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 1-2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결과로 처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바 그대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인류가 확산되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여기서는 혼합된 혈통적 계대성이 혼재하고 있으며 곧 이어서 은혜의 계대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1. 본문 1절은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입니다.
1) 모세는 이제 인류의 증식을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이 역사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라’ 라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은 죄로도 폐지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아담의 마음이 신적인 확증을 갖게 되어 이제 공포 때문에 좌절되지 않았으며 자손을 생산하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손을 갖는 벽두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진정한 부성애적인 관대(寬大)를 인식하게 되었던 것과 같이 후에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자신의 죄의 지독한 결과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가인과 아벨이 쌍둥이라고 시사(示唆)는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들이 쌍둥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아기를 잉태한 하와가 첫 아기를 낳았다고 그가 말한 바로 직후에 그녀가 다시 다른 아기를 낳았다고 곧 첨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번 출산을 시사(示唆)하면서 그는 단지 한번의 잉태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세상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다시 가득 채워야만 했을 때에 가인가 아벨 뿐만 아니라 기타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도 그 후에 그렇게 쌍둥이로 태어났을 것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와 부합되고 있는 듯합니다.
2)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는 말씀에서 모세가 사용하고 있는 그 말은 “얻다” “소유하다”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여기서 두 가지 모두를 채용해도 현재 문맥에 거의 어떤 변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말하기를 ( 야웨)를 받았다고 한 이유를 캐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해석하기를 ‘여호와와 함께’ 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분의 은총으로, 또는 여호와의 호의로’ 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와가 자손의 복을 하나님의 주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사실은 시편127:3절에서 “태의 열매는 여호와의 선물이라”고 기록된 것과 같은 말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동일한 요지에 이르고 있는데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제롬의 번역과 동등한 위력(偉力)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통하여”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거니와 이 세 가지 해석상의 표현은 이런 점을 지적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하와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자기야말로 영구적(永久的)으로 불임 선고를 받아야 마땅한 존재(存在)이며 또한 철저하게 멸망되어야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통하여 자손(子孫)을 일으키기 시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감사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대단히 세밀하게 그 말들을 ‘내가 여호와의 사람을 얻었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와가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그 뱀의 정복자를 이미 소유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하와의 신앙이 대단했다고 극구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자기의 자손을 통하여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들만이 그녀가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을 가인에게만 국한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고 그녀가 그 사람이나 그 개인 안에서 오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이 진정한 의미로 보고 있습니다. 즉 하와가 득남한 것에 관하여 자신을 자축하고 있는 반면에 그 아들을 그 인류의 첫 열매로서 하나님께 드렸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 문장을 ‘내가 여호와로부터 득남하였다’ 라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표현이 히브리 문장에 더 잘 부합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녀는 새로워진 인종을 보았기 때문에 새로 태어난 갓난 아기를 남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전에 자기의 잘못으로 그 인류를 망쳐버렸던 것입니다.
2. 본문 2절은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입니다.
1) 가인의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由來)되었으며 왜 그에게 그 이름을 지어 주었는지는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카니티)라고 말했기 때문인데 그 말은 내가 득남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가인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일한 설명이 아벨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안하기를 그의 어머니가 그를 멸시하여 그렇게 불렀는데 그 애가 마치 불필요한 존재이며 쓸모 없는 자가 된 것처럼 무시했다고 합니다. 그 의견은 철저하게 불합리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 자신의 자손들이 어느 정도로 번성될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또한 ‘생육하고 번성하라’ 고 하신 하나님의 복을 전혀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와와 그의 첫 아기에게 준 이름에서 그 자신에게 갑자기 터진 기쁨을 증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는데 후에 가서 다른 자식을 낳은 데서는 다시 인류의 비참한 것들을 다시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하나님의 새로운 복이 특별한 기쁨을 주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후손들이 아주 많고 막대한 죄악들에 빠진 것을 미처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 자신이 이미 그 죄악들로 저주를 받았으나 가장 비통한 슬픔을 겪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의 슬픔의 추념이 자기 둘째 아들에게 준 이름에서 남아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공통된 거울을 들고 그것으로 그녀의 모든 자손들에게 인간의 ‘공허성’을 충고해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와가 자기 자신의 공의롭고 거룩한 아들을 역시 자기의 사악하고 버림받은 아들과 비교하는 면에서 배격해야 될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판단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은 우리로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와는 왜 하필이면 그녀가 첫 아들을 낳고 자신을 축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둘째 아들에게는 인간의 모든 공허성을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하여 회상되게 함으로 그들 자신의 죄악들에 관하여 부지런히 회상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게 하려는 데에는 그녀의 잘못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2)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라는 말씀에서 그 두 형제가 결혼하여 아내를 거느리고 있는지 또는 각자가 별도로 분가하여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모세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이 자기 동생을 죽이기 전에 결혼을 했다는 가능성은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직후에 그가 자기 아내를 알았으며 자녀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첨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결혼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생활 자체로는 거룩하고 칭찬 받을만한 생활을 했습니다.
땅을 개간하고 경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며 또한 양치는 것도 유용한 것에 뒤지지 않을 명예로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전원 생활의 전체가 정말 천진스럽고 단순하였으며 모든 것의 대부분이 자연의 질서에 적응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엇보다 먼저 주장되어야 할 것이니, 즉 그 두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노동에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발휘했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인간 생활의 공통적인 용도에 필요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