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 [3·1운동 막전막후] 파리강화회의 '韓·日 극과 극'
우사 김규식
파리 시내 9구(區)의 고풍스러운 트리니테 성당에서 동쪽으로 한 블록 걸어가면 사거리 모퉁이에 7층짜리 석조 건물이 나온다. 파리에서 흔한 19세기 양식 건물이다. 샤토덩가(街) 38번지의 건물 1층은 수퍼마켓 프랑프리, 2층부터는 아파트다. 낡은 아파트 출입문 왼쪽 위에 현판이 달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절단이 있던 곳'이란 프랑스어 아래 한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라고 썼다.
이곳은 우사(尤史) 김규식(1881~ 1950)이 100년 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사무실을 낸 곳이다.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가 활동 무대였다. 김규식은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대표 자격으로 열강들을 향해 일본 지배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독립운동사 연구가 이장규씨(파리7대학 박사 과정)는 "밖에서 김규식이 타자기 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1층 또는 2층에 김규식이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지난 주말 이곳을 찾아 50대 주민에게 현판의 의미를 아는지 물었다. 그는 "5년 넘게 살면서 무심코 쳐다보긴 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다른 주민들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7년간 유학하며 프린스턴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김규식은 프랑스어도 능숙했다. 스위스에서 온 이관용, 상하이에서 온 조소앙, 미국에서 온 황기환 등이 김규식을 도왔지만 김규식이 외교 활동을 도맡았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던 일본은 '세계 5강'을 자처하며 기세등등했다. 일본은 메이지 원로이자 총리를 지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를 대표로 하는 대규모 사절단 68명을 파리에 파견했다.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는 건물에서 센강이 있는 남쪽으로 15분을 걸어내려가면 방돔 광장이 나온다. 당시 일본 사절단이 머물렀던 '브리스톨 호텔(Hôtel Bristol)'이 여기 있다. 1718년 들어선 이 건물은 대표적 고급 호텔로 이름을 날렸다. 파리 중심부의 특급호텔에 자리 잡은 일본 사절단과 허름한 건물에서 고군분투한 김규식의 처지는 극과 극이었다.
일본 외교관 사와다 렌조(澤田廉三·1888~1970)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브리스톨 호텔을 통째로 빌렸다. 호텔 앞에는 30대에 가까운 자동차에 일본을 상징하는 휘장이 자랑스럽게 휘날렸다. 파리지앵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광경이었다." 사와다 렌조는 외무성 차관과 주불·유엔대사를 지냈다. 1960년대에는 4차 한·일 회담의 일본 측 대표였다. 브리스톨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더 이상 호텔은 아니다. 브루나이 국왕이 사들여 가끔 파리에 들를 때 묵는다고 한다.
김규식은 파리에서 소식지 '자유 대한(La Corée libre)'을 내면서 독립 국가의 대표라는 점을 알리려 애썼다. "우리의 독립 요구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어려운 싸움이지만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크로아티아가 주권을 회복한 것처럼 한국도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로베르 브뤼셀 당시 프랑스 교육부 국장에게 프랑스어로 쓴 김규식의 편지다. 김규식의 활동을 다룬 기사는 유럽 181개 신문에 517건이나 됐다.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 회의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독립국 대표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일본 요청을 받은 프랑스 경찰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김규식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두통에 시달렸다. 눈도 나빠졌다. 실망한 그는 그해 8월 미국으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