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 하나가 웃고 있다. 철 지나 핀 등나무꽃 빛깔처럼 파리하다 병실 침대에 얹혀서 미소 짓던 엄마의 모습이다. 사실상 내게 남은 당신의 마지막 초상肖像이다. 나이 열일곱 살의 한 여름날 질정 없이 꿈에 부풀던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돌이켜 보면 천사와 악마가 서로 이기겠노라고 내 팔을 잡아끌던 시기였다. 무더위가 곳곳에 우글거렸다. 곧 그 기세가 꺾일 8월의 중순 무렵, 성모병원 좁은 마당에는 등나무 덩굴이 우거져 있었다. 지지대를 타고 오른 즐기와 잎들이 물 샘 틈조차 없을 만큼 울울했다. 그 아래는 나무벤치 몇 개가 있었다. 햇별만 가려져도 청량감이 느꺼셔 그곳 의자에 잠시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봄바람에 샹들리에처럼 흔들리며 향기를 홀뿌렸을 꽃들의 흔적마다 작두콩 같은 씨주머니가 매달렸다. 그 콩들은 초록색 벨벳으로 만든 모빌처럼 머리 위에서 달랑거렸다 . 그런데 어느틈바구니엔가 철 지난 꽃 한 줄기가 연보랏빛으로 배시시 웃고 있었다. 서리가 내리고 첫눈이 오기 전에 씨앗을 맺을 수 있을지 공연히 걱정되었다.
엄마는 내가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무렵부더 아팠다. 최초 아픔의 시작은 과로였을 것이다. 당시 마흔한 살의 젊은 엄마에게 가족이라는 멍에가 너무도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시아버지에 남편 그리고 다섯명의 자녀 건사가 온통 엄마 몫이었다. 당신의 건강 따위는 건딜 수 있는 대로 견디고 버틸 수 있는 대로 버티다 툴툴 털고 일어날 거라 믿었지 싶다. 보건소나 의원 정도가 있었지만 참고 견디면 견더지리라 여겼을 수도 있다.
엄마의 발병 원인에는 우리 다섯 형제자매에다가 아버지도 호출해야한다. 우리는 어렸고 아버지는 [운수좋은 날]의 김 첨지보다도 경제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겨울방학 무렵에는 며칠 자리에 누울 정도로 엄마는 심하게 앓았다. 하지만 이때도 병원에 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 은사님 한 명을 어찌어찌 수소문하였다. 그 선생님의 방문으로 엄마에게 링거액을 두어 번 주사했던 기억이 치료의 전부다. 선생님의 부모님은 도회지에서 병원을 운영한다고 했고 그래서였던지 주사를 놓을 줄 알았다. 요즈음처럼 불법 의료행위 같은 건 따질 겨를도 없었다. 링거 덕분이었던지 휴식을 취해서였던지 엄마는 원기를 회복하였다.
새봄이 되어 나는 고향을 떠났다. 어떡하든 상급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주위 권유와 은사님 주선으로 도회의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무렵, 지방에서 일류라는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려면 새벽이나 방과후 또는 저녁 시간까지 과외 수업을 하던 풍조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몇 달은 하루에 두어 시간씩 과외반에 끼기도 했는데 이내 그만두었다 몇백 원에서 몇천 원 하던 금액을 김 첨지보다 능력 없는 아버지가 해결해 주지 못했고 엄마만 애를 태울 뿐이었다.
야간고등학교를 주선해 준 은사님을 기억하며 부끄럽지 않으티내려고 노력 했다. 지금의 처지로는 어쩔 수 없지만 이 고비를 넘기면 당장 무엇인지는 몰라도 꿈을 이를 수 있다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며 바보스러울 만큼 믿었다. 마치 천사의 계시인 양 위안 삼았다. 한 학기를 보내면서 직장과 학교, 자취방을 꼭짓점으로 삼각형 그리기에 익숙해졌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몇 개월 동안 천사의 속삭임에 위로받아 유년의 서정을 바탕으로 나름의 서사를 펼쳐보고 싶은 용기가 싹트려 했다. 조그만 쌍떡있이 솟아 나오려는 찰나에 그만 악마에계 들키고 말았다. 악마는 천사보다 구체적이고 힘이 셋다. 나의 오른쪽 팔을 사정없이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