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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沸流水
[영남일보]<연재>서지월시인의 '만주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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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뒷방서 본 단풍도 가사 곳곳에 담겨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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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푸른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이 노래가 만들어진 이유는 중국 여관서 만난 한 여인의 가슴 아픈 사연 때문이었다
◇ 도문의 두만강 공원
연길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문행 24인승 미니버스를 타고 곧장 남쪽으로 향해 가면 도문에 도착한다.
도문의 두만강공원은 북한의 남양시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 국경지대로, 변방도시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시골냄새도 물씬 풍기는 곳이다. 내가 도문의 두만강공원을 처음 찾은 것은 1999년 여름이었다. 그 이후 땟목배가 띄워져 관광객을 유치하게 됐다. 한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두만강변이기도 하며 이곳에서 유일하게 두만강 뱃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가요로 널리 알려진 김정구의 노래 '눈물젖은 두만강', 그 현장의 강이 바로 이곳 도문의 두만강이기도 하다. 우리 선조들이 이 강을 건너 간도지방으로 이주한 내력과 민족수난의 역사를 안고 있는 대표적인 노래이기도 하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던 그이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쉬니/ 추억에 목메이는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님가신 이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 울면/ 떠나간 옛님이 보고 싶구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김용호 작사·이시우 작곡 '눈물젖은 두만강' 전문.
◇ 일제치하 유행가 가사의 의미
일제치하, 우리 민족의 수난사가 투영된 많은 노래들은 곡명이 말해주듯 설움과 눈물의 대명사였다.
더욱이 1930년대 중엽에 이르러 가요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검열의 관문을 피하기 위하여 작사자들이 은유적인 수법을 많이 쓰게 되었으며, 그래서 흔히 조국을 '님'으로, 조국의 광복을 '님은 언제나 오려나' 하는 식으로 은유화하였다고 한다. 눈물젖은 두만강이 바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떠나간 '옛님'으로 비유한 노래의 하나인 것이다. 자세히 음미해 보면, 가사의 외형적 표현은 구애의 노래로 되어있는 것 같으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하는 후렴에는 빼앗긴 조국에 대한 절절한 감정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 눈물젖은 두만강의 탄생 비화
작곡가 이시우 선생이 이 노래를 작곡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30년대 중엽, 극단 '예원좌' 일행이 중국 동북지방 용정에서부터 시작, 조선인 부락들을 찾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하다가 두만강변의 소도시 도문의 한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이 여관은 조선사람이 경영하면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때는 마침 가을이라 한 나무는 누렇게 심황색 단풍이 물들었고, 다른 한 나무는 빨갛게 다홍색 단풍이 물들어 집 떠난 나그네의 향수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여관주인이 단풍에 얽힌 사연을 얘기한다.
"저 단풍나무는 내가 두만강을 건너올 때 가지고 와서 심은 나무입니다. 말하자면 고국땅의 나무웨다. 내가 고향을 떠나오던 때가 기미년 추팔월인데 연년이 그 날을 잊지 말자고 두만강 나루를 건너오면서 이런 단풍나무를 몇 그루 파갖고 왔습니다. 그런데 두 그루만 저렇게 살아왔습니다. 심은 지 십 여년이 되는데 이제 제법 가을맛을 안겨줍니다"라고 했다.
여관집 주인의 말을 듣고난 이 선생과 배우들은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생각이 깊어졌다. '봄이 되어야 진달래 고운 줄 알고, 가을이 되어야 단풍 고운 줄 안다'는 말이 있듯이 가을에 낙엽이 지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순연한 붉은 빛을 잃지 않고 있는 단풍은 사람들의 정서에 더욱 깊숙이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날 밤, 이 선생이 밤이 깊도록 자리에 누워서 뒤척이고 있을 때 옆방에서 난데없이 여인의 비통하고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와 극단일행은 잠에서 깨어났다. 이 선생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여관집 주인을 통해 오열하는 여인에 대한 사연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여인의 남편은 항일투쟁에 나선 사람이었는데 항일전투에 참가하였다가 불행하게도 체포되었다고 한다. 여인은 남편이 끌려간 형무소를 찾아갔으나 남편은 이미 일제에 의해 총살된 뒤였다. 그날 밤은 바로 남편의 생일이었다. 빈방에서 조용히 술을 한 잔 부어놓고 기제사를 올리려 했는데 여관집 주인이 이것을 알고 제물을 차려가지고 들어왔다. 여관집 주인과 그 여인의 남편은 서로 잘 아는 사이로 그날 밤 여관집 주인이 차려준 제상에 술을 붓고 난 여인은 오열을 참지 못하여 이렇게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사연을 알게 된 이 선생의 가슴에는 커다란 충격이 안겨왔다. 이튿날 그 여인이 남편을 찾아 건너온 두만강을 바라보며 나라를 잃은 우리 겨레의 슬픔을 통탄하며 즉흥적인 선율을 붙인 것이 바로 '눈물젖은 두만강'이다.
◇ 이제 허물어져 볼품없는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비
그 여인의 애절한 호곡소리는 '그리운 내 님이여'라는 시어로 승화되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은유됐던 것이다.
특히 2절에서 '추억에 목메이는 애달픈 하소'라고 한 표현과 3절에서 '님 가신 이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라는 표현은 여관집 뒷방에서 본 단풍나무에서 시상을 얻었다고 한다. 눈물젖은 두만강이 작곡되자 극단 예원좌는 장월성이라는 소녀가수로 하여금 막간에 나가서 이 노래가 처음으로 부르게 했다. 대박이었다. 그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 선생은 시인 김용호 선생을 찾아 가사를 다듬고 가수 김정구 선생을 통해 음반을 취입하게 됐던 것이다. 그후 사람들은 조국이 그리울 때도 이 노래를 불렀고, 떠나간 옛님이 그리울 때도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 치하 수많은 동포들이 살길을 찾아 두만강 건너 북간도로 이주하게 되었다. 30년대부터 도문에는 두만강 나루의 선착장이 생겼으며, 이곳이 바로 나라 잃고 부모처자와 생이별하던 원한의 두만강 나루터였다. 도문교에서 약 1㎞ 가면 우측 야산의 북한땅이 잘 보이는 곳에 조그마한 정자가 하나 있다. 이 정자 올라가는 입구에는 연변조선족전통문화연구센터에서 세워놓은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비가 있다. 나무로 만들어 세워져 오랜 세월에 허물어지고 부서져 이젠 볼품이 없게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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