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부여기 1세 단군 해모수(解慕漱)(45년간 재위) 첫해가 임술(6959-BC239)년이다. 본래 고리국(藁離國) 사람으로 수유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웅심산(熊心山)을 의지하여 일어나 집을 난빈(蘭濱)에 지었다. 2년 3월 16일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연호법(烟戶法)을 세웠으며 오가의 군사를 나누어 두고 둔전을 작급하게 하여 불시의 근심이 있을 때를 대비하게 하였다. 8년에 임금이 무리를 거느리고 옛 도읍에 가서 깨우치니 오가(五加)가 드디어 공화(共和) 의 정치를 철폐하고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단군(檀君)을 삼았다. 11년에 북막(北漠)의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해 갔다. 19년에 비(丕)가 죽고 아들 준(準)이 아버지를 이어 번조선(番朝鮮)왕이 되었다. 연(燕)이 장수 진개(秦介)를 보내어 우리의 서부 변방을 침범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20년에 명을 내려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게 하고 7월에 새 궁궐 366간을 짓고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22년에 창해(滄海)의 역사 여홍성(黎洪星)이 한인(韓人) 장량(張良)과 더불어 박랑(博浪)의 모래 가운데서 진(秦)왕 정(政)을 저격하다가 잘못하여 부거(副車)를 맞췄다. 31년에 진승(陳勝)이 군사를 일으키자 진(秦)나라 사람이 크게 어지러워지니 연(燕)·제(齊)·조(趙)의 백성이 번조선으로 도망 온 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 운장(雲障)에 나누어 두고 장수를 보내어 감시하게 하였다. 38년에 연의 노관이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동쪽의 한계를 패수(浿水)로 하였다. 45년에 연의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凶奴)로 들어오자 그 무리 위만(衛滿)이 우리에게 도망올 것을 요구했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이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단안을 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번조선왕 기준(箕準)이 많은 기회를 잃으므로 드디어 위만을 받들어 박사(博士)를 삼고 상하 운장(雲障)을 나누어 봉하였다. 이 해 겨울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태자 모수리가 왕위에 올랐다. 2세 단군 모수리(慕漱離)(25년간 재위) 첫해(丁未-7004-BC194)에 번조선(番朝鮮)왕 기준(箕準)이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일찍 많은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다 부유하였다. 뒤에 떠돌아 다니던 도적에게 패하여 도망하였는데 바다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해설) 이에 제가(諸加) 무리들이 상장(上將) 탁대(卓大)를 받들어 많은 사람들이 길을 떠나 바로 월지(月支)에 이르러서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곧 탁이 난 고향인데 이것을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이에 변(弁)·진(辰) 두 한이 또한 각각 그 무리들이 봉함을 받은 백리 땅을 가지고 도읍을 세우고 스스로 나라 이름을 지었으나 모두 마한(馬韓)의 정령(政令)을 듣고 사용하니 대마다 반(叛)하지 않았다. 2년에 임금이 상장 연타발을 보내어 평양에 성책을 세워 적(賊) 만(滿)에게 대비하게 하였는데 만(滿)도 또한 괴로움에 지쳐 다시는 침략하는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3년에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道)에 소속시키고 임금의 아우 고진(高辰)에게 지키도록 하니 중부여(中夫餘) 한지역이 모두 군량미를 바쳤다. 25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고해사가 왕위에 올랐다. 3세 단군 고해사(高奚斯)(49년간 재위) 첫해(壬申-7029-BC169) 정월에 낙랑(樂浪)왕 최숭(崔崇)이 곡식 300석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이 낙랑으로부터 진기한 보물을 산같이 쌓아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해설) 이것이 단군 해모수(解慕漱)의 병오(7003-BC195) 겨울이었다. 42년(7070-BC128)에 임금이 몸소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남려성(南閭城)에서 위적(衛賊-위만의 무리)을 쳐서 이기고 거기에 관리를 두었다. 한(漢)이 나라의 남쪽의 제후인 남려(南黎)를 회유하여 복속시키고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다.(해설) 49년에 일군국(一郡國)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이해 9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고우루가 왕위에 올랐다. 4세 단군 고우루(高于婁) 또는 해우루(解于婁)(34년간 재위) 첫해(辛酉-7078-BC120)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치게 하였으나 이롭지 못하여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병력을 증강하고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우거를 막는데 공이 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句麗侯)를 삼았다. 3년에 우거(右渠) 적이 크게 쳐들어 왔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이 모두 노략질 당하여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 4년에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해성을 쳤으나 석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6년에 임금이 친히 정예 군사 5천을 거느리고 해성을 쳐서 이기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니 구려하(句黎河)로부터 동쪽이 모두 항복하였다. 7년에 좌원(坐原)에 목책을 설치하고 군사를 남려(南閭)에 주둔시켜 불시의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 13년(7090-BC108)에 한(漢)의 유철(劉徹)이 평나(平那)에 쳐들어와 우거(右渠)를 멸하고 이어 이곳에 사군(四郡)을 설치하려 하여 큰 기세로 군사를 내어 사방을 침입하였다. 이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를 부르 짖고 군사를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도둑을 쳐부수니 남아있는 백성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싸우는 군사를 도와 크게 떨치는 소식을 알려왔다. 34년 10월에 동명왕(東明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사람을 시켜 와서 말하기를 "나는 천제이 아들로서 장차 여기에 도읍을 하려고 하니 왕은 이곳을 피하라"하였다. 임금이 이를 곤란하게 여기다가 그 달에 걱정으로 병을 얻어 세상을 뜨니 임금의 아우 해부루가 왕위에 올랐다. 동명왕이 군사를 내어 위헙하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군신이 이를 매우 곤란하게 여겼다. 이에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이 아뢰기를 "통하(通河)가에 가섭원(迦葉原)이 있어 땅이 기름지고 오곡을 키우기에 마땅하오니 도읍할만한 곳입니다."하고 드디어 왕을 권하여 도읍을 옮겼다. 이곳을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라 하고 혹은 동부여(東夫餘)라고도 한다. 5세 단군 고두막(高豆莫)(22년간 재위, 27년간 재제위) 첫해(癸酉-7090-BC108)가 단군 고우루(高于婁) 13년이다. 임금의 사람됨이 호걸스럽고 준수하며 용병을 잘 하였다. 일찍이 북부여(北夫餘)가 쇠하고 한(漢)의 도둑이 강성함을 보고 분개하여 세상을 구할 뜻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본(卒本)에서 즉위하여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고 혹은 고열가(高列加)의 후손이라고도 하였다. 3년에 임금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檄文)을 띄웠는데 가는 곳마다 대적하는 자가 없더니 10여일이 못되어 무리가 5000에 이르렀다. 싸울 때마다 한의 도둑이 그대로 무너지니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구려하(句黎河)를 건너 추격하여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곧 옛날 고리국땅이다. 22년은 곧 단군 고우루 34년이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배천(裵川)의 한나라 도적을 쳐서 이기고 남아있는 백성들과 힘을 합하여 가는 곳마다 계속하여 한나라 도적을 쳐부수고 그 지키는 장수를 사로잡아 적을 막으며 대비 하였다. 23년에 북부여(北夫餘) 온 성읍이 항복하고 여러번 보전하게 해주기를 애걸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해부루(解夫婁)의 직급을 낮추어 후(侯)로 삼고 이를 분릉으로 옮게게 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앞에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인도하여 도성으로 들어가니 이를 북부여라 하였다. 가을 8월에 한의 도적과 더불어 여러 번 서압록하(西鴨綠河) 위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30(7119-BC79)년 5월 5일에 고주몽(高朱蒙)이 분릉에서 탄생하였다. 49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유명(遺命)에 의하여 졸본(卒本)천에 장사지내고 태자 고무서가 왕위에 올랐다. 6세 단군 고무서(高無胥)(2년간 재위) 첫 해(壬戌-7139-BC59)에 임금이 졸본천에서 즉위하였다. (해설) 2년에 임금이 순수하다가 영고탑(寧古塔)에 이르러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고주몽(高朱蒙)이 유명에 따라 그 뒤를 이어 대통을 계승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보고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 자리에 올랐는데 당시의 나이가 23세였다. 그 때에 하부여 사람이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자,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부(陜父) 등 세 사람과 더불어 덕과 의로써 사귄 벗이 되어 도망하였다. 이후 골본(忽本:심양)이 현도군에게 점령당하자 당시 북부여의 수도이던 골본(忽本)에 남아 있던 동명계 무리 중 일부는 장춘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그 후 이 무리들은 동명성제 10년(7170-BC28)에 고구려에 정복되었다. 그러나 그 나머지 무리들은 계속 존속하니, 후에 위구태가 백제국을 건립하게 되었다.
2) 가섭원 부여기(迦葉原夫餘紀) 1세 단군 해부루(解夫婁)(39년간 재위) 첫해(乙未-7112-BC86)에 왕이 북부여(北夫餘)의 통제를 받아 가섭원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또한 분릉이라고도 한다. 오곡을 기르기가 알맞고 또 범, 표범, 곰, 이리가 많아 사냥하기가 편리하였다. 3년에 국상 아란불(阿蘭弗)에게 명을 내려, 진대(賑貸) 제도를 만들고 원근의 유민들을 불러 위로하고 그들이 제 때에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도록 하였다. 8년 이보다 앞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나가 놀다가 부여(夫餘) 황손(皇孫) 고모수(高慕漱)의 꾀임을 받아 강제로 끌려가 압록의 가에 있는 방에서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고모수는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그 부모는 그가 중매도 없이 따라간 것을 책망하여 쫓아내어 변실(邊室)에 살게 하였다. 고모수는 본래 이름이 불리지(弗離支) 였는데 고진(高辰)의 손자라고도 한다. 이해 5월 5일에 유화부인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이를 고주몽(高朱蒙)이라 하였다. 그는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잘생겼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번 쏘면 백번 다 맞추었다. 부여 말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한다. 10년에 왕이 늙고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어 뒤를 이를 아들이 있기를 구하였는데 타고 있던 말이 관연에 이르러 큰돌이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렸더니 조그만 아이가 있었는데 금빛 개구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곧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로다"하고 거두어다가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자라서 태자가 되었다. 28년에 나라 사람들이 고주몽이 나라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이렇게 되어 고주몽이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달아나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이듬해에 새나라를 열었다. 이 이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해설) 39년에 왕이 세상을 뜨니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2세 단군 금와(金蛙)(41년간 재위) 첫해(甲戌-7151-BC47)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24년에 유화부인이 세상을 떴다. 고구려가 호위하는 군사 수만명을 시켜 졸본으로 돌아가 황태후의 예로 산릉(山陵)에 장사지내고 옆에 사당을 세웠다. 41년에 왕이 세상을 뜨니 태자 대소가 왕위에 올랐다. 3세 대소(帶素)(28년간 재위) 첫해(乙卯-7192-BC6) 봄 정월에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아들을 볼모로 하여 수교할 것을 청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이를 노여워하였다. 겨울 10월에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졸본성(卒本城)을 쳤으나 큰 눈이 내려 얼어 죽는 군사가 많으므로 그대로 물러났다. 19년에 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렀다가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28년(7219-AD22) 2월에 고구려가 온 나라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오자 왕이 스스로 무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다가 진창을 만나 왕이 탄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상장 괴유(怪由)가 앞으로 다가와 이를 죽였다. 그러나 우리 군사는 오히려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마침 이레동안이나 짙은 안개가 끼어 고구려의 열제는 밤에 군사를 몰아 포위망을 벗어나 샛길로 도망갔다. 여름 4월에 왕의 아우가 자기를 따르는 자 수백명과 함께 달려가 압록곡(鴨綠谷)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이 나와 사냥하는 것을 보고 이를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해 달아나 갈사수(曷思水)가를 확보하고 나라를 세워 왕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갈사(曷思)이다. 태조무열제(太祖武烈帝) 융무(隆武) 16년(7265-AD68) 8월에 이르러 도두왕(都頭王)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지는 것을 보고 온 나라가 스스로 항복하니 모두 3세로써 47년을 지나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 도두(都頭)를 명하여 우태(于台)를 삼아 집을 내려주고 혼춘(琿春)을 식읍(食邑)으로 삼고 그를 봉하여 동부여후(東夫餘侯)를 삼았다. 가을 7월에 왕의 종제(從弟)가 옛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高句麗)에 항복하자 고구려가 봉하여 왕을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등에 얽힌 무늬가 있다아여 낙(絡)씨로 성을 내렸다. 뒤에 차음 자립하게 되자 개원(開原) 서북 쪽으로부터 이사하여 백낭곡(白狼谷)에 이르니 연(燕)과 가까운 땅이다. 문자열제(文咨烈帝)의 명치(明治) 갑술(甲戌-7691-AD494)에 이르러 그나라를 가지고 고구려 연나부(椽那部) 굽히고 들어가니 낙씨들이 드디어 제사 지내지 않았다
첫댓글 영소 님 3월18일 일요일
상큼하고 그윽한 하루소망사랑의공동체
〃´`) 한반도 평화정착 기원
카페활성화
,·´ ¸직장과 가정에 하느님 은총 충만 하시길..,·´`)
(¸,·´ (¸
고운댓글감사합니다
봄비 오시는 첫날 멋과 맛 향기로 즐거운 시간 행복하시고 늘 건강 조심 하소서~
고운댓글감사합니다