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은 후 자리를 펴고 앉았다.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俱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구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 舍衛大城 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이시 세존 식시 착의지발 입 사위대성 걸식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식흘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이것이 『금강경』 첫 구절에 있는데 여기에 법문이 다 있다.
그 소중한 경전의 첫머리에 왜 이것을 넣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니 팔만사천장경(八萬四千藏經)의 진리가 밥 먹고 옷 입고 우리가 일상생활 하는 거기에 다 있는 것이다.
우리 몸 가운데
눈[眼]은 삼라만상을 다 볼 수가 있어서 일월광명세존(日月光明世尊) 부처님이고
귀[耳]는 온갖 소리를 다 들어서 성문여래(聲聞如來) 부처님이고
코[鼻]는 좋은 향기, 나쁜 냄새를 맡아서 알게 되니 향적여래(香積如來) 부처님이고
입[口]은 법희여래(法喜如來) 부처님이 있어 상주 설법하시는 데 자신한테 있는 법문은 들을 줄 모르고,
어디서 법문을 한다고 하면 다른 사람 말만 들으려는 것이다.
뜻[意]은 부동광명여래(不動光明如來) 부처님이고,
몸[身]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다.
이 육불(六佛)이 내 몸에 있어 매일 상주(常住)하여 설법하시는데
이 부처님의 말을 우리가 듣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일이 뜻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무엇을 하든 성공하려면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은 굳은 생각으로써 원력을 세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걱정이 있어도 술 한잔 먹고, 잠이 안 와도 술 한잔 먹고,
술만 자꾸 먹다가 나중에 술독에 걸리면 그만 폐인(廢人)이 되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말하기를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무대(舞臺)로 잡고
연극(演劇) 한바탕 멋지게 살라고 하니까 마치 춤이나 추고, 노래나 부르고 술이나 먹고
뛰고 굴리는 것이 멋지게 사는 것인 줄 아는데 그것이 아니라
물질과 사람을 초월(超越)한 정신(精神)을 지니고 있어야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무대로 잡고 연극 한바탕 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덟 가지 복전(福田)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불법승 삼보를 신앙심을 가지고 공경해야 한다.
불(佛)은 불가설(不可說) 불가설(不可說) 미진수(微塵數) 부처님이 있다고 해도
이 사바세계는 석가여래 부처님이 교주니까 석가여래 부처님이 불이고, 법은 부처님의 팔만대장경이 법이고,
승[僧]은 비구·비구니가 승인데, 이 불법승 삼보(三寶)를 공경할 줄 알아야 복을 받는다.
진리적으로 말하면 심청정시불(心淸淨是佛)이라.
마음이 청정한 것이 부처요 팔만 사천 무진한 부처님이 있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이 청정(淸淨)한 그 자리가 참된 부처이다. 심광명시법[心光明是法]이라.
마음의 광명이 곧 법이다. 팔만대장경이 법이라고 하지만 마음의 광명(光明) 그 자리가 곧 법이다.
그리고 승은 비구·비구니가 승이지만 진리적으로 말하면 정광(淨光)이 처처무애[處處無碍]라.
맑고 광명이 처처에 걸림이 없는[無碍] 그 자리가 곧 승이다.
또 진리적으로 말하면 불(佛)은 벼가 부처요, 법(法)은 보리가 법이요. 승(僧)은 콩이 승이다.
이것은 공부해서 그 진리를 깨쳐야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지
공부 안 하고는 이것이 어디에 떨어지는 소리인지 그 낙처(落處)를 모른다.
둘째, 효양부모(孝養父母)하라. 자식 된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복을 받는다.
우리가 법을 먼 데서 구하지 말고 내 부모가 곧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고 부모에게 효성을 가져야 복이 온다.
그런데 요즘 보면 부모 된 사람은 자기 자식이 감기라도 들면
신약(新藥)과 구약을 가리지 않고 온갖 약을 먹여서 병(病)을 낫게 하려고 하는데,
자식은 부모가 감기가 들어서 콜록-콜록 하고 뒷방에서 아파 누워있어도
나이 많은 사람에게 으레 있는 천식(喘息)이나 노병(老病)이라고 해서 약 한 첩 안 쓴다.
이러해서는 복을 받지 못한다.
셋째, 급사병인(給事病人)하라.
어떠한 사람이든지 병든 사람이 있거든 내 힘 있는 데까지 구완을 해주면 복을 받게 된다.
복(福)이라 하는 것은 내가 노력(努力)하며 행(行)하고 닦고 증득(證得) 해서 복을 갖는 것이지,
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복(福) 파는 사람이 그냥 복을 한 덩어리 집어서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부처님은 내 몸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났다고 했다.
그러니 남을 위해서 수고스러운 일을 많이 하고 남을 도와서 좋은 일을 많이 해주면 그것이 복(福)을 짓는 일이다.
넷째, 구제빈궁(救濟貧窮)하라. 가난하고 궁한 사람을 구제해 주면 복을 받는다.
가난하고 궁해서 복을 못 짓는 사람에게 내 힘닿는 데까지 그 사람을 도와주면 그것이 복(福)을 짓는 것이다.
다섯째, 광로의정(廣路義井)하라.
평원광야에 물이 없는데 우물을 파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다 먹도록 해주면 복이 된다.
자기가 사는 동네에 물이 없거든 돈을 내어 우물을 파서
온 동네 사람이 다 먹도록 해주면 그것이 곧 복을 짓는 것이다.
여섯째, 건조교량(建造橋梁)하라.
많은 사람이 개울에 다리가 없어서 발 벗고 건너다니는 데에는
어디든지 다리를 놓아서 발을 걷지 않고 건너가도록 해주는 것이 복(福)을 짓는 것이다.
일곱째, 치평험로(治平險路)하라.
험한 길에 닦아서 다른 사람이 다 잘 다니도록 해주는 것이 복이 된다.
요새 새마을운동이 모두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하는 것인데
예전에 길을 닦으려고 하면 누가 땅을 내놓았던가.
돈을 내고 논밭을 내어 길을 넓혀서 수레도 다니고 자동차도 다니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내가 돈이 있으면 모든 험한 길을 닦아서 사람들이 잘 다니도록 해주는 것이 복을 짓는 것이다.
여덟째, 무차법회(無遮法會)하라.
법회를 열어서 어떤 사람이 오든지 법문을 듣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복(福)을 짓는 것이다.
내가 법문하는 건 불교의 진리이고 진수(眞髓)다.
수(髓)라는 건 사람이나 짐승의 뼈를 쪼개면 그 안에 기름이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한 달에 한 번씩 듣는 이 골수 법문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귀를 통해 심장에 들어가면
과거 다겁(多劫)·다생(多生)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과
팔만 사천 진뇌심(瞋惱心)이 있는 그 업장(業障)이 얼음 녹듯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다.
靈鷲山深雲影冷(영축산심운영냉)
洛東江闊水光靑(낙동강활수광청)
영축산이 깊으니, 구름 그림자 차고
낙동강이 넓으니, 물빛이 푸르도다.
-경봉 스님[鏡峰] <19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