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가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알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및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긴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시집 『달나라의 장난』, 1959)
[작품해설]
마치 한 편의 산문을 대하는 것 같은 이 시는 수동적인 삶에서 탈피하려는 시적 화자의 진지한 생활 자세를 형상화하고 있다. 팽이를 돌리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화자는 그 속에서 발견한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상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 아이들의 팽이 돌리기는 어름들에게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는 놀이이자, 돌지 않으면 쓰러진다는 속성을 갖고 있다. 화자는 팽이가 도는 것을 단순히 유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식하는 계기로 삼는다. 이로써 팽이는 놀이를 바라보는 순간, 화자는 ‘살아가는 것이 신비로울’뿐 아니라,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이는’ ‘별세계’ 같은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제목 「달나라의 장난」으로 제시된 이 팽이 놀이는 일상의 현실적 가치와는 구별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상을 표상하게 된다. 현실 세계의 팽이 놀이에서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새로운 관념 세계를 발견한 화자는 돌지 않는 팽이는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임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자세로 변모한다.
화자는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다. 이러한 화자는 팽이 놀이를 계기로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항상 답보(踏步) 상태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멈출 줄 모르는 끊임없이 도는 팽이는 마치 ‘수천 년 전의 성인’ 같은 모습으로 화자에세 각인된다. 화자는 팽이를 통하여 ‘제트기 벽화’ ⸱ ‘비행기 프러펠러’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사회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생활하지 못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는다. 이렇게 팽이는 줄기차게 돌아가면서 ‘스스로 도는 힘’을 갖도록 화자의 의식을 자극할 뿐 아니라, 나아가 독자 모두의 의식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다.
[작가소개]
김수영(金洙暎)
1921년 서울 출생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토쿄(東京)상대 전문부에 입학했다가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
1947년 『예술부락』에서 시 「묘정(廟廷)의 노래」를 발표하여 등단
1958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시집 『달나라의 장난』 발간
1968년 사망
1981년 김수영문학상 제정
시집 : 『새로운 도시의 시민들의 합창』(공저, 1949), 『달나라의 장난』(1959), 『거대한 뿌리』(1974),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9), 『김수영전집』(1981),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1984),『사람의 변주곡』(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